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사상

西學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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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은 세계 지도나 과학 기술 등으로 '서유럽의 충격' 으로 불릴 만큼 조선 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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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은 세계 지도나 과학 기술 등으로 '서유럽의 충격' 으로 불릴 만큼 조선 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이후 18세기에 걸쳐 조선에 도입되기 시작한 서양의 새로운 과학 · 기술이나 학문 · 사상, 천주교 신앙 등을 연구하거나 수용 또는 비판하던 사조를 폭 넓게 지칭하는 역사적인 용어. 그 연구는 대체로 북학파(北學派)의 서학 수용론이나 전통 유학자들의 척사론(斥邪論)까지 포함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19세기의 천주교 신앙 운동과 서기(西器) 수용론을 설명하기도 한다. 본래 '서학' 이란 용어는 16세기 이래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저술한 여러 학문 · 정치 · 윤리와 관계된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 안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 일본에서는 17세기 초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입국하면서 특히 서양의 과학 기술을 가리켜 '난학' (蘭學)이라고 칭하였다. 이 서학 안에는 서유럽 문물과 천주교 신앙의 두 가지 요소가 혼재해 있었지만, 조선의 학자들은 서학을 양학 · 서사지학(西士之學) · 서태지학(西泰之學) 등으로 부르거나 천주교만을 지칭하여 서교 · 천주학(天主學) · 사학(邪學) · 요학(妖學)이라고 하였다.
〔서학의 수용 과정〕 서학의 수용 내지 서학 사상의 형성 배경으로는 먼저 중국 천주교회의 성립과 여기에서 활동하였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유론(補儒論)과 같은 문화 적응주의의 입장에서 저술 · 간행한 한역 서학서나 서양 문물, 세계 지도의 유포를 지적할 수 있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북경에 간 조선의 연행사(燕行使)들은 선교사를 만나거나 서학서를 접한 뒤 귀국할 때 이들을 얻어 와 조선에 소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배경으로는 서학서의 도입을 가능하게 한 조선의 내재적인 문화 욕구, 즉 현실 개혁이나 부국 강병에 관심을 기울이는 실학(實學) 사조가 이미 조성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서학서의 도입 유포는 단지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서학의 자발적인 수용과 이해의 단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초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의 부연사(赴燕使)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명말에 제작하였거나 간행한 군기(軍器)와 한역 서학서, 세계 지도 등을 조선에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최초의 기록으로는 1603년(선조 36)에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熺)가 리치(M. Ricci, 利瑪竇)의 세계 지도인 <곤여 만국 전도>(坤輿萬國全圖)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전래하자,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이 그에 관한 논평을 《지봉류설》(芝峯))에 수록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어 1614~1615년에 허균(許均, 1569~1618)도 명나라로부터 서학서를 도입하였으며, 1631년에는 정두원(鄭斗源)이 산동성에 머물고 있던 로드리게스(J. Rodriquez, 陸若漢)와 교류한 뒤 군사, 천문 · 역법, 서양의 지리 · 풍속, 천주교 등과 관련된 문물과 서적들을 얻어 귀국하였다.
청초에 와서는 1644년 11월에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귀국하면서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로부터 천문 · 역산서와 천주교 관계 문물 · 서적을 얻어 귀국하였고, 다음해 귀국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호행재신 한흥일(韓興一)도 천문도와 역산서를 도입하면서 "역상수시제왕지선무" 曆象授時 帝王之先務)라 하여 새로 역법을 밝혀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1646년에 북경에 간 김육(金堉)과 이경석(李景奭) 등은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거나 천문 · 역법서를 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청나라에서는 1645년에 시헌력(時憲曆)을 실시하였고 이듬해 아담 샬을 흠천감정에 임명하면서 기존 역법가들과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학 관련 서적과 문물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계속 조선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여기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한흥일과 같이 역법 개수와 서기(西器)의 현실화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천문 · 역법 사상을 수용하거나 세계 지리 · 천주교 신앙을 연구하고, 서양과의 통상이나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경우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서양의 새로운 학문, 특히 천주교 신앙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면서 서학의 수용과 배척이라는 상반된 양상을 낳게 되었다.
〔서학 사상의 전개〕 서학 사상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북경을 왕래하면서 서양의 지리 · 천문 · 역산 · 기술의 도입에 관심을 갖게 된 조정의 관상감원들과 북학파 인물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다른 하나는 한역 서학서나 서양의 세계 지도를 접하게 된 재야의 기호 남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서양의 천문 · 역법 · 지리 등에 관심을 갖다가 점차 천주교 신앙을 연구하거나 수용하는 방향으로 흘렀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이러한 사상 조류를 비판하면서 18세기의 척사론을 주도해 나갔다. 여기에서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지식인들에게는 서학서 안에 담겨 있던 보유론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학이 도입되면서 조정에서는 먼저 역법 개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김육 · 이경석 등은 북경에서 비밀리에 역법서를 구해다가 연구한 뒤 시헌력의 시행을 주장하여 1653년에는 마침내 그 시행을 보게 되었으며, 관상감원 허원(許遠)은 1708년부터 시행한 시헌오성법(時憲五星法)을 기초로 《현상신법세초류휘》(玄象新法細草類彙)라는 천문 역법서를 저술하였다. 이어 1725년에는 청나라로부터 신수시헌 칠정법(新修時憲七政法)이 전래되었고, 관상감원 이세징(李世澄)은 1732년에 만년력(萬年曆)을 전래함으로써 그 안에 있던 카시니(Cassini)의 신법(일명 噶法)을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김육이 이해하고 있던 티코 브라헤(Tycho Brahe, 第谷)의 천동설이나 기존의 원 궤도설(圓軌道說)이 무너지고 지동설이나 타원 궤도설(惰圓軌道說)이 정립되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역법 자체의 이해에만 몰입함으로써 지원설(地圓說)이나 지동설과 같은 새로운 사상을 창출해 내지는 못하였으며, 기초 이론을 가르쳐 줄 선교사가 없었으므로 결과로서의 역산표(曆算表)만을 이해하는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지원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만중(金萬重, 1637~1693)이었다. 그리고 이이명(李頤命, 1658~1722)도 북경에서 괴글러(I. Kögler, 戴進賢)와 사우레즈(J. Saurez, 蘇霖)를 만나고 귀국한 뒤 새로운 천문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김석문(金錫文) 같은 경우에는 로(G. Rho, 羅雅谷) 신부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지전설(地轉說, 즉 天靜地動說)을 제기하였다. 일찍부터 천문에 관심이 많았던 북학파의 대종 홍대용(洪大容, 1731~1783)도 1765년에 북경을 다녀온 뒤 서양의 천문 · 역법과 의기의 수용을 주장하면서 지원설뿐만 아니라 지전설을 내세웠고, 더 나아가 중화주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역외 춘추론(城外春秋論, 중국 밖에서의 중화 존재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허생전》(許生傳)에서 서양 문화의 수용에 대해 적극적인 일본의 사이 정신(師夷精神)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이러한 북학론은 박제가(朴齊家, 1750~1815)에 이르러 해외 통상론과 서사(西士) 고빙책으로 발전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북학파 인물들의 서학 인식은 서양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사이 장기(師夷長技)식의 채서사상(採西思想)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양 철학이나 천주교 신앙에는 처음부터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대부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여기에 관심을 보인 인물들은 주로 기호 남인에 속하는 일부 학자들, 즉 이익(李瀷, 1681~1763)을 대종으로 하는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지식인들이었다. 이익은 일찍부터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수많은 서학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해 오고 있었으며, 화이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지원설을 주장하였고, 지구 자전설(自轉說)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인 신후담(愼後聃, 1702~1762)은 서양의 철학과 천주교에, 윤동규(尹東奎, 1695~1773) · 이병휴(李秉休, 1710~1776)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 홍유한(洪儒漢, 1726~1785) 등은 천문과 역법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성호학파의 3세대들도 이미 여러 서학서들을 접해 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익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리 · 천문관을 갖게 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와 서양 기술을 접합시키려는 중체 서용(中體西用)의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만은 보유론의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며, 신후담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서학 수용에 반대하면서 그 철학과 신앙을 비판하는 《서학변》(西學辨)을 저술하였다.
성호학파의 서학 사상이 변모된 것은 이익의 사후 3세대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1770년대 후반부터 천문 · 역법서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가까이하기 시작하였으며, 1776년을 전후하여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을 중심으로 녹암계(鹿菴系)를 형성하였다. 그중에서도 이벽(李檗, 1754~1786)은 일찍부터 천주교 서적을 가까이 하였고, 1779년의 주어사(走魚寺) 강학 때 그 내용을 스승과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녹암계 인물들의 서학 연구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정약용(丁若鏞, 1762~1836), 권일신(權日身, ?~1792)의 세례로 이어졌으며, 1784년 겨울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권철신도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물론 성호학파의 인물들이 모두 천주교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신후담이 이를 비판한 적이 있는 것처럼 안정복은 1746년부터 꾸준히 반천주교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또 이헌경(李獻慶, 1719~1791)과 채제공(蔡濟恭, 1720~1799)도 천주교의 폐해를 우려하였으며, 안정복은 교회 창설 이후 녹암계를 직접 비판하면서 척사(斥邪)의 공론화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로써 안정복이 지니고 있던 서학의 천문 · 역법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1785년에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이라는 척사론을 지어 제자들에게 돌려보도록 하였고, 한편으로는 황덕일(黃德壹, 1748~1800) · 황덕길(黃德吉, 1750~1827) 형제를 비롯하여 심유(沈유) · 오석충(吳錫忠) · 김원성(金源星) 등에게 척사의 입장을 고수하도록 당부하였다. 그 결과 1789년을 전후하여 안정복을 대종으로 하는 순암계(順菴系)가 형성되었으며, 기호 남인은 학문 성향에 따라 녹암계와 순암계로 분리되었다.
〔서학 사상의 소멸과 의미〕 이에 앞서 서학 사상은 1788년에 이승훈 · 정약용 등의 반회(泮會) 모임이 홍낙안(洪樂安, 1752~1811)에 의해 누설되고, 정치적으로는 남인 안에서 친서(親西) · 공서(攻西)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급변하였다. 북학파의 서학 사상은 1786년에 박제가가 해외 통상책을 정조에게 건의한 이후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기호 남인의 서학 사상도 천주교 신앙 운동 일변도로 흐르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이헌경은 <천학문답>을 지어 서학을 배척하였고, 황덕일 · 황덕길 형제도 안정복의 가르침에 이어 척사에 앞장서게 되었다. 더욱이 1791년의 진산 사건(珍山事件) 이후 홍정하(洪正河)는 《증의요지》(證疑要旨)를 저술하여 천주교 교리는 물론 서양의 과학 기술까지 비판함으로써 신후담의 《서학변》과 함께 공서계의 척사 운동을 뒷받침해 주었다.
진산 사건 이후 정치적으로 지속되어 나간 척사 운동은 마침내 서학 사상의 소멸을 가져왔으며, 일찍이 서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친서계의 이가환(李家煥)이나 정약용 등은 스스로 서학을 멀리하면서 학문의 폭을 좁혀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천주교 신자들의 활동은 신문화 수용 운동의 성격이 완전히 배제된 채 민중 종교 운동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은 보유론에 바탕을 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하였고, 이문우(李文祐, 요한)나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는 보유론 혹은 인유론(引儒論)에 입각하여 천주 가사를 짓기도 하였다. 반면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로지 반서학의 입장에서 '서교(西敎) = 멸륜(滅倫) · 매국지도(賣國之道)' 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상 조류는 서양 제국주의의 등장과 맞물려 숭정학(崇正學) · 벽이단(闢異端) 사상에 입각한 위정 척사론(衛正斥邪論)이나 양이 운동(攘夷運動)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명 · 청 시대의 서학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서학사상에도 일정한 한계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서학서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교의 한 방편으로 저술 · 간행한 것이지 동서 문화 교류의 목적에서 근대 유럽의 학문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중세 스콜라(scholar) 철학에 입각한 서양의 철학 · 종교 사상과 중세 또는 르네상스기의 과학 · 기술 문화가 용해되어 있었으며, 그것도 유럽 문화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로운 시각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번역 문화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 자체는 '서유럽의 충격' (west-ern impact)으로 불릴 만큼 중국은 물론 조선 사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로 조선의 지식인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세계 지도와 지리서들을 통해 화이지분(華夷之分)이라는 지리적 중화주의 내지는 《주비산경》(周髀算經) 이래의 천원 지방(天圓地方)이라는 전통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세계관과 지구설 · 지원설을 인식할 수 있었다. 둘째로 서양의 9중천 내지는 12중천설, 지동설 · 지전설을 이해하게 되면서 《서경》(書經) 이래의 개천(蓋天) · 혼천(渾天) · 선야(宣夜) 사상이 무너지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근대적인 천문 · 역법의 수용이나 지구 자전설에 관한 주장이 나오게 되었는데 시헌력 등 새로운 역법의 시행이 그 좋은 예였다. 셋째로 서양의 과학 · 기술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기론(理氣論)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부국 강병에 필요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과학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넷째로 서양의 철학과 윤리, 천주교 교리는 일부 지식인들에게 이기(理氣) · 성명(性命)의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과 윤리 사상을 갖도록 하였으며, 종교 운동이 확산되면서 봉건 사회의 윤리와 국가 운영 체제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학의 근대적인 평등 사상과 새로운 인간상, 새로운 가치 체계가 천주교 신앙의 전파 과정에 편승하여 점차 민중 속으로 유포되어 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서학은 조선의 전통 사상 · 윤리 체계를 무너뜨리는 반동적인 요소로 작용하면서 봉건 사회에 근대적인 개안(開眼)의 길을 열어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실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일부 지식인들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스스로 의식 세계를 확대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 문화와 근대 정신의 맹아는 비록 반서학 운동과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소멸된 것처럼 보였으나, 19세기 말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진행된 개항 · 개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민중 종교 운동으로 진행되어 온 천주교는 정교 분리를 먼저 내세우게 되면서 이러한 조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말았다. (⇨ 사학 ; → 북학 ; 한국 천주교회 ; 한역 서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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