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목구 초기의 대표적 평신도.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의 주도자. 자(字)는 윤서 ( 潤瑞) . 본관은 달성 ( 達成 ).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가문과 출생〕 서상돈의 집안이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4대 조 서광수(徐光修) 때였다. 서명응(徐命膺)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천주교를 믿게 된 서광수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에 연루되어 달성 서씨 문중에서 파적(破籍)을 당하였고, 이어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피신하여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경상도 상주(尙州)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서광수의 차남인 유오(有五)의 아들 치보(致輔) 즉 상돈의 조부 때 문경(聞慶) 여우목에 정착하였다. 서상돈은 1850년 서치보의 삼남인 서철순(徐哲淳)과 김후상(金厚詳)의 장녀 김 아가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1857년에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그의 집안에서는 3명의 삼촌이 순교하였는데, 인순(隣淳)은 경산에서 잡혀 대구에서 옥사하였고, 익순(翼淳)은 칠곡(漆谷) 한티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1857년에 순교하였으며, 태순(泰淳)은 문경 한실에서 관헌에게 잡혀 상주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일찍부터 순교 신심이 싹튼 서상돈은 훗날 갑부가 된 뒤에도 순교한 삼촌들의 일화를 자주 언급하면서 일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신앙과 교회 활동〕 대구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의 나이로 가장이 된 서상돈은, 상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경북 일원의 장터를 전전하는 보부상(褓負商)으로 활동하였으며, 17~18세 때에는 독자적으로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윤이 많아지자 고령(高靈)의 개포(開浦)를 근거지로 삼고 생필품을 배에 싣고 부산에서 안동까지 왕래함으로써 이미 36세때에는 수십 명의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大商)이 되었으며, 매년 3만 석 정도의 이윤을 남겼다. 45세 때인 1894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 대우를 받는 한편, 탁지부의 시찰관(視察官)에 임명되어 경상도의 세정(稅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당시 시찰관은 할당된 세금을 미리 대납(代納)하고 추후에 거두어 그 이익금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는 궁핍한 나라 살림을 걱정하여 그 돈까지 모두 국고에 헌납하였다.
1910년경 서상돈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교구 분할의 필요성을 느껴 이를 로마 교황청에 건의함으로써 주교 소재지가 전주와 대구 가운데한 곳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대구로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마침내 1911년 6월 11일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는 데에 기여하였다. 또 초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가 교구 발전의 초석을 다지기까지 '남산화원' 이라고 불리던 자신이 경영하는 종묘원(種苗園) 부지 1만여 평을 주교관과 수녀원 건립 부지로 기증하는 등 많은 사재(私財)를 털어 주교의 사목 활동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대구대교구청과 대구 효성 가톨릭대학교, 그리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 소재하고 있다. 한편 그 무렵 서상돈의 사랑채에는 늘 10여명의 식객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를 전교 대상자로 생각한 그는 그들에게 틈틈이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감화를 받아 입교한 이만도 여럿이었다.
〔자주 독립 의지와 국채 보상 운동〕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 나라는 외 교권을 박탈당한 채 통감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차관으로 도입하게 함으로써 이후 5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와 함께 '광문사' (廣文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계몽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엄청난 국채로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1907년 1월 중순 자신의 사랑채에 광문사 간부들을 불러모은 뒤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미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서 자주 독립 운동에 앞장서 왔던 서상돈은, 이 자리에서 우선 2천만 국민이 담배를 끊어 매월 20전씩 3개월만 헌납한다면 국채를 전액 보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국채 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였다. 이 취지문에는 우선 유럽 제국의 식민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시아에서 일본이 그러한 나라이며, 근세에 나라를 잃은 이집트 · 월남 ·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은 그 민족이 자기 자신과 가정만 생각했을 뿐 나라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뒤 우리 나라도 국채를 청산하지 않으면 국토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우리 2천만 동포 중에 애국심을 가진 자는 있으되, 그것으로 뭉친 사람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우리가 감히 이에 발기하여 피눈물로 고하노니 우리 대한 백성은 이 취지문을 보시고 한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 알려, 기어코 국채를 보상하여 위로는 황제의 밝은 뜻에 보답하고 밑으로는 우리 강토를 유지할 것을 복원하는 바이노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 申報)를 비롯하여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 등에 이 취지문이 보도되자 국채 보상 운동은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같은 해 2월 21일 이 취지문을 보도하고 이때부터 이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3년 동안 전국의 사회 각계각층이 모두 호응하는 가운데 국민 애국 운동으로 확산된 국채 보상 운동은 또한 우 리 나라 역사상 여성들의 참여가 돋보였던 국민 운동이기도 하였다. 각기 다른 시선이긴 하였지만 일본 · 만주 · 중국의 언론들에서도 이 사실을 보도하였고, 뉴욕의 한국인들도 신문사에 기고문과 함께 후원금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서상돈은 이때 이 운동의 창시자이자 중심 인물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은 한일합병을 몇 달 앞둔 1910년 4월 16일 일본인들의 방해 공작으로 서울 흥사단 회관에서 각 군(郡) 대표 115명이 모여 총회를 개최한 후 종결되고 말았다.
상점 종업원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보부상을 거쳐 대구 제일의 갑부가 된 서상돈은 일생 동안 교회와 가난한 이웃을 위해, 그리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조국의 재기와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64세 때인 1913년 6월 30일 노환으로 사망하여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가족 묘지에 묻혔다. (→ 국채 보상 운동)
※ 참고문헌 <대구 서씨 세보(世譜)>, 1987. 91 최정복 편저, <대구천주교회사》, 천주교 대구 계산동 교회, 1952/ 드망즈 주교, 《드망즈일기》, 가톨릭신문사, 1989/ <대구 재계 선각인들>, 《대구 상의(商議)뉴스》, 1979. 4. 15 ; 1980. 12. 31/ 이상근, <국채 보상 운동에 관한 연구>, 《국사관 논총》 18집(1990. 12), 國史編纂委員會 《교회와 역사》 181호(1990. 6), 한국교회사연구소, p. 41 崔埈, <국채 보상 운동>,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3, 정신문화연구원. 〔徐公錫〕
서상돈 (1850~1913)
徐相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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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서상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