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2월 25일 생제(P. Singer, 成載德, 1910~1992) 신부가 성가정의 겸손과 가난을 본받아 가난한 자 · 환자 · 무의탁자들을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수녀회. 1974년에 일시 수녀회 이름을 '성가 수녀회' 로 바꾸었다가 1986년 10월 2일에 현재와 같이 환원하였다. 본부는 서울시 성북구 정릉1동 10번지 소재.
〔수녀회의 설립〕 서울 성가 소비녀회를 설립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생제 신부는, 1935년 7월 7일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파견되어 합덕(合德, 현 구합덕) 본당과 제물포(濟物浦, 현 답동) 본당 보좌 신부를 역임한 뒤 1939년 7월 7일 서울 백동(柏洞, 현 혜화동) 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이 무렵에 그는 조심스럽게 수녀회 설립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나라 안팎에 전운이 감돌 때였고, 세계 도처에서는 전쟁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과 식량 및 교육 문제 등 여러 어려움들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전사자를 비롯해 부상자와 전쟁 고아가 급증하여 이것이 곧 사회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점차 높아 가고 있었다.
생제 신부는 이러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하며, 특히 수녀회의 헌신적인 봉사가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국내외 여건상 외국의 수녀회를 초청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자생 수녀회를 계획하게 되었다. 마침 백동 본당에는 농촌에서 상경하여 수도 성소의 뜻을 가지고 있는 신심 깊은 처녀들이 여럿 있었으나, 학력 미달이거나 혹은 정원 초과로 인해 당시 서울의 유일한 활동 수녀회였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생제 신부는 당시 대 · 소신학교에서 영성을 지도하고 있던 공베르(A. Combert, 孔安國) 신부와 이재현(李在現, 요셉) 신부와 협의를 거쳐 이 동정녀들을 위한 수녀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1943년 12월 25일 백동 본당에서 김청자(루치아)와 김충순(바르바라)이 순명 서약을 함으로써 성가 소비녀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영 성〕 "예수는 스스로를 낮춰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왔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였다(필립 2, 5-8). 그리고 하느님은 지금도 신자들을 통해, 특히 수도자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리신다. 우리 소비녀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려가야' 한다." 생제 신부가 첫 지원자들에게 당부하였던 이 훈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울 성가 소비녀회는 '강생의 신비로 사는 소비녀(작은 여종)' 의 영성으로 생활한다.
생제 신부는 가브리엘 천사의 음성을 들은 마리아가 곧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루가 1, 38)라고 응답하였던 것과 성 김효임(金孝任, 골롬바) · 효주(孝珠, 아네스) 자매가 재판장 앞에서 스스로를 하느님 대전의 소비녀' 라고 칭했던 것에 착안해서 수녀회 이름을 정하였는데,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소비녀의 정신이란 '종처럼 그 주인을 위해서 일하고 순명하며,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 을 말한다. 이것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우리에게로 내리고, 다시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내리는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울러 생제 신부는 "종은 그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신원을 인정할 때 어떤 처지에서건 기뻐할 수 있다" 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그가 회원들에게 한 "기뻐하라 소비녀"라는 훈화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에 따라 회원들은 하느님의 뜻에 조금의 의심도 없이 순명하였던 예수 · 마리아 · 요셉의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 가난과 겸손, 침묵과 노동의 정신으로 세상의 소외 계층과 함께하고 있다.
〔정착과 성장〕 1944년 3월 백동 본당 방연용(方淵容, 요셉) 복사의 집에 수도 공동체를 마련한 생제 신부는, 이듬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강부길(姜富吉, 데클라) 수녀와 김덕생(金德生, 아델라) 수녀를 초청하여 양성을 맡겼다. 이후 지원자가 늘어나게 되자 1946년 12월 2일에 본원을 예전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사용하던 혜화동 35-4번지(현 가톨릭대학교 사회 교육원)로 이전하였다. 이어서 이듬해 1월 10일 6명의 회원이 첫 서원을 하였으며, 1949년 2월 3일에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회칙에 대한 승인을 얻었다. 그리고 1952년 11월 21일에 김청자(金淸子, 엠마누엘) 수녀가 초대 총 원장으로 임명됨으로써 성장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수녀회는 이듬해 11월 1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953년 1월에는 서울교구로부터 천주교 양로원(현 부천시 소사동의 성가 요양원)을 인수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벨기에인 팔리스(A. Palisse)가 운영하던 '벨지움 보육원' 을 인수하여 '성가 보육원' (1978년 성가 요양원을 확장할 때 폐쇄)으로 이름을 바꾼 뒤 1955년 3월에 부천 소사로 이전하여 운영하였다. 또 1958년 8월에는 미아리 본당 내에 성가의원을 개원한 뒤 이를 성가병원으로 발전시켜 1969년에 현재의 하월곡동으로 이전하였다. 아울러 1961년에는 소사(素沙) 본당 주임 신성우( 申聖雨, 마르코) 신부가 운영하던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수하였으며, 편물과 보세 가공 기술을 가르치는 나자렛 기술 학원(1960~1969)과 미망인 양재소(1964~1980)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편 수녀회는 1961년 12월 31일에 '성가회 유지 재단' 을 발족시켜 서울교구 유지 재단으로부터 독립함으로써 한층 내실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1968년 8월 31일에는 본원을 혜화동에서 현재의 정릉1동으로 이전하였고, 1990년 7월 12일에는 성가병원을 성가복지병원으로 전환하여 재개원하였으며, 1993년 2월에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인천교구에 무상 양도하면서 사도직의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1998년 12월 현재 종신 서원자 335명, 유기 서원자 75명, 수련자 30명, 청원자 14명, 지원자 16명 등 총 470명의 회원이 있다.
〔사도직 현황〕 "서원한 모든 소비녀들은 가없은 이를 최소한 한 명씩 돌봐 주어야 한다"는 설립자의 권고대로 가난한 자 · 환자 · 무의무탁자들을 돕는 일을 모든 사도직의 최우선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양로원, 요양원, 결핵 · 나환우들을 방문하여 도움을 주고 있으며, 장애인의 집, 복지 병원, 쉼터, 지역 사회 복지관 등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노인 복지 분야로 성가 요양원 · 성 요셉 양로원 · 안나의 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장애인 복지 분야에서는 살레시오의 집 · 작은 자매의 집 · 밀알 재활원 · 부천 장애인 복지관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 성가 모자원 · 교정(矯正) 사목 · 희망의 집(결핵 환자 요양원) · 상록촌(나환우 정착촌)에서도 봉사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엠폴리의 미세리코르디아 사회 복지관에도 회원들을 파견하였다. 특히 의료 사도직으로 부천 성가병원 · 성가복지병원 · 나자렛 가정 간호 호스피스 · 세브란스 병원 · 국립 의료원 · 아르헨티나 알바레스 병원에서 진료 및 원목 활동을 폭 넓게 전개하고 있으며, 서울 신대방동과 강원도 현북에서 가정 간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외에 유아 교육 및 보육 사업으로 전국 12개 유치원과 어린이 집에서 교육 사업에 투신하고 있다. (⇦ 성가 수녀회 ; → 생제 ; 성가 복지병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백동 70년사 편찬위원회 편, 《백동 70년사》, 천주교 서울대 교구 혜화동 교회, 1997/ 천주교 서울대교구편, 《서울大教區 教區總覽》, 가톨릭출판사, 1984/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천주교 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서울 성가 소비녀회 역사 자료실 편, 《성재덕 신부》, 서울 성가 소비녀회, 1993/ 《교회와 역사》 282호(1998. 11), 한국교회사연구소, pp. 2~71 <경향잡지> 1453호(1989. 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76~80. 〔金成喜〕
서울 성가 소비녀회
聖家小婢女會
[영]Little Servants of the Holy Family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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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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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서울 성가 소비녀회의 혜화동 본원(왼쪽)과 정릉동에 소재한 현재의 본원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