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서구 석남2동 546-3 소재. 1974년 10월 6일 송림동(松林洞)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관할 구역은 석남1 · 2동, 가좌1동 전역과 석남 3동 일부 지역. 〔교 세〕 승격 당시 636명, 1980년 1,684명, 1984년 3,660명, 1988년 3,966명, 1993년 5,273명, 1997년 6,606명. 〔역대 신부〕 초대 모린(L. Morin, 명일중) 레오나르도(1974. 10~1976. 2), 2대 아바솔로(R. Abasolo, 서정천) 라파엘(1976.2~1977.2), 3대 올라베리아(I. Olavoerria, 오태일) 일데폰소(1977. 2~1979. 2), 4대 모린(1979. 2~1985.5), 5대 무르구쥬르(J. Murgúzur, 문요섭) 요셉(1985. 5~1994. 2), 6대 최병철(崔炳喆) 아우구스티노(1994. 2~1997.2), 7대 유영진(劉永珍) 루가(1997. 2~ 1999. 2), 임시 김병두(金炳斗) 베르나르디노(1999.2~현재).
[공소 시대] 인천시의 변두리 지역이었던 석남동 일대는 부평(富平, 현 부평2동) 본당 관할로서 1950년대 중반에 이미 신억배(요한)를 중심으로 한 10여 명의 신자들이 신승원의 집에 모여 공소 예절을 갖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신자들 중에는 구호 물자를 받기 위해 참석한 경우가 많아 교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초기 공소 신자들은 석남동 105번지 일대의 부지 60평을 마련하여 공소 강당을 신축한 뒤 곧 이어 주변의 부지 200여 평을 추가로 매입하였고, 1961년 1월 13일에 유순섭(베드로)을 비롯한 3~4가구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정식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현 본당 부지 802평을 매입하여 공소 강당(18평)을 신축했는데, 1964년 7월 4일에 부평1동 본당으로, 1966년 2월에는 송림동 본당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그 후 교구에서는 1974년 10월 6일 석남동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사목권을 프란치스코회에 위임하였다.
〔정착과 변모〕 1975년 4월 7일 성당 신축 기공식을 가진 후 같은 해 9월 3일 148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여 10월 24일 봉헌식을 거행한 초대 주임 모린 신부는, 4대 주임으로 재부임하여 1979년 10월에 사제관(75평)을 신축한 데 이어 1981년 5월 3일에는 성모 동산을 조성하였다. 한편 1983년 1월 1일에는 김포(金浦) 본당의 금곡(金谷) 공소와 오류(梧柳) 공소를 이관받았으며, 4월에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분원이 마련되자 그 해 7월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1984년 8월 15일 가좌동(佳佐洞)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241세대 692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그리고 5대 주임 무르구쥬르 신부는 1985년 7월 21일 성당 증축 공사를 실시하여 교리실과 기타 부대 시설들을 마련하였고, 이듬해 1월 1일에는 가정동(佳亭洞) 본당을 분리하여 768세대 2,325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그 후 본당에서는 기존의 협소한 성당으로 신자 수용에 어려움이 많자 1988년 9월 17일 성당 신축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했으나 건설 회사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91년 11월 29일 성당(275평)과 사제관 및 교리실(105평) 등을 완공하여 이듬해 10월 4일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92년 9월 14일에는 가정3동(佳亭三洞) 본당을 분리하여 179세대 488명의 교적을 이관하였고, 1995년 10월 4일에는 교육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여러 차례의 분할에도 교세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석남동 본당에서는 관할 구역 내에 공단 지역과 시장이 포함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여 근로자와 빈민층을 위한 사목 방침을 모색하고 있으며, 본당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본당사 편찬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 인천교구 ; 송림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보유편/《인천교구사), 천주교 인천교구, 1991. [李裕林]
석남동 본당
石南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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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