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지금의 의주로와 서소문로가 교차하는 사거리 부근, 즉 의주로 2가와 합동(蛤洞, 조갯골) 사이에 있는 서소문 공원과 그 인근을 말한다. 한국의 103위 성인 중 44명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으며, 기록에 나타나는 순교자수는 90여 명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까지 오랫동안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된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서소문(즉 昭義門) 밖' 이다.
〔서소문 형장〕 서소문 밖의 형지로 알려져 온 곳은 지금의 서소문 공원 옆에 있던 이교(圯橋, 흙다리)의 남쪽 백사장으로, 무악산(毋岳山)에서 발원하여 용산으로 흐르는 만초천(蔓草川, 旭川) 변이었으며, 서소문을 지나 비탈진 언덕길 아래에 있었다. 그 인근에는 조갯골 · 두께우물골(蓋井洞)과 같은 마을들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은 세종 때 서부 반석방(盤石坊)에 편입되었고,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시전(市廛)이 발달한데다가 마포와 아현 방향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기록상으로는 연산군 때부터 이곳에서 죄인들을 처형한 사실이 나타나나 그 이전부터 이미 처형지로 이용해 왔음이 분명하다. 이곳을 형장으로 설정한 이유는 《서경》(書經)에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고 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성밖이면서도 형조나 포도청과 가까웠던 까닭에 이곳이 주로 한양의 형장으로 이용되었다.
〔박해와 순교자의 탄생〕 천주교 신자로서 처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은 신유박해 직후에 체포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고 1801년 2월 26일(양 4월 8일)에 참수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등 6명이었다. 이후 이곳에서는 3월 29일에 2명, 4월 2일에 6명, 4월 20일에 1명, 5월 22일에 9명, 8월 27일에 2명, 10월 23일에 2명, 11월 5일에 3명, 그리고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에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등 9명이 순교할 때까지 모두 40명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정법(正法, 즉 참수형)을 당하였지만 10월 23일과 11월 5일에 각각 처형된 황심(黃沁, 토마스)과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만은 능지처사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서울에서는 1819년 윤 5월 21일(양 6월 13일)에 조숙(趙淑, 베드로)과 권(權) 데레사 동정 부부, 고(高) 바르바라(혹은 막달레나)가 순교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서소문 밖에 서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소문 밖에서는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다후(純元王后)의 이름으로 <사학 토치령>(邪學討治令)이 내려진 직후인 4월 12일(양 5월 24일)에는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으며, 6월 10일에는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 8명이 처형되었다. 이어 7월 27일에 6명, 8월 15일에 2명, 8월 19일에 9명이 참수되었고, 11월 23일(양 12월 28일)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된 이튿날에도 형벌을 받고 옥에 갇혀 있던 최창흡(崔昌洽, 요한) 등 7명이 참수되었다. 이로써 기해박해 때만 모두 41명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
했는데, 이들 모두는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에도 서소문 밖에서는 1월 21일(양 3월 7일)에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홍봉주(洪鳳, 周, 토마스)가 순교하였고, 1월 23일에는 전장운(全長雲,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이 같은 장소에서 참수형을 받았는데, 홍봉주를 제외한 3명도 같은 날 성인품에 올랐다. 이어 1868년 윤 4월 7일(양 5월 28일)에는 다시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 이신규(李身逵, 토마스) · 권복(權複, 프란치스코) · 조 도사 등 4명이 순교하였으며, 1871년 4월 9일(양 5월 27일)에는 김창실(金昌實, 안토니오) · 김여강(金汝江) · 이돈호(李敦浩) 등 3명이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이 밖에도 1866년 11월 8일에 이용리(李容離, 베드로)가, 1868년에 김백철(金百喆) · 조계승(曹啓承) · 남 데레사 등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나 이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조사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1868년 1월 23일(양 2월 16일)에 참수된 김경보(金景甫) 등 6명, 2월 13일과 4월 14일(양 5월 6일) 사이에 참수된 30여 명도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던 것 같다.
그 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아울러 순교자 현양 운동이 계속 전개되어 왔지만, 서소문 밖 형장은 도시 개발로 인해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이곳에 새로 서소문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에 교회 당국에서는 옛 순교터를 사적지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984년에는 103위 시성식을 계기로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에서 공원 안의 동쪽 편에 '서소문 순교 현양탑' 을 건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인근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이 현양탑은 헐리고 말았다. 그 후 서울대교구에서는 베네딕도회의 조광호(趙光鎬, 엘리지오) 신부에게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제작을 의뢰하였으며, 1999년 5월 26일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 신유박해 ; 기해박해 ; 병인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上 . 中 . 下/ 《기해일기》 《치명일기》《병인박해 순교자 증언 /《日省錄》 《純祖實錄》 《邪學懲義》 《承政院日記》/ 《推案及鞫案》/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인천 교구준비위원회 편, 《聖地》 I, 東林文化社, 1982. 〔車基真〕
서소문 밖
西小門
글자 크기
7권

1 / 4
오랫동안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었던 '서소문 밖' 옛 모습(왼쪽)과 1984년에 건립된 현양탑과 지금의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