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과 형성〕 설립과 인가 : 수도회 설립은 성 빈천시오가 농민들의 교리 지식과 교육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1617년 1월 17일 빈천시오는 고해성사를 주기 위하여 공디(Gondi) 가문이 후원하고 있는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한 성당을 방문하였는데, 그의 설득력 있는 강론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성당으로 모여들게 되었으며, 영적 지도를 해주던 공디 가문의 요청으로 인근 마을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 1625년 4월 17일 공디 가문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글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교리 교육을 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과거 자신의 모든 잘못을 고백하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가톨릭 교리를 바탕으로 한 자선 사업 단체"를 조직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을 빈천시오에게 약속하였다. 이와 함께 공디 가문 출신으로 파리의 교구장이었던 장 프랑수아(Jean-Francois de Gondi)는 1626년 4월 24일 수도회 설립을 허가해 주었다. 같은 해 9월부터 파리에 있는 '봉 장팡 학교 (Collège des Bons-Enfants)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빈천시오와 다른 3명의 신부들은, 시골로 가서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는 한편, 농번기에는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수도 생활을 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활동 지역에서 보다 조직적으로 봉사할 단체로 '애덕회' (Confrérie de la Charite)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1632년 1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뒤(
규칙과 서원 및 운영 : 선교 수도회는 수도 규율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재속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도록 하였으며, 수도회 규율은 총 12개 항이었다. 복음 교육 · 청빈 · 정결 · 순명 · 병자 간호 · 겸손 등을 실천하는 것이 수도회의 목적이라고 밝힌 이 규율에는, 이밖에도 회원들간의 관계 · 대외적인 관계 · 신앙의 실천 · 선교 · 기타 다른 임무 등이 명시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역할을 통해 은혜를 갚는 방법 등도 규정하였다.
처음에 빈천시오는 회원들이 수도 서원 없이 고유한 사도직을 추구하고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회헌의 준수를 통하여 애덕을 완성하도록 하는 공동체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회원들의 소속감과 연대 의식을 확립하기 위하여 서원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단순 서원(votum simplex)과 사적 서원(votum privatum)을 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은 오직 교황과 수도회의 총원장만이 부여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 서원 형식은 프랑스는 물론 로마에서조차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을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커다란 저해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더욱이 회원들은 이러한 서원 형식을 도입하는 것이 기존의 제도와 비교할 때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고는 서원을 철회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서원 형식은 1641년 10월 19일 파리 교구장의 인가를 받았고, 1655년 10월 19일에는 교황 알렉산델 7세(1655~1667)에 의해 재가를 받았다(
수도회 운영과 관련된 정관은 교황 글레멘스 10세(1670~1676)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1670. 6.2), ,이 정관에 의하면 최고 권한은 12년마다 소집되는 총회에 있으며, 통상적인 권한은 종신직으로 선출되는 총원장에게 있고 총원장은 4명의 참사를 둘 수 있다. 그리고 각 관구에는 담당 선교 지역과 고유의 권한 영역이 부여되며, 관구장이 총회의 권한을 대행하면서 관구 내 분원들을 통제하는 권한을 행사한다. 이 정관은 1953년 7월19일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로부터 새로운 정관을 인가받기 전까지 유지되었지만, 실제로 새 정관이 예전의 정관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확장과 변모] 선교 수도회는 생 라자르 수도원에 정착한 후 확장을 거듭하면서 선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635년에 툴(Toul)에 선교 본부를 설치한 후 부터 프랑스 각지에 선교 본부 · 신학교 · 성당 등이 세워졌는데, 1660년에 빈천시오 아 바오로가 사망할 당시 프랑스 내에만 23개의 분원과 15개의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선교 수도회는 이들 기관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성직자 양성을 위한 많은 계획들은 1628년 보베(Beauvais)에서 개최된 최초의 성직자 피정으로 시작이 되었다. 또 1633년부터 프랑스 혁명 때까지 생 라자르 수도원에서는 서품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성직자들의 피정, 신부들과 평신도들의 피정, 가난한 이들을 도와 주는 방안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개최되었는데, 특히 성직자들이 매주 화요일마다 모인 '화요회'가 1632년부터 개최되어 열심한 성직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봉 장팡 학교' 는 1636년에 신학교가 되었다.
1642년부터는 로마를 시작으로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국가들로 활동 영역이 확장되었다. 특히 교황청 직속의 성직 서임 후보자들은 선교 수도회가 개최하는 피정에 참여하여야 했다. 이후 선교 수도회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비롯하여 스페인 · 포르투갈· 독일 · 북아프리카 등지로 선교 활동을 확산시켰으며, 중국과 인도에까지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수많은 분원을 보유하고 신학교들을 운영하던 선교 수도회는 1792년 프랑스 혁명 이후 활동이 위축되고 말았다. 즉 160여 개의 신학교 중에서 51개만 운영되었고 프랑스의 분원도 78개로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에 다시 재건되어거의 전세계로 활동 영역을 확대하였는데, 성 빈천시오아 바오로가 사망한 지 300년이 지난 1960년경에는 회원수가 전세계에 약 6,000명 정도를 헤아리게 되었다.
〔활동과 정신] 선교 수도회의 사도직은 회원들의 완덕, 빈민 특히 농촌 빈민의 구제, 성직자들이 지식과 덕을 얻도록 도움을 주는 것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빈천시오는 이 가운데 두 번째 사도직은 선교를 통해서, 그리고 세 번째 사도직은 신학교 운영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였다. 그런데 세 번째 사도직은 두 번째 사도직에 종속되는 것이고, 따라서 선교 수도회의 본질적인 목적은 농촌에서의 선교에 있었다. 선교 수도회 회원들이 담당했었고 또한 현재도 담당하고 있는 모든 임무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임무의 발전 혹은 보충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선교 수도회에서는 우선적으로 농촌 지역에서의 선교·신학교에서의 성직자 양성 · 비그리스도교 지역에서의 외방 선교 등 기본적인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외에 본당 · 학교 · 병원 혹은 교육 기관에서의 사목 활동등도 수행하고 있다.
빈첸시오가 원했던 선교 수도회의 근본 정신은 5가지의 덕성, 즉 단순 · 친절 겸손 · 고행 · 열성 등이었다. 현재 회원들이 수행하고 있는 활동 즉 교수나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통해서 볼 때, 마음의 단순성 · 근대적인 선교 방식에 대한 연구와 반성 · 초자연적이고 열렬한 열성등과 같은 정신들로 대표되는 선교 수도회의 정신과 영성은 회원들을 활성화시키는 대표적인 요소들이다. 선교수도회 회원들은 청빈 서원을 하였더라도 자신의 재산을 간직할 수 있지만, 만일 그 재산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반드시 자선 사업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또 선교 수도회 사제들은 전통적인 신학 노선을 따르는데, 회원들 중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가톨릭의 정통 교의를 가르치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선교 수도회는 교회 내에서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us) · 갈리아주의 (Gallicanismus) · 얀센주의(Jansenismus) · 신앙주의(fideis-mus) · 이성주의(ratioalismus) · 근대주의(modernosmus) 등 이단적 흐름이 발생하였을 때마다 이에 대항하여 싸워왔다. 수도회 내에 얀센주의를 추종하는 회원들이 늘어나자 이들의 주장을 단죄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하기 위한 총회가 1724년에 수도회 자체에서 개최되기도 하였으며,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옹호하였다. 이처럼 선교 수도회는 언제나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에 순응하며 따르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였다.
〔중국과 한국 교회와의 관계〕 중국 진출 : 선교 수도회 소속으로 처음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는 1699년 광주(廣州)에 도착한 아피아니(Appiani 畢天祥) 신부와 뮐르네(Mullener, 穆天尺) 신부였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 수도회 자체의 진출이 아니라 포교성성(현재의 인류 복음화성)에서 중국에 신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파견한 것이었다. 1711년에는 페드리니(Pedrini, 德理格) 신부가 세 번째로 입경(入京)하여 1726년에 서당(西堂)을 설립하였다.
선교 수도회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진출한 것은 1785년이었다. 교황청이 1783년 12월 7일 선교 수도회로 하여금 해산된 예수회의 중국 전교 사업을 대체하도록 하였고, 이에 선교 수도회 소속의 프랑스 선교사인 로(N.J.Raux, 羅廣祥, 1754~1801) 신부와 길랭(Ghislain, 吉德明)신부, 파리(Paris, 巴茂正) 수사가 1785년에 북경에 도착함으로써 공식적인 중국 진출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어 1801년에는 포르투갈 선교사인 피레스 페레이라(G.Pirés-Pereira, 畢學源) 신부와 리베이로 누네스(Ribeiro-Nunes, 李拱震) 신부가 도착하였고, 1808년 프란치스코 회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북경 주교가 사망한 이후에는 선교 수도회 소속의 사제들이 북경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즉 구베아 주교의 후임으로 수자 사라이바(Souza Saraiva, 1808~1818) 주교가 임명된 데 이어서 리베이로 누네스(1818~1826) 신부, 피레스 페레이라(1828~1838) 주교, 카스트로 에 무라(Jean de Franca Castro e Moura, 趙, 1838~1846) 신부, 물리(Joseph-Martial Mouly, 孟振生, 1846~1856) 주교 등이 총대리 자격으로 북경교구를 관할하였다.
한편 교황청에서는 1856년에 포르투갈의 북경교구에 대한 보호권을 철회하고, 감목 대리구(vicariatus apostoli-cus)로 설정하였다. 선교 수도회는 이후 북경을 위시한 중국 각지에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북경교구에 물리 주교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이래 1924년까지 선교 수도회 소속의 주교들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강서(江西)교구 · 절강(浙江)교구 · 천진(天津)교구 · 순덕(順德)교구 등은 프랑스 선교 수도회 회원들에게 맡겨졌고, 영평(永平)교구는 독일 선교 수도회에 맡겨졌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선교사들은 모두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수도회 소속의 현지인 사제들만이 중국에 남아 활동하였다.
중국에서의 선교 수도회 활동은 크게 '선교' 와 '현지인 사제 양성' 으로 나눌 수 있다. 선교의 경우 북경교구를 예로 들면 1856년에는 신자수가 17,000명, 1868년에는 24,000명, 1884년에는 32,000명으로 꾸준히 증가하였고, 사제 양성의 경우 뮐르네 신부가 사천(四川)에 신학교를 세운 이후 북경교구 강서교구 · 절강교구등에도 신학교를 세워 많은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였다. 그 결과 1941년의 수도회 소속 중국인 사제는 중국 전체의 현지인 사제 2,186명의 4분의 1이 넘는 610명이 되었다. 또 1842년에는 빈천시오가 세운 '빈첸시오 아바오로 사랑의 딸회' (Compagnie des Filles de la Charité) 소속 수녀들이 중국에 진출하여 병원 · 고아원 · 양로원의 운영과 교육 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한국과의 관계 : 선교 수도회가 한국 교회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북경의 선교 수도회 책임자 겸 북당의 프랑스 선교단장인 로 신부가 1790년 2월에 조선 교회의 밀사인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에게 세례를 준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 교회가 본격적으로 선교 수도회와 관계를 맺는 것은 신유박해 이후 선교 수도회에서 북경교구를 관할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즉 당시 교회의 재건을 꾀하던 조선 교우들은 1811년에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조선 교회의 상황과 성직자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이 편지가 마카오에 머무르고 있던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어 1813년에 이여진이, 1816년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이 재차 성직자 영입을 위하여 북경을 방문하자 수자사라이바 주교는 1817년에 밤(Vam) 요한 신부와 신(Xin Vellozo) 플로리아노 신부를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병으로 조선 입국에 실패하였다. 이후 리베이로 신부도 1826년에 성직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던 정하상과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은 1825년에 다시 한번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이 북경을 거쳐 마카오에 주재하던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인 움피에레스(Umpiemes) 신부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이를 선교 수도회 회원인 라미오(Lamiot, 南彌德) 신부의 도움으로 라틴어로 번역한 뒤 로마로 발송하였다. 이 청원서는 1827년 교황청에 도착하였고, 이를 계기로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구는 포르투갈의 보호권 아래 있었고, 조선은 북경교구장 관할이었다. 이에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를 계속 북경교구의 관할 아래두고자 하였으며, 당시 남경교구장으로 북경교구까지 관할하고 있던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 포교지에 대한 재치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 Bruguière)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로 조선 입국에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835년 서부 달단(韃靼)의 교우촌인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결국 선교 수도회 회원들은 조선교구 설정 이전에는 조선 교회를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조선교구가 설정되면서 특히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프랑스 선교사들과는 달리 보호권과 관련해 교구 설정에 부정적인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 라자로회 ; 선교 사제회 ;→ 보호권 ; 북경교구 ; 브뤼기에르 ; 빈천시오 아 바오로)
※ 참고문헌 R. Chalumeau, 《Cath》 7, pp. 114~120/ N.C. Eberharct,《NCE》 14, pp. 685~688/ 《ODCC), p. 961/P. Coste, 《DTC》 17, PP, 88~93/A. Oligschliger, 《LThK》 7, pp. 844~845/ A. Thomas, Histoire de la Mission de Pékin, Paris, 1923/ Alphonse Hubrecht, La Mission de Pékin etles Lazaristes, Pékin, 1939/ 羅光主 編, 《天主教在華傳教史集》, 光啓出版社, 1967/ 최석우, 朝鮮教區 設定의 敎會史的 意味〉, 《교회사 연구》 4,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pp. 59~81. [邊琪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