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익 (1881~1948)

徐丙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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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익 신부.

서병익 신부.

전주교구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1881년 9월 28일 강원도 홍천(洪川)에서 태어나 1910년 9월 24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와 함께 종현(鐘峴, 현 명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신학교 재학 중에는 한때 정신 분열 증세를 보여 휴학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서품 직후 전북 용안군 용안면(龍安面)의 안대동(安大洞, 현 함열) 본당 주임으로 사목 활동을 시작한 서병익 신부는 12개 공소에 퍼져 있는 1,250여 명의 신자들을 돌보다가 이듬해 5월 21일 평안도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교구측의 평안북도 전교 계획에 따라 의주(義州) 본당 신설 책임자로 임명되어 그곳에 부임하자마자 남문동(南門洞)의 사가(私家)를 매입했다. 성당 신축 계획을 추진하던 서병익 신부는 신미도(身彌島) 공소의 최응하(崔應夏, 베드로) 회장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성당 부지와 건립 기금을 마련한 후 공사에 착수하여 1919년 10월 7일 이를 완공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사제관 · 수녀원 · 유치원 등 부속 시설의 건립에도 노력하였으며, 1921년에는 성당 구내에 학교(해성학교의 전신)를 설립한 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에게 그 운영을 위임하였다.
이어 서병익 신부는 경기도 개성(開城) 본당 4대 주임(1924~1927)을 거쳐 충북 감곡(甘谷) 본당 보좌(1927~1928), 강원도 춘천읍 약사리(藥司里, 현 죽림동) 본당 3대 주임(1931~1935), 대구 계산동(桂山洞) 본당 보좌(1935. 6~1936. 6), 전북 나바위(현 화산) 본당 6대 주임(1936. 6~1938. 6), 충남 금산(錦山) 본당 3대 주임(1939.4~1941.3)을 역임하였으며, 1941년에는 다시 안대동 본당 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그 동안의 활동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안대동 본당 부임 후 천황의 사진을 훼손하고 비방하는 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되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중풍 증세로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구금에서 풀려 난 서병익 신부는 1941년 말에 되재(현 고산) 본당 주임(1943. 5~1944. 10)으로 전임되어 사목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전주교구 주교관에서 휴양을 하게 되었는데, 끝내 이를 회복하지 못하고 1948년 6월 14일 사망하여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그의 후손 중에는 서울교구 소속으로 1949년 공산 치하에서 순교한 서운석(徐雲錫, 보니파시오) 신부와 사목 연구원 차장과 정릉동(貞陵洞) 본당 주임 등을 역임한 후 1978년에 사망한 서우석(徐祐錫, 요한) 신부가 있다.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82호(1982. 6), 한국교회사연구소, p.51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편, 《天主教平壤教區史》, 1981/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김진소 편,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교회사연구소1993 .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