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宣敎

〔라〕missio · 〔영〕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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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선교의 기원을 성자와 성령의 파견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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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선교의 기원을 성자와 성령의 파견에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맡긴 대로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펼쳐야 하는 모든 사명. 좁은 의미로는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어설프게 아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회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이끄는 임무이다.
I . 원천과 근거
선교를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자각하는 교회는 선교의 기원을 성자와 성령의 파견에 두고 있는데, 성자와 성령의 파견은 하느님 아버지의 원천적인 사랑에서 나온 구원 계획에 따른 것이다(선교 2항) .
〔구원의 보편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 교령>(Ad Gentes)에서 "성부께서는 지극한 당신 인자(仁慈)로써 자유롭게 창조하시고 자비롭게도 당신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신적(神的)선성(善性)을 관대히 베푸셨으며, 또한 베푸시기를 그치지 않으신다"(2항)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3항). 한편 구약성서에는 이러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개념이 내재되어는 있지만 명확한 개념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받은 민족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의 보편성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부르심의 성격을 드러내는 대목도 적지 않다(창세 12, 3 ; 시편 22, 28 : 67, 2-3 ; 이사 56, 1-7 ; 19, 19-25 등).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보편성과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모든 민족에게 확장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하느님이 니느웨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요나를 설득하는 모습에서, 야훼는 모든 인간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모든 이들을 향한 그분의 자비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선교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데 비해 신약성서에는 전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 명령이 명백하게 등장한다. 결국 구원의 보편적인 사상과 선교해야 할 의무에 대한 자각은 신약성서에서 완성된 것이다(마태 8, 10-12 : 요한 3, 16-17 : 사도 10, 34-35 : 로마 10, 12-13 : 1디모 2, 4). 궁극적으로 사랑의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냄으로써 구체화되었으며, 마침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선교 2~3항).
〔선포의 의무〕 성자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세상에 온 것은 하느님 계시의 정점이며, 구원 계획의 완전한 성취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의 신비를 통해 당신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리고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예수는 공생활 초기부터 제자들을 뽑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견하였으며, 특히 승천하기 전에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시오"(마르 16, 15)라고 당부함으로써 교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할 의무를 지웠다(선교 5항) . 그러므로 선포에 대한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선포의 가장 우선적인 근거는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진리를 '증거' 함으로써 선포하였다(요한 3, 11 : 8, 14 : 히브 1, 1-2). 이에 따라 교회 또한 복음을 계속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루가4, 18-19 ; 마르 1, 15. 38). 둘째, 그리스도가 선교를 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복음과 그의 모든 가르침을 '선포' 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모든 복음사가들은 이 선포 명령으로 복음서의 끝을 맺고 있으며(마태 28, 18-20 : 마르 16, 15-18 : 루가 24, 46-49 ; 요한 20, 21-23), 사도 행전의 초반부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발견된다(사도 1, 8). 다양한 형식의 선교 명령은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인 공통점은 선교가 '모든 민족들' 에게 행해졌다는 점과 파견된 사도들이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복음사가들이 '선포' (마르코의 복음서), '제자를 만드는 것' (마태오의 복음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체험을 증언하는것' (루가의 복음서, 사도 행전)을 각각 최우선으로 강조하여 서로 다른 양상을 보였지만 선교 명령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말씀의 선포이다. 사실 사도들은 그들의 임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의 직무' 라고 간주하였다(사도 6, 2-4).
셋째, 예수는 다른 협조자 즉 성령을 보내 주기로 약속하였는데(요한 14, 16), 이는 복음 전파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성령과 결합되어 구원 계획이 보다 잘 실현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선교 4항). 성령 강림 사건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75항). 따라서 교회 안에는 예수의 영이 현존하고 있으며, 말씀을 선포하게 하는 역동성이 존재한다. 예수 자신도 세례를 받는 동안 성령에 의해 도유되었고, '기쁜 소식을 선포' 함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였다(루가 3, 23 ; 4, 18 이하). 넷째, 선포되고 받아들인 말씀은 신앙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즉 구원을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다(로마 10, 14-17).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은 회개, 즉 "신앙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완전하고 진지하게 귀의하는 것"(<교회의 선교 사명> 46항)을 지향하는 데 있다. 다섯째, 만약 선교 활동의 목적이 부분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라면, 공동체를 소집하고 형성하는 것은 '말씀' 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령을 받은 날에 베드로가 장엄한 설교를 하자 회개가 잇달았고, 그 후 최초의 공동체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교회의 선교 사명> 26항). 이렇게 예수와 제자들의 선교 활동으로 생겨난 교회(<현대의 복음 선교> 15항)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징표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성사와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펼쳐야 하는 교회의 선교는 거부할 수도 소극적으로 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사명이다.
II . 용어와 개념
선교라고 번역되는 '미씨오' (missio)는 '파견하다' 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미테레' (mittere)에서 유래하였다. 본래 '미씨오' 는 종교적인 범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던 개념은 아니었다. 단어 자체의 의미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한을 가진 이로부터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부여된 과제나 임무를 위임받아 수행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교는 어떤 합법적인 권한자로부터의 파견을 전제로 한다. 일단 파견을 받은 자는 파견한 자의 대리인으로서 파견자와 똑같은 권위를 갖고 행동하며 일반적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이 같은 '미씨오' 의 의미가 종교적인 환경 안에 그대로 도입되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성서의 많은 본문들에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권한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파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성서 안에서의 개념〕 보내다 · 파견하다 : 이 단어는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다. 모세(출애 3,15) · 기드온(판관 6, 14) · 예언자들(2역대 24, 19 : 예레7, 25 : 이사 6, 8 이하 등)은 자신들이 하느님에 의해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는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를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낸 자로 이해하였으며, 예수는 나자렛의 첫 연설에서(루가 4, 18) 이사야서 61장 1절을 자신에게 인용함으로써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밝혔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보내다' (ἀποστέλλω) · '파견하다' (πέμπω)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진 '하느님의 아들' 이며 이로써 예수의 사명이 정당화되었고(10, 3)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신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보법니다"(20, 21)라고 선포하였다. 그분은 열두제자를 마치 이리 떼 가운데에 양처럼 보냈으며(마태 10,16 : 루가 10, 3), 직접 방문할 모든 마을과 고장에 일흔두 제자를 미리 보내기도 하였다(루가 10, 1). 이렇듯이 세상속으로 예수 자신이 파견된 것은 곧 제자들을 파견하는 근거가 된다(요한 17, 18).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구원 활동은 <선교 교령> 1~5항에서 '교회의 사명' (missio Eccle-siae)이라고 부르는 것, 즉 보냄과 보내짐과 관계된다.
전하다 : 선포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용어로 '전하다' (παραδίδωμι)라는 말이 있다. "실상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1고 린 15, 3). '전하는 것' 은 초대 교회에서 선포의 가장 권위 있는 형식이었으며, 그들이 받은 것을 성실하게 전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용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계시8항, 10항)와 교도권의 최근 문헌들, 특별히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n Nuntiandi 1975. 12. 8)에 의해 채택되었다(4항, 15항, 78항). .
케리그마 : 복음 선포를 설명하는 가장 특징적인 용어로 '케리그마' (κήρυγμα)를 들 수 있다.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지를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케리그마는 최초의 선포를 의미하는데, 능력 있는 지도자의 이름으로 전달자가 대중 앞에서 장엄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복음 선포에 대한 개념을 표현하는 이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는 다른 형태의 설교들, 예를 들어 교리 교육과 구별이 된다. 공생활을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 하는 것으로(마르 1, 14) 시작한 예수는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교를 명령하였다.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시오"(마르 16, 15). 바오로는 하느님이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기로 기꺼이 작정하셨습니다" (1고린 1, 21)라고 전함으로써 케리그마적인 설교를 보여 주고 있다.
복음을 전하다 · 알리다 : 선포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용어는 '복음을 전하다' (εὐαγγελίζομαι) 혹은 기쁜 소식을 '알리다' (ἀναγγέλλω, ἀπαγγέλλω)라는 말이다. 구약성서에서 이 말은 메시아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의미할 때 사용되었을 정도로 어휘가 풍부하다. 그 좋은 예가 시편 96편 2-3절의 "주님께 노래하라, 그 이름을 찬미하라. 나날이 선포하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 사이에 그분의 영광을 민족들 사이에 그분의 기적들을"이다. 이 구절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하여 행한 경이로운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증언 : 선포를 서술하기 위한 개념으로서는 '증언'(μαρτύριον)이라는 말이 있다. 이 개념은 어떤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선포와 계시를 위해서 사용되었으며, 선포와 증언은 종종 함께 발견된다(사도 2, 40 : 8, 25 ; 1요한 1, 1 이하). 증언은 추상적인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것을, 그래서 살아 있는 메시지를 알린다(묵시 1, 5 ; 요한 3, 11). 예수는 제자들을 '증인' 으로 전세계에 보냈다(사도 1, 8). 사도들은 선교적인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법정에 불려 다녔고, 그곳에서 예수에 대한 케리그마를 설명하면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들이며 ··성령도 그 증인입니다"(사도 5, 32)라는 말로 끝맺음하였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불려 나올 때마다 예수가 약속하였던 대로 성령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성령은 보호해 주는 변호자가 되어 주었다 (마태 10, 18-20). 이에 비추어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협조자' (παράκλητος)로서의 성령에 대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요한 14, 15-26). 성령은 사도들에게-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예수를 체험하도록 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을 증인으로 변화시켰다.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Redemptoris Missio, 1990. 12. 7)에서는 성령 강림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을 변혁시키는 강력한 체험을 하였으니 곧 성령의 강림이었다. 성령의 강림은 사도들이 겪은 예수 체험과 이로 인한 강한 희망을 타인에게 전하고자 하는 조용한 대담성을 사도들에게 부어 줌으로써 그들을 증인과 예언자가 되게 하셨다(사도 1, 8 ; 2. 17-18 참조).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과감하게(사도 2, 29) 증언할 능력을 주셨다"(24항).
〔개념의 변천〕 교회가 그 기원부터 선교 활동을 펼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에 이 개념은 '신앙의 전파' · '이교도의 개종' · '무지한 자들에 대한 종교 교육' · '사도적 선포' · '복음의 선포' · 교회의 부식(扶植)' · 그리스도 왕국의 확장' 이라는 구절들로 표현되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지리적으로 신대륙을 발견한 16세기경부터 교회의 선교 의식이 새로워졌다는 점이다. 선교 활동에 대한 열정이 새로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선교 개념이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펄치는 특정한 활동이라기보다는 개괄적인 뜻으로 쓰였으며, 주로 권한자 편에서 파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선교' 라는 말을 근대적인 의미로 사용한 사람은 로율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 , 아코스타(Jos Acosta), 예수의 토마스(Thomas of Jesus) 등이었다. 특히 선교라는 개념은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와 그 동료들에 의해 교황이 명한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예수회 회원들은 '선교들에 관하여' (circa missiones)라는 네 번째 서원과 함께 수도회 총장을 통하여 교황에게 철저히 순명할 것을 서약하였는데, 교황이 보내는 곳이면 어디든, 다시 말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물론 이교도들이나 교회 분리주의자들 심지어 비신자들에게까지도 간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개념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평소 생활하던 곳을 일시적으로 떠난다는 의미로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권한을 부여한 파견' 이라는 개념이 변함없이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었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라는 특정한 과업을 위탁한다는 뜻이 내포되었다.
1622년에 포교성성(지금의 인류 복음화성)이 설립된 후, '선교 라는 말, 무엇보다도 복수형인 '선교들' (missiones)이라는 말은 어느 한정된 지역에서 펼쳐지는 교회 활동의 일정한 형태나 범주를 명시하기 위하여 더욱 구체적이고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자치 선교구' (missio sui iuris) 또는 '선교 지역' (territorium missionis)이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지목구(praefectura apostolica)와 대목구(vicariatus apostolicus)가 설정되었다. 이는 아직 교계 제도가 설립되지 않았거나 현지인 성직자가 없는 한정된 지역으로서 포교성성에 속하였던 지역을 지칭하였다. 한편 '선교' 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의는 19세기 말 선교학(missiologia)의 발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Ⅲ . 교회 문헌을 통한 정의
〔<선교 교령>〕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 교령>을 통하여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扶植, implantatio)하는 독특한 사업"(6항)이라고 선교를 정의하였다. 그런데 이 교령에서는 교회의 선교적인 활동을 설명하면서 '선교' 의 복수 형태인 '선교들' 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일반적인 교회의 사명인 선교 활동이 어느 한 가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펼쳐져야 함을 뜻하였다. 그리고 선교라는 용어는 이때부터 보다 전문화된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선교 교령>에서 선교 개념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고 많은 부분이 교회 설립 이론이나 지리적 혹은 교회법적인 개념에 결속되어 있지만, 전통적인 선교 개념에 비해 풍부해졌으며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교회와 그의 선교성을 예수와 성령의 파견에 기원을 두는 사실이 무엇보다 강조되었다(2항) 또 교회의 선교는 본질적으로 예수의 선교를 계속하는 데 있으며 이는 다양한 방법과 환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5항). 선교 활동의 한 형태는 명백히 복수 형태인 '선교들' 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지역 교회를 설립하는 목적과 함께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민족이나 집단에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실행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6항). 그러나 그 지역에서 부분 교회를 설립한 다음에도 선교 활동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비를 모르거나 믿지 않는 환경이 있기 때문이다(6항). 한편 "전에 창설되었으나 지금은 후퇴 혹은 약체화(弱體化) 상태에 있는 교회들에게도 이 선교 활동은 도움을 주어야 한다" (19항). 반면에 이 선교 교령에서는 '선교들' 이라는 표현보다는 '선교 활동' (activitas mis-sionalis)이라는 표현이 더 강조되었는데, 선교 활동은 간혹 '선교들' 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마치 교회의 사명들의 총체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9항).
〔<현대의 복음 선교>]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는 '선교들' 이라는 말을 전통적인 개념과 전문 용어로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개념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대신 '복음화' (evangelizatio)라는 용어가 '선교들' 의 본질이나 교회의 모든 사명을 한 가지 근본적인 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또 '복음화' 와 '선교 활동' 을 명백히 구별하였는데,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복음화' 즉 교회의 사명' 을, 고유한 의미에서는 '선교 활동' 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예수나 교회와 관련하여 간혹 단수인 '선교'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고(6항, 14항, 15항), 드물지 않게 단수형 '선교' 가 복음화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두 단어가 서로 결합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15항,19항, 75항).
〔<교회의 선교 사명>] 개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25년 동안의 선교학적인 논쟁 끝에 <교회의 선교 사명>을 반포하여 긴급하고 필요한 활동으로서 선교 활동에 다시 관심을 갖도록 촉구하였다. 아울러 선교 개념이 더욱 풍부해지도록 몇몇 요소를 제공하면서 '복음화' 활동의 상황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그리스도와 복음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여 그들의 환경에서 신앙을 가꾸고 다른 집단들에게 선포할 수 없는 민족이나 인간 집단의 경우이다. <선교 교령> 6항에 의거하여 교황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의 활동을 '외방 선교 (missio ad gentes)라고 불렀다(33항).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외방 선교 인데 교회가 가진 선교의 성격을 더욱 명백한 방법으로 표현하면서 때로는 특수한 면에서의 선교로, 때로는 선교 활동으로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2~3항, 7항, 21항, 31~34항, 37항). 반면에 복수 형태인 '선교들' 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둘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적합하고 견고한 구조를 가지고 신앙과 생활에 열성적이며 자기 지역에 복음의 증거를 확산시키면서 보편적인 선교 의무를 갖는 경우이다. 이것은 '복음화' 혹은 '교회의 사명' 에 속한 '일반적인 사목적 직무' 의 영역으로서 그 목적이나 방법 및 대상자들이 '외방 선교 의 경우와 상당히 다르므로(33항)이것은 '복음화' 의 특별한 분야로 간주되어야 한다. 셋째, 위의 두 경우의 중간 상황이 오래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진 나라들과 때때로 신생 교회들에서 나타난다. 그 곳에서는 세례받은 집단 전체가 신앙의 활력을 잃었거나 자신들이 더 이상 교회의 일원이 아니라고 여기기까지하며, 그리스도와 복음에서 유리된 생활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새 복음화' 혹은 '재복음화' 가 요구된다(33 항)
교황이 이 세 가지 활동 분야를 구별 지은 것은 최근의 혼란스러운 '선교 용어' 의 사용에 관한 논쟁(32항) 때문만이 아니라 사목적인 배려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로 '선포' (바꾸어 말해 missio ad gentes)는 일반적인 사목자의 활동' 과는 다른 방법과 자세를 필요로 한다. '새 복음화' 역시 오랜 기간 마음을 닫은 이들을 위해 또 다른 방법과 특별한 배려가 요구되는데, 이것은 물론 복음화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분야는
서로 중복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구별하려는 목적은 각각의 책임 영역의 중요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교황은 이처럼 세 가지 영역을 구분하면서도 외방 선교를 고유한 선교 활동이라고 부르며, 이는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이나 집단,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 교회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가 아직 복음의 영향을 입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활동" 이라고 정의하였다(34항) 한편 교황은 비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하는 특수한 선교 임무(34항)인 외방 선교를 교회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행위로 간주하였는데(31항), 이는 다른 두 복음화의 활동 분야가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 용어에 대한 재정의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던 용어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혼란 속에서 '선교' 그 자체의 참된 개념이 상실되지 않도록 그 특별한 분야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선교 활동의 범위 :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는 선교 활동이 일반적으로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면서 지리적인 범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새로운 상황은 외방 선교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선교 개념에 의해 선교지라고 불리던 지역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 교류로 인해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대도시도 선교의 주요 대상이 된다. 특히 소외된 사람, 비그리스도인 젊은이들, 이주민이나 피난민들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필요하다(37항). 아울러 선교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는데 이는 새로운 선교의 장(場)들이다. 첫째가 홍보의 장이다. 홍보 수단을 통해 복음 선포를 확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문화의 복음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홍보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또 다른 선교의 장으로는 민족들의 평화와 발전과 해방의 추진, 인권 옹호,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의 권익 향상, 자연 보호, 문화와 과학 탐구, 국제 관계 등을 들 수 있다(37항). 이처럼 선교 개념은 지리적 · 교회법적인 경계에 의해 전통적으로 규정된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적 · 문화적 · 종교적인 특성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특수한 선교 활동인 외방 선교는 그 중요성이 없어지지도 감소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지평이 확장될 뿐이다.
IV . 목 적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다. 따라서 교회가 선교하지 않는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맡긴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에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 즉 인간의 구원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에서 구원이란 "현세에서 시작되지만 영원 안에서 완성되는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구원"(<현대의 복음 선교>27항)을 말한다. 따라서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교회는 보다 더 밀접하게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그들을 '그리스도교 공동체' 로 부르므로, 인간이 교회에 결합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回心)이 낳은 자연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교회는 그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교 활동을 통해 선교의 궁극 목표를 지향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가 설립되기를 추구해 왔다. 그러므로 선교 활동의 목적을 구원 · 교회의 설립 · 인간 발전의 세 가지 양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선교 행위' 의 세 가지 양상이므로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궁극적 목표로서의 구원〕 예수가 선교를 한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명으로부터 태어난 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를 선교 활동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하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구원' 이라하여, 교회 자체에 인간을 구원하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구원의 도구이며 성사임을 자각하는 교회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들이 신앙과 회개를 통해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각자의 응답에 달렸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마르 16, 16), 선교 활동의 목적이란 바로 '인간 구원' 임을 명백히 밝혔다(요한 3, 17). 또한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중심 내용도 바로 인간 구원의 문제인데,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사도 4, 12).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하느님은 구원의 선물을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구별 없이 주었다(사도 11, 14. 17)고 하였다. 아울러 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사도 16, 30-31). 또 바오로는 사도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는 첫째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이들의 구원 때문이며, 둘째는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데 대일부 유대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1데살 2, 16) 자신이 이방인들의 사도임을 자각하면서 유대인들의 구원 역시 추구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로마 11, 13-14).
이처럼 예수와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늘 '인간 구원' 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구원' 이며, 교회 문헌들도 선교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구원' 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선교 교령>의 첫 부분은 '구원의 보편적인 성사' 로 불리는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자기 사명에 더 긴급하여야 한다"(1항)라며 선교하는 교회가 지닌 구원적인 특성을 잘 표현하였다. <평신도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에서도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인간 구원을 목적하고 있다"면서 복음을 널리 알려야 함을 강조하였다(6항).
한편 교황 바오로 6세는 복음적인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교회의 근본 의무임을 다시 한번 피력하였다. "복음의 메시지를 제시하는 일은 교회가 임의적으로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이가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의 명에 의해 맡겨진 의무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5항).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구원' 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23항에서 "선교의 최종 목적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교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 활동의 최종 목표는 구원이며, 교회는 구원의 성사와 도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특수 목적으로서의 교회 설립〕 <선교 교령>은 선교활동의 본 목적이 교회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백성이나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심는 일이라고 하였다(6항).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심거나 설립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 활동의 특수한 목적 또는 당면한 목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선교는 물론 사목 활동이나 교회 일치 운동과도 분리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심거나 설립하는 것은, 교회가 복음 선교 활동을 완수하는 데 있어서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도들의 설교는 초대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공동체는 늘어갔으며 발전하였다.바오로 사도는 새로 탄생된 공동체를 돌보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사도 15, 36 : 18, 21-23) 동시에 이방인의 사도로 불린 자신의 소명에도 충실하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구원의 메시지를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사도 13, 48-49). 그는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이에게, 특히 아직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곳에, 즉 교회가 없는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였다(로마 15, 20-21). 깨달은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개간한 지역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 또 다른 곳을 향하였던 것이다(로마 15, 23).
1944년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선교의 위대한 목적은 새로운 땅에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며, 그곳에 뿌리가 굳게 내리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AAS 36,1944, p. 210). 이어 회칙 <에반젤리 프레코네스>(Evangelii Praecones, 1951.6.2)를 통하여 선교 활동의 목적은 "첫째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새로운 민족에게 전하고 신앙을 촉진시키며, 둘째 현지 교회를 설립하는 것, 즉 현지인만이 아닌 현지인 성직자와 그들로 이루어진 교계 제도까지 설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AAS 43, 1951, p. 507). 또 교황 바오로 6세는 "복음 선포는 복음의 메시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그 땅에 심는 데 의미가 있는 만큼 성체성사에 정점을 둔 성사 생활의 힘 없이는 교회 건설도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교회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현대의 복음 선교> 28항) .
그러나 이 교회 설립의 이론은 선교 또는 선교 활동의 특수한 목적이지 결코 유일한 목적이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이 강조되어야 한다. <선교 교령>에서도 이 선교 활동, 즉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일반적인 선교 활동과 구분됨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이 선교 활동에 있어 어떤 때 복잡한 여러 단계가 발생한다. 먼저는 시작 혹은 부식의 단계이고, 다음은 새로움 혹은 젊음의 단계이다. 이런 단계들이 완성된다고 하여 교회의 선교 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벌써 설립된 부분 교회들에는 그 선교 활동을 계속 해나가야 하며 아직 밖에 있는 각 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된다"(6항) 그러므로 여기서 선교 활동이란 단지 교회를 세우는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설립은 이제 더 이상 교회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선교의 다른 양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
〔종말적인 구원과 인간 발전〕 교회의 선교 활동에 긴밀히 연관되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종말적인 구원과 인간 발전이다. 전자는 초월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현실적인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지상생활을 하면서 기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바로 이 기적을 베푸는 행위에서 이 두 가지 차원이 일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진실로 인간의 삶을 선택하였고 실제로 그대로 살았다. 동시에 예수는 항상 청중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실제를 깨닫도록 노력하였다. 즉 예수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종말론적인 차원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는 구원으로 부름받은 인간으로서의 참된 존엄성을 깨우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이 구원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보여 주었던 삶과 가르침에 늘 충실하기를 희망하면서 복음 선포와 인간 발전을 위한 사명의 조화를 추구해 왔다. 사실 인간 발전은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알리지 않고서는 결코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참된 존엄성을 깨우치고 구원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도록 하면서 이 구원의 실현을 위해 인간을 회개로 끊임없이 부르고 있으며, 모든 인간이 이 작업에 참여하기를 호소하고 있다. 다른 한편 복음은, 인간은 홀로 구원을 이룩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더욱이 이 구원은 종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선교는 세속적인 어떤 계획이 비록 아무리 승고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구원과 종말을 목적으로 가지는데 이 목적은 후세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사목 40항). 물론 이 말은 교회가 인간이 처한 물질적 · 현세적인 차원을 무시한다거나 소홀히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의 선교적인 특징은 인간 사회의 현세적인 발전을 저지하지 않는다. 사실 창조주 하느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하셨다(창세 1. 28).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3. 26)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도 역시 창립자의 가르침과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 여러 민족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인간적인 향상도 꾀하여 왔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12항). 또 제2차 바티칸 공의 회는 <사목 헌장>(Gaudium et Spes)을 통하여 사회적 · 정치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43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교회에 부여한 선교 사명은 어디까지나 정치 · 경제 · 사회에 관한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질서에 관한 것이므로(42항) 교회는 구원의 도구로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임무에 힘써야 한다(40항). 이러한 종말론적인 구원과 인간 발전과의 관계는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도 많이 언급되었다. 물론 이 관계가 복음화의 맥락에서 표현되었음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 복음화는 명확하게 인간 발전을 위한 임무를 포함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를 통하여 교회가 선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정의 · 해방 · 개발 평화에 관한 문제들의 중요성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만일 이러한 문제들을 무시한다면 "고통과 궁핍중에 있는 이웃에 대한 복음적인 사랑의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31항).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려는 대상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소홀히 하면서 오로지 영적인 것에만 몰두한다는 것은 결코 복음적' 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교회가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인 임무에만 자신의 역할을 국한시킨다면 복음 정신에 위배될 것이다(32항) .
여하튼 복음화의 최종 목표는 구원이다. 이 구원은 현세에 한정된 물질적 · 정신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구원이 아니다. 참된 구원은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채워지는 구원, 현세에서 시작되지만 영원 안에서 완성되는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이다(27항, 34항). 따라서 교회는 선교 활동을 통해 인간의 참된 해방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들을 구원으로 이끌면서 인간들의 참된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여야만 한다. (⇦ 전교 ; 포교 ; → <교회의 선교 사명> ; 복음화 ; 복음화 ; <선교 교령> ; 선교사 ; 선교의 역사 ; 선교학새; 선교 회칙 ; <현대의 복음 선교>)
※ 참고문헌  Dizionario di Missiologia, EDB, Bologna, 1993/AA.VV., Following Christ in Mission, A Foundational Course in Missiology, Paulines, Nairobi, Kenya, 1995/ 一, Riflessioni sulla Redemptoris Missio, Urbaniana Univ. Press, Rome, 1991/ André eumois, Teologia Missionaria, EDB, Bologna, 1993/ J.A. Scherer · S.B. Bevanseds., New irections in Mission & Evangelization 1, Basic Statements, 1974~1991, Orbis Books, Maryknoll, New York, 1944/ A. Wolanin, Teologia della Missione, Editrice Pontificia Univ. regoriana, Roma, 1994. 〔金俊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