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善 ro iayrriv

〔그〕τὸ ἀγαθόν

〔라〕bonum · 〔영〕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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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는 의미의 선은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는 보고 양식에서 절정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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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는 의미의 선은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는 보고 양식에서 절정에 이른다.

형이상학과 실천 철학 및 윤리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서, '악' 의 대당(oppositio) 개념. 넓은 의미로는 존재자의 본성적인 성향에 상응하는 사물의 적합성 및 모든 존재자 자신의 근원적이고도 초월적인 속성을 가리키며, 좁은 의미로는 윤리적인 선을 가리킨다.
I . 어 원
'좋다' 를 뜻하는 히브리어 형용사는 '토브' (טוֹב)인데, 이는 '쾌적한 · 즐거운 · 기쁜 · 만족하게 해주는 · 마음에 드는 · 눈에 드는 · 호의적인 · 쓸모 있는 · 유익한 · 올바른 · 착한 · 향기로운 · 아름다운' 등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칠십인역 성서에서 대개 그리스어 '아가토스' (ἀγαθός)로 번역되었으며 '칼로스'(καλός) 또는 '크레스토스' (χρηστός)로도 번역되었다. '아가토스'는 '아가마이' (ἄγαμαι, 깜짝 놀라다)나 '아간'(ἄγαν, 매우 많은)과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로서 놀랄 만한 . '경탄할 만한' . '훌륭한' 을 뜻한다. 이 단어는 '아름다운' . '좋은' · '올바른' 을 뜻하는 그리스어 형용사 '칼로스' 와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남성 형용사인 '아가토스' · '칼로스'' 에 각각 상응하는 중성 형용사는 '아가톤' (ἀγαθόν) · '칼론' (καλόν)인데, 이 중성 형용사들이 명사화되어 사용될 경우 그 뜻은 '선' 곧 좋은 것' 이 된다. '좋은' (착한)· '선' 을 뜻하는 라틴어 보누스 (bonus) . '보눔' (bonum)은 특히 그리스어 '아가토스' . '아가톤' 의 개념을 이어받은 것이다.
한자 '선' (善)의 갑골문 자형은 '양' (羊) 자와 '목'(目) 자로 이루어져 있다. '양' 은 곧 '상' (祥)을 뜻하고 '목' 은 ''눈' [眼]을 뜻하므로, '선' 이란 '보기에 매우 아름답다' 는 의미이다. 따라서 글자의 꼴에 있어서 '좋다'는 것은 '아름답다' 는 것과 통한다. 실제로 중국 문화권 안에서 '선' 과 '미' (美)는 서로 통용되는 개념이었다. 공자는 "소위 음악은 미의 극치를 이루고 선의 극치를 이루었다" 子謂韶盡美美 盡善也, <論語> 八佾)라고 하였고, 맹자는 "욕구할 만한 것을 선이라 이르고 · · · 충실하게 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 이른다" (可欲之謂善 · · 充實之謂美, 《孟子》 盡心章句下)라고 말하면서 '선' 과 '미' 를 한자리에 놓고 있다. '선' 을 '욕구할 만한 것' 이라고 규정한 맹자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철학의 전통 안에서의 '선' 에 대한 정의, 곧 "선은 모든 것이 욕구하는 것이다" (Bonum est quod omnia appetunt)라는 명제와 유사하다.
II . 성서에서의 선
히브리어 형용사 '토브' 와 어원을 같이하는 단어들이 성서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몇 개의 의미 영역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목표를 위한 적합성을 나타낼 때(창세 3, 6), 품질을 규정할 때(창세 41, 5), 소식 · 조언 · 말씀 · 행동 · 사실 · 꿈풀이 등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창세 40, 16), 인간의 특성(1사무 25, 3) 및 외모의 아름다움(2사무 11, 2)을 묘사할 때, 종교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인 선을 가리킬 때(잠언 2, 9), 대당 개념인 '악' . 곧 히브리어 '라' (רַע)와 함께 쓰일 때(1사무 24, 18), 하느님에 대한 술어로 쓰일 때(시편 25, 8), '최상의 품질' (창세 47, 6. 11 ; 출애 22, 4 : 1사무 15, 9)· '땅의 소출' (창세 45, 18. 20. 23 : 이사 1, 19 : 예레 2, 7 : 에즈 9, 12 : 느헤 9, 25) . '축복. 구원' (시편 27, 13 : 65, 5 : 욥기 21, 16 : 예레 31, 12) · '자애' (출애 33, 19 : 이사 63, 7 : 호세 3, 5)· '마음의 기쁨' (신명 28, 47 : 이사 65, 14)· '아름다움' (호세 10, 11 : 즈가 9, 7) 등과 같이 추상 개념으로 쓰일 때 등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경우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자면, 크게 사물이나 사실과 관련된 것 · 인간과 관련된 것 · 선과 악을 대비적으로 나타낸 것 · 하느님과 관련된 것으로 나누어진다.
〔사물 · 사실과의 관련〕 적합성 : '좋다' 는 말은, 구약 성서 용례 중 가장 많은 경우에 '무엇을 위한 좋음' 곧 어떤 목적을 위한 하나의 사물의 적합성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예를 들면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창세 3, 6)라고 할 때 '토브' 란 단어가 쓰였는데, 여기서 대상인 나무는 주체인 인간을 위해 먹거리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인간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그 나무가 적합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로의 쓰임은 특히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 안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1, 4. 10. 12. 18. 21. 25. 31)라는 창조에 대한 합당한 보고 양식 안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좋은 것' 은 '보는 것' 과 연결된다. '좋다' 고 판단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본다' (רָאָה)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본다는 것은 작품의 합목적성을 눈여겨보고 시험해 보고 평가해 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질서 정연함과 창조된 작품의 합목적성이 이런 방법을 통해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강조된다. 창세기의 이러한 묘사 수법은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본다" 라고 묘사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학 양식, 곧 수공업자가 일을 끝내고 나서 본래 의도하였던 목적대로 자신의 작품이 이루어졌는지 눈여겨보는 데에 따른 표현 방법과 병행을 이룬다.
품질 : '좋다' 는 말이 사물의 품질 또는 대상의 질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에 이 말은 특히 농업과 땅에 연관되어 쓰인다. 이 말이 농업에 연관되어 쓰일 때 풍요로운 생산성이 전면에 부각된다. 이를테면 낟알을 가득 달고 있는 이삭(창세 41, 5. 22. 24. 26)이 좋은 품질의 것으로 일컬어지고, 잘 길러진 튼튼한 소(창세 41, 26 ; 1사무 8, 16)나 나귀(1사무 8, 16)와 같은 가축이 좋은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좋다' 는 말이 땅과 관련되어 쓰일 때 '좋은 땅' (출애 3, 8 ; 민수 14, 7 : 신명 1, 35 ; 3, 25 ; 4, 21 ; 여호 23, 16 ; 판관 18, 9)이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좋은 땅' 은 인간의 삶을 보장해 주는 풍성한 생산력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신명 23, 17),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나 사막에서 방랑하는 동안에 물질적으로 갈망하던 모든 가치들을 내포한다. 아울러 '좋은 땅' 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로 약속한 '바로 그 땅' 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구원의 선익이다(신명 1. 25 ; 4, 21 : 8, 10).
판단 : 모든 형용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판단을 내포하므로, '좋다' 는 말은 적극적으로 주관적인 태도를 밝히는 경우에 쓰인다. 사람들은 하나의 소식 · 제안 · 말씀 · 사실 · 꿈풀이 등이 유리하게 느껴질 때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창세 40, 16 : 1사무 9, 10 : 2사무 18, 27 ; 1열왕 2. 38. 42 : 이사 39, 8 : 52, 7). 어떤 일에 찬성하거나 승낙하는 뜻으로 이 말을 쓰기도 하고(창세 24, 50 ; 1사무 20, 7), 때로는 하나의 윤리적인 판단을 할 때 이 말을 쓰기도 한다(느헤 5, 9 ; 2역대 12, 12). 결국 좋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 과 직결된다. 구약성서는 이 판단을 '눈에' (בְּעֵינַי)라는 말로 표현한다. 따라서 '누구의 눈에 어떤 것이 좋다' 는 성서의 표현은 "누구의 판단에 있어 그것이 좋다"는 뜻이다. 이런 구조의 문장에서 주어는 대개 사물이고 '눈에' 에 따라붙는 소유격 명사는, 그 사물의 유용성과 합목적성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 인격체는 통치자(창세 41, 37 ; 1사무 14, 36), 성조 또는 한 개인(창세 16, 6 ; 레위 10, 20 ; 1사무 1, 23), 한 민족 혹은 한 집단(창세 34, 18 ; 1사무 18, 5)이다. 그뿐 아니라 그 인격체는 또한 하느님일 수도 있다. 이 경우 "하느님의 눈에 어떤 것이 좋다" 라는 말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민수 24, 1 ; 판관 10, 15 : 1사무 3, 18; 2사무 10, 12)에 맞거나 하느님이 제정한 제의적인 규범(레위 10, 19) 내지 윤리적인 규범(신명 6, 18 ; 12, 28)에 합당함을 뜻한다.
〔인간과의 관련] 특성 및 능력 : '좋다' 는 말은 인간과 관련되어 개인의 적극적인 특성이나 탁월한 능력을 가리키는 데 쓰이며, 아울러 인간의 외모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데도 쓰인다. 하지만 셈족의 사고 방식과 언어 관습에 있어 하나의 인간은 그의 외관보다는 그의 능력으로써 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이른 시기에 성립된 구약성서의 본문들은 대부분 군사적인 임무와 같은 특정 임무와 관련하여 이 '좋다' 는 단어를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사무엘 상 9장 2절에서는 선택될 지도자에게 이 단어가 쓰였고, 사무엘 하 18장 27절에서는 승전의 기쁜 소식을 가져온 아히마스라는 사람에게 이 단어가 쓰였다.
외모의 아름다움 : 그리스인들에게는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전면에 나타나는 반면, 근동인들에게 있어서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전면에 나타난다. 인간에게 쾌적한 느낌을 주는, 근동적인 의미의 이러한 미학적인 아름다움은 구약성서 안에서 '좋다' 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표현되지 못하고, '좋다' 는 단어가 동반하는 소유격의 명사인 관계어와 함께 표현되었다. 그래서 '좋다' 는 말은 외형 및 외관을 특징짓는 소유격 명사인 '마레' (מראה ) 창세 24, 16 ; 26, 7 ; 2사무 11, 2)· '토아르' (תֹּאַר, 1열왕 1, 6)· '로이' (רָאִי, 1사무 16, 12)와 함께 어울려 '외관이 좋다' 혹은 '형태가 아름답다' 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이고도 감각적인 아름다움' 이 단순히 대상 자체 안에 있는 것은 아니며,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봄' 또는 '관찰' 에 기초해 있다. 왜냐하면 '마레' . '토아르' . '로이' 와 같은 명사들은 '보다' 또는 '관찰하다' 는 뜻을 지닌 동사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윤리적 선 : '좋다' 는 말은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뜻으로 지혜 문학 안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지혜는 사람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며(잠언 2, 19 ; 5, 6) 그를 악의 길로부터 보호한다(잠언 2. 12). 따라서 '생명의 길' 이란 곧 '선의 길' 을 가리킨다(잠언 2. 9. 20). 이러한 의미의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선은 특히 예언자들의 선포 안에서 심화된다. 이를테면 아모스 예언자에게 있어 '하느님을 찾는 일' 과 '윤리적 선을 찾는 일' 은 거의 동일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는 "살려거든 야훼를 찾으라"(아모 5, 4. 6)고 말하면서 아울러 "살려거든 선을 찾고 악을 찾지 말라" (아모 5, 14)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모스에게 있어 '하느님' 과 '윤리적선' 은 동의어이다.
〔선과 악의 대비〕 '선' 이라는 낱말과 그 대당 개념인 '악' 이라는 낱말이 결합하여 쓰일 경우, '선-악' 은 품질의 '우-열' (레위 27, 10) · '찬성-반대' (창세 24, 50) ·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복-화' (욥기 2, 10 ; 애가 3, 38) 등을 뜻한다. 여기서 '선' 곧 '좋은 일' 은 삶에 이익을 주는 것을, '악' 곧 '궃은 일' 은 삶에 손해를 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경우의 '선-악' 은 윤리적인 '선-악' 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을 악으로 갚는(창세 44, 4 : 1사무 25, 21 ; 시편 35, 12 ; 잠언 17, 13) 경우의 선악은 윤리적인 선악을 뜻한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그 벌로 불행을 얻기 때문에 마땅히 커다란 불의(잠언 17, 13)인데 반해, 자신에게 못된 일을 저지른 원수에게조차 도리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상을 받을 일이다(1사무 24, 18-20).
〔하느님과의 관련〕 하느님에 대한 술어 : 비교적 후대의 본문 특히 시편 안에서는 하느님 자신이 '좋으신 분'으로 일컬어진다(시편 25, 8 ; 34, 9 : 73, 1 ; 애가 3, 25). "야훼는 어지신 분"이라는 고백은 전례적인 찬양시의 도입부에 자주 나타나며, 이 고백은 곧잘 "그 사랑 영원하여라" 라는 화답을 통해 보충된다(예레 33, 11 ; 시편 100, 5 : 에즈 3, 11). 그런데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좋은 분인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거나(나훔 1, 7 : 시편 73, 1 ; 86, 5 : 애가 3, 25) 그렇지 않거나(예레 33, 11 : 시편 100, 5 : 136, 1) 간에 '하느님이 좋으시다'라는 표현은 결코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좋으심은 처음부터 인간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 개념 : 선이 종교적인 영역 안에서 추상 개념 내지 추상 명사로 쓰일 때 '좋다' 는 말은 가장 탁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선' 이 홀로 선 자체' 인 야훼 하느님과 연관될 때, 그 선은 인격화되어 하느님과 동일시된다. 곧 '선' 은 야훼의 '얼굴' (פָּנִים) 혹은 '영광'(כָּבוֹד)과 동격의 개념으로서 하느님의 '선' 은 '신현' (神顯, theophania)을 뜻한다(출애 33, 19). 하느님의 선은 인간의 현실 안에서 구체적인 효과를 야기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구원과 복이다(예레 15, 11 : 33, 11 : 44, 17). 그뿐만 아니라 '선' 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인 '해세드'(חסד, 자애)와 결합하여 '인자함' 또는 '자애로움' 을 뜻함으로써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가 된다(출애 33, 19 : 이사 63, 7 ; 시편 25, 7).
신약성서 : '좋다' 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아가토스' . '칼로스' · '크레스토스' 는 루가 복음 6장 27절과 35절에 함께 나타난다. 6장 27절의 '칼로스' (καλὸς)와 35절의 '아가토··· (ἀγαθὸ~)는 인간이 행해야 할 '선'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고 6장 35절에 나오는 '크레스토스' 는 하느님의 '인자함' 을 표현하기 위하여 각각 사용되었다. 이 구절들에서 주목할 점은, 인간이 악인과 원수에게조차 선을 행해야 하는 근거는 다름아닌 '하느님의 좋으심과 인자하심' 때문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Ⅲ . 철학적 언어 관용상의 선
'아가토스' 라는 말은 사물 · 동물 · 인간 및 그 신체 기관 등에 두루 적용되어 대상의 질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이를테면 '땅' 에 대해 "결실을 가져오기에 좋다" 라는 말은 그 '땅' 이 결실을 이루는 일에 기능을 잘 발휘하여 쓸모가 있다는 뜻이고, '말' [馬]에 대해 " '달리기' 와 '승마자를 태우기' 에 좋다" 라고 하는 말은 그 '말' 이 잘 달리고 승마자를 잘 태운다, 곧 달리는 일과 사람을 태우는 일에 기능을 잘 발휘하여 '유용하다' 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 에 대해 "예술을 하기에 좋다" · "정치를 하기에 좋다" · "전쟁을 하기에 좋다" 라는 말은 그 '사람' 이 예술 · 정치 · 전쟁을 잘한다, 곧 그 방면에 '유능하다' 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덕으로써 그 기능을 수행하는 '영혼' 에게 적용되어 영혼의 질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 사상 안에서 '선' 개념은 크게 '사실' 에 관련된 의미와 '인격' 에 관련된 의미로 구분이 되었다.
〔사실과의 관련〕 어떤 사물의 기능은 그것을 사용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어떤 사물 또는 존재자가 스스로 그 기능을 잘 발휘할 때 그 사물은 좋다' 곧 '유용하다' 고 말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기능의 유용성 곧 '선' 이 다름아닌 그 사물 및 존재자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그것의 본질적인 속성 곧 기능의 유용성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존재자는 비로소 '완전한 것' (τέλειον)이다. 예를 들면 눈의 기능은 잘 보는 데 있고, 눈이 스스로 보는 기능을 잘 수행할 때 그 눈은 좋은 눈이다(플라톤, 《국가》 353b~c). 따라서 보는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은 눈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이로 말미암아 눈은 '완전하다' 고 말해진다. 이처럼 '선' 은 한편으로, 그 자체로 완전함' (perfectum) 곧 '완전한 것' 의 특성을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선' 은 다른 것을 위해서도 유익하고 중요하다. 이런 의미의 선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 . '도움을 주는 것 · '삶을 지탱시켜 주는 것' 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아가톤' 의 의미 영역은 '실체적인 의미' 에서 '관계적인 의미' 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 그 자체에 있어서 선 또는 완전함' 에서 '다른 것을 위한 선' 으로 넓혀진다. 사실 순서를 따지자면 관계적인 의미는 실체적인 의미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즉 어떤 존재자가 '남을 위해 좋다' 는 사실은 그것이 그 자체로 좋다'는 사실의 토대 위에 성립한다. 빨리 달리는 능력을 갖춘 말은, 우선 스스로 힘있고 튼튼한 사지 및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승마자에게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남을 위해 좋은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06a 20). 마찬가지로 자기 직업에 충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유능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의 동료 시민들을 위해서도 쓸모 있고 유익한 사람이다. 결국 좋은 사람은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하나의 '선' 인 것이다. 이로써 실체적인 의미와 관계적인 의미는 하나로 통합된다.
그런데 명사화된 '아가톤' 안에서 '아가토스'의 변형된 의미가 나타난다. 그 변형된 의미란, 한 존재자의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선은 그 존재자의 내적인 기능과 결합됨 없이도 다른 것을 위해 유익하다는 점이다. 자연 현상을 볼 때 모든 존재자는 자기 존재 안에 근원적이고도 자연적인 욕구를 지니며, 따라서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해소시켜 줄 대상을 추구하기 마련이다(플라톤, <향연>202d). 이 대상이 다름아닌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4a 3)으로서의 '선' 이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자에 의해 추구되는 하나의 대상은 성질상 다른 것에게 유익함을 주고, 다른 이의 삶에 도움을 줌으로써 타자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이 점이 '선' 의 또 다른 '완전한 것' 적인 특성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것' 은 그 자체로 완전함' 으로서의 선이 아니라 '타자를 완전하게 함' (pefectium)으로서의 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선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놀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으로서의 선, 곧 그 자체로 완전함' 으로서의 선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단지 그것의 소유가 결핍을 해소시켜 주며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선은 이중적인 '완전한 것' 의 특성을 갖는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e Aquino, 1225?~1274)에 의해 '완전한 것' 의 이런 이중적인 특성은 '완전함' 과 '완전하게 함' 으로 더욱 명확히 구별되었다.
〔인격과의 관련〕 인간의 어질고 착한 행실〔德行〕 안에서 보여지는 '선' 은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한편으로는 덕을 소유한 개인의 '유능함' (훌륭함)과 사회 생활에 미치는 '좋은' 영향 때문에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덕행 안에 있는 윤리적인 아름다움 곧 '영혼의 아름다움' (καλόν) 때문에 높이 평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소크라데스(Sokrates, 기원전 470?~399)에 의해 "영혼이 아름답고도 훌륭한"(플라톤, 《테아이테토스》 185e)이란 표현을 통해 시사되어 있다. 인간은 인격체이기에 인간에게는 유능함으로서의 '선' (ἀγαθόν)뿐 아니라 의지의 힘으로서의 '도덕적 아름다움' (καλός)도 요구된다. 곧 좋은(ἀγαθός) 사람은 유능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καλός)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인격적인 의미의 '윤리적인 아름다움' (καλός)은 그 자체로 찬양받을 만한 내적인 가치를 지닌 하나의 '선' (ἀγαθόν)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IV 선의 개념 규정의 역사
선의 개념 규정은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일이다. 하지만 선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더러 가장 단순한 개념이기 때문에 선의 본질을 직접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선의 정의는 본질적인 정의가 아니라 선의 특징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도록 선의 '동의어' 및 선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 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일을 가리킨다. 결국 선의 개념 규정의 역사란 선 개념을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로써 다양하게 정의하고 해석해 온 역사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우리 인간이 선의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이해에 이를 수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고 대〕 플라톤 : 플라톤(Plaon, 기원전 427?~347)은 우선, 선을 관계적인 의미- '완전하게 함' 으로서의 선-에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 '선' 은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며 인간에게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국가》 358a : 571a). 그뿐 아니라 그는 선을 실체적 의미- '완전함' 으로서의 선-로도 이해하였다. 곧 '좋은' 영혼이 영혼의 덕으로써 고유한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353e). 그러나 플라톤은 더 높은 차원의 선 곧 모든 인간에 의해 추구되는 궁극적인 선 및 참된 선을 거론하면서 '선' 의 관계적인 의미를 심화시켜 나갔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 의해 추구되는 '참된 선이야말로 결국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탐구함에 있어 플라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갔는데, 첫번째 방향은 형이상학적인 원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곧 선이란 어떤 결함 및 결여도 없는 것으로서 이런 의미의 선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따라서 홀로 참된 존재를 가지고 있는 '이데아' 들에서 찾아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 의하면 이런 초월적인 이데아들에 참여하는 한에서 이 세상의 일상적인 사물들은 좋은 것이고, 이런 여러 가지 이데아들은 최고 존재로서의 '선의 이데아' 를 나누어 받는 한에서 아울러 좋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데아들 특히 아름다움의 이데아와 정의의 이데아를 바라보며 그런 이데아들을 가능한 범위 안에서 현실로 실현시키는 것이야말로 개별적인 인간을 위해서만이 아닌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도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아 주는 일이 된다(541a). 두 번째 방향은 행복으로 인도하는 선을 사실적으로 규명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플라톤은, 행복으로 인도하는 선은 '쾌락' 이 아닌 '영혼의 건강' 안에 있다고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선은 정의와 절제에 기초하여 본성에 따라 이루어진 '질서' 와 '조화' 안에 있기 때문이다(<고르기아스> 504a~d). 훗날 그는 행복으로 인도하는 선이 본질적으로는 '도덕적인 아름다움' (καλός)안에 있다고 규정하였다(《필레보스) 64d~66d).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에 따르면, '좋다' (ἀγαθός)는 말은 '있다' 는 말만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096a23). 왜냐하면 선은 존재와 마찬가지로 모든 범주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양한 의미안에서 드러나는 선의 존재론적인 의미 내용을 상세히 규정하지 않은 채 '선' 을 단지 관계적인 의미에서 정의하였다.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4a 3 : 참조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1, q5, a 1). 그런데 각 존재의 고유한 본성이 각기 다름에 따라 각자가 추구하는 선의 내용도 또한 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신에 의해서 기초가 마련된 실천 철학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인간적 선 (ἀνθρωπινὸν ἀγαθὸν)을 거론하였다. 첫째 인간적 선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본성에 알맞게 이성의 고유한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적 선' 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098a 16). 둘째로 '인간적 선' 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 과 동일하다.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 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 자체 때문에 추구되는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 때문에 추구되는 목적을 위해 선택하는 여러 가지 다른 목적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들끼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피라미드식 위계 질서를 상정하고 그 정상에 위치해 있는 선을 '최고 선 이라고 불렀다. 최고 선은 항상 그 자체 때문에 추구되며 결코 다른 목적 때문에 선택되지 않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서, 곧 '행복' (beatitudo)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인간적 선 은 끝내 '행복' 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행복은 이성에 따라 덕스러운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그리고 더 나아가 불변의 진리를 순수하게 관상(contemplatio)함으로써 실현되는 가장 쾌적한 것이다.
〔중 세〕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 : 6세기 초의 인물로 위(僞) 디오니시오(Pseudo-Dionysius)라고 불리기도 하며, 성서와 신플라톤 학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그는, 신플라톤 학파의 사람들보다 더 선명히 존재와 선을 내적으로 밀접하게 결합시켜 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선성' (善性)이다. 선성은 선의 원천이자 원리로서 선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선 및 선성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까닭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선성을 피조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성이 가장 낮은 등급의 사물에게까지, 심지어는 비존재에게까지도 들어 있다. 인간이 지닌 선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런 신적인 선성의 선물일 뿐이다. 언젠가 모든 것은 자신들이 나온 근원인 신적인 선성으로 다시금 되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선성이 모든 것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근원으로 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하느님의 이름》 4, 4).
아우구스티노 :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가선에 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선의 본성》(De Natura Boni)이라는 소책자에서였지만, 그는 이 주제를 그의 전 작품 안에서 거듭 거론하였다. 곧 하느님은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선이자 나님이 없는 선으로서 개개의 모든 선들을 만들어 내므로, 모든 피조물은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자유 의지》 2, 17, 46)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한에서 '좋은 것' 이다(《자유 의지》 3, 13, 36). 심지어 악마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한에서는 결코 '악' (malum)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마라 할지라도 의지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악하게 되었을 따름이지 본래는 하느님에 의해 천사로, 곧 좋은 피조물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참된 종교》 13, 26). 그런데 모든 피조물이 '창조된 본성' 에 따라 갖게 되는 이러한 선 이외에도 우리 인간에게는 '의지' 로써 실현해야 할 선 곧 윤리적인 선이 있다.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윤리적인 선 또는 악은 인간의 '고유한 의지' (propria voluntas)로부터 비롯된다. 곧 선한 의지로부터는 선이, 그리고 악한 의지로부터는 악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의지' 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선을 향한 본성적인 경향으로서의 선한 의지는 선자체인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악한 의지는 단지 무(mihil)로부터 올 뿐이다(《신국) 12, 6). 따라서 의지의 궁극적인 목표는 '최고 선 곧 '하느님에게로의 귀속' 으로 서의 영원한 삶이다(《신국》 19, 4, 1).
토마스 아퀴나스 :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상적으로 나타난 사실에서 출발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선을 정의하였다. "선은 모든 것이 욕구하는 것이다." 곧 선은 '욕구할 만한 것' (appeibile)으로서 모든 존재자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더 나아가서 선은 모든 존재자 자신의 근원적이고도 초월적인 속성 곧 존재론적인 선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는 존재하는 한에서 좋은 것이다"(《신학 대전》 I q5, a3, c). 결국 '존재자' 와 '선' 은 개념상으로만 다르게 구별될 뿐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서, 서로 자리바꿈〔換置〕을 할 수가 있다(《신학 대전》 I-Ⅱ, q18, a1, c). 그뿐 아니라 선은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그 이상의 개념적인 분석이 불가능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 중 하나에 속한다. 그리하여 "선은 첫 번째 것들로 열거된다" (Bonum numeratur inter prima, 《니코마코스 윤리학 해설》 I, 1, 1 n. 9). 그런데 모든 존재자가 지니는 선은 참으로 그 자체로 선이긴 하지만 하느님의 '무제한적인 선' 에의 '참여' (participatio)로 이루어진 '제한적인 선' 에 불과하다. 곧 하느님만이 '본질상' (per essentiam) 좋으며, 자연안의 각 사물은 높은 등급의 사물로부터 낮은 등급의 사물에 이르기까지 단지 존재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나름대로 알맞게 선을 나누어 받을 뿐이다(《신학 대전》I , q5, a2, ad 1). 이 점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와 아우구스티노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심화되고 체계화되었던 선의 특징 및 의미를 네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의 내적인 특징은 완전함이다. "각각의 사물은 완전하다는 점에 있어서 선이라 불린다”(Unumquodque dicitur bonum secundum quod est perfectum, <신학 대전》 1, q 6, a3). 여기에서 말하는 완전함이란 곧 현 실태를 말한다. 둘째,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더욱 높은 단계의 현 실태를 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완성되는 과정 중에 있으며, 따라서 더 높은 단계의 것은 그것을 추구하는 낮은 단계의 존재자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 . 곧 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동기로서 작용하는 '목적인' (目的因)이며, '목적'이야말로 선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셋째, 선은 '자기 확산' (diffusivum sui)이다. 자기 확산이란, 선의 작용에 대한 궁극적 기초인 '통교' (communicatio)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선이 의지와 자유를 매개로 하여 자기를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한다. 넷째, 선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윤리적인 선' 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물의 선성'(bonitas objecti)과 '형상적인 선성' (bonitas formalis)을 구분하였는데, 사물의 선이 실질적인 선을 가리키는 반면에 형상적인 선은 윤리적인 선을 가리킨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하느님과 직접 연관되는 윤리적인 선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신학 대전》Ⅱ-Ⅱ , q 19, a 2, ad 2). "윤리적 선은 하느님을 향해 인격적인 결단을 내리는 데 있다." 이에 반해 "윤리적인 악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데 있다." 결국 그에 의하면 윤리 전반은 "하느님을 향한 이성적인 피조물의 운동" (motus rationalis creaturae ad Deum)으로 파악된다.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결코 어떤 선도 인간을 완전한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최고 선' 으로서의 하느님을 직관하는 데 있다.
〔근대 및 현대〕 칸트 : 칸트(I. Kant, 1724~1804)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 을 가져온 근대적 자연 과학의 방법론을 자신의 윤리학에 적용하여 욕구의 대상 및 내용과 연관된 모든 도덕률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성취하고 실현한 것을 통해서 선한 것도 아니며, 설정된 목표에 도달하는 유용성 때문에 선한 것도 아니다. 이 세계 안에서 무조건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 의지' 밖에는 없다(《도덕 형이상학의 정초》). 하지만 '선 의지' 에 한정된 선 개념 안에서는, 유익함으로서의 선 및 행복으로 인도하는 선 등은 도외시되고 만다. 그래서 덕과 행복의 실제적인 일치인 '최고 선' 의 문제가 도덕적인 예지계의 성립을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문제로서 칸트에 의해 다시금 윤리학 안에 대두되며, 그는 하느님 · 자유 · 영혼 불멸을 실천 이성의 이름 아래 요청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실천 이성 비판》).
셀러 : 셀러(M. Scheler, 1874~1928)는 자신의 '질료(실질)적인 가치 윤리학' (die materiale Wertethik)으로써 선을 의지에 귀속시킨 칸트의 '형상(형식)주의' (Formalismus)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좋다' 는 것은 "그 자체 하나의 가치" 로서 행위 안에서 실현되는 가치들을 고려할 때만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좋다' 는 것은 가치들의 위계 질서 안에서 더욱 높은 질을 가진 가치들과 연관되어 있는 가치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좋다' 는 가치" (der Wert 'gut' im absoluten Sinne)는 본질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에 있어서 나타나는 가치이며, "상대적으로 좋다"는 것은 하나의 더 높은 가치의 실현에다 지향을 두고 있는 행위에 있어서 나타나는 가치이다(《윤리학에 있어서 형상주의와 질료적 가치 윤리학》). 그리고 "윤리적으로 좋다" 는 것은, 행위가 본래 지향했던 '가치 질료'에 따라 '행위' 와 '실현된 가치' 가 일치하는 경우이다.
무어 : 무어(G.E. Moore, 1873~1958)는 가장 단순한 윤리적인 관념으로서의 '선' 을 '윤리와 무관한'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시켜 정의하는 일을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부르면서, "선이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였다. '정의한다' 는 것은 한 개념을 여러 가지 요소로 분해해 내는 일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로 구성된 복합 개념만이 정의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좋다'는 것은 그보다 더 단순한 것으로 나뉠 수 없는 '단순 개념' (simple notion)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선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상 더 단순한 것으로 분석해 낼 수 없는 '선' 을 '정의한다' 는 것은 불가능하다(《윤리학 원리》).
V . 윤리에서의 선
'윤리적 선 은 인격적 의미의 '선' 으로서, 도덕법에 의해 인간의 행위 안에 요구되는 '완전함' 을 뜻한다. 이에 반해 '윤리적 악' 곧 '죄' 는 '윤리적 선' 의 반대 개념으로서, 인간의 완성 및 완전함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악의 이러한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죄는,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죄의 현실은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총체적이고도 완성된 삶의 현 실태로서의 윤리적인 선을 인간에게 역설적으로 요구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윤리적인 선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윤리적인 선은 세 가지 '질' (quality)을 갖는데, 가치 · 당위 · 목적이 그것이다.
〔가치로서의 선〕 어떤 사물이 욕구의 대상이 될 때, 곧 그 사물이 한 존재자의 본성적인 성향 및 자연적인 경향에 적합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좋다' 고 말한다. 여기서 '좋다' 는 말은 그 사물이 '가치가 있다' 는 말과 통한다. 따라서 가치와 선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가치가 곧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가치 곧 윤리적인 선에 있어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좋다' 는 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다' 는 점, 다시 말해 다른 것에 미치는 결과 및 효과와 는 별도로 독립된 가치라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윤리적인 선은 '본래적 선' (the intrinsic good)이라고 불리며, 이것이 윤리적 선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 및 양상이다. 그뿐 아니라 도덕적인 가치는 인격적인 가치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인격체가 그것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그 가치들이 각 존재의 가장 내밀한 중심이 되는 인격성의 표현이라는 점 때문에도 그러하다. 그런 인격성은 의지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서 드러난다. 결국 윤리적인 선에 있어서 강조가 되는 가치는 외적이거나 인습적인 가치가 아닌 본래적이고도 인격적인 가치이다. 좋은 명망이나 혈통과 같은 외적인 가치들은 인간을 더욱 영예롭고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인간을 순수하게 인간 그 자체가 되도록 도와 주는 본래적이고도 인격적인 가치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요구된다. 그것이 인격적인 존재의 자유로운 행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보편성을 띠며, 그것이 옳다는 것이 자명하게 입증되고, 다른 모든 가치들보다 탁월하며, 의무를 지우는 경우이다.
〔당위로서의 선〕 도덕적 의무 : 윤리적 선의 주된 성질 가운데 하나가 선의 의무적인 특성 곧 당위성이다. 당위로서의 선에서 강조되는 점은, 인간 각자가 완전하게 될 수 있는 만큼 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선악을 분별함과 동시에 도덕적인 의무감을 느끼기 마련이며, 이 '의무' 곧 '당위성' 을 '도덕적인 필연성' 이라고 부른다.
첫째로, 도덕적 의무 또는 도덕적 필연성은 객관적(objective)이다. 왜냐하면 '의지-행위' 의 대상(object) 곧 선한 행위의 종류 자체로부터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둘째, 도덕적 의무는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선택과 결정을 요구하는 도덕적인 필연성에 있어서 그 '요구' 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셋째, 도덕적 필연성은 주체의 자유 의지 위에 부과된다. 왜냐하면 자연 법칙(physical law)이 부과하는 물리적인 필연성(physical necessity)이, 자연이나 동물과 같이 자유 의지가 없는 존재들이 자연적인 경향 및 본능에 종속되어 운동하도록 방향을 지우는 데 반해 도덕적인 필연성(moral necessity)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은 채 자유 의지에 대해 내적인 구속력을 갖기 때문이다. 넷째, '도덕적인 의무' 는 '강박' 과 다르다. 도덕적인 의무가 내부로부터 오는 데 반해 강박은 외부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실천적 제일 원리 : 도덕법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도덕적인 의무 및 도덕적인 명령은, 일차적으로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 (Bonum est faciendum, malum est vitandum)는 '실천적 제일 원리' 안에서 표현되며, 더 나아가 이 원리로부터 파생되는 더욱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다른 모든 원리들 안에서 표현된다. 여기서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는 '실천적 제일 원리' 란, 도덕의 기초를 형성하는 '도덕의 제일 원리' 를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원리가 자연법의 다른 모든 계명들(alia praecepta legis naturae)을 성립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는 뜻에서, 이 원리를 '법(도덕법)의 제일 원리' 라고 불렀다 (《신학 대전》 I-Ⅱ . 994, a2, c). 그런데 그에 따르면 '원리' 또는 '제일 원리' 라는 말은 필연적이고도 보편적인 명제를 뜻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 및 마음 안에 각인되어 있는 근원적인 개념을 뜻하였다(《진리에 대해 토론된 문제들》 q11, al, c : a3, c).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수고함이 없이도 지성 또는 이성의 단순한 직관에 의해서, 인간의 본성 안에 각인되어 있는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는 '실천적 제일 원리' 를 모든 인간에게 타당하고 구속력을 지닌 보편적인 원리 및 절대적인 의무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윤리적 선' 은 '실천적 제일 원리' 안에서 요구되는 '당위(의무)로서의 선' 이라고 정의된다.
〔목적으로서의 선〕 목적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목적' 은 '그것 때문에 어떤 것을 행하는 것' 을 뜻한다(《물리학》 1094b 33 ; <형이상학> 1013a 33). 곧 '선' 이 다름아닌 목적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선이 곧 목적이고, 각각의 목적이 곧 선이다. 이 목적으로서의 선 때문에 인간은 어떤 행동을 의욕하며, 따라서 인간의 행동은 선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결국 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자신의 행동 또는 활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얻는 존재자들을 완전하게 해준다. 이 점은 윤리적 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곧 윤리적 선은 인격체인 인간이 실현하고자 추구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실현하는 인간을 인격적으로 완전하게 해준다. 이처럼 윤리적 선을 포함한 다른 여러 가지 선들은 인간이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완성에 이르는 데 있어, 곧 자신을 실현하고 가능성들을 완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전인적인 완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인간에게는 그 마지막 목적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수많은 중간 목적들이 있다. 일상의 선들이 다름아닌 그런 중간 목적들이다. 따라서 모든 선들은 목적이자 동시에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에 반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유일한 목적인 '절대적으로 궁극적인 선' 은, 결코 그 이상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는 마지막 것으로서 다른 목적들 및 선들이 결국은 그 궁극적 선을 향해 있는 것이다.
인간적 행위 : 인간적인 행위, 곧 윤리적인 행위는 전인적인 완성으로서의 궁극적인 선 및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길 또는 방법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선은 결국 인간의 '궁극적 목적' 과의 관계 안에 있다. 이런 관계는 인간의 전 존재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습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윤리적인 선악을 문제 삼는 윤리 신학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인간적인 행위와 습성을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의 관계 안에서 탐구한다. 인간적인 행위는 '인식' (knowledge) · '자발성' (voluntariness) · '자유' (freedom) 등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① 인식 : 윤리적인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행해야 할 선이고 어떤 것들이 행하지 말아야 할 악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곧 '지성' 이 필수적으로 전제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영혼혼론) 433a 14)를 따라 '지성' 또는 '이성' 을 '사변 이성' (intellectus specu-lativus)과 '실천 이성' (intellectus practicus)으로 구별하였다. 이때 사변 이성은 진리를 숙고하기 위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인 데 반해, 실천 이성은 진리를 실천에 옮기도록 지시하기 위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신학 대전》 I, q79, a11, c). 따라서 실천 이성이란 어떤 것들이 선의 성질을 지닌 채 목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영혼의 능력을 말하며, 양심이란 개별적인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 및 '선악' 을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실천 이성의 기능이다.
② 자발성 : 인간의 행동을 윤리적인 행위로 만들어 주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자발성이다. 따라서 '윤리적인 행위' 라는 말과 '자발적인 행위' 라는 말은 같은 뜻이다. 인간의 윤리적인 행위는 목적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인식과 의지로부터 나온 행위가 '자발적' (voluntarium)이라 불리는 윤리적인 행위이다. 곧 '자발적인 행위' (actus voluntarius)는 목적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 '의지의 동의' (consensus voluntatis)로 말미암은 행위이다. 결국 하나의 행위의 도덕성은 의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도덕성의 본질은 의지 앞에 윤리적으로 선한 것으로 또는 악한 것으로 나타난 대상에 대하여 의지가 동의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③ 자유 : 의지가 어떤 것에 대해 동의하고 무엇을 결정하려면, 의지에 필수적으로 무엇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것을 할 수도 있고 저것을 할 수도있는 '힘' (또는 '능력' )으로서의 자유가 수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이는 윤리적인 선을 행할 수도 윤리적인 악을 피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윤리적인 선악 자체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 의지에 의해 자유롭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그의 목적을 이루도록 이끌어 주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의 목적을 잃게 만드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행위가 전자일 경우 그것은 윤리적으로 선이고 후자일 경우 윤리적으로 악이다. 윤리적으로 선한 이성적인 선택들은, 만일 이런 선택들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것이라면, 최고 선인 하느님의 직관으로 인간을 인도할 것이다.
최고 선 : '선' 을 '본성적 성향의 충족' 이라고 이해할 때 '본성적 성향' 또는 '자연적 경향' 이 '사물' 의 본성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경우와 '인간' 의 본성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경우로 나뉘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적으로서의 최고 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곧 각 사물의 '본성적 성향' 이 충만한 현실태에 이른 경우에는, '선의 위계' 에 있어서 선들을 비교하는 것은 '존재의 위계' 에 있어서 존재자들을 비교하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선의 위계의 정점에 위치한 '최고 선' 은 존재의 위계의 정점에 위치한 제일 존재(primum ens)요 최고 존재(summum ens)인 하느님을 뜻한다. 그러나 '본성적 성향' 이 인간에게 적용되어 '의지' 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선의 위계의 정점에 위치한 '최고 선' 은 인간이 열망하는 "궁극적 완성"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을 위한 "궁극적 완성" 으로서의 '최고 선' 은,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느님 자신의 내적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종말에 누리게 될 이러한 초자연적 생명의 충만성은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지복' . '지복 직관' . '영원한 삶 · '천상 영광' . '하느님의 나라' 등 다양하게 불린다. (↔ 악 ;→ 가치 ; 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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