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조약

宣敎條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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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광무 8)에 한국 외부 대신 이하영(李夏榮)과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in de Plancy, 葛林德) 사이에 체결된 외교 조약. 그 목적은 교 · 민(敎民) 사이의 분쟁 즉 교안(敎案)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고 분쟁시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는 데 있었다. 선교조약이 체결된 배경으로는 1886년에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이 체결된 후 1899년에 교민조약(敎民條約)이, 1901년의 제주 신축교안(辛丑教案) 이후에 다시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01 ~1904년에도 계속하여 교안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만 교민조약과 교민화의약정이 지방 관리와 선교사 간에 체결된 데 반해 선교조약은 정식 외교 당사자들이 체결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전문 8개 조로 체결된 선교조약의 내용은 앞의 두 약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따라 선교사는 내지(內地) 선교시에 지방 관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나 조선의 행정에 관여할 수 없으며(제1~3조, 6조), 지방 관리는 교인의 불법을 공평하고 온 당하게 처벌해야 한다(제4~5조, 7조)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교무에 관해 부당한 처사를 받게 될 때에는 프랑스 공사를 통해 한국 외부와 교섭할수 있도록 했고(제6조), 조약 체결 이후 이와 관련된 장정(章程)들이 추가로 마련될 예정이었다(제8조). 그러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상해에 보낸 1904년 6월 27일자 서한에서, 이 조약은 수포로 돌아갔고 아마 그것은 모든 일에 간섭한 일본인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외부에서 프랑스 공사관에 보낸 조약문에는 제1~2조항이 빠져 있어 한불 조약문과 별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한국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추가 장정도 마련되지 않았다. 이 조약문은 당시 <제국신문>(帝國新聞) 1904년 6월 6일자에 게재되었다. (→ 교민조약 ; 교안)
※ 참고문헌  崔鍾庫, (韓國에 있어서의 宗教自由의 法的 保障過程〉, 《교회사 연구》 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pp. 73~111/ 李元 淳, 〈朝鮮末期社會의 對西敎問題研究一 중심 으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朴贊植, 〈韓末 天主教會와 鄉村社會一敎案의 사례 분석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96.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