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교구이자 신앙과 교회 활동의 중심지. 현재는 서울 전 지역과 가평군 · 포천군을 제외한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을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대교구이며, 주보는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朝鮮代牧區)로 설정되었으며, 1890년대 이후 약 30년 동안 간도(間島) 지역의 사목까지 관할하였다. 1911년 4월 8일 대구 대목구(大邱代牧區)를 분리하면서 나머지 지역을 관할하는 '서울 대목구 로 개칭되었고, 이후 1920년에 원산 대목구, 1927년에 평양 지목구, 1939년에 춘천 대목구, 1958년에 대전 대목구와 청주 대목구, 1961년에 인천 대목구, 1963년에 수원교구를 각각 분리하였다. 그러던 중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면서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춘천교구 · 인천교구 · 대전교구를 비롯하여 침묵의 교회인 평양교구 및 함흥교구를 포함하는 서울 관구(管區)를 형성하였으며, 이후 수원교구와 원주교구가 동 관구에 포함되었다. 현재 서울대교구장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다.
〔역대 교구장〕 초대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바르톨로메오) 주교(1831. 9. 9~1835. 10. 20), 2대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1836. 4. 26~1839. 9. 21), 3대 페레올(J. Ferréol, 高, 요하네스) 주교(1942 말~1853. 2. 3), 4대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1854. 8. 5~1866. 3. 7), 5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1866. 3. 7~3. 30), 6대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주교(1869. 4. 27~1884. 6. 20), 7대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주교(1884. 6. 20~1890. 2. 21), 8대 뮈텔(G. Mutel, 閔德孝, 구스타프) 대주교(1890. 8. 4~1933. 1. 23), 9대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아드리아노) 주교(1933. 1. 23~1942. 1.3), 10대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1942. 1.3~1967.3.24), 11대 (서리)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대주교(1967. 3. 24~1968. 4. 9), 12대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1968. 4.9~1998.5.30), 13대 정진석(鄭鎮奭, 니콜라오) 대주교(1998. 5. 30~현재). 〔교 세〕 1865년 23,000명, 1883년 12,035명, 1894년 24,733명, 1911년 76,843명, 1920년 59,331명, 1930년 51,536명, 1944년 65,795명, 1962년 128,545명, 1972년 186,285명, 1982년 490,787명, 1992년 1,055,288명, 1998년 1,253,392명.
I . 조선 대목구의 설정
〔설정 배경〕 조선 포교지는 1690년 이래 포르투갈의 보호권(保護權) 교구인 남경교구(南京敎區)에 속해 있다가 1784년 겨울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면서 북경의 북당(北堂)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 이어 1785년 1월 18일에는 프란치스코회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북경교구장에 임명되어 남당(南堂)에 부임함으로써 조선 포교지는 북당에 이어 남당과도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회의 해산으로 그 해 5월부터 북당에 거처하게 된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조선 포교지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89년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 북경에 가면서부터였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1792년 4월 1일 교황 비오 6세(1775~1799)로부터 개인 자격으로 조선 포교지에 관한 지도를 위임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1831년까지 조선 포교지는 북경주교의 지도 아래 놓이게 되었다.
조선 포교지가 북경교구장의 지도 아래에서, 더 넓게는 북경교구나 중국 교회에서 독립하여 조선 대목구로 설정된 배경을 크게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 천주교회의 대내적인 배경으로는 조선 신자들이 꾸준히 추진해 온 성직자 영입 운동(聖職者迎入運動)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언제나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지만, 조선의 사회 구조와 근본 사상이 바뀌지 않는 한 신앙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요원하였다. 반면에 성직자 영입 운동은 초기의 신자들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은 밀사 윤유일이 북경을 다녀온 이후로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1794년 12월에는 구베아 주교가 파견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으나, 박해로 인해 그 활동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주문모 신부마저도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순교하면서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조선 신자들의 제2차 성직자 영입 운동은 1811년경에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때 밀사 이여진(요한)이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권기인(요한) 등의 도움을 받아 1811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교황과 북경교구장에게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고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 동안에도 조선에서의 국지적인 박해는 계속되었고, 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는 경상도와 전라도 교우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반면에 천주교 신앙은 경기 · 강원 이남의 전 지역으로 널리 확산되어 갔으며, 새로운 교우촌이 계속 형성되고 있었다. 이 무렵 교회의 밀사로 활약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은 1816년 이래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824년과 1826년에는 역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과 마부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 그를 도와 북경을 왕래하였다. 이 중에서 유진길은 1824년 말에 교황에게 보내는 조선 신자들의 두 번째 서한을 북경에 전하였다.
조선 대목구 설정의 대외적인 배경으로는 중국 교회와 교황청의 상황을 들 수 있다. 사실 조선 포교지에 대한 지도 권한은 구베아 주교가 사망하면서 소멸되었지만, 그의 후임자로 남경에 머무르고 있던 수자 사라이바(J. de Souza-Saraiva) 주교는 교황청에서 다른 결정을 내릴 때 까지 계속하여 조선 신자들을 돕기로 결심하였다. 이 점은 1811년에 조선 신자들로부터 서한을 받은 수자 사라이바 주교와 북경에 있던 그의 총대리 리베이로 누네스(J. Ribeiro-Nunes, 李拱震) 신부가 조선의 젊은이를 중국으로 데려와 사제로 양성하거나 새로 선교사를 선발하여 조선에 보낼 계획을 세운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박해 중에 있던 중국 교회의 상황 때문에 성직자 파견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무렵 교황청에서도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1821년에 포교성성 장관 루이지 폰타나(F. Luigi Fontana)추기경은 나폴리 성가정신학교(聖家庭神學校)에 입학한 4명의 중국 신학생들로부터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전해 받고 이듬해 다시 한번 북경 주교에게 조선 선교를 요청하였으며, 1824년에는 남경을 통해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1826년에는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가 사망하면서 당시 북경에 거주하던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G. Pirés-Pereira, 畢學源) 주교가 조선 포교지의 지도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의 보호권 교구인 북경교구에 위임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는 조선 포교지를 다른 선교 단체에 위임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선임자들처럼 선교사 파견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이를 위한 항구적인 대책도 마련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의 경리부 대표 움피에레스(R. Umpierres) 신부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 신자들의 1824년 말 서한을 교황청에 보내면서 1827년 2월 7일자로 작성한 자신의 의견서를 첨부하였다. 이때부터 교황청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 포교지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서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마침내 결실을 얻게 되었다.
〔대목구 설정과 의의〕 1827년에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받은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Cappellan) 추기경은 조선 포교지의 독립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였다. 이때 포교성성 회의에서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권고를 감안하여 조선 포교지의 사목을 '로마 예수회' 나 '파리 외방전교회' 에 위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1827년 9월 1일자로 예수회 신학교 총장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인 랑글루아(C.F. Langlois)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의중을 타진하였으나, 예수회에서는 선교사의 부족을 이유로 거절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들은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저하였다. 다만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조선의 실상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이 문제를 동양 선교사들에게 문의하였다.
이때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시암(Siam, 지금의 타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신부가 조선 포교지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파리 본부로부터 조선 포교지에 대한 문의 서한을 받자, 1829년 5월 19일자 서한을 통해 먼저 파리 본부에서 내세운 다섯 가지 이유들을 반박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지원자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파견하되, 지원자가 없으면 자신이 조선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때부터 포교성성에서는 보다 진지하게 조선교구의 설정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6월 29일 시암에서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거듭 포교성성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기를 희망하였다.
포교성성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마침내 브뤼기에르 주교의 의견을 수락하고, 1831년 7월에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조선 포교지를 '조선 대목구' 로 설정하는 동시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한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같은 해 2월에는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로 선출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조선 포교지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교황은 추기경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 1831년 9월 9일자로 된 두 개의 교서를 통해 조선 대목구의 설정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대목구장 임명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당시 추기경 회의에서는 이러한 결정에 두 가지 단서를 붙였다. 첫째,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에야 조선 교회가 비로소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체류가 완전히 보장될 때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그 후에도 계속 보호권을 주장하였으며, 남당에 거처하고 있던 임시 대리자인 페레이라 남경교구장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때까지 조선에 대한 재치권(裁治權)을 고집하게 되었다.
조선 대목구의 설정 의의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 포교지가 북경의 보호권 교구, 정확히 말하면 북경 주교의 지도 아래서 독립하여 발전의 전기를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교황청의 포교성성관할 아래에 놓인 독립 대목구로서 로마 교회와 결합되고 세계 교회와 교류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비록 단서가 붙었지만 조선 대목구의 사목권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됨으로써 선교사 파견이 보장되었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첫 번째 선교 지침이 '현지인 성직자 양성' 에 있었으므로 언젠가는 한국인 대목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반면에 파리 외방전교회가 순수한 선교를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중국 교회 초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루어 낸 것처럼 문화 적응주의에 입각한 동서 문화교류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II . 박해와 순교자의 탄생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25일에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 시암 교구의 샤스탕(J.Chastan, 鄭) 신부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고, 이보다 앞서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고 이미 입국 길에 오른 중국인 유 파치피코(중국 이름은 余恒德) 신부는 입국에 성공하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기로 되었었다. 그 해 9월 12일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곳에서 교황 친서를 받았으며, 1833년 3월 9일에는 사천(四川) 선교사 모방(P. Maubant, 羅)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임지를 조선으로 변경해 달라는 서한을 사천교구장에게 보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후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반면에 유 파치피코 신부는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 1834년 1월 3일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9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처음으로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받고 서부 달단(韃靼) 즉 요녕성의 서만자(西灣子, 일명 Sivang)에 있던 라자로회 신학교로 거처를 옮겨 모방 신부를 만났으며, 조선 신자들과의 약속대로 1835년 10월 7일 서만자를 떠나 마가자(馬架子, Pie-li-ke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의 한 교우촌에 도착하여 요동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 동안의 과로로 인해 얻은 병 때문에 10월 20일(음 8월 29일)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사망하기 전에 조선 교회를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포교성성에 서한을 보내 조선 입국시에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요동 지역을 북경 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 대목구에 예속시키거나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두 번째로는 중국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할 경우 류큐(琉球)로 가서 기회를 엿볼 수 있게 해주도록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6년 4월 26일자로 류큐 포교지를 조선 대목구장에게 위임해 주었다. 세 번째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를 출발하기에 앞서 모방 신부에게 조선 선교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한편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추천한, 당시 사천 신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던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신부는 1836년 4월 26일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미 사망한 후였으므로 그는 이때부터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5월 14일 갑사 명의의 주교로 성성되었다.
서만자에 있던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소식을 듣자마자 마가자로 출발하여 장례식을 치른 다음 길을 재촉하여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으며, 1836년 1월 13일(음 1835년 11월 25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하였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번째 프랑스 선교사였다. 이어 1837년 1월 1일에는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고, 같은 해 12월 18일에는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였다. 그때 정하상이 매입해 놓았던 서울 후동(后洞, 樂善坊의 後洞인 듯)의 집은 조선 대목구의 중심지요 첫 번째 주교관이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어를 배운 후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 당시 교우촌은 목자 없는 조선 교회를 지탱해 나가는 중요한 터전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편 모방 신부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 김대건 (金大建, 안드레아) 등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1836년 12월 3일에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고, 앵베르 주교는 1838년에 다시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였다. 또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1일 북경교구의 주보인 '성 요셉'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를 조선 대목구의 주보로 정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에 이를 허락하면서 '성 요셉' 도 공동 주보(compatronus)로 계속 공경하도록 지시하였다.
〔박해와 조선 대목구의 변모〕 대목구 설정 이후 약 40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크고 작은 박해와 교회 재건 활동이 반복되는 여정을 겪어야만 하였다. 먼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까지는 교우촌이 확대되면서 총 신자수가 1801년 수준인 1만 명으로 다시 증가하였으나, 이 박해로 인해 교회 재건 활동이 다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중 다행인 것은 박해 중에도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에 의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수집 · 정리되었고, 마카오의 조선 신학교에서는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학 수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842년 말에는 페레올(J. Ferréol, 高) 신부가 부주교로 임명됨으로써 이미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어 자동적으로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는 1845년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되어 10월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A. 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면서 병오박해(丙午迫害)가 일어나 조선 대목구는 다시 한번 순교자들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박해가 끝난 11월 초에 다블뤼 신부는 공주 수리치골(현 충남 공주군 신풍면 鳳甲里)에서 '성모 성심회' (聖母聖心會)를 창설하였으며, 1847년에는 최양업 부제가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파리 외방전교회를 통해 교황청으로 보내졌다. 이어 1849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 서품된 뒤 12월에 귀국하여 사목 순방을 시작하였다.
1850년대와 1860년대 초까지는 공식적인 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잇달아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고, 전교 활동의 활성화로 1850년에는 신자수 약 11,000명에 공소수 약 185개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1859년에는 신자수가 16,700명에 달하였다. 한편 1853년에는 페레올 주교의 사망으로 대목구의 장상이 된 메스트르(J. Maistre, 李) 신부가 최양업 신부의 도움을 받아 3명의 신학생을 말레이 반도의 페낭(Pen-nang) 신학교로 보냈고, 1855년 초에는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성 요셉 신학교 를 설립하였다. 이어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가 1856년 3월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1857년에 다블뤼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고 3월 25일에 성성식을 집전하였으며, 3월 26~29일에는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개최한 뒤 그 내용을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이름으로 반포하였다. 또 다블뤼 주교로 하여금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도록 하고, 서울에 두 곳의 목판 인쇄소를 설립하여 1862년부터 《천주 성교 공과》, 《천주교 요리 문답》 등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약소(施藥所)를 설립하여 교우들과 일반인들에게 시료 혜택을 주었으며, 성영회(聖嬰會) 사업을 통하여 고아들을 양육하기도 하였다.
1860년에는 경신박해(庚申迫害)가 일어나 지방의 여러 교우촌들이 약탈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박해가 중지되었다. 그러자 베르뇌 주교는 이듬해 10월 배론 신학교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을 7개의 본당 구역으로 분리 · 설정하였다. 1865년의 조선 대목구 총 신자수는 23,000여 명이었다. 그러나 1866년에는 꾸준히 성장해 가던 조선 대목구가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해 다시 한번 좌절을 겪게 되었다. 베르뇌 주교와 3명의 선교사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이어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홍봉주(洪鳳周, 토마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또 베르뇌 주교의 순교 이후 제5대 조선 대목구장을 맡게 된 다블뤼 주교도 3월 30일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는 그 후 1870년대 초까지 지속되면서 대략 네 단계, 즉 1866년 봄에 시작된 초기의 박해,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인 1866년 가을에서 이듬해까지 계속된 박해, 덕산 굴총 사건(德山掘塚事件)으로 인한 1868년의 박해,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인한 1871년 이후의 박해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서 약 8천~1만 명의 유명 · 무명 순교자가 탄생하였고, 그중에서 24명이 훗날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박해가 지속되면서 조선 대목구에서는 오랜 기간이 지난 뒤에야 재건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Ⅲ . 본당의 확대와 대목구 분할
〔신앙 자유기의 조선 대목구〕 조선 선교사 중에서 리델(F. Ridel, 李福明) · 페롱(S. Féron, 權) · 칼래(A. Calais, 姜) 신부는 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7월과 10월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그중에서 리델 신부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조선 원정에 동승한 적이 있었다. 또 그는 1867년부터 조선 선교사들과 함께 요동의 차쿠(岔溝, 현 莊河市 蓉花山)에 거처하였고, 이듬해 12월에는 조선 대목구의 제2차 성직자 회의를 이곳에서 개최하였으며, 1869년 초에는 만주교구장 베롤(Verolles, 方若望) 주교로부터 차쿠 지역의 재치권을 이관받아 그곳에 조선 교회의 대표부를 두고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요동에서의 재치권은 1881년 조선 대표부가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이전되면서 소멸되었다. 이어 리델 신부는 1869년에 제6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6월 로마에서 성성식을 가졌으며, 1876년에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자 조선 입국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박해 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게 된 것은 1876년 5월이었다. 이때 블랑(J. Blanc, 白圭三) 신부와 드게트(Deguette, 崔東鎮) 신부가 입국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리델 주교와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와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황해도로 입국하였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18일 체포되어 6월 24일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이듬해 5월 16일(음 윤 3월 26일)에는 드게트 신부도 체포되어 9월 7일 추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선교사들은 비밀리에 교우촌을 순방하였으며, 또 다른 선교사들이 계속하여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리델 주교는 1881년에 차쿠의 대표부를 나가사키로 옮기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였다가 병을 얻게 되었고, 귀국하여 요양하던 중 1884년에 사망하였다. 이에 앞서 1882년에 부주교로 임명된 블랑 주교는 이듬해 일본에서 성성식을 가졌으며, 리델 주교가 사망한 뒤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을 승계하면서 본격적으로 교회 재건에 나섰다. 블랑 주교는 우선 경상도 · 강원도 · 전라도 · 충청도 등지에 넓은 의미의 지역 본당을 설정하고, 1883년부터는 서울 종현(鐘峴, 지금의 명동) 언덕의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내 그곳에 있는 가옥 한 채를 집회소로 삼아 '종현 본당' 을 설립하였다. 이어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와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로 하여금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조사와 교회 재판을 추진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다. 또 1883년에는 그 전해에 설립된 인현학교(仁峴學校)를 종현으로 이전하면서 한한학교(韓漢學校, 계성학교의 전신)로 개칭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서울에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1885년 3월에는 서울 곤당골에 영해원(嬰孩院)이란 고아원이 설립되었고, 이어 양로원 겸 시약소가 개설되었다. 또 블랑 주교는 각 본당별로 성영회 사업을 전개하도록 하였으며, 1885년 가을에는 강원도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釜坪里)에 소신학교인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한 뒤 그 책임을 마라발(Maraval, 徐若瑟)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이 소신학교의 설립으로 조선 신학생의 페낭 파견이 중단되고 그곳에 재학하던 신학생들도 한두명씩 귀국하게 되었다.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어느 정도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자, 블랑 주교의 사목 활동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블랑 주교는 우선 일본 나가사키의 성서 활판소를 서울 정동으로 옮긴 뒤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에게 그 운영을 맡겼으며, 1887년에는 예수성심신학교를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는 한편 종현 성당의 터를 닦기 시작하였고, 9월 21일에는 《한국 교회 지도서》(Coutumier de la Mission de Corée)를 반포하였다. 이어 1888년에는 서울의 고아원과 양로원 사업을 위하여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를 초청하였고, 6월 8일에는 조선 대목구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는 장엄 미사를 올렸으며, 종현에 인쇄소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전교 회장을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코스트 신부와 푸아넬 신부로 하여금 주교관 겸 경리부 건물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블랑 주교는 주교관 완공을 앞둔 1890년 2월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다. 1890년의 조선 대목구 교세 현황은 종현 · 제물포 · 원산 · 대구 · 전주 · 부산 등 13개 본당에 신자수 17,577명이었다.
〔본당의 확대와 교안〕 블랑 주교의 뒤를 이어 1890년 8월 4일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1885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지도자로 임명되어 파리로 돌아갔다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자 1891년 2월에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다. 뮈텔 주교는 먼저 코스트 신부로 하여금 용산 신학교 건물과 약현(藥峴, 현 중림동) 성당을 짓도록 하였고, 1892년에는 종현 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아울러 약현 본당 · 공주 본당 · 수원 본당 등을 잇달아 설립하였으며, 1909년에는 간도(間島)에도 2개의 본당을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운동에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각처에서 순교자들의 무덤을 확인 발굴하는 동시에 《치명일기》와 《기해일기》를 간행하였으며, 1899년부터는 병인 순교자들에 대한 교구 재판을 시작했고, 1905년에는 <기해 · 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을 예부성성에 제출하였다. 또 1896년 4월 26일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등 3명에게 사제 서품을 준 이래 한국인 성직자를 탄생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1898년 5월 29일에는 마침내 종현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891년에 17,000여 명에 불과하던 신자수가 1910년에는 73,5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조선 대목구에서는 교육 · 언론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지방 본당에서의 학교 설립을 돕거나 이를 장려하였으며, 1906년 10월 19일에는 <경향신문>(京鄕新聞)을 창간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1911년에 폐간되고, 그 부록인 <보감>이 《경향잡지》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교회 학교들에 필요한 교사들을 양성하는 일을 맡아 줄 수도회를 물색한 끝에 1908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를 한국에 초청하였으며, 그 회원들은 이듬해 서울에 진출하여 백동(柏洞, 현 혜화동) 수도원을 건립하고 1910년에는 실업 학교인 승공학교(崇工學校)를, 1911년에는 사범 학교인 숭신학교(崇信學校)를 개교하였다.
조선 대목구는 이러한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우선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및 1894년의 동학 농민운동, 그리고 도처에서 계속된 교안(敎案)이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였다. 이들 교안 중에서도 1901년의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과 1903년의 황해도 해서교안(海西敎案)이 가장 컸으며, 교회 당국에서는 교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899년에 교민조약(敎民條約)을, 1901년에는 교민화의약정(教民和議約定)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뮈텔 주교는 정교(政敎)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자주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1904년에는 헤이그(Hague)로 보낼 밀사를 고종에게 추천하고 그들의 파견을 위하여 파블로프(Pavlov) 러시아 공사와 서신까지 교환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일어난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의거는 뮈텔 주교가 친일 입장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후일의 사가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다.
〔대목구의 분할〕 1911년 4월 8일에는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 가 분리되면서 대목구의 명칭이 '서울 대목구 (당시 명칭은 경성 대목구)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서울 대목구에서는 제주도를 포함하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 이외의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게 되었고, 총 신자수 76,000여 명 중 52 000여 명만을 사목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서울 대목구에서는 꾸준히 본당을 신설해 나갔으나, 1910년의 한일합병 이후 개종열과 종교열의 감소로 증가율은 크게 둔화되었다. 이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의 심화와 아울러 정치적인 자유와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하와이 · 일본 · 간도 등지로 이민 가는 신자수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선교사 11명의 징집 명령은 성사 집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1915년의 포교 규칙과 사립 학교 규칙 개정령은 전교와 교육 활동을 위축시켰다. 또 3 · 1 운동과 같은 정치적 상황도 개종 운동에 유리하지 않았으며, 1920년대에 두드러진 세속화의 물결은 냉담자를 급속히 증가시켰다. 그 결과 서울 대목구의 신자수는 1922년에 53,574명, 1931년에는 52,949명으로 20년 동안제자리걸음을 하였다. 반면에 간도 지역의 신자수는 이 시기에 크게 증가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뮈텔 주교는 다시 한번 교구 분할을 생각하였는데, 때마침 서울의 베네딕도회에서도 독립된 포교 지역을 갖기를 원하고 있었다. 1910년에 승신학교가 폐교된데다가 본국에서 오는 후원금이 부족하여 승공학교를 지탱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뮈텔 주교는 함경도 지역의 사목을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에게 제안하였고, 그 결과 1920년 8월 5일에는 함경도와 간도 지역이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원산 대목구' (1940년 1월 12일 함흥 대목구와 덕원 면속구로 분리)로 설정되었다. 뮈텔 주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21년에 교황 탑전 시종(榻前侍從), 교황궁 고등 성직자, 로마 백작이란 명예직에 임명되었고, 1926년에는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1921년에는 원산의 초대 대목구장인 사우어(B. Sauer, 辛) 주교와 서울 대목구의 드브레(E. Devred, 俞世竣 보좌 주교가 동시에 성성식을 가졌다. 그러나 드브레 주교가 6년 만에 사망하고 말아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신부가 1926년 12월 14일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1일 성성식을 가졌다. 한편 평안도 지역은 1923년부터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으며, 4년 뒤인 1927년 3월 17일에는 '평양 지목구'(1939년 7월 11일 대목구로 승격)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그해 서울에서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덕원(德源)으로 이전되면서 옛 승공학교 자리에 백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한편 서울 대목구에서는 1922년 2월에 소의학교를 인수하여 5년제 남대문상업학교로 개칭 인가를 받았으며, 1928년 말에는 신학교를 대 · 소 신학교로 분리함과 동시에 대신학교는 용산에 그대로 두고, 상업학교 안에 을조(乙組)를 편성하여 이를 소신학교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상업학교는 1929년에 혜화동으로 이전하였고, 1932년에는 소신학교의 명칭을 '동성신학원' 으로 개칭했다. 한편 1922년 9월 21일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에 이어 1924년에는 《조선어 성가》가 간행되었으며, 1925년 7월 5일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가경자 82명 중 79위가 시복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또 1927년 7월 10일에는 청년 연합회에서 <별>보를 창간하였고, 이듬해 1월 8일에는 '황해도 감목 대리구 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 기념 행사와 전국 주교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이듬해 9월 26일에는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가 반포되었으며, 1934년에는 《천주교 요리 문답》이 발간되었다.
IV . 시련과 극복의 노력
〔일제 말기의 대목구〕 1890년 이래 서울 대목구장으로 재임해 오던 뮈텔 대주교가 사망하면서 1933년 1월 23일에는 라리보 주교가 제9대 서울 대목구장을 승계하였다. 이후 서울 대목구 내에서는 '가톨릭 운동' 이 확산되어 갔고, 1933년 3월 6일 전국 주교 회의에서는 《가톨릭 청년》의 창간을 결정하고 라리보 주교를 출판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라리보 주교는 1931년부터 병원 설립 운동을 적극 지원해 왔는데, 1935년에는 성모병원이 개원됨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서울 대목구에서는 이 무렵 공산주의 사상의 침투에 맞서 개종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본당의 증설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36년에는 서울의 네 번째 본당으로 영등포 본당이 설립되었고, 지방에도 새 본당들이 신설되어 1933년 한 해에만 신자수가 2,992명이 늘어났고 1938년에는 3,694명이 늘어나 모두 69,911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또 1939년 4월 25일에는 '춘천 지목구 (1955년 9월 20일 대목구로 승격)가 분리 · 설정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특히 신사 참배(神社參拜) · 창씨 개명 · 국민 정신 총동원 · 성당 내의 일장기 게양 같은 일련의 교회 탄압으로 성직자와 신자들 모두가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1939년 5월 14일에는 '국민 정신 총동맹 경성교구 연맹' 을 결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욱이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더 나빠지게 되었다. 평양 · 광주 · 춘천 등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체포 · 구금한 총독부에서는 일본인 성직자를 각 대목구장에 앉히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라리보 주교도 사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는 비밀리에 한국인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를 후임자로 임명해 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노기남 신부는 1942년 1월 3일 서울 대목구장 및 평양 · 춘천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기남 대목구장은 착좌식을 갖자마자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만 하였다. 우선 1942년 2월에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를 폐쇄하라는 통고를 받자 서울에 있는 대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고, 신사 참배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동경 주재 교황 사절 마렐라(Marella) 대주교와 대책을 협의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감금된 35명의 프랑스인 성직자와 아일랜드인 성직자들을 보호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또 1942년 12월 20일 성성식을 가진 노기남 주교는 이듬해 2월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신부가 제5대 평양교구장에 임명되도록 하였고, 1945년 2월 23일에는 경성 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教神學校)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로부터 6개월 후 광복을 맞이하였을 때는 서울의 본당수가 8개였고, 대목구의 총 신자수는 65,795명이었다.
〔광복과 전쟁기의 대목구〕 8 · 15 광복 직후 노기남 주교는 8월 17일자로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축복을 내리면서 한국의 자주 독립을 기원하였고, 춘천 지목구장을 퀸란(Quinlan, 具仁蘭) 주교에게 인계하였다. 이어 미군과 함께 찾아온 스펠만(Spellman) 대주교를 맞이하여 9월 28일 명동 대성당에서 한 · 미 친선 특별 미사와 미군 환영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12월 8일에는 상해 임시 정부 요인 귀국 환영식을 개최하였다. 또 1946년 10월 6일에는 <경향신문>을 창간하였고, 세종로 본당 · 신당동 본당 · 삼각지 본당 · 의정부 본당 · 잠원동 본당· 홍제동 본당 · 후암동 본당 등을 신설함으로써 1950년 전쟁 직전까지 서울의 본당수는 16개에 달하였다. 이어 노기남 주교는 충청남도 지역을 독립된 포교지로 설정해 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여 1948년 5월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책임자 : 라리보 주교)가 이 지역을 맡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교회 기관지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이 복간되었고, 1946년 9월 16일에는 전국 교구장 회의에서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를 재발족하는 동시에 순교 성지인 한강 새남터〔沙南基〕에 순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또 1947년 4월 30일에는 경성 천주공교신학교를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승격 인가받았고, 이듬해에는 이문근(李文根, 요한) 신부가 편집한 《가톨릭 성가》가 간행되었다.
6 · 25 전쟁이 발발한 뒤 서울 대목구는 한동안 침체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1950년 7월 2일 영등포 본당의 보좌 이현종(李顯鍾, 야고보) 신부가 피살된 것을 비롯하여 교황 사절 번(Byrne, 方) 주교와 그의 비서 부스(W. Booth, 夫文化) 신부, 공베르(Gombert, 孔) 형제 신부, 대목구 당가인 유영근(偸榮根, 요한) 신부 등이 체포되거나 피살되었고, 이 중 몇몇은 '죽음의 행진' 을 겪어야만 하였다. 당시 유럽 순방 중에 있던 노기남 주교는 즉시 귀국하여 부산의 피난 교회를 돌보는 데 노력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군을 따라 평양으로 가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1년에는 신학교를 제주도 · 부산 · 밀양으로 옮겼으며, 군종 제도 설립에 동참하여 '가톨릭 군종 신부단' 을 창설하였는데 이후 군인 사목은 전교 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1951년 8월에는 밀양 피난 학교로 운영되던 성신대학 부속 중학교(즉 소신학교)가 성신중 · 고등학교로 분리되었고, 대목구의 활동도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어 1953년 10월과 11월에는 성신대학과 성신중고등학교가 부산과 밀양에서 혜화동으로 복귀하였으며, 이듬해 4월에는 성신대학에 의학부가 증설 인가되었다. 이처럼 전쟁 동안에도 성직자 양성 사업이 계속된 결과 1953년까지 잃은 50명의 성직자수보다 많은 53명의 성직자가 새로 탄생하였다. 한편 노기남 주교는 1953년에 전국 교구장으로 구성된 '천주교 중앙위원회' 의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30여 명의 신부 · 신학생 · 평신도를 유럽 · 캐나다 등지로 유학시켰다.
당시 서울 대목구에서는 폐허가 된 각처의 성당과 시설 복구에 힘쓰면서 구제와 사회 봉사 활동에 교회가 앞장서도록 인도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전란에 시달린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안주할 곳으로 찾아 입교하거나 저명 인사들이 개종하면서 신자수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 증가에는 수도 단체들의 진출과 활동, 지성인 교리반의 운영과 같은 적극적인 전교 활동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 교세 확대는 본당 증설로 이어져 1953년에 명수대 본당이, 1954년 이후에는 대방동 본당 · 돈암동 본당 · 청량리 본당 · 종로 본당 · 천호동 본당 등이 연이어 설립되는 등 1950년대 말까지 서울 지역의 본당수만도 29개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어 1958년 6월 23일에는 '청주 대목구' 의 설정과 충청남도 독립 포교지의 '대전 대목구 승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1961년 6월 6일에는 '인천 대목구 가 설정되었다.
1955년에는 명수대 본당에서 서울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 운동을 도입하였고, 1956년에는 《정선 가톨릭 성가집》이 발간되었으며, 5월 20일에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에서 양화진(즉 절두산) 순교 터를 매입하였다. 또 1957년에는 청량리 성 바오로 병원이 개원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성모병원이 종합 병원으로 승격되었고,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서울교구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그 해 11월 16일에는 기존의 경향잡지사가 가톨릭출판사로 개칭 등록하였다. 이어 1959년 2월 12일에는 성신대학이 '가톨릭대학' 으로 인가되었고, 10월 20일에는 조인원(趙仁元, 빈천시오) 신부가 가평에서 정지신학원(貞智神學院, 1974년에 교리신학원으로 개칭)을 개원했으며, 1960년 2월 18일에는 예수회의 서강대학이 설립 인가되었다. 반면에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에 폐간되었다가 이듬해 4월 23일 복간되는 변모를 겪어야만 하였다.
V . 대교구 승격과 쇄신 · 발전
〔대교구 승격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한국 천주교회가 전쟁의 시련을 극복해 나가면서 교황청에서는 그 자립 능력과 성숙을 인정하여 1962년 3월 10일자로 한국 교회의 교계 제도(敎階制度) 설립을 인가함과 동시에 서울교구 · 대구교구 · 광주교구를 대교구로 승격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3개 관구(管區)를 설정하였다. 이는 조선 대목구가 설정된 지 131년 만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 대목구는 서울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노기남 주교는 6월 29일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동시에 서울 관구에는 춘천교구 · 인천교구 · 대전교구를 비롯하여 침묵의 교회인 평양교구 · 함흥교구가 속교구가 되었으며, 이후 1963년 10월 7일에 설정된 '수원교구' 와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에서 분리되어 설정된 '원주교구' 도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1962년의 서울대교구 신자수는 128,545명이었다.
1962년 6월 16일 서울대교구에서는 성신대학 의학부 및 성모병원 등 부속 병원을 통합하여 '가톨릭 중앙 의료원' (C.M.C.)을 개원하였다. 이어 이듬해 11월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 여성 연합회(한국 가톨릭 여성 연합회의 전신)가 창립되었으며, 1964년 8월 17일에는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0월에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안에 농촌 청년부(1972년에 한국 가톨릭 농민회로 개칭)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는 절두산의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준공되었다.
한편 1962년에 개막되어 1965년 말까지 지속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서울대교구에서도 하나 둘씩 쇄신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1965년 1월 1일부터 한국어 미사 경본이 사용된 것을 비롯하여 전례 양식이 간소화되었고, 신학교 교육은 물론 성직자 · 수도자의 생활 및 평신도의 위상이 변화되어 갔으며, 교회 일치 운동과 평신도 사도직 단체가 활성화되어 갔다. 또한 1966년에는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 묵상회(M.B.W.)가 개최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교리서 및 기도서의 쇄신과 현대화 작업의 결과로 1967년에는 《가톨릭 교리서》가 간행되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거행된 병인 순교 복자 24위의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에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또 같은 해 7월과 11월에 한국 및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발족된 이래 여러 평신도 단체들이 계속 설립되었으며, 1969년 초부터는 프로테스탄트와 공동으로 신약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노기남 대주교는 1967년 3월 24일 서울대교구장직을 사임하면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뒤를 이어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가 제11대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아 약 11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68년 4월 9일에 마산교구장으로 재임하던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주교가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 30일 로마에서 서임식을 가졌다. 1968년 말의 서울대교구 교세는 48개 본당에 14만여 명이었다.
〔사회 참여 운동과 200주년 행사〕 김수환 추기경 서임 이후 서울대교구에서는 1969년 11월 19일에 경기도 가평군과 포천군을 춘천교구로 이관하였으며, 교구 쇄신과 발전을 위한 작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이어 1970년에는 교도 사목회 · 가톨릭 군종 후원회 ·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창립되었으며, 1972년에는 《가톨릭 기도서》가 간행되었고, 이듬해 12월 5일에는 성신 운동 협의회(성령 기도회의 전신)가 발족되면서 성령 쇄신 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전체적으로는 농촌 인구의 도시 이주로 인한 농촌 본당의 공동화 현상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도시 본당은 냉담자나 행불자의 급격한 증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등장하였다.
1971년 4월 3일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공동으로 번역해 온 《신약성서》가 마침내 출간되었고, 이해부터 서울대교구에서는 토요 특전 미사를 시행하였으며,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인간 존엄성 회복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회 문제 해결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농민 · 빈민 · 복지 · 평화 등을 위한 교회 활동이 활성화되어 갔으며,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시국 성명서도 자주 발표되었다. 이와 함께 절두산 성지 종합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1972년 5월 14일에 복자 김대건 신부상을 건립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1975년의 '화해의 성년' 을 준비하는 제1차 교구 성년 대회를 개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하게 되었다.
서울대교구의 사회 참여 운동은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장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의 체포를 계기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 이를 기해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과 정의 평화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었으며, 1975년 2월 4일에는 명동 성당에서 인권 · 민주 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었고, 이듬해 삼일절에는 <민주 구국 선언문>으로 이른바 '명동 사건' 이 발생하면서 많은 성직자와 지도층 인사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이후 각 본당에서는 구국 기도회가 연이어 개최되었으며, 서울대교구와 명동 성당은 점차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1975년 4월 20일에 서울대교구 신학생 후원회(성소 후원회의 전신)가 발족되었고, 이듬해 5월 1일에는 가톨릭 사회 복지회가 창립되었다. 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는 1976년 9월 16일에 한국 순교자들을 위한 시복 · 시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5일에는 한국 순교 복자의 시성 청원서가 교황청에 정식으로 제출되었다. 이어 1977년 3월 25일 경갑룡(景甲龍, 요셉) 신부가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고, 4월 20일에는 교구 사목국이 신설되면서 교구 행정 조직이 새로 구성되었으며, 이듬해 12월 23일에는 레지오 마리애 서울대교구 세나투스가 발족을 보았다. 그리고 1979년 6월에는 새 교구청사가 완공되었다.
1980년은 2월 23일에 열린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 준비위원회 대표자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3일 가톨릭 중앙 의료원 강남 성모병원이 개원하였고, 11월 25일에는 서울대교구 사목 협의회가 발족되었으며, 1982년 11월 20일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 실업인회가 창립되었다. 한편 1981년 초부터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사업이 시작되면서 그 해 6월 14일의 지구별 신앙 대회를 거쳐 10월 18일에는 전국 신앙 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날의 신앙 대회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행사였다. 한편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7일의 광주 민중 항쟁을 계기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1980년에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 준비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성 추진 운동과 순교자 현양 사업이었다. 먼저 1983년 1월부터 1984년까지는 복자 김대건 신부 유해 순회 기도회가 계속되었고, 1983년 7월 3일에는 한국 순교자 현양위원회가 발족되어 교회 사적지 개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이에 1984년에는 서소문 성지에 순교 사적비가 건립되었고, 같은 해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에서 착공한 새남터 기념 성당이 3년 만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1983년 9월 27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복자들의 시성을 승인하면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행사와 시성식 준비가 동시에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듬해 5월 6일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대회 및 103위 시성식이 여의도 광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대교구의 발전과 현재〕 1983년 말의 서울대교구 교세는 120개 본당에 신자수 542,852명, 성직자수 341명, 남자 수도 · 선교 단체 18개, 여자 수도 단체 29개 등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200주년 행사를 전후하여 급격히 교세가 증가한 결과였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본당의 대형화 · 교회의 중산층화 · 소외 계층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었고, 신자들의 신심 함양을 위한 재교육 활동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을 시작하여 1985년 2월 20일에 이를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3월 10일에는 20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어 온 통일 성가집 《가톨릭 성가》가 간행되었다. 또 3월 9일 김옥균(金玉均, 바오로)신부에 이어 12월 21일에는 강우일(姜禹-, 베드로) 신부가 각각 새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1986년 3월 14일에는 교황청에서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의 1989년 개최지를 서울로 확정 ·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1일에는 성체 대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1987년 9월 13일에는 지구 성체 대회가, 이듬해 10월 16일에는 대전에서 한국 성체 대회가 개최되었다. 아울러 세계 성체 대회를 기념하여 '한마음 한 몸 운동' 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교회 안팎으로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다. 그런 다음 1989년 10월 4일에 평화의 날 행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체 대회 일정이 시작되었으며, 10월 8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가운데 여의도 광장에서 세계 성체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앞서 가톨릭 중앙 의료원에서는 1986년 7월 12일에 명동의 성모병원을 여의도로 이전 개원하였으며, 서울대교구에서는 옛 병원 건물을 가톨릭회관으로 변경하여 12월 6일에 개관하였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7년 6월 7일부터 다음해 8월 15일까지를 성모 성년으로 선포하자, 서울대교구에서는 시내 6개 성당을 순례 성당으로 지정하여 성직자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한 뒤 전대사를 얻도록 하였다. 이어 1988년 5월 15일에는 <평화신문>을 창간하였고, 1990년 4월 15일에는 '평화방송국' 을 개국하였다.
이 시기에도 서울대교구의 사회 운동은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낙태 반대 · 간통죄 폐지 · 사형 폐지 운동이 활발하였으며,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을 중심으로 양심수 석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과 환경 운동이 본당 · 단체별로 전개되었고, 북방선교 · 북한 동포 돕기 운동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운동도 시작되었다. 특히 1990년대 초부터는 소공동체(小共同體)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는데, 이는 본당의 대형화에 따르는 문제를 해소하고 신앙 생활안에서 나눔과 사귐의 장(場)을 마련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91년 3월 25일에는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가 간행되었으며, 이듬해 7월 12일에는 '새 사제 학교 가 개설되었다. 이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1993년 8월 21일에 안중근 학술 심포지엄과 추모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듬해 9월 9일에는 새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권을 간행하였다.
1994년 2월 3일에는 최창무(崔昌武, 안드레아) 신부가 새 보좌 주교에 임명되었으며, 3월 31일에는 개정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권이 출간되었고, 6월 29일에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 본부가 발족된 데 이어 11월에는 기존의 가톨릭대학교와 성심여자대학교가 가톨릭대학교로 통합되어 1995년 3월에 개교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 현양위원회와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중심으로 순교 신심 함양과 순교자 현양 운동이 전개되었고, 9월 15일에는 잠실 종합 운동장에서 신앙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97년 8월 15일부터는 개정된 《가톨릭 기도서》가 사용되었다.
1998년 5월 22일에는 청주교구장으로 재임하던 정진석(鄭鎮奭, 니콜라오) 주교가 제13대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1998년 6월 6일)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어 6월 29일에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앞서 김수환 추기경은 1997년에 정년을 맞이하여 로마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혔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듬해 이를 수락함으로써 1968년 이후 30년 만에 새 교구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정진석 대주교는 효율적인 교구 사목을 위하여 지구장(地區長) 제도를 도입하였고,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본당 분할을 꾸준히 추진해 나갔으며, 2000년 대희년(大禧年)과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선교 활동을 비롯한 사목 전 분야에 걸쳐 쇄신과 발전을 모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대교구에서는 그 동안의 복음 활동을 되돌아보면서 현재의 위상을 확인하고, 새 천년기에 합당한 교구의 사목 방향을 설정한다는 목적에서 대희년을 기해 교구 시노드를 개최할 계획으로 있다. 1998년 말 현재 서울대교구의 교세는 200개 본당에 신자수 1,253,392명, 성직자수 811명(한국인 726명, 외국인 85명), 남자 선교 · 수도 단체 30개, 여자 선교 · 수도 단체 52개에 달하였다.
이처럼 서울대교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를 중시하면서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과 함께하는 화해와 나눔의 교회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 결과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소외된 계층 모두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되었으며, 천주교가 신앙과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인식을 널리 심어 줄 수 있었다. 교세의 꾸준한 증가는 바로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발전 과정에서 본당의 대형화나 중산층화 · 교회 안에서의 소외 계층과 냉담자의 증가 · 교리 교육의 부재와 청소년 교육 문제 등 갖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왔으며, 따라서 새 천년기에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 한국 천주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경향잡지》 <가톨릭 신문>/ <평화신문>/ 《교회사 연구》 《교회와 역사》 《가톨릭 사전》 <명동 대성당 연보(1908~1983)>, 필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金昌文 . 鄭宰善 편, 韓國國 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 코리아사, 1963/ 崔奭祐, 《韓國天主教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韓國教會史研究所 편,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명동 천주교회, 《韓國 가톨릭 人權運動史》, 명동 천주교회 200년사 1집, 명동 천주교회, 1984/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 《서울敎區年報》 I . II , 明洞天主敎會, 1984 · 1987/ 천주교 명동 교회 편, 《교세 통계 882~198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명동 교회 편찬실, 《명동 성당 신문 기사 자료집》 상 · 하, 천주교 명동 교회, 1994/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車基真〕
서울대교구
大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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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9월 21일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 연합회 창립 총회에 참석한 각 지방 대표들(왼쪽)과 1931년 9월 31일의 전 조선 주교 회의 개막 미사 후의 퇴장 행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