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기원전 624~544?)

釋迦牟尼

〔산〕Śākyam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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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 조각. (왼쪽부터) 탄생, 관수(灌水),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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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 조각. (왼쪽부터) 탄생, 관수(灌水), 열반.

불교의 개조(開祖). 본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 .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성도(成道)하였고, 45년 동안 전교 활동을 하다가 80세에 입멸(入滅)하였다. '석가모니' 란 산스크리트어 사키야무니(Sakyamuni)의 음역으로 석가(Śākya)족 출신의 성자(muni)를 뜻한다. 이는 성도 후 얻게 된 존칭이며, 이외에 불타(佛陀), 석가세존(釋迦世尊) , 석존(釋尊)으로도 불린다.
〔탄생과 태자 시절의 고뇌〕 2,500여 년 전 지금의 네팔 타라이(Tarai) 지방에 있던 카필라(Kapila) 공국의 슛도다나(Śuddhodana) 왕과 마야(Maya)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인 파자파티(Pajapati)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석가모니의 성은 고타마' 였고, 이름은 '모든 것을 성취한' 또는 '미덕을 갖춘 사람' 이라는 뜻의 '싯다르타' 였다. 어린 시절 싯다르타는 왕족에게 어울리는 교육을 받았으며 또 아무런 불편이 없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렸으나 이러한 세속적인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차 삶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이라고 묘사되는 늙음[老] · 병(病) · 죽음[死] · 출가 사문(出家沙門)과의 만남은 당시 싯다르타의 철학적 사색을 극화시킨 좋은 예라고 하겠다.
《성구경》(聖求經)에는 당시 청년 싯다르타의 앞날을 예감하게 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결국 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구하는 데에는 착하게 구하는 것과 악하게 구하는 것이 있다. 무엇이 악하게 구하는 것일까. 자기 스스로 태어나게끔 된 존재이면서 남이 태어나는 것을 바라며, 스스로 늙고 병들게 된 존재이면서 남이 늙고 병드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또 자기 스스로 죽어 가고, 슬픔에 잠겨 있고, 더러움에 물든 존재이면서 자기와 같이 병든 자, 죽어 가는 자, 슬픔에 잠겨 있는 자, 더러움에 물든 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처자나 심부름꾼이나 재물 등은 모두 이와 같이 생겨나고, 늙고, 앓고, 사라지며, 슬픔에 잠기며, 더러움에 물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스스로 멸망해 가는 존재이면서 멸망해 가는 것에 집착하고 미혹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착하게 구하는 것은 바로 무상 안온(無上安穩)의 열반(涅槃)을 구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착하게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이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제부터는 죽음과 슬픔과 더러움을 떠난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처럼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만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골돌히 생각하였다. 명상하는 그의 습성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제는 종전과는 달리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에 싯다르타는 출가 수행할 것을 결심하고 부왕에게 허락을 요청하였다. 부왕은 처음에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싯다르타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결국 왕통을 이을 세손을 낳기 전까지는 출가할 수 없다는 조건부 허락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석가족의 일원인 콜리족의 야소다라(Yaśodharā)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라홀라(Rāhula)를 낳게 되면서 출가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출가와 깨달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싯다르타는 29세 때에 출가하여 사문(沙門, 구도자)이 되었다. 여기에는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석가모니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방광장엄경》(方廣莊嚴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미녀가 부르는 노래는 욕망으로 사람들을 매혹한다. 그러나 더러움이 없는 사람은 그 소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듣는다. 거룩한 자여, 고통에 잠긴 사람들을 보고 원(願)을 일으켜 행(行)을 거듭한 옛일을 생각하소서. 집을 떠날 때는 지금이다. 큰 자비로써 삼독(三毒)의 사람들을 구하라. 그러면 구름이 걷히고 달이 빛나듯 몸의 빛이 사방의 나라들을 비추리라. 세계는 고뇌이다. 성난 불과 같이, 뜬구름같이, 물위의 달, 골짜기의 산울림, 환각의 물거품과 같더라. 어리석은 자는 젊음을 좋아하지만, 머지않아 늙음과 병과 죽음 때문에 부서진다. 비유컨대 꽃에 뒤덮인 가지가 꽃이 떨어지면 버림받음과 같은 것을.."
삶에 대한 진지한 번민을 거듭하고 있던 한 젊은이가 선택한 길은 결국 호사와 공명을 버린 출가 사문의 긴 여정이었다. 그것은 곧 늙음과 죽음과 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더없는 행복[涅槃)을 찾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中阿含經) 卷 56, 羅摩經).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하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위대한 결심을 엿볼 수 있다.
불전(佛典)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출가한 직후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그리하(Rajagha, 王舍城)로 갔다가 그곳에서 당시 유명했던 요가의 두 선인(仙人) 알라라 칼라마(Ālāra Kālā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āmaputta)에게 선정(禪定)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석가모니가 품었던 '죽음과 삶의 문제' 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때부터 석가모니는 고행을 결심하였는데, 출가인들이 고행을 수도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인도인들은 고행을 통해 육신을 학대함으로써 정신이 그 결박을 벗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도 네란자나 강(Nairañjanā, 尼連禪河) 근처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가 6년 동안 고행에 전념하였으나 여기서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몸만 쇠약해져 죽음 직전에 까지 이르게 되자 그는 고행주의로는 대각(大覺)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고행을 중단하고 산에서 나온 싯다르타는 체력을 회복한 후, 우루베에라의 조그마한 동네에서 명상을 시작하였고 명상에 잠긴 지 이레째 되던 날 드디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무엇이 존재를 괴롭혀 왔던가, 그것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와 같은, 이제까지의 모든 의혹들이 걷히고 비로소 해탈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성도(成道)라고 하며, 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싯다르타는 스스로 붓다(Buddha, 깨달은 자, 불타)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우주의 근원을 통찰했다는 긍지이며 만유의 존재 당위를 독특한 지견으로 열어 보였다는 자각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오는 자' ,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 , '침묵하는 분' 의 의미를 지닌 여래(如來, tathagata) , 세존(世尊, bhagavat), 무니(muni)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두 동양인의 성자에 관한 사고 방식을 보여주는 호칭들이다. 즉 동양적 성현은 '아는 자' 가 아니라 '깨달은 자' 이며, 그 '깨달음' 은 절대적 타자(他者)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증(內證)인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 이란 언설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은 '침묵하는 자' 로도 표현된다.
〔초전 법륜과 교화의 발자취〕 석가모니가 대각(大覺)을 얻은 후, 처음으로 찾은 곳은 바라나시(Vārāṇasī) 현재의 Benares) 교외의 사르나트(Sarnath, 鹿野苑)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때 자기와 수행한 적이 있었던 비구 5명에게 처음으로 설법하였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초전 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법(法)이란 '사물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 , '자연 현상의 원리' , '최고의 진리'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법륜(法輪)이란 부단히 움직이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처음으로 진리의 법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에서 베나레스의 설법을 중시하고 있다. 이 최초의 설법에는 연기(緣起) · 사성제(四聖諦) · 팔정도(八正道) · 중도(中道) 등 근본 불교의 기본 원리가 망라되어 있고, 그 내용은 이제까지 아무도 설한 바 없었던 독창적인 경지였다. 특히 석가모니는 중도를 강조하였는데, 향락적인 생활이나 지나친 금욕주의적 고행은 둘 다 피해야 할 극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도의 내용인 팔정도(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는 실천적 윤리 생활의 덕목으로서 해탈을 자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때 설법을 들은 다섯 명의 비구가 제자가 됨으로써 최초의 승가(僧迦)가 성립되었고, 그 결과 불(Buddha, 가르침을 연 부처) · 법(dharma, 부처가 가르친 진리) · 승(samgha, 불법을 받들고 실천하는 교단)의 삼보(三寶)가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불교가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다.
교단이 성립된 후 최초로 입단한 사람은 바라나시에 살던 야사(Yasa)였다. 야사의 부모와 아내도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재가(在家) 제자가 되었는데, 이들이 남녀재가 신자를 의미하는 우바새(優婆塞, upasaka)와 우바이(優波夷, upasika)의 시초였다.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귀의하였는데, 이 중 마가다국의 카사파(Kāśyapa, 迦葉) 3형제(三迦葉)와 그 제자 1,000여 명, 그리고 바라문 출신인 사리풋타(Śāriputra, 舍利弗)와 마하목갈라나(Mahāmaudgalyāyana, 大目犍連, 目連)의 인솔로 회의론자(懷疑論者)인 산자야(Sañjaya)의 제자 250명이 집단으로 개종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석가모니는 고향 카필라를 방문하였을 때 부왕을 위시하여 아난다(Ananda, 阿難)와 나중에 반역한 데 바닷타(Devadatta, 提婆達多) 등 석가족 사람들을 교화시켰고 아들 라훌라도 출가시켰다. 그리고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여 비구니 교단도 만들었다.
석가모니는 이후 45년 동안 몸소 교화 생활을 전개하였다. 즉 그는 제자들이 진리를 증득하게 되자 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많은 지방으로 가서 불법을 전하게 하였고, 자신도 홀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교화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불교의 참뜻은 스스로만의 해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석가모니의 교화의 발자취는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북쪽은 그의 고향인 카필라로부터, 남쪽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이르기까지 거의 인도 전역에 미쳤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거점은 바로 라자그리하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밧티(Sāvatthī, 舍衛城)의 기원정사(祇園精舍)였다. 석가모니는 안거(Vassa, 우기 3개월 동안의 안주) 기간 동안 죽림정사나 기원정사에 머무르면서 제자들과 함께 명상에 들고, 또 가르침과 교훈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석가모니는 법을 설할 때 상대방의 신분이나 학식과 직업에 맞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은 왕족 · 바라문 · 상인 계급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귀의하였다. 특히 신분에 관계 없이 언제라도 출가 혹은 재가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교단의 개방성은 교법의 은혜를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제한한 베다 종교와는 전혀 다른 획기적인 것이었다. 한편 석가모니는 만년에 이르러 사촌 동생인 데바닷타의 모반 사건, 동족인 석가족의 멸망, 상수제자였던 사리풋타와 마하목갈라나의 죽음 등 인간적인 불행을 겪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일생은 자신의 가르침처럼 평화롭고 조용하였다.
〔입 멸〕 석가모니는 만년에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거주하다가 자신의 수명이 다하였음을 자각하고 고향인 카필라를 향해 최후의 여행을 떠났다가 도중에 식중독에 걸려 인도 북부 쿠시나가라(Kuśinagara의 살라(sila) 나무숲에서 80세의 나이로 입멸하였다. 그는 입멸하기 전에 아난다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유훈을 남겼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령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여기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남긴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석가모니의 입멸 후 그의 유골은 8부족에게 분배되어 10개의 사리탑에 봉안되었는데, 1898년 프랑스인 펫페(Peppe)에 의하여 그 유골 항아리가 발견되면서 석가의 실재성이 입증되기도 하였다. 석가모니의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異見)이 있다. 즉 남방 불교의 전승에 근거하여 불멸(佛滅)을 기원전 485년으로 보는 설과 북방 불교의 전승에 근거하여 기원전 383년으로 보는 설이다. 그러나 현재 남방 불교권에서는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대사》(大史, Mahāvamsa)나 《도사》(島史, Dipavamsa) 등에 근거하여 기원전 544년을 불멸 연대로 보고 있으며, 우리 나라도 이를 따르고 있다. (→ 부처 ; 불교)
** ※ 참고문헌  정병조, 《인도 철학 사상사》, 경서원, 19771 《불교학개론》,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4/ 《불교 성전》, 방문사, 1985. [鄭柄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