I . 교의 신학적 의미
유대 ·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 나타나는 일련의 하느님 사건을 통칭하여 계시라 부른다. 계시는 아무런 외적 근거도 없이 주어졌다. 그런 성질의 사건을 긍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고하신 자유 안에서 인간과 스스로 교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다. 인간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발생하도록 하신다. 따라서 신앙과 신학은 하느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다. 계시에 이유가 없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의사 전달을 해오신다는 사실을 인간의 지평에서 추리해 낼 수가 없다는 뜻이다.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이 무상성(無償性)은 계약, 말씀, 베푸심과 약속 등의 표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1~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계시를 개별 주제로 취급한 공의회 문헌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헌장>(Dei Filius) 제2장(DS 3004~3007)이 처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더 나아가서 독립된 헌장 <계시 헌장> (Dei Verbum)을 만들었다. 이 문서는 제1차 공의회의 표현들을 수용하면서 현대를 위한 새로운 계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제2차 공의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현대주의(Modernismus)의 위기 이후 발전한 성서신학과 교부학(敎父學)을 충분히 수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원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하려 하였다.
모든 공의회의 교의적 정의는 그 시대가 제기하는 신앙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따라서 그 시대가 제기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공의회의 교의적 표현을 고찰할 수 없다. 모든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는 없기 때문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직면한 문제는 계몽사상으로 발생한 이신론(理神論)이 계시 사실을 부인하는 데 있다. 이신론은 인간 이성의 절대적 자유성을 주장하기 위해 계시 자체를 거부한다. 계몽 사상과 이신론은 역사적 계시의 외적 도움 없이, 인간의 비판 구원을 위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계시는 역사 안에 스스로 성취되는 의미의 내재적 총체를 가리킨다. 구원은 비판적 이성과 인간 자유의 자율적 발전이 가져다 주는 결과이다. 계몽주의는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진리 외의 신적 정보 제공으로서의 계시를 인간 이성과 자유를 소외시키는 것으로 거부한다. 인간 이성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권위와 순종의 장에서만 이해되는 계시를 반대한다. 이런 계몽 사상과 이신론에 맞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성에 대한 자연적 인식 외에 초자연적 계시가 있음을 선언하였다. 공의회는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두 개의 길이 있음을 말하였다. 인간은 피조물을 통해서 인간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초자연 질서의 하느님이 당신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으로 인류에게 당신 스스로와 당신의 뜻이 "결정한 것들" (decreta)을 알려 주기 원하셨기에 열리는 두번째의 길이 있다. 이 문헌에서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적 인식의 대상과 구별되는 초자연적 계시 내용이다. 자연 이성이 발견한 진리들 외에 계시로써 주어진 초자연적 진리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 진리들은 이성이 발견하는 진리와 다르다.
이성이 대상으로 하는 진리와 그것과는 구분되는 계시 진리가 있고, 이 진리는 교회 권위에 의해 보존되며 신앙인은 외적 권위에 대한 순종으로 그 진리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세 신학에 있었던 사상이다(S.Th.I,q.1,a.1;a.8,ad 2). 그러나 이 신학은 계시 자체와 신앙 진리를 혼동하지는 않는다. 중세 신학에서 계시는 구원을 위한 교리들이 아니라 구원의 기원에 대한 말이었다. 따라서 계시 개념에는 초언어적 성격이 들어 있다. 계시가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객관화할 수 없는 유래와 원천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하느님의 계시 안에서 사고하는 모든 것은 계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고 말하였다(S.Th.I,q.1,a.3,ad 2).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계시 내용(decreta)과 계시를 동일한 것으로 말함으로써 초언어적 사실인 계시를 언어적인 것으로 전락시켰다. 초자연적 계시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그 시대의 사상 앞에 계시의 초자연성을 긍정한 것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설정한 경계였다. 이 경계 안에서 계시에 대해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 문헌이 겨냥하는 그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고 그 표현들만을 수용하여 절대화한다면, 계시는 하느님의 의사 전달에 힘입어 우리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계시는 이성이 접근할 수 있는 진리들과 병행하는,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련의 진리들, 곧 초역사적 성격을 지닌 언술들을 의미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들을 수용하면서도 후자의 입장을 넘어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계시가 하느님의 위격적 자기 전달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을 강조하였다. 하느님이 초자연적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를 전달하신다. 제1차 공의회는 하느님이 "결정하신 것들"을 말하였는데, 제2차 공의회는 바울로계 서간의 표현인 "하느님 뜻의 신비"(Sacramentum voluntatis suae : 계시 2항 ; 에페 1, 9 참조)를 계시하고 알려 주신 것으로 말하였다. 계시는 하느님이 스스로를 알려 주신 것이며 그리스도가 지닌 신비를 나타내고,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우리의 삶을 보여 주신 것이다. 계시는 삼위적 성격을 지닌다. 계시가 있는 것은 "인간이 혈육을 취하신 말씀,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천주성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계시가 목적하는 바이다.
제1차 공의회는 계시를 하나의 교리를 주는 수직적 행위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공의회는 구원의 역사 안에 말씀과 업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말하였다. 우리가 계시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과거의 신앙 체험이 담긴 교재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고, 주셨다. 그리고 이 스스로를 나타내고 주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루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충만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아버지, 아들, 영의 생명에 참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 확인되지 않는 것은 계시라고 말할 수 없다.
〔개 념〕 계시라는 단어는 인간이 스스로 지배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이 사자(使者)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사자는 예언자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적 성격을 외면하고서는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음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회상하고 해석하면서 발생하는 신앙 체험을 문자로 정착시킨 것이 복음서들이다. 우리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 안에 수록된 초대 교회의 신앙 체험 언어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발생시키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언어를 읽을 때 하느님이 발신자(發信者)로, 우리가 수신자(受信者)로 보이면 그 언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그러나 성서의 언어는 사람들의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언어의 출처와 발생 당시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한다. 이런 연구를 우리는 성서 역사 비평학이라 부른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은 먼저 예수를 의미한다. 물론 옛날 예언자들, 이스라엘의 현자들, 연대기 작가들과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요한 복음은 예수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특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은 또한 "말씀이 육이 되셨다"고 말하면서 예수의 인간 조건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었기에 예수 안에서는 인간의 말이 하느님 말씀의 차원과 질(質)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교 계시 개념에는 일련의 사건들이 들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계시 개념은 사실적(史實的)인 것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개념은 살과 피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생각이나 지식이 다른 세상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듯이 계시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교는 비결 종교(秘訣宗敎)가 아니며, 초능력을 가지고 저승과 의사 소통을 하는 무속 종교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초대 교회가 남긴 언어 안에서, 또 그 언어로 말미암아 발생한 역사 안의 신앙 체험 언어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교회 초창기부터 그리스도교는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靈智主義)를 배척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비밀스러운 정보는 없다. 언어는 다의성(多義性)을 지니기에 해석되어야 한다. 말하는 주체는 언어의 다의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언어도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객관적 언어 체계 안에서 계시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말씀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주체 앞에 스스로를 여는 인간 주체의 자유 안에 계시로 나타난다.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언어를 매체로 하여 말씀하시는 주체인 하느님과 그 말씀을 듣는 주체인 인간의 자유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는 모든 시대를 위하여 고정된 지식을 하느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데 있지 않다. 계시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과 그 일하심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는 신앙인의 체험이다. 계시 개념은 신앙인이 예언자들이나 예수를 통한 역사적 사건들 안에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만 보고 다른 이유 없이 믿고 응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계시의 그리스도론적 성격〕 예수는 당신 설교의 시작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 15)라고 선포하신 것으로 공동체는 전한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심판자의 말이 아니었고, 요한 세례자의 말과도 달랐다. 예수는 죄인들, 버려진 사람들, 희망 없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다. 선포된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과 요구된 회개는 예수의 행위들 안에 구체적이고 비유적 형태를 띤다. 그 시대에 통용되던 유대인 사회의 규범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위는 하느님과 무관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이나 행동에 하느님의 계시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귀의 휘하에 있다고 생각한다(마르 3, 22).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행위를 보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예언자" (마태 21, 46)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의 말과 행동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고백이다. 하느님이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은 다른 데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스스로 결정하신 것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는 다른 지평에 갖다 놓고 이해할 수도 있었다. 예수를 신성 모독으로 단죄한 것은 그런 예의 하나이다. 하느님의 행위는 볼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예수의 말과 행동 안에 계신다. 한 사람의 인간인 예수는 확인해 볼 수 있는 행위들로 하느님의 대변자인 예언자로 인정되고, 부활의 힘으로 모든 성서와 모든 계시적 사건의 보이지 않는 주체로 고백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를 하느님 말씀으로 생각하고 다른 말들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예수의 지상적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예수의 지상 생활을 배제한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발생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지상 생활은 그리스도교 경전 안에 수록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체험이 전해 주는 예수의 모습이다. 신약 외경들이 호기심으로 만들어 낸 예수에 관한 이야기, 접신(接神) 상태에 있는 무당이 공수를 주는 양식으로 된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사생활 이야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완전한 표현인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어떤 말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려면 그 말이 예수가 열어 놓은 길에 상반되지 않아야 한다. 하느님 말씀을 영원하신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서를 계시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으로서 예수라는 인물은 하나의 우연이 아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말씀이라는 표상은 예수라는 하나의 개체를 보편(普遍) 안에서 폭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서는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사건을 전해 주는 특권을 지닌 문서이다. 성서는 역사적 사건들을 보도하고 신앙 공동체는 그 설화들을 전혀 다른 여건에서 읽으면서 성서가 지닌 보편성을 증언한다. 이 보편성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신앙 공동체와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모든 신앙 해석의 규범이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 예수는 역사의 현장에서 영원히 사라진 인물이고 우리는성서 안에서만 그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는 문화적 거리를 지니고 있다. 성서는 기록될 당시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로,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의 신앙 체험을 수록한 것이다.
성서의 형성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는 복음서의 형성에 초대 교회 공동체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새 청취자들을 위해 예수의 설교에 필요한 첨가와 수정을 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이며 사명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가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이나 표현을 예수가 한 것처럼 만들었다. 이것은 현대 실증주의(實證主義)에 물든 우리의 사고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많은 가르침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한 것은 팔레스티나가 아닌 다른 환경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으로 교회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가 말씀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대 교회가 윤색하고 각색한 것을 예수의 것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가 한 말씀의 역사성 내지는 개별성과 그 메시지의 보편성 사이에 균열이 있기 때문이었다. 듣는 사람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말이 되는 것은 그 메시지의 성격이다. 이러한 각색은 예수에 대한 기억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계시지 않지만 성령으로 교회 안에 살아 계신다. 역사적으로 예수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말씀이 부활 사건으로 열려진 현실에 부합하는 한, 예수의 메시지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적 규범은 성서가 전해 주는 일의적인 말의 표현 안에 있는 것도, 부활하신 분을 대변하는 사람의 카리스마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그 규범은 신앙 공동체가 성서를 참조하여 말씀을 체현(體現)하면서 하는 증언 안에서 식별된다. 따라서 성서는 신앙 진리를 위한 참조의 텍스트이고 신앙 공동체는 그 메시지를 현재화하여 진리를 발생시키는 장소이다. 신앙 공동체는 부활 신앙 안에서 원초적 사건인 예수를 회상하면서 말씀을 발생시키고 기록으로 남겼다.
현대 교회는 성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신앙 공동체는 그 공동체가 처한 시공(時空) 안에서 이 회상이 살아있는 것이 되게 한다. 다양한 상황에서 신앙 공동체의 활동적 현존은, 예수가 설교한 팔레스티나의 여건과 다른 시간과 장소 안에 예수를 상기시키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복음을 선포한다. 이것을 우리는 '해석' 혹은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이라고 말한다. 성서 안에는 오늘 우리의 실천을 위한 차림표가 없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연주가가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것은 해석하는 행위이다. 해석은 악보의 자동적 재생이 아니라 연주가의 창조적 행위이다. 악보가 없었다면 그 음악의 연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창조적 해석인 연주가 없다면 악보는 음악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신앙 공동체의 복음 선포도 성서라는 악보를 해석하는 것과 그 성격이 같다.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다면 성서는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은 없다. 성서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우리 시대에 상응하는 창조적 해석인 신앙인의 삶이 있을 때이다. 이 삶은 성서라는 하나의 문서에서 자동 발생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신앙인이 스스로 독자적으로 발생시키는 것도 아니다. 성서 언어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삶은 창조적인 것이고,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일하심을 본다. 성서의 언어와 그 언어에 접하는 인간 이상의 것을 발생시키는 분은 하느님의 영이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신앙 공동체의 실천적 현존의 모습은 다르다.
〔계시된 하느님〕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계약은 하나의 베푸심으로 나타난다. 모세를 통한 계약(출애 3, 7-15 ; 24, 1-11)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공통된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계약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결과였다. 계약은 하느님이 스스로를 주셨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현존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장하는 물을 위시한 선물로써 표시되었다. 이 선물들은 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서명이며, 그분의 무상성(無償性)을 표현한다. 계약 체결이나 사람들의 신앙보다 앞서는 것이 하느님의 베푸심이다.
계약 체결에 들어 있는 율법은 하느님의 베푸심 안에는 어떤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유아(乳兒)로 취급하시지 않았다. 광야에서 하느님이 주신 선물들이 사라지면서 백성은 율법을 가지고 약속된 땅에 정착하였다. 이제 빵과 물은 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노동으로 얻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 노동의 산물이 초월적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과,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나눔으로써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맏물을 성전에 바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산물 위에 내려오게 하여 그것이 지닌 초월적 기원을 기억하고 나눔의 진리를 거룩한 것으로 하는 행위이다. 하느님의 베푸심은 계약 체결이 아니다. 계약보다 먼저 있는 것이 베푸심이다. 하느님의 베푸심은 어떤 보상(報償)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서들을 보상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읽는 것은 계약의 참다운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선택, 계약, 순종, 베푸심, 이런 식으로 순서를 정할 수는 없다. 선택, 계약, 율법, 약속,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베푸심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실패로 나타난 것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들을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베푸심을 거스르고, 그 베푸심에 대한 보답으로서 베풂을 요구하는 계약을 벗어난 행위이다. 율법은 보답으로서의 베풂을 촉구한다.
말씀은 베푸는 행위와 더불어 살아 있다. 말씀 없이 선물만 있다면 백성은 의사 전달의 대상이 아니다. 말씀은 어떤 거리를 강요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의 주체가 되게 한다. 따라서 말씀은 하느님이 백성에게 베푸신 최초의 참다운 선물이다. 말씀으로 백성은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동반자가 된다. 따라서 말씀은 보답을 호소하는 베푸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의 베푸심 은 물질적인 것을 인간 자율성 안에 두면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을 여는 약속을 준다. 약속은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종말이나 천년 왕국(묵시 20, 1-6)을 주는 것이 아니다. 약속은 하느님의 함께 계심인 성령을 위한 약속이다.
하느님의 베푸심과 약속은 사물들이 그분의 질서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물들이 그분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의 베푸심의 결과이다. 그것들은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환난 중에 나타나서 병고나 죽음 등의 위협에서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 하느님의 베푸심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고, 그 관계 안에서 인간의 욕구가 충족될 때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베푸심과 약속은 우리 역사 안에 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받은 혜택이 있는 그만큼 보답하는 베풂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베푸심은 인간 소외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사물은 그들의 질서 안에 정립되어야 한다. 그들은 신적(神的)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계약 속에 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계약의 직접 목적은 될 수 없다. 약속은 공동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계약이 약속하는 공생(共生)을 제쳐 놓고 사물을 목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계약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공생이다. '하느님의 나라' 라는 예수의 설교 주제나 '친교 (koinonia) , '감사' (eucharistia), '새로운 계약' 이라는 그리스도교 단어들이 무엇이 핵심인지를 말해 준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의 역사는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안에 이 친교를 계속 삽입하는 현상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받을 수 있는 혜택이 공생의 행복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공생보다는 욕망의 충족이 좋은 것이다. 이것은 공생활 초기에 예수가 받았다는 '악마의 유혹' 설화에서 악마가 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안에 지금도 살아 있고 성공을 거두는 언어가 기복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욕망의 충족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사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였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공생을 위해 하느님을 찾는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예수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시오"(마태 6, 33)라는 말씀으로 예언자들의 말을 지속시킨다. 여기서 의로움은 분배의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베푸심이다.
성령으로 살아 계시는 예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혜택을 주시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하느님의 나라를 미래의 것으로 밀어 놓는다. 예수는 지금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계약에서 약속된 공생을 살게 하는 분이다. 교회가 증언하는 성령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원초적 베푸심의 힘에 편승하면서 창조적이고 책임성 있는 사람이 되게 이끄시는 분이다. 성령은 어떤 혜택에도 비교될 수 없는 공생인 친교에로 인도하신다. 성령을 이상한 언어나 치유 등 비일상적이고 기적적인, 우리 욕망의 충족과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성령을 추방하는 것이다. 성령의 주어짐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친교는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것이었다.
〔계시와 오늘 우리의 문제들〕 오늘의 세계는 최고유(最高有)인 신(神)을 정점으로 한 절대 군주(絶對君主) 사회가 아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권위의 후광이 되어주는 분이 아니다. 신앙의 언어는 그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한 사회의 역사적 여건과 그 사회가 만들어내는 신(神)의 표상(表象)들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다. 과거에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 권위 앞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권위는 모두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정통성은 권위를 이어받는 것을 의미했다. 하느님은 위에 계시고, 하느님은 윗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었다. 윗사람들의 결정이 나의 현세적 운명을 좌우하듯이, 하느님께서 결정하여 계시하신 바가 나의 내세적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영주의 신앙이 주민의 신앙(Cujus regio eius religio)인 시대도 지나갔고, 주교나 사제의 신앙 체험에 맹목적으로 따름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시대도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로마 제국 안에서 성장하였고, 게르만족의 유럽 정착과 더불어 시작되는 중세 봉건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이념이었다. 이런 과정에 그리스도교 언어 안에 자리잡은 권위주의는 현대 교회 안에 그 폐해(弊害)가 심각하지만 그것을 청산하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오늘날에는 위로부터 주어진 권위도, 순종하면서 사는 백성도 없다. 이제 권위는 신분에 따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권위는 실효성(實效性)이다. 실효성이 있으면 권위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실효성은 황제의 대관식과 같이 어떤 의식(儀式)을 통해서 위로부터 신비스럽게 전수(傳授)되는 것도 아니고 남과 다른 복장을 함으로써 발생하지도 않는다. 실효성은 당사자가 연구하고 수련한 결과로 획득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가 사람들을 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실효성을 보고 인정한다. 권위는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되는 것이다.
신앙 언어를 위한 여건이 크게 달라졌다. 많은 교역자(敎役者)들의 말이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잃은 것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중세적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한 언어가 호소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의식의 자율성은 오늘날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권위이든, 교도권의 권위이든, 어떤 권위의 이름으로 어떤 지식의 옳음을 주장하면 거 부당할 수밖에 없다. 가르치는 내용 자체가 믿을 만한 것이라야 한다. 신앙을 정초(定礎)하는 사건들 안에서 신앙 체험이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각자가 자유롭게 또 책임감 있게 신앙의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집트에서 해방을 앞두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은 당신 이름을 '야훼' 라고 가르쳐 주셨다. 함께 계신다는 의미로 주어진 이름이다. 이 이름은 권력을 상기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에게 마술적으로 접근하는 비밀 통로를 여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이름은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유사한 장소와 순간에 그 실효성을 발휘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제 이 이름은 1세기의 한 유대인 예수와 분리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예수는 이 이름에 얼굴을 주셨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28, 20)라는 부활하신 분의 말씀으로 끝맺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이고 말씀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상기시키고, 말씀은 말씀하시는 주체를 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보여 주고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예수의 운명은 스스로를 없애는 데 있었다. 그분의 죽음과 승천은 바로 이 없어짐을 말한다. 부활하신 분은 지도자로 군림하시지 않는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군림하면 말씀 자체가 왜곡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분은 지울 수 없는 하나의 흔적을 남기셨다. 성령이 만들어놓은 성서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이름, 곧 "함께 계심"이라는 것에 살과 피의 역사적 농도와 특수성을 주고 하느님에 대한 모든 개념화와 모든 권력화를 금지하는 십자가의 상처를 표시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기신 것은 예수의 흔적을 담은 성서이다. 예수는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하느님의 흔적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주시고, 아들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분이다. 하느님은 우리 위에 힘으로 군림하시지 않는다. 측은히 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약자의 겸손함을 사시는 분임을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보여 주셨다. 흔적은 하나의 표현이지만 겸손한 것이다. 그것은 정의(定義)와 같이 강요하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의 관계만 보여 준다. 눈이나 모래 위에 있는 발자국과 같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지나갔음을 증언한다. 흔적은 정확하고 대단히 귀중하지만 여러 가지 해석에 열려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흔적이다. 하느님이 한 인간 존재의 행위와 말에 개입하신 것이다. 신앙인들은 그분이 남긴 흔적을 해석하지만 선택의 자유가 있다. 흔적은 겸손하다. 하느님이 인간과 하시는 교섭은 하나의 얼굴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얼굴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얼굴의 흔적이다. 이 흔적을 읽고 생활 안에 체현으로 해석하게 하는 성령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주어진 것은 성령과 예수의 흔적인 성서, 그리고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선교 사명이다.
하느님은 아들과 성령을 주시면서 말씀하신 분이다. 비밀스런 정보를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힘으로 아들의 흔적에서 우리 삶의 진리를 발생시키면서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 신앙인들이다. 사람들은 기쁨과 고뇌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짖었고 이 부르짖음은 역사 안에 무수한 흔적을 남겼다. 이 흔적들은 성서가 일으킨 운동의 새로운 역사적 모습들이다. 이 흔적들은 하느님의 이름이 인류 역사 안에 어떤 희망을 일으켰는지를 보여 준다. 이 부르짖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희망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이 부르짖음들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 고통과 죽음은 계속된다. 그러나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 하나의 흔적이 신앙인들에게 죽음과 허무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증한다. 성령은 이 보증을 하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자신에게 되돌아가지 않는 탈아(脫我), 사랑과 베푸심, 지치심이 없고 갈등이 없는 베푸심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또한 성령은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그분과의 친교를 주신다는 것을 증언한다. 이 친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표상으로 표지되었다. 하느님은 당신을 계시하면서 증오, 좁은 마음, 죽음 등으로 물든 생명보다 전혀 다른 생명을 맛보도록 초대하신다.
※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6, pp. 149~169/ B. Rigaux & P. Grelot, Vocabulaire de Théologie biblique, Paris, 1969(한국어 역, <계시>, 《성서 신학 사전》, 광주 가톨릭대학, 1984, pp. 22~28/ Ch. Duquoc,Alliance et Révélation, Initiation pratique a la théologie, Cerf Paris, 1982, T. 2, pp. 5~75/ H. Fries,Die Offenbarung, 《MySal》 1, pp. 159~235/R. Latourelle, Catholicisme Hier Aujourd'hui Demain, Letouzey et Ané Paris, 1990, t.11, pp. 1046~1118 : Théologie de la Révélation, Desclée de Brouwer, Bruxelles-Paris-Montréal, 1963/ J.R. Geiselmann, Offenbarung,
《HthG》, pp. 242~250/ N. Schiffers, K. Rahner, Offenbarung, 《SM》 3, pp. 821~843/ E. Schillebeeckx, Révélation et théologie, Cep, Bruxelles, 1965/ A. Dartigues, La Révélation, du sens au salut, Desclée, 1985/ B.D. Dupuy, Révélation, Encyclopedia Universalis, Paris, 1968, t.14, pp. 194~196/ P. Eicher, Offenbarung. Prinzip neuzeitlicher Theologie, Kösel, München, 19771/ P. Ricoeur, E. Lévinas et coll, La Révélation, Bruxelles, 19771/ H. de Lubac, La Révélation divine, Cerf Paris, 1983/ P. Beauchamp, L'Un et I'Autre Testament. Essai de lecture, Seuil Paris, 1976. 〔徐公錫〕
II . 종교학적 의미
일반적으로 종교학에서는 여러 제종교를 분류할 때, 그 기원을 중심으로 자연 종교(自然宗敎)와 계시 종교 (啓示宗敎)로 구분한다. '계시' (啓示)는 종교의 기원이 어떠한 형태이건 신(하느님) 또는 신성(신적인 것)에 기초 하는 계시 종교들의 기본 개념이 된다. 일반적으로 '계 시' 란 인간의 자연적인 경험이나 인식으로는 불가능한 종교적 진리를 신 스스로가 자기를 열어 보임으로써 인 간으로 하여금 신의 의지 혹은 가르침을 알게 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 계시란 어원적으로 '드러나다' , '나타나 다' , '열어 밝히다' (revelare)라는 동사로부터 유래하였 다. 종교학적으로는 어떤 '감추어져 있는 것' , '가려져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 '자기를 나타내다' , '자 기를 열어 밝히다' (聖顯, hierophania)라는 의미로 사용된 다.
〔현상학(現象學)적 특징〕 계시는 모든 계시 종교들의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계시는 인간 존재에게 전 개되는 신적인 의사 소통(divine comunication to human beings)이다. 종교 현상학 학자들은 매우 다양한 방법과 정도로 넓은 의미의 계시에 관해 언급하였다. 초월적인 힘 때문에 생기는 가장 모호한 체험에서부터 인격적 신 의 자기 고지(self-comunicaion of a personal God)에 이르기 까지 계시의 범위는 넓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교 현상 학자들은 계시에 관하여 다섯 가지 기준 범주(criteria)로 설명한다.
기원 혹은 계시자(origin or author) : 하느님, 정령 (spirits), 조상 선조들, 힘(manas), 세력(forces) . 어떤 경 우든 계시의 근원은 초자연적인 혹은 '거룩한(numinos) 무엇' 이 된다.
도구 혹은 수단(instrument or means) : 자연에서 선별한 거룩한 상징들(별, 동물, 장소 또는 시간), 꿈, 현시 (visions) , 황홀경(ecstasies) , 말(words) 또는 문서(sacred books)
내용 혹은 목적(content or object) : 방언(didactic), 도움, 형벌의 예시, 의지, 존재, 활동, 또는 신의 임무(commis- sion of the divinity).
수신자 혹은 청취자(recipients or addressers) : 치료사 (medicine men), 사제(sacrificing priests) 무당(shamans), , 마 법사(sorcerers), 점쟁이(soothsayer), 명상가(meditators) , 개인 또는 집단에게 임무와 정보를 전해 주는 예언자.
영향과 결과(effect and consequence) : 개인적 교시 혹은 설득, 신적 임무 부여, 최고의 경우 육화(肉化, incarna-
tion)를 통한 봉사(神託, oracle)
〔계시 개념의 역사적 적용] '계시' 개념이 유대-그리 스도교 전통에서 주로 신학적 조명을 받아온 만큼, 종교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유대-그리스도교 전통과 연결 시켜 사용한다. 그러다가 종교사 연구 과정을 거쳐 다른 종교 전통에 폭 넓은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로 옮겨져 적 용, 사용되었다. 그래서 문제는 정령 숭배(精靈崇拜, ani- mistic)적인 다신론적(多神論, polythestic) 혹은 다악령 숭배(多惡靈崇拜, polydemonistic)적인 종교들이 이 용어 를 적용 사용할 때, 이 개념이 과연 그들에게 적합한지 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이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오직 그리스도교
에만 계시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종교 역사학 자 반 데르 레우(Van der Leeuw)는 그리스도교에서 고도 로 발달한 이 계시의 개념을 더욱 폭 넓게 이해 발전시 켜 다양하고 함축적인 의미의 계시에 관한 여러 개념들 을 보여 주었다.
〔계시와 주술〕 계시와 주술(呪術, magic)은 명백히 구 분된다. 주술이 신적인 것의 거부 혹은 극복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계시란 원칙적으로 신에 의한 자유로운 고지(free announcement by the divinity)를 의미하기 때문이 다. 이 고지(告知)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신 (神)과 알려진 신비 사이에, 계시하는 주체와 계시된 객 체 사이의 구분을 분명하게 포함하듯이 때로는 히에로파
니(聖顯, hierophanies)와 에피파니(ephipanies)를 넘어서 거룩한 것(something holy)의 현현(顯現)까지가 포함된다. 여하튼 이 용어의 개념적 의미는 라틴어 레벨라씨오(re- velatio)와 그리스어 아포클륨시스(apllulupinsi)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계시와 그노시스주의 또는 신비주의] 그노시스주의 (Gnosticism)와 신비주의가 계시의 형태들로 또는 그와 정반대로 계시가 그노시스주의나 신비주의의 한 형태로 간주되건 이들은 종교적 삶에 체현되어 나타나는 신적 자비(혹은 신의 자기 고지를 통한 은혜)에 본질적으로 의존 하고 있다. 궁극적 인식과 초월적 예지의 파악이 인간 존 재의 노력 그 결과만으로 인정되지 않고 신으로부터의 선물(신의 자기 고지로부터의)로만 언제나 인정된다면 계시 개념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특별 히 명확한 신관이 종교들의 원형적 형태에서 분명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호하고 혼동스러운 형태 일지라도, 계시관과 초월 의식은 기타 다른 종교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계시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 탕으로 할 때, 일반 제종교(대표적으로 이슬람교, 조로아스 터교,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계시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슬람교 : 계시의 저자는 인격적 신이며 계시의 내용 은 계명(戒命)으로서 온 세상을 통제하는 무한한 신(알 라, Allah)의 의지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의 자기 계시 또는 구원의 역사에 기초를 이루는 참여는 발견할 수 없 다. 이슬람 전통의 계시 이해는 그리스도교의 성서의 계 시에 대한 이해와 매우 밀접한 면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 가 있다. '계시' (Wahy, revelation)는 보통 대천사 가브리 엘을 통하여 신(알라)으로부터 온다. 이 계시는 알라의 명령, 알라의 오묘한 의지, 심판의 고지(통보), 알라의 계 명 그리고 알라의 신적인 법(shariah)을 내용으로 한다. 계시는 결정적인 형태로 예언자들에게 특히 꿈속에서 환 청으로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Muhammad, 570~632)에게 주어진다. 이 계시는 천국의 알라의 권좌에까지 올려진, 영원한 전형의 코란(Quran)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진리 의 '말씀' 은, 그리스도교의 성서와는 달리, 알라의 자기
인식의 근원은 아니다. 이 점에서 코란 안에서 계시의 내 용은 지혜와 삶의 안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후의 심판 에 대한 경고와 고지가 된다. 왜냐하면, 이 내용들은 그 근원상 변경될 수 없는 신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 : 똑같이 계시는 인격적 신의 의지의 활 동으로 설명한다. 후기 페르시아 종교에서 이 계시(신적 결단)는 이원론(二元論)적 세계의 개시 이전부터 선택되 는 모든 인간들에게 윤리와 영성적 의무로 변한다. 역사 는 이미 예정되어 신의 승리로 확신되는 전쟁터일 뿐이 다. 자라투스투라(Zarathustra) 역시 비성서적 의미의 또 한 사람의 예언자였다. 그 또한 계시를 유일하고 인격자 인 신의 자유로운 행위에 그 근원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이란 세계의 주도적인 이원론 또한 근원적 계시 에 기초한다.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처럼 마즈딘 (Mazdeans)들 역시 악을 거슬러 투쟁하는 선을 선호한 다. 인류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 고 이 선택은 인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힌두교 : 힌두교에서도 종교 역사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계시를 말할 수 있다. 베다(Veda)는 거룩한 계시 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즉, 스루티(Sruti ; 원뜻은 '들려 진' 신들이 시성[詩聖, rish, seers]들에게 직접적으로 계시하였다 고 말하여지는)는 스므리티(Smriti ; 원뜻은 '기억되어진' 인 간에 의해 작성된)와 명확히 구분된다. 힌두 신앙에 따르 면 베다 문헌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해 왔으며 그 기원은 전자연(prenatural in origin)적이고 알 수 없는 시성들에 의 하여 무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 존재에게 전해져 온 것이 다. 리그 베다에서 자연의 힘과 자연의 요소들은 신들로 이해된다(천등신, 바람신, 불신 등등). 이러한 믿음들은 후 에 다양한 다신들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궁극적인 무엇 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우파니샤드 (Upanisad)는 이 물음에 대한 답과 관련하여 '아트만' (Atman, 영혼)과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 (Brahman, 梵)과 는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 : 계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 파악은 성서적 신관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신구약 성서는 다같 이 유일신을 증언하고 있으며, 이 유일신은 자유롭게 인 간 세계에 다가와 자신을 증거하고 알려 주며 개방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그는 언어와 통교의 성격을 가진 인간 과 같아져서 유추적(類椎的, analogous)인 인격체로 이해 되고, 비유적인 의미로 말을 건네 받고 대화에로 부름받 는다.
※ 참고문헌 Johannes Deninger, revelation, 《ER》, ed. by Mircia Eliade, vol. 12, New York, 1987, pp. 356~362/ Karl Rahner, 《SM》 5/ Mircea Eliade, A History of Religious Ideas, vol. 3, Chicago, 1978~1986. 〔吳將均〕
계시
啓示
[라]revelatio · [영]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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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을 쓴 사도 요한의 환상 : 면류관을 쓴 동정녀(구스타브 도레 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