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 본당

瑞興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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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마리아가 기증한 서흥 공소의 제대와 감실.

손 마리아가 기증한 서흥 공소의 제대와 감실.

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예운리(曳雲里) 소재. 1915년 9월 6일 검수(劍水) 본당 관할인 서흥읍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어 이듬해 6월 폐쇄된 후, 1937년에 본당으로 부활되었다가 1942년 1월에 다시 폐쇄되었다. 1916년 신자수는 920여 명이었으며, 폐쇄 직전의 관할 공소는 신막읍 · 능리 · 남천 · 어사천 등 4개소였다. 〔역대 신부〕 초대 이기준(李起俊) 토마스(1915. 9~1916. 6), 2대 안학만(安學滿) 루가(1937~1939.5), 3대 임충신(林忠信) 마티아(1939. 5~1942. 1 ) .
〔전사 및 공소 시대〕 서흥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1856년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수안(遂安) 출신의 김기호(金起浩, 요한) 회장이 서흥 두꺼비골에 거주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김기호 회장의 권면으로 1863년에 세례를 받은 향교골〔鄕校谷〕 출신의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이 지역 최초의 성인이 되었으며, 이 박해로 정정제 · 정군칠 · 김택보(마르코) · 이심여(요한) · 최운학 · 김여선 등이 순교하였다. 그 후 재령 본당의 초대 주임 르각(Le Gac, 郭元良) 신부는 1899년 5월에 서흥읍과 흥수원〔興水里〕에 각각 공소를 설정하였는데, 당시 신자수는 22명과 24명이었다. 서흥 지방은 이때부터 교세가 급증하여 '검수 본당' 으로 이관될 때에는 15개 공소에 600명의 신자수를 기록하였다.
〔본당 승격과 폐쇄〕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신부, 샤보(Chabot, 車麗松) 신부에 이어 검수 본당의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기준 신부는 풍토병으로 고생한데다가 전교 희망도 보이지 않자 본당 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5년 9월 6일에 검수 본당을 폐쇄하면서 본당을 서흥으로 이전함으로써 기존의 공소가 '서흥 본당' 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한편 이에 앞서 영파리(暎波里)에 있던 서흥 공소 강당은 1912년경에 예운리로 이전되었었다. 그러나 이기준 신부는 이곳 서흥에서도 신자들 사이의 불화로 사목상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16년 6월에 다시 사리원으로 본당을 옮김으로써 사리원 본당이 설립되고, 서흥 본당은 공소로 격하되고 말았다.
1930년대 초에 들어 서흥 공소 회장 안희택(安熙宅, 요한)이 종각을 건립하고, 1937년 2월에는 이천복(李天福, 프란치스코) 회장이 강당을 수리한 데 이어 신자 손(孫) 마리아가 제대와 감실을 기증하는 등 본당 부활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서흥 공소는 20여 년 만인 1937년에 안학만 신부를 2대 주임으로 맞이하면서 본당으로 부활되었는데, 안학만 신부는 이곳에서 2년 간 사목하다가 1939년에 장련(長連) 본당의 설립과 함께 전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28일 임충신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임충신 신부가 1942년 1월에 곡산(谷山)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서흥 본당은 사리원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는데, 이후 북한 공산당의 탄압으로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 침묵의 교회 ; 황해도 감목 대리구 ; 사리원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天主教 敎勢統計表>(1899~1911),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黃海道天主教會史》,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84/ 《경향잡지》 847호(1937. 2. 12), pp. 91~92/ 《서 울大教區教區總覽》, 가톨릭출판사, 1984.〔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