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역사

宣敎 - 歷史

s라]historia missionum · [영]history of the mi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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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자신의 선교 사명을 도와 줄 12명의 제자들을 뽑아 3년 동안 동고 동락하며 그들을 교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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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자신의 선교 사명을 도와 줄 12명의 제자들을 뽑아 3년 동안 동고 동락하며 그들을 교육하였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서 그 기원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 (missio Dei)에서 찾는다.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어 인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었고, 성령은 성자의 요청에 의해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인간들을 성화한다. 성자는 자신의 선교 사명을 도와 줄 12명의 제자들을 뽑아 3년 동안 동고 동락하며 그들을 교육하였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할 때 다음과 같은 말로 12제자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였다.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 19-20). 그래서 사도들은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으며,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회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으며, 오늘날도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선교는 삼위 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파견의 역사이며, 파견에는 수행해야 할 위임된 사명이 있다. 이 사명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죄와 죽음과 악의 불행한 상태로부터 구원과 생명과 행복의 상태로 이끌어 준다는 구원의 말씀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지리적 확장이라는 영토적인 의미가 아니라 삼위 일체 하느님의 신적인 친교를 널리 알리고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과 구원의 기쁜소식을 알리고 체험하게 한다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선교는 역사를 거치면서 '사람들 사이' 에서 끊임없이 펼쳐져 왔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구원 메시지는 여러 문화권, 예를 들면 관습 · 종교 · 문화 · 사회 체제 등이 다양한 인간 사회에 전해졌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적인 가치는 여러 다양한 문화와 만나 상호 변혁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다른 문화 전통을 흡수하여 풍요로워졌다. 그리고 다른 문화적인 가치들도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만나 새로워지고 변혁되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토착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토착화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그리스도 교적인 메시지가 지방 문화화되는 것과 지방 문화가 그리스도교화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완전한 토착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선교는 교회가 가진 모든 것, 예를 들면 믿음과 성사와 교계 제도 같은 영적인 차원의 것뿐만 아니라 기술 · 경제 · 정치 · 제도 등 물질적인 차원의 것을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세례로 인도하고, 하느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일을 추진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선교는 그리스도교 가정의 형성, 현지인 성직자 배출, 그리고 그 지역에서의 가톨릭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들의 원동력은 물론 사랑과 명상에서 나온다. 그리고 선교에 의해 하나의 교회적인 모습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역 교회가 자기 고유의 독립적인 주교를 가지며, 믿음 · 성사 · 교계 제도를 구성하고 세계의 보편 교회와 함께 협력하면서 선교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보다 완전한 의미의 그리스도교적인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I . 초기 및 박해 시대
〔사도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사도들은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였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전해지며,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는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였다. 사도들이 선교하던 시기는 로마 제국 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로서, 로마에서는 황제들이 신처럼 숭배받고 제국의 통일을 위해 황제 숭배를 강요하던 때였다. 이러한 박해 시기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목숨을 내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메시아성에 대한 증언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던 것이다. 사도들은 외교인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여 개종자를 얻었고, 그 개종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교 세계에 전달되도록 하였다. 특히 사도 바오로의 선교 활동은 다른 사도들의 활동보다 훨씬 두드러졌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제국의 큰 도시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곳을 발판 삼아 소위 징검다리식의 선교를 하였으며, 복음의 씨앗이 그 주변에 파급되도록 선교하였다. 사도 바오로와 그 수행원들(마르코, 바르나바, 디모테오 등)은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해 로마 제국 내의 대 도시들에 복음을 전하였다.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을 가리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렀던 안티오키아를 위시하여 살라미스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 이고니온 · 리스트라 · 필립비 · 데살로니카 · 베레아 · 아테네 · 고린토 · 에페소 · 트로아스 · 밀레도스 등 소아시 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 지역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다. 사도 바오로와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도들의 선교적인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소아시아.그리스 · 팔레스티나 지역에 전해졌던 것이다.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는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를 받아 64년경에 순교하였고, 다른 사도들과 복음 선포자들은 이 시기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복음을 전하였으며, 100년경에 요한은 사도들 중 마지막으로 파트모스 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후 사도들의 제자들, 이른바 사도 교부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 복음은 계속해서 전해졌다.
〔로마 제국의 박해 시대〕 교회의 선교는 100년경에 유럽의 동부와 북부로 확장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트라야누스(98-117) 황제 치하에서 북쪽으로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유스티노(100~165)는 두 권의 호교서를 집필한 뒤 순교하였고, 테르툴리아노(160~223)는 《여러 민족에게》(Ad ationes, 197)를 비롯하여 《호교론》(Apolo-geticum, 197) · 《세례론》(De Baptismo) · 《마르치온 반박》(Adversus Marcionem, 210) 등의 저술로 그리스도교를 변호하였다. 87년경에 소아시아에서 출생한 포티노(Pothinus)는 리용의 초대 주교로 활동하다가 177년경에 리용에서 순교했는데, 그의 순교는 다른 42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갈리아(Gaule) 지방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회는 동쪽으로 확장되어 180년경에는 에티오피아에 전해졌으며, 200년경에는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과 심지어는 페르시아에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3세기 중반에는 독일 괄른(Köln)과 마인츠(Mainz)에 주교들이 임명되었으며, 로마교회는 동방 교회를 대체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는 그레고리오(240?~326)가 선교 활동을 하며 계몽 사업을 전개함으로써 4세기부
터는 교회의 선교가 흑해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이 시대는 교회가 아직도 로마 제국의 박해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카타콤바 교회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가던 시기였다. 당시 로마 제국은 귀족 · 군대 · 철학자 · 노예 · 황제 숭배와 같은 로마의 관습과 가치가 흥행하던 시기였으나,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적인 사랑 · 나눔의 생활 · 신앙을 위한 순교적인 모범 등의 새로운 가치관을 로마 제국 내에 심어 주어 외교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데 큰 힘을 발휘하였으며, 마침내는 로마 황제의 궁전에까지 그리스도교 신자가 생기게 되었다.
II . 콘스탄틴 대제 이후 시대
〔콘스탄틴 대제 시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이 신앙의 자유를 처음으로 허락한 것은 갈레리우스(305~311) 황제 때인 311년이었다. 그는 '디오클레시아누스(Diccletianus)의 박해' 라는 이름이 붙은 대박해의 선동자였으나 사망하기 전에 '신앙 허용령' 을 발표하였다. 갈레리우스의 '신앙 허용령' 이 제한적이었던 반면에,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313년에 발표한 '밀라노 관용령' (Edictum ilanensie)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전체적으로 공인을 받은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자기정적(政敵)들을 차례로 격퇴하고 324년에 제국의 유일한 군주가 된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이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고 그리스도교를 부흥시키려는 열정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325년에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고 그리스도교의 정통 신앙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330년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옮기고 그리스도인들의 초기 기념물들을 곳곳에 세웠는데,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숨진 골고타 언덕에 '성묘 성당'을 건설하였고, 로마에는 '라테란 대성전' 과 '바티칸 대성전' 을 지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는 '사도들의 교회' 와 '하기아 소피아 성당' 을 지었다. 그의 이러한 치세는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에서 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 후 그의 뒤를 이은 로마 황제들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로마 제국의 정통 종교로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353년에 로마 제국 내에서의 이교제사 금지령과 그 사원들의 철폐령이 내려졌으며, 마침내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밀라노의 대주교였던 암브로시오(339~397)는 "교회는 진실한 로마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종교로 인정받았지만, 그때 절실히 요구된 것은 넓은 영토를 그리스도교화시키는 선교적인 업무였다. 선교사들은 공개적으로 일할 수 있었고 제국 내에서는 어디든 선교 여행을 다닐 수 있었으며, 선교와 교육을 통한 사도직 활동이 사회의 모든 계층 사람들을 상대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각 지역에서 위대한 선교사들이 활동하게 되었는데, 4세기 말에 마르티노(Martinus Tourenus, 316?~397)는 투르의 주교로서 프랑스 이교 지역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활약하였고, 세르바시오(Servaius, +384)는 벨기에 북부의 통게른(Tongeren)에에서, 니니아노(Ninianus, 360~432)는 스코틀랜드에서, 그리고 파트리치오(Patricius, 385?~461?)는 아일랜드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시대에는 로마 제국 내 대부분
의 지역으로 그리스도교가 확장되었다.
한편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후,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에서 유일한 종교로 대우받으며 제국의 종교로 발전되어 갔다. 이에 따라 로마 제국에서 통용되던 제도들이 교회에 도입되었다. 즉 교황과 황제 · 주교와 주지사 등의 관련, 전례와 축제에 있어서 이방인 관습 들이 각 날들에 해당되는 축일 행사로 변형되었고, 전례예식에 쓰이는 옷 · 정결 예식 · 분향 등에 적용 혹은 응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학 용어인 로고스(logos) · 위격(persona) · 신비(mystery) 등의 개념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서양의 야만족 세계〕 여기에서 말하는 '야만족' (bar-barian)이란 아직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그리스나 로마 문화와 접하지 못한 무리들을 뜻한다. 이들은 보통 세 부류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로마 제국에 이미 흡수된 이들이고, 둘째는 로마 제국을 점차적
으로 붕괴시키며 침범하는 무리들이며, 셋째는 로마 제국 밖에 남아 있는 무리들이다. 두 번째 의미의 야만족 세계에 대한 선교를 살펴보자면, 이 시기의 야만족들의 개종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즉 어떤 민족의 왕이나 수장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그 민족 전체가 뒤따라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선교는 주로 왕이나 영향력 있는 이들에 대한 선교에 치중하였다. 갈리아 지방에 정착한 프랑크 민족은 클로비스(Clovis) 왕이 498/499년에 개종하자 그 민족 전체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갈리아 지방의 동남쪽에 정착하였던 부르군디족의 왕 지기스문트(Sigismund)가 496년에 아리우스주의를 버리고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들어왔으며, 스페인의 수에비족과 비시고트족도 그들의 왕 레카레드(Recared)가 586년에 개종하자 모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롬바르드족이 650년경에, 영국에서는 앵글로-색슨족이 7세기경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한편 로마 제국의 국경 너머에 살던 민족들에 대한 선교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즉 게르만족은 6~8세기 경에 그리스도교로 들어왔는데 여기에 포함된 민족으로는 프리시아(Fisia) · 헤스(Hesse) · 투린지아(Thuringia) · 바바리아(Bavaria) · 섹슨(Sexony)족 등이었다. 그리고 9~11세기경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스칸디나비아족에는 덴마크(Denmar) · 스웨덴(Sweden)족들이 있다. 슬라브족(Slaves)은 세 부류로 나뉘는데, 이들은 시기적으로 7~ 10세기에 걸쳐 남부 · 서부 · 동부의 순으로 그리스도교화되었다. 슬로벤(Slovenes) · 세르비안(Serbians) · 크로아트(Croats) · 불가르(Bulgas)족이 속한 남부 슬라브족은 7~9세기경에 그리스도교로 들어왔으며, 서부 슬라브족으로는 포메라니아(Pomeranians) · 체코(Czechs) .슬로박(Slovaks) · 모라비안(Moravians) · 북극(Poles) · 발틱(Balic)족들이 9~14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로 들어왔고, 동부 슬라브족인 러시아인들(Russians)은 1~14세기에 걸쳐서, 그리고 헝가리족(Hungratians)은 10세기부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직접 선교에 종사한 이들은 대부분 베네딕도회 수사들이었다. 이들은 원거리 선교 계획을 수립한 교황들, 게르만족의 왕들,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 그리고 주교들의 보호하에서 외교 사절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선교사는 벨기에의 아만도(Ammanus de Elnon, 584~676), 독일 지방의 보니파시오(Bonifacius, 675~754), 영국 지방의 아우구스티노(Augustine of Canter-bury, 604), 서부 슬라브 지방의 치릴로(Cyrlus, 826~869)와 메토디오(Methodius, 815~885), 프리시아 지방의 빌리브로르도Willibrordus, 658~739) 등이었다.
Ⅲ . 중세기의 비서유럽 세계
중세 시대에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경계는 북으로는 빙하,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과 남쪽은 이슬람 세력과 대치되어 있었다. 제국은 동 · 서로 분리되었고 여러 개의 군소 왕국들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1054년에는 종교적으로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분리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스페인의 국토 회복 전쟁(Spanish Recon-quista, 711~1492) 예루살렘에의 십자군 전쟁(1096~1270),동부 유럽에서의 이슬람 세력 저항 운동,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1453), 아라비아 지역의 학문과 예술의 서방 세계 전달, 그리고 기사 수도회(Ordo Militaris)의 탄생 및 탁발 수도회(프란치스코회 · 도미니코회)의 선교 활동 등으로 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또 이시기의 선교의 특징으로는 교황이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국경을 넘어 선교 활동을 시도하였고, 프랑스의 왕 루이4세(1214~1270)처럼 군주들도 교회의 선교 사업에 관심을 갖고 직접 관여했다는 것이다. 또 새로운 수도회들, 특히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선교를 주요 활동으로 받아들였고, 기사 수도회와 같은 선교 단체들이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타문화권으로의 선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무르치아(Murcia)와 미라마르(Miramar) 등에서는 아라비아어를 위시한 여러 언어 학교들이 운영되었으며, 선교를 체험한 이들, 예를 들어 륄(Raymond Lull,
1235~1316)과 루브륄의 요한(John of Rubruck) 등이 교사로 기용되었다. 이 시기의 선교적인 확장은 문화권별 즉사라센(Saracen) · 몽골(Tartar) · 인도 · 아프리카 지방으로 구분된다.
무슬림 지역 : 이슬람 세력은 7세기경부터 확장되기시작하여 동부로는 근동 · 페르시아 · 인도에까지 이르렀고, 아프리카 북부와 스페인 남부를 장악하였다. 중세 시기에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위한 그리스도교 국가들과 이슬람 세력 간의 싸움이 있었으나 지역 판도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하였고, 무슬림들을 회개시키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다만 이 시기에 이들 지역에 대한 선교 노력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가 1219년에 이슬람의 술탄(Sultan)에게 가서 설득을 시도한 결과,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13세기부터 팔레스티나에 수도원들을 설립하여 순례자들을 맞아들일수 있었고, 륄은 이슬람 선교를 위하여 '선교 학부' (Mis-sionary Colleges)를 조직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정도이다. 이슬람 점령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선교는 불가능하였으며, 스페인의 경우에서처럼 자기 나라에 남아 있는 이슬람 교도들을 개종시키는 일 정도가 가능할 뿐이었다. 몽골 지역 : 몽골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회원들이었는데 , 이들은 처음에는 교황사절로 파견되었었다. 프란치스코회의 피아리오 카르피노의 요한(John of Piario Carpino, 1245~1247)이 교황 인노 천시오 4세(1243~1254)에 의해 파견되었고, 그 후 도미니코회 소속의 롱쥐모의 안드레아(Andrew ofLongjumeau,
1248~1251)와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루브뤽의 윌리엄(William ofRubruck, +1253)이 루이 왕의 이름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한 일은 선교 활동이라기보다는 외교에 관련된 일이었다. 그 후 13세기 말에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이곳을 여행하였고, 쿠빌라이 칸(Kubilai Khan, 1216~1294)이 이교도를 물리치기 위하여 100여 명의 선교사들을 원한다고 하자, 당시 교황 니콜라오 4세 (1288~1292)가 몬테코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 1247~1328)을 급히 파견하였다. 요한은 북경에 성당을 세운 데 이어 라틴어를 사용하는 신학교를 세웠으며, 수천 명의 개종자를 얻는 등 세 명의 보좌 주교들과 함께 일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370년에 명나라가 들어서자 선교 활동은 중단되고, 이룩한 선교마저 파괴되었다.
이와 유사한 선교 활동이 페르시아에서는 13세기부터 도미니코회에 의해, 그 후에는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1318년경에 7개의 교구가 설정되었고, 14세기에는 러시아와 불가리아 · 우즈베키스탄(Uzbekistan)등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들어가 활동하였다.
인도와 인도양 : 이 지역에서의 선교는 본격적인 선교라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지나치는 접촉일 뿐이었다.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이 멜리아푸르(Meliapur)에서 1292~1293년에 선교하였으며, 1319년에는 4명의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봄베이의 살세트(Salsete)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고, 1323년에는 포르데논의 오도리코(0doricoof Pordenone, +1331)가 자바(Java) · 보르네오(Borneo) · 수마트라(Sumara)에서 선교하였다. 그리고 1329년에는카탈라니의 요한(John of Catalani)이 퀼론(Quilon)의 주교가 되었다.
아프리카 : 1270년경에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아비시니아(Abysinia)에서 선교하였으며, 1300년경에는 모잠비크(Mozambique)에 도달하였고, 가르멜회 회원인 베르나르도는 1351년에 카나리인들(Canaries)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 1419년에 마데이라(Madeira) 지역이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 (OrderofChist)에 위임되어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1456년에는 미래에 있게 될 아프리카의 모든 포르투갈 식민지들에 대한 선교 임무가 맡겨졌다.
Ⅳ. 지리상 발견과 보호권 시대의 비서유럽 세계
15세기 말에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스페인은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지만, 유럽은 여전히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통해 멀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진출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 중부와 남부로 나아갔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메리카의 동부 브라질로 갔으며, 후에 영국과 프랑스인들은 북아메리카로 진출하였다. 또한 유럽인들은 이슬람 교도들과 흑인들을 측면에 두면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였다. 포르투갈사람들은 동쪽으로 항해하여 아시아에 이르렀는데, 이러 한 여러 경로를 거쳐 유럽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새로운 문화권을 만나게 되었다. 즉 힌두교 · 불교 · 유교 · 도교 · 신도(神道) · 애니미즘(animismus) 등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면서,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경영등의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선교에 대한 새로운 시도들 과 선교 활동을 원거리에서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들과 기구들이 등장하였다.
〔시대적 상황〕 이 당시 유럽에서 세력이 막강해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보호권' (padroado)을 갖게 되었다. 교황청의 위임에 따라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왕이 선교지역에서 관할권(juridiction)을 행사하는 동시에 무역 업무를 관장하고 그의 책임하에 복음화와 개종 사업을 수행하는 제도인 보호권 제도는, 교황청과 그리스도교 국가 간의 계약인 동시에 교회가 국가와 손을 잡고 선교 업무를 수행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여러 가지 이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또한 단점도 있었다. 다시 말해 교회와 국가는 함께 부흥하기도 하고 함께 망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즉 교황 비오 2세(1458~1464)는 1461년에 포르투갈의 왕에게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의 위대한 군주' (GrandMaster of the Order of Christ)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보호권을 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당시 경쟁적인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들 사이에 알력이 생기자 교황 알렉산델 6세(1492~1503)는 1493년에 경계선을 그어 주었으며, 이듬해에는 두 나라 사이에 '토르데실라스(Tordesillas)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왕은 포르투갈의 왕과 마찬가지로 '인도 제도 와 '아메리카' 에 대한 보호권을1501년에 교황 알렉산델 6세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스페인 출신인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는 1540년에 예수회를 설립하였고, 1613년에는 로마에 가르멜 선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교황청은 1622년에 포교성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지금의 인류 복음화성)을 설립하고 그 동안 '보호권' 아래 선교를 수행하던 방법에서 벗어나 교황청 주도의 직접적인 선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선교회로는 빈천시오 아 바오로(1580~1660)가 1625년에 시골 선교와 성직자들의 훈련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 설립한 '선교 수도회' (Congregatio Missionis, Lazaristae)를 비롯하여 1658년의 파리 외방전교회와 1663년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그리고 1703년에 파리에 설립된 '성령 수도회' (Congregatio S. Spiritus)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1742년에는 중국에서 전례 논쟁이 종식되었는데, 이 전례 논쟁의 여파로 당시 3,200명의 선교사를 두었던 예수회가 773년에 교황 글레멘스 14세(1769~1774)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또 프랑스에서는 1789년에 대혁명이 일어남으로써 파리에 있던 선교회 신학교들이 폐지되기도 하였다.
[각국의 상황] 아프리카 : 이 당시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선교는 서유럽 열강의 내륙 개발 및 노예 무역과 결부되어 진행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1455)는 포르투갈 왕에게 노예 무역을 허용하였으며,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 를 통해 아프리카 선교를 시작하였다. 1461년에 포르투갈 왕에게 이 교단의 '위대한 군주' 라는 칭호가 부여되면서 '보호권'이 행사되기 시작하였는데, 포르투갈의 보호권 아래에서콩고에 선교가 시작된 것은 1484년부터였다. 1489~1491년 사이에는 세네감비아(Sanegambia)의 왕이 세례를 받은 데 이어 마니족(Mani)과 베니노족(Benino)의 왕이 세례를 받았으며, 1501년에는 남아프리카에 첫 번째 성당이 건립되었다. 1509년에는 콩고의 왕 알풍소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우상 숭배를 척결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사제가 된 그의 아들 헨리코는 훗날 주교품에까지 올랐다. 1520년에는 앙골라(Angola)에 선교가 시작되어 1584년에 앙골라의 왕이 세례를 받았으며, 1540년에는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1560년에는 모잠비크에 선교가 시작되어 이후 왕도 세례를 받았다. 그 밖에도 베냉(Benin) , 기니(Guinea)나탈(Natal) , 몸바사(Mombasa) 등지에서 선교가 이루어졌다.
아프리카에서의 선교는 선교사수는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사회적 신분이 높은 이들이 많이 세례를 받아 어느정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호권에 의한 포르투갈의 선교가 18세기경에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선교사의 부족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중부와 남부 아메리카 : 이 지역은 스페인의 무력 정복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이루어졌다. 아메리카에 선교사들이 도착한 것은 콜럼버스(C. Columbus, 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곧 이루어졌는데, 1493년에 중앙 아메리카에 첫 선교사들이 도착하였고, 1502년
에는 쿠바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브라질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들어와 그 밖의 다른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으며, 1513년부터는 '라틴 아메리카' 라고 불리는 다른 지역들에도 선교회들이 들어왔다. 1519년에는 코르테즈(H. Cortez, 485~1547)에 의해 멕시코가 정복되었고, 피자로(F. Pizarro, 1475~1541)는 1532년에 페루를 정복하였으며, 그 후 콜롬비아 · 볼리비아 · 칠레 등도 무력으로 정복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스페인식 아메리카(Spanish America)를 건설하려는 정책에 따라 선교도 진행되었다.
대규모의 광산과 농장의 지주였던 스페인 정복자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면서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였으나 피정복민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라스 카사스(B.de Las Casas, 1474~1566)는 노예 제도와 식민 정책에 끊임없이 반대하며 폐지를 주장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지역의 선교사들은 주로 수도회 출신으로서 프란치스코회 . 도미니코회 · 예로니모회(Ordo Sancti Hierony-mi) · 예수회 등이었으며, 스페인 왕의 보호권에 따라 선교가 이루어졌다. 선교는 식민 사업의 한 방법인 국가-선교(state-mission)의 형태를 취했으며, 종교 재판(inquisi-tion)과 군대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어떤 선교사들은 파라과이에서처럼 인디언들의 축소 현상을 막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보호하려고 하였으며, 병원 · 학교 · 수도원 등을 선교지에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523~1572년에 멕시코에 복음화가 이루어졌고, 1530년경부터는 아메리카(멕시코 중부 · 남부)에서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1549년부터는 예수회 회원들이 브라질에 도착한 뒤 페루와 멕시코 등지로 진출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선교는 성공적으로 그리스도교화된 듯 보이지만 교리나 신앙 면에서는 피상적이었으며 성직매매도 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사목자와 교회에 순종적이었고 존경을 표하였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외형상 가톨릭적이었다. 다시 말해 세례 · 혼인 · 장례 · 축제 · 관습 등 사회 의식과 문화는 가톨릭적이었지만 여전히 미신적인 요소는 남아 있었다.
동부와 북부 아메리카 : 아메리카의 동부 지역은 포르투갈에 의해 선교가 수행되었다. 중남미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처럼 '보호권' 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예수회 회원들이 많이 활약하였는데 특히 안치에타(Anchieta, 1553~1597) 신부는 식민주의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선교는 프랑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카르티에(J.Catier)와 여러 사제들이 1543년에 캐나다에서 활동하였다. 1608년에는 퀘벡(Quebec) 교구가 설립되어 선교가 시작되었고, 1615년부터는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1625년부터는 예수회 회원들이, 그리고 1639년부터는 우르술라회 수녀들(Ursulines)이 활동하였다. 1642년에는 몬트리올(Mon-treal) 교구가 설립되었다.
인도 : 인도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힌두교와 1000년경부터 형성된 이슬람교로 중첩된 사회였다. 인도 북부는 아랍인, 몽고인, 터키인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인들에 의해 침략 · 점령되었지만, 남부는 거의 침략을 받지않고 대부분 힌두교로 남아 있었다. 인도 선교사의 대표 적 인물인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는 포르투갈에 속하는 상업적이며 군사적이고 선교를 위한 전초 기지였던 고아(Gôa)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1534년에 창설된 고아 교구는 당시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으로부터 일본까지 관할하던 광대한 지역구였다. 사베리오 신부는 1542~1545년과 1551년에 고아와 그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였었다. 그러나 그 이전인 1500년에 이미 프란치스코회 회원들과 재속 사제들이 베트남의 남부 지역인 코친(Cochin)에 도착했고, 1510년에는 고아, 1517년에는 콜롬보에 들어왔다. 그리고 예수회 회원들의 선교는 한참 후인 1578년에 인도 북부무굴(Mogu)인들의 황제에게까지 미쳤다.
마두라(Madura)에는 1595년부터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 신부가 피셔리(Fishery) 해안에 도착한 것은 1605년이었다. 마두라에서 '크리스찬 브라만' (Christian Brahman)으로 행세한 노빌리 신부는 타밀(Tamil)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대화하면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으로 인도의 상류 사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선교 방법은 고아와 로마에 고발되어 인도에서의 의례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1703~1704년에 풍디세리(Pondicherry)에 있던 카푸친작은 형제회(O.F.M.Cap.) 회원(Capuchins)들이 노빌리 신부와 동료 예수회 회원들을 교황 대사 투르농(Maillard deTournon)에게 고발하자, 그가 자세한 조사도 없이 16개 항목의 제한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의례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742년에 예수회가 교황청으로부터 단죄를 받게 되자 이곳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회원들은 포르투갈 정부로부터 더 이상 법률상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127명의 예수회 회원들은 리스본(Lisbon)으로 철수하였고, 프랑스령 인도에서 선교하던 파리 외방전교회도 선교를 잘해 낼 수 없었다. 말라바르(Malabar)의 그리스도인들은 분규가 있었음에도 신앙을 잘 보존하였지만 마두라에서의 성공적이었던 선교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인도에서의 선교는 당시 교회의 원리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해 적응주의적인 선교를 단죄한 결과를 낳았으며,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인도의 상류층에 진출하지 못하고 비힌두인들과 최하층민들에게만 수용됨으로써 여전히 이국적인 종교로 남게 되었다. 중국 : 16세기의 중국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베리오는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가려 하였으나 중국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중국이 바라다보이는 상시안(Sancian, 上川島)에서 1552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계속 중국에 입국하였다. 1558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마카오(Macao)에 들어왔으며, 1576년에는 마카오 교구가 설립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도교 · 유교 · 불교가 전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중국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중국 고전을 연구하며 적응주의 노선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8~1606) 신부, 루지에리(Michel Ruggieri, 1543~1607) 신부,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신부 등은 중국 고전을 연구하고 자연 과학과 천문학에 대한 서양 지식을 바탕으로 일반인들보다는 사대부를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그 결과 1601년에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 1573~ 1619)에게 호감을 줌으로써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중국 · 한국 · 일본 등 동북 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1614년에는 중국의 9개 지방에 15만 명의 중국인 신자가 있었으며, 1671년에는 2만 명이나 세례를 받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선교회 간의 갈등과 알력 및 견해 차이로 중국 선교를 크게 후퇴시키게 된 것이다. 즉 뒤늦게 중국에 온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예수회 회원들의 적응주의적 선교를 불법적인 것으로 보고 교황청에 고발하면서 의례 논쟁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회와 도미
니코회, 포르투갈과 스페인, 포교성성의 투르농과 중국의 강희(康熙, 1662~1722) 황제 사이에 갈등을 야기시켰다. 강희 황제가 1700년 11월 30일에 '공자와 조상 승배' 는 종교적인 예식이 아니라 시민 예식이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1742년에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 1758)에 의해 예수회의 적응주의적인 선교는 단죄를 받았다. 그 결과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식층의 개종과 입교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신자들도 배교의 시련을 겪어야 하였다. 또 그로 인해 동남 아시아의 유교적인 전통이 있는 국가들에 큰 종교적인 시련을 가져왔으며, 동북 아시아의 선교에도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왔다.
인도차이나 : 인도의 문화와 영향을 받아 힌두교 · 불교 · 이슬람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시암(Siam, 현 타이) 왕국 · 안남(Ammam, 현 베트남) · 버마(Buma, 현 미얀마) · 캄보디아(Cambodia) 왕국등이 있었다. 1554년에 말라카(Malaca) 교구가 설립되었고 1568년과 1574년에는 시암 왕국과 캄보디아에서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순교하였으며, 1580년과 1583년에는 코친차이나(Cochin-China)와 시암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들어왔고, 1606년과 1615년에는 시암과 코친차이나에서 예수회 회원들이 활동하였다. 1624년부터 1645년까지 인도차이나에서 활동했던 로드(A. de Rhodes, 1591~1660)는 중국과 인도에서처럼 적응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그래서 교리 교육 수도회를 만들고 현지인 사제 양성에 힘쓰며 지방 언어를 활용하여 선교한 결과, 통킹(Tonking)에만 30만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 후 1644년에 진출한 파리 외방전교회는 현지인 성직자를 배출하고자 페낭(Penang)에 신학교를 세워 아시아권 신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 이 지역은 포르투갈 세력이 접근하면서 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티모르(Timor, 1530), 몰루카스(Molucas, 1534) , 그 밖에 자바 · 수마트라 · 보르네오 등에서 프란치스코회 · 도미니코회 · 예수회 그리고 재속 성직자들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필리핀 :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1521년에 필리핀의 세부 섬에 도착한 후 1561년부터아우구스티노회에 의해서, 1577년부터는 프란치스코회, 1579년부터는 도미니코회, 그리고 1581년부터는 예수회 등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예수회는 1611년에
마닐라에 성 토마스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620년에는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고 신자수는 200만 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다. 필리핀의 선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그들은 필리핀에 그리스도교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다.
일본 : 1549년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다른 2명의 예수회 회원들이 상륙함으로써 선교가 시작되었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통치하던 기간(1562~1582)에는 예수회 선교가 수월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통치 기간(1582~1598)에는 점점 덜 호의적이 되어갔다. 1587년에 외국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지고 유형과 파괴의 법령이 반포되었으며, 1597년에는 나가사키(長畸)에서 26명이 순교하였다. 이어서 통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98~1616)의 종교 정책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1601년에 처음으로 3명의 일본인 신부가 탄생하였지만 1614년에 또다시 대박해령과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졌고, 1616년에는 그리스도교 금지령이 내려졌다.1634년부터 1854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유지하여야 했다.
V . 근대의 선교 활동
19세기의 선교 쇄신 운동에서 크나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교황이었다. 1826~1831년에 포교성성 장관을 역임하고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1831년에 조선 대목구를 설정함으로써 조선을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교회 체계를 갖추게 하였으며, 처음으로 오세아니아(Oceania)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 1839년에는 노예 제도를 공식적으로 단죄했으며, 지방교회를 조직하고 선교 책임자들에게 현지인 성직자들을 양성하라는 지침을 발표하였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많은 선교 구역을 설정하였으며, 아프리카 선교에 많은 관심을 둔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1893년에 세일론(Ceylon)에 현지인 성직자를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프랑스에 '근동 선교의 보호자' 라는 역할을 위임하였다.
1817년에는 포교성성이 재조직되어 활성화되었으며, 근대 선교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수도회들이 복구되거나 창립되었다. 즉 예수회의 재건(1817 인가), 예수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Congregatio Sacrorum Cordium Iesuet Mariae)의 창립(1814), 성령 수도회와 선교 수도회의 재설립(1815),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Congregatio Mission-ariorum Oblatorum B.M.V. Immaculatae, 1816)를 비롯하여 팔로틴 수도회(Pallttini Fathers, 1835) , 밀라노 외방전교회(Istituto per le Missioni Estere di Milano, 1850) ,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 (Missionarii Sacratissimi Cordis Iesu, 1854), 리용의 아프리카 선교회(Societas Missionum ad Afros, 1856) 스 쾨트회 즉 무염 성모 성심 선교회(Congregatio Immaculati Cordis Mariae, 1862) , 밀힐 외방전교회(Societas Missionario- rum Sti. Joseph de Mill Hill, 1866), 아프리카 성모의 선교사회(White Fathers, 1868), 신언회(Societas Verbi Divini, 1875)의 창립 등이다. 이러한 선교회의 선교 활동을 돕기 위한 후원 단체들도 이 시기에 창설되었는데, 교황청 전교회(PontifcaliumOperum Missionalium a Propagatione Fidei, 1822) , 교황청 어린이 전교회(Pontificalium Operum Missionalium a Sancta Infantia, 1843) ,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Pontifcalium OpusMissionale a S. Petro Apostolo, 1888), 교황청 전교 연맹(Pon-tificia Unione Missionaria, 1916) 등이다. 그 밖에 《감화를 주는 편지들》(Lettres Édifiantes), 《그리스도교의 정수》(LeGénie du Christianisme) 등 선교 활동을 돕기 위한 출판 간행물들도 등장하여 선교적인 관심을 북돋았다. 그리고 선교학 강좌가 대학 학부에 등장하였는데, 메리놀 외방전교회(Societas de Maryknoll pro Missionibus Exteris)에서는 가톨릭 선교학 강좌를 1911년에 처음으로 개설하였으며, 1932년에는 로마의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와 포교성성 대학교에 선교학 학부가 생겨 선교학을 전문적으로 배우도록 하였다.
〔아시아의 선교 부흥〕 인도 : 많은 선교회의 창립과 선교 후원 단체들의 활동으로 아시아에서는 선교적인 부흥을 맞게 되었다. 1832~1836년 사이에 인도의 마드라스(Madras) · 캘커타(Calcuta) · 풍디세리 · 마두라에 교황 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838년과 1857년에는 고아의 이교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 1886년에는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고, 1893년에는 캔디(Kandy)에 교황청립신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1931년에 360여 만 명이었던 신자수가 1997년에 1,60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인도 전체 국민의 1.7%에 해당된다.
인도차이나 : 세일론의 경우 1849년에 콜롬보의 자프나(Jaffna)에 교황 대목구가 설정되었고, 1886년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미얀마에서는 1866~1870년 사이에 3명의 대목구장이 임명되었고, 인도네시아의 페낭에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신학교가 1813 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의해 설립되었다. 시암 왕국은 185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의 자유를 얻고 활동한 결과 1880년에 초대 시암인 사제가 탄생하였다. 동남 아시아 :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 1841년에 교황 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인도네시아는 1807년에 자바
섬에서 선교 활동이 재개되었다. 그 후 1841년에 바타비아(Batavia) 대목구 설정, 1911년에 수마트라 대목구설정, 그리고 1935년에는 발리(Bali) 섬에 선교가 이루어졌다.
중국과 한국 : 1831년에 북경 대목구가 선교 수도회에 맡겨지고 같은 해에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다. 조선은 1836년에 모방(P.P. Maubant, 1803~1839) 신부가 입국한 후 1839년, 1846년, 1866년에 큰 박해가 있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1840년에 다시 중국에 입국하여 활동하게 되었으며, 대만에는 1859년에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들어갔고, 몽골에는 1865년에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성심회가 들어가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광동(廣東)에는 신언회가 1882년부터 활동하였다. 1900~1901년에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많은 신자와 성직자 및 수도자들이 박해를 받았고 1918년부터는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활동하였으며, 1926년에는 첫 중국인 주교 6명의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레브(Vincent Federic Lebbe, 1877~1940)신부는 1928년에 '세례자 요한의 작은 형제회' (Little Brothers ofSt. John the Baptist)를 창립한 데 이어 1937년에는 '국제 가톨릭 형제회'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A.F.I.)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1935년에 공자 존경은 순전히 시민적인 예절이라고 선언되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37년에 신사 참배 예절이 일본에 의해 의무적으로 부과되었다.
일본 : 오키나와(沖繩) 섬들에 대한 선교가 1844~1848년 사이에 있었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59년에는 선교사가 도쿄(東京)에 거주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며, 1865년에 나가사키 대목구가 설립되었고 1873년에는 선교사들이 자유로이 다닐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그리고 1890년에 열린 나가사키 주교 회의에서는 신자들이 조상들의 신주 앞에서 행하는 예절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1927년에는 일본인 주교가 탄생되었으며, 1940년에는 모든 외국인 주교들과 선교회 장상들이 일본인으로 대체되었다.
[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 지역은 정치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로 분할되어 영향을 받았다. 지역적으로 선교하기에 너무 광대하였으나 선교사들은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현지인 사제는 드물었지만 1949년의 통계에 의하면 약 200만 명의 거주민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28만여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 이 지역에서 기념될 만한 선교 활동은 타이티(Tahid)에서의 첫 세례자 탄생(1819), 동부 오세아니아 대목구 설정(1833) 중앙 오세아니아 대목구 설정(1842)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 대목구설정(1847), 뉴헤브리데스(New Hebrides) 대목구 설정(1904), 남태평양 지역을 위한 중앙 소신학교 설립(1936)등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지역〕 북극의 에스키모인과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는 캐나다의 퀘벡에 있던 성직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 회원들이 캐나다 북서 지방을,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회원들은 미국의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를 담당하였다. 선교사들은 지역적 으로 광대한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보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선교하였으며, 남아메리카에서도 시골 · 정글 · 산악 지방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의 신자 공동체 형성에 주력하였다. [아프리카] 아프리카에서 특히 정령주의가 널리 퍼져있는 지역은 사하라 사막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는데, 이곳 주민들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서유럽 열강의 식민지와 노예 무역으로 인해 황폐해 있었다. 아프
리카 주민들은 선교사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지만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추장들은 선교사들에게 설교하도록 허가해 주면서 자기 지방의 주민들을 위해 학교 · 병원 등의 시설을 세워 주기를 바랐다. 이러한 선교를 목적으로 건설된 사회 간접 시설들은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1900년 이후에는 선교에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1933년에 포교성성의 영향하에 있던 흑인 아프리카 신자수는 400만 명이나 되었으며, 1949년에는 1,10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성숙은 결
여되어 있었으며, 성직자수는 1만 명에 한 명꼴로 절대 부족이었으므로 이 지역에서의 성직자와 평신도 양성은 미래의 교회 건설에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선교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성령 수도회가 가봉(1844) · 세네감비아(1847) · 찬치바르(Zanzibar, 1863)에 설립되었으며, 예수회는 마다가스카르(1845) · 로디지아(Rhodesia, 1879) · 콩고(1893)에 설립되었다. 오블라띠 선교 수도회는 나탈(1851)에, 마리아 성심의 아들회(Cordis Mariae Filius)는 수단(1872)에, '아프리카 성모의 선교사' 들은 동아프리카 우간다(1878)에,리용의 아프리카 선교회는 골드 코스트(Gold Coast, 1881)에, 트라피스트회(Ordo Cisterciensium Strictioris Observan-tiae)는 마리안 힐(Marianhill)에, 스쾨트회 회원들은 콩고(1888)에, 팔로틴 수도회는 카메룬(1890)에, 신언회는 토고(Togo, 1892)에 들어갔다. 그리고 교황 사절이 1922년에 남아프리카에, 1929년에는 벨기에령 콩고에, 1930년에는 동부 아프리카에, 그리고 1948년에는 다카르(Dakar)에 파견되었으며, 1940년에는 교황청과 포르투갈 사이에 선교 협정이 맺어졌다.
[이슬람] 북아프리카 · 중동 · 근동의 북부 · 서남 아시아 등 이미 이슬람화된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은 초민족적인 신앙으로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으로 강한 유대감 속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단체로 개종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 지역에서의 선교는 푸코(C. de Foucauld, 1858~1916)가 보여 준 것처럼, 관상 생활과 애덕 생활을 통한 증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도 아직 이슬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에서나 가능할 뿐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슬람 세력과 그리스도교 세력은 선교에 있어서도 경쟁 관계 속에 있었다. 이슬람 지역에의 선교는 '백의(白衣)의 선교사회' 에 의해 헌신적으로 수행되었다.
아프리카 지역 : 이 지역에서의 선교의 주요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모로코의 탄지에르(Tangiers)에 교황 대목구 설정(1859) ,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아프리카 성모의 선교사회' 설립(1868), 튀니지의 카르타고(Carhago)에 교황 사절 파견(1884) , 이집트에서의 가톨릭 확장(1895), 나일 강 델타(Delta) 지역에 교황 대목구 설립(1909) 이집트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평등권 보장(1923)등이다.
서아시아 지역 : 이 지역에서의 주요 선교 결과들은 다음과 같다. 페르시아(이란)에서의 종교 자유 획득(1834), 선교 수도회 회원들의 페르시아 선교(1840), 바빌론 대교구 설정(1848), 터키에서의 종교 자유 획득(1856), 아덴(Aden, 예멘)에 교황 대목구 설립(1859), 콘스탄티노플에 교황 사절 파견(1868), 베이루트(Beint)에 성 요셉 대학교 설립 및 아라비아 교황 대목구 설정(1875), 이스파한(Ispahan)에 교황 대목구 설립(1910), 다카(Dacca)에 교황 대목구 설립(1850), 라호레(Lahore)에 교황 대목구 설립(1886), 치타공(Chittagong) 교구와 디나즈푸르(Dinajpur)교구 설립 및 물탄(Multan)에 교황 대목구 설립(1936), 라왈핀디(Rawalpindi) 교구 설립(1947), 카라치Karachi)교구 설립(1948), 다카와 카라치의 수도 대교구 설립(1950) 등이다.
Ⅵ. 현대의 선교 방법과 과제
1945년에 국제 연합(UN)이 창설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서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독립을 하게 되었다. 식민지 국가 대부분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지역에 있었는데, 이들 나라에서의 선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과거의 선교는 식민주의적인 정책 아래 포르투갈 스페인 · 프랑스 등 서유럽의 강대국들에 의해 선교가 수행되었으며, 군사적 · 인적 · 물적 자원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선교 형태였다. 그리고 19세기의 선교는 각 나라의 지도 계층의 개종보다는 주로 하위 계층에서 많이 이루어졌고 시골과 농촌 지역의 구조에 알맞 는 선교 형태를 띠었다. 선교사들은 동일한 전례를 통해 종교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려 하였으며, 선교도 주로 성직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현대는 과거와는 다른 여러 가지 양태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선교적인 적응이 요청되고 있다. 적응(adaptation)은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업이다. 적응하지 못하는 교회는 도태되고 적응하는 교회만이 생존 ·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선교는 여러 가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선교는 세상의 변화와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 성직자 양성 :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국가들에서는 과거 식민지 형태의 선교와는 다른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교계 제도가 될수 있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따라서 현지인 사제와 주교들이 많이 배출되어 교회의 식민지화를 벗고 대등한 자 격으로 세계 교회의 선교적인 문제에 협력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도시화 및 공업화 현상에 대한 선교적인 적응 : 오늘날 과학 · 공업 · 기술의 도시 집중으로 인하여 이농 현상과 이주자들의 도시로의 증가 현상들이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선교는 이러한 일에 대처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선교 대책, 예를 들어 도시 빈민 선교 · 직장 선교 · 농민 선교 등에 대한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다. 정치 · 종교 · 문화 다원주의에 대한 선교적인 적응: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현대 세계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다양 속에서의 일치와 쇄신' 이라고 표현하였듯이, 현대는 정치 · 사회 · 종교 · 문화 면에서 다양성을 띠고 있다.
① 정치적인 면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몰락하였다. 소련은 여러 민족 국가들로 분리되었으며,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대신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다. 동시에 옛 소련의 여러 민족 국가들과 동유럽에서는 새로운 종교적인 부흥 시대를 맞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제한적이지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 공산주의 국가들과 중국 등에 대한 선교 활동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② 종교적인 면 : 과거에는 그리스도교가 가장 우월하며 절대적이라는 사고에 기반을 두고 선교에 임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여러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 다원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의 당위성과 방법론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③ 문화적인 면 : 언어 · 예술 · 문학 · 건축 · 음악 · 생활 양식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현대에 적응하여 문화의 그리스도교적인 토착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평신도 사도직에서의 선교적인 적응 : 현대는 수많은 정보와 사건들 속에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분야에 정통하거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선교사나 성직자도 본래의 교회적인 일 이외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띨 수는 없으므로 현대의 다양한 사회 속에서 선교를 효율적으로 하 기 위해서는 업무의 분담과 전문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나 선교사가 맡고 있었던 본래의 성직이외에 비본질적인 분야들(학교 · 병원 · 교회 운영 등)에 지나치게 시간을 빼앗겨 본래의 선교적인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신도 사도직 을 증진시키고 성직자나 평신도들이 협력하는 가운데 선교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 연대성을 위한 선교적인 적응 : 과거의 선교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일방적인 선교였으나 오늘날에는 상호 주고받는 교환으로서의 선교가 필요하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발전된 과학 기술 · 분석능력 · 정보 시스템 · 제도들은 동양의 낙후된 자연 과학 분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서유럽도 동양의 도덕적·영적 · 종교적인 문화 유산을 접함으로써 동서양이 호혜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선교는 인간의 자기 완성과 구원을 위해 인류에게 주어진 모든 하느님의 선물을 나누고 활용하도록 세계적인 연대성을 증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물질의 나눔뿐만 아니라 정신적 · 영적 유산의 나눔,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 <피데이 도눔>(Fidei Donum, 1957. 4. 21)에서 제시하였듯이 사제가 많은 교구에서는 사제가 없는 곳에 교구 사제를 일정 기간 파견하여 봉사하는 일처럼 인적 차원의 연대성과 나눔도 필요하다. 오늘날 서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 내에서 신앙의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냉담한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현대의 무신론적인 사고 풍조 속에서 이교 지역으로 변해 버린 곳도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선교사는 자기 고향을 떠나 선교한다는 과거의 고전적인 선교사 개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되며, 자기 고향이나 지역에서도 냉담 지역이나 이교화된 지역에서 선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자각해야 한다. 오늘날의 선교가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 교회사 ; 노빌리, 데 로베르토 ; 리치, 마테오 ; 밀라노 관용령 ;사베리오, 프란치스코 ; 선교 ; 선교사 ; 선교학 ; 선교회; 의례 논쟁 ; 중국 교회사 ; 한국 교회사)
※ 참고문헌  Joseph- Masson, Missions, 《SM》 4, pp. 49~791 김웅태 엮음,《선교의 역사와 개념》,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3, pp. 19~116 A. Descamps, Histoire générale comparée des missions, 1932/ A. Henry, Esquissed'ume théologie de la mission, 1959/ A. Rétif, Initiation a la mission, 1960/A. Seumois, Apostolat, Structure théologique, 1961/ E. Murphy, Teach YeAll Nations, 1958/ G. Gorrée . G. Chauvel, Mission des temps nouveaux, L'Eglise et sa mission, 1963/ E. Loffeld, Le Problème cardinal de la missio-logie et des missions catholiques, 1956/ J. Masson, Fonction Missionnaire, Fonction d'Eglise, 《NRT》 80, 1959, pp. 1042~1061 ; 《NRT》 81, 1959, pp. 41~59/ 一, Mission 1960, Afrique, Asie, Océanie, 《NRT》 82, 1960, pp. 158~185/ Problèmes missionnaires l'échelle du Concile, Bulletin deI'U.M.C., Belge, 1963. 41 L. Goddard, Encyclopedia of Modem Christian Missions, 1967/ K.S. Latourette, A History ofthe Expansion of Christicmin, vols. 7, 1939~1945/ P. Charles, Dossiers de I'Action Missiomaire, 1939/ P.Tillich, Theology ofMission, 1954/ S. Delacroix ed., Histoire universelle desmissions catholiques, vols. 4, 1956~ 1959/ S. Neill,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1965/ T. Burke, Catholic Missions : Four Great Encyclicals, 1957. 〔金雄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