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업

善業

〔그〕ἔργα ἀγαθά · 〔라〕opera bona · 〔영〕good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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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인들은 각자가 행한 선업과 악업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갚음을 받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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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인들은 각자가 행한 선업과 악업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갚음을 받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 의지 자체의 의향과 동의로 이루어지는 의지의 내적 행위. 즉 의향이 행동의 옳고 그름 및 선악을 판단해 주는 도덕성의 규범에 일치 · 조화를 이루어 행하여지는 인간적인 행위를 말한다.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선업' 곧 선한 행업과, 불교에서 말하는 '선업' 곧 선한업은 다 같이 '선행' 또는 '착한 행위' 를 뜻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I . 개 념
불교에서 '업' (kama)이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행위를 가리키며, '선업' 과 '악업' 으로 구분된다. 불교는 현재 짓는 업이 미래에 있을 좋은 결실이나 나쁜 결실을 가져오는 씨앗에 해당한다고 가르치며, 따라서 선업은 좋은 결과와 응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악업은 나쁜 결과와 응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 밖에도 업에는 선악을 확실히 측정하기 어려운 '무기업' (無記業)이 있는데, 무기업은 결실 곧 과보(果報)를 낼 수 없는 것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행업' (opera)은 도덕성의 규범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 '선업' (또는 '선행' )과 '악업' (또는 '악행' )으로 구분되며, 일반적으로 '행업' (opera, 행함)은 곧 잘 선업(opera bona, 선행)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선업'은 도덕성의 규범과 합치되는 '인간적 행위' (actus huma-nus)를 가리키는데, 이러한 선업은 다시 일상적이고도 세속적인 의미의 '자연적 선업' 과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루어지는 '초자연적 선업' 으로 구분된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화(義化) 뒤에 믿음으로부터 성장하는 사랑의 행위를 가리키는 초자연적 선업에는 영원한생명과 구원의 상급이 뒤따른다고 한다.
II . 윤리 신학적 관점
〔행 업〕 '행업' 또는 '행위' 는 도덕성의 규범과 일치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곧 선업과 악업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선도 악도 아닌 의지적 행위, 곧 선에도 악에도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행위' (actus indif- ferens)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신학자들간에 쟁점이 되어 왔다. 예로니모는 윤리적 선악에 이어 도덕적 중립이 존재함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구(警句)로 표현하였다. "절제는 선이고 색정은 악이다. 이 둘 사이에서 걷는 일은 중립이다"(《편지》 112, 16). 그러나 도덕적 중립이 윤리적 선악에 이어 참으로 도덕성의 세 번째 범주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간의 견해는, 도덕적 중립이 도덕성의 참된 범주가 아니라는 '통설' (살라망카 학파)과 그것이 도덕성의 참된 범주이기는 하지만 불완전한 범주일 뿐이라는 '이설' (John of St. Thomas, D. Priim-mer, R. Garrigou-Lagrange)로 나누어진다. 이 문제에 대하여 토마스는, 추상적 차원에 있어서 인간적 행위는 '선' 과 '악' 과 '도덕적 중립' (actus indifferens secundum suamspeciem)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행위에 있어서 인간적 행위는 선한행위와 악한 행위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그에 따르면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중
립적인 행위' (actus indifferens secundum individuum)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신학 대전》 I-Ⅱ , q.18, a.9).
〔선 업〕 도덕성의 규범과 일치 · 조화를 이루는 '인간적 행위' 라고 정의되는 선업 또는 선행(actus boni)은, 의지 자체의 의도적인 선택인 '순전한 내적 행위' 와 자선과 같은 '외적 행위' 를 둘 다 포함한다. 여기에서 '도덕성의 규범' 은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과 선악을 재는 기 준으로서, 인간은 이러한 도덕성의 규범에 따라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행위의 옳고 그름 및 선악을 측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도덕성의 규범은 지성과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갖춘 인간이 윤리적인 결정을 하는 데 있어 근거해야 하는 원칙이자 자신의 행위의 도덕성을 재는 잣 대이다. 또 도덕성의 규범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간적 행위' 는 '인간의 행동' 과는 다르다. 곧 호흡이나 잠과 같은 '인간의 행동' (actus hominis)은 의지적이 아닌 물리적 필연성에 따른 행동을 가리키지만, '인간적 행위' (actus humanus)는 의지 자체의 계획적이고 자유로운 선택 능력에 따른 윤리적 행위 곧 인간의 정신적 본성을 명백히 표현해 주는 윤리적 행업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간적 행위는 '내적 행위' (actus interni)와 '외적 행위' (actus externi)로 구별된다. 내적 행위가 의지 자체의 의향과 동의로 이루어지는 정신적 행위를 가리키는데 반해, 외적 행위는 자선을 베푸는 일과 같이 신체 기관이 의지의 명령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이루어지는 신체적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도덕성의 규범에 맞는 윤리적 행위로서의 선업이란, 결국 내적 행위와 외적 행위가 하나로 합쳐져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하지만 선업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내적 행위' 이다. 왜냐하면 어떤 윤리적 행위이건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는 의지 자체의 내적 행위 곧 '의향' 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Ⅲ. 성서 신학적 관점
〔행 업〕 구약성서 : 구약성서에서 '행업' 곧 '행함' 을 가리키는 단어들로는 '마아쎄' (מַעֲשֶׂה), '포알' (פֹּעַל), '멀라카' (מְלָאכָה), '아보다' (עֲבֹדָה) 등 여러 단어들이있다. 이 단어들이 하느님에게 적용될 경우 그분의 창조사업(창세 2, 2. 3 ; 이사 45, 9. 11) · 섭리적 활동(신명 32, 4) · 역사 안에서의 구원 행위(출애 34, 10 : 여호 24, 31 : 시편 44, 2)를 뜻하며, 인간에게 적용될 경우 인간의 창조적 활동(창세 1, 28 : 2, 5. 15) · 경신례를 위한 여러 가지 형태의 봉사(1역대 9, 28 : 28, 14 : 2역대 34, 13 ; 출애12, 25 ; 30, 16 : 민수 4, 4 : 여호 22, 27) · 일상의 일거리(욥기 24, 5) · 노동(창세 5, 29) · 인간의 윤리적 행위(욥기34, 11 ; 잠언 20, 11 ; 21, 8)를 뜻한다. 칠십인 역본에서 행업을 가리키는 단어 '에르곤' (ἔργον, 행함, 일, 업적)은 하느님이 우주 안에서 이루신 창조 사업(창세 2, 2. 3)과 역사 안에서 당신 백성을 이끄신 일(출애 34, 10), 그리고 인간의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일은 거룩한 일(출애 31, 3), 세속의 일(출애 12, 16), 노동(창세 5, 29), 선행과 악행 곧 윤리적 선악의 행위(시편14, 1 : 잠언 10, 16 : 욥기 11, 11)를 통틀어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의 행업은 그의 의향이 외적으로 표현되어 이루어지므로 의도 및 지향은 행위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구약의 초기에는 외적 행위만이 가치가 있다는 마술적이고 서물적(庶物的)인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고(1사무 14, 27. 43-44), 특히 제의(祭儀)에서는 단지 외적으로 규정을 어기는 일만으로도 중벌을 받았다(1사 무 6, 19 ; 13, 8-14 : 2사무 6, 6-7). 그래서 사람들은 정결례에 관한 숱한 규정들을 외적으로 지키는 일에 커다란 비중을 두게 되었으며,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채 모르고 짓는 죄' 들에 관한 규정까지도 생겨났다(레위 4장 : 5, 17-18 : 22, 14 ; 민수 15, 24-29 : 에제 45, 20 : 욥기 19, 4 ; 시편 19, 13). 더 나아가 이런 흐름으로 인해 제사의 근본 정신을 망각한 채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그릇된 예배가 성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풍조는 예언자들의 호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예언자들은 선행 · 의로움 · 공정 같은 덕의 실천이 제사의 근본 정신임을 강조하였고(아모 5, 21-24 : 이사 1, 10-17 : 예레 7, 21-23), 그들의 영향으로 구약 후기에 선업은 가치에 있어서 제사를 능가하거나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잠언 15, 8 :21, 3 ; 집회 3, 14. 30-31 : 35, 1-5 : 토비 4, 8-11). 이와 함께 참된 선업에 대해 하느님으로부터 보답을 기대하는 '응보' 사상, 곧 각자가 행한 선업과 악업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갚음을 받게 되리라는 믿음(판관 1, 7 ; 2사무 3,39 : 이사 59, 18 : 예레 50, 28-29 : 욥기 34, 11 : 시편 28, 4 ; 62, 13 ; 잠언 11, 4 24, 12 : 집회 16, 12-14 ; 로마 2.6)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안에 깊이 각인되었다(신명24, 13 : 이사 58, 6-14 시편 92, 13 : 112장 : 잠언 11-12 장 : 집회 3, 30-4, 10 : 17, 19-23). 신약성서 : 신약성서에서 '행함' · '행업' · '일' 을 뜻 하는 단어들은 동사 '에르가조마이' (ἐργάζομαι, 일하다, 노동하다, 행하다. 선 또는 정의를 행하다, 죄 또는 악을 저지르다. 거룩한 의식을 거행하다) , '포이에오' (ποιέω, 일하다, 행하다, 저지르다) , '프라쏘' (πράσσω, 실행하다, 행하다, 저지르다)에 속하는 어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어들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 내지 그분의 창조적 활동보다는(요한5, 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요한 4,34 ; 5, 36), 지상 예수의 기적 및 전 활동(마태 11, 2. 19), 사도들과 믿는 이들을 통하여 현양된 그리스도의 일을 가리키는 데 더 많이 사용되었다(마르 16, 20 : 로마15, 18 : 1고린 15, 58). 하지만 이 단어들이 인간의 행업에 적용될 경우에는 지상에서의 '노동' (마태 21, 28 : 1고린 9, 6 ; 1데살 2, 9)과 어떤 일정한 교회 직무를 위한 조
건으로서의 '모범적 생활' (1디모 5, 10. 25)을 가리켰다.
그런데 '행업' 또는 '행함' 이란 말은 바오로에 의해 독특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곧 '행업' 또는 '행함' 이라는 말이 단지 자기 의화의 수단인 한에서는 바오로에 의해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지만(로마 3, 20 : 4, 2. 6 ; 9, 12. 32 : 11, 6 ; 갈라 2, 16 : 3, 2. 10 ; 에페 2, 9 ; 2디모 1, 9 ; 디도 3, 5), 믿음과 관련되어 이루어지는 사랑의 선업인 한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갈라 5, 6).
첫째, 바오로에 의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행업' (로마 4, 2. 6 : 9, 12. 32 : 11, 6) 및 '율법의 행업' ('ἔργα νόμου, 로마 3, 20. 28 : 갈라 2, 16) 또는 이것의 준말인 '율법' (νόμος, 로마 3, 21 : 갈라 2, 21 : 3, 11 ; 필립 3, 6. 9)과 같은 그리스어 표현들은 유대교의 율법 준수와 관련된 한에서 믿음과 대립된다. 바오로가 사용한 이런 그리스어 표현들은 유대교 랍비 문헌에서 사용되던 '마아쎄 미츠보트' (מַעֲשֵׂה מִצְוֹת) 또는 '미츠보트' (מִצְוָה)에 상응하는 표현들이다. '마아세 미츠보트' 는 글자 그대로 '계명들의 행함' 곧 '계명들의 실행' 을 뜻하였으며, 이보다 더 일상적인 표현인 '미츠보트' 곧 '계명들' 은 '계명들의 실행' 에서 생기는 행업 및 업적을 뜻하였다.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계명들의 실행과 그로 인한 공로는 인간이 심판의 날을 대비하여 인간 자신을 위해 보물을 쌓아 놓는 일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계명들의
실행과 율법 조항들의 구체적인 실행은 인간을 하느님 앞에 의롭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은 젖값을 면제받게 해주는 근거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의로움의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수단 및 참된 생명의 실체였다. 그리고 이런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대인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위대한 특전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율법의 소유에 따른 유대인의 특전을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구약성서가 불신앙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해 죄인이라고 하는 내용들은 불신앙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여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며(로마 3,
10-18), 따라서 인간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이건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이건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로마 3, 9). 그뿐 아니라 바오로는 율법의 실천으로 인간이 의화된다는 유대교의 구원 교리를 거슬러,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이 선이고 죄인지를 명백히 인식시 켜 줄 뿐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주지는 못한다고 주장하였다(로마 3, 20 : 7, 7-13. 16-18).왜냐하면 율법의 기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이 명하는 선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각자의 숨은 욕구 및 이기심으로부터 인 간의 행업을 끌어내어, 그런 행업이 실상은 인간의 한낱자기 의화의 수단이자 불의의 행업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율법' 또는 '율법의 행업' 을 '믿음' 과 대립시킨 채, 인간은 행업으로 곧 율법이 명하는 선을 행함으로써 의화되지는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곧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화될 뿐이라고 역설하였다(로마 3, 28 ; 갈라 2, 16 : 3, 10).
둘째, 바오로에 의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행업'및 '율법' 또는 '법' 과 같은 그리스어 표현들은 그것이 믿음에 기초를 두고 이루어지는 한에서 사랑의 행함(갈라 5, 6)이자 사랑의 법(로마 13, 9)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업' 은 믿음의 결실 및 의로움의 결실을 뜻하였고(2고 린 9, 10 ; 갈라 5, 6 ; 필립 1, 11 : 골로 1, 10), '법' 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면서(로마 8, 2) 실행하는 사랑의 계명을 뜻하였다(로마 13, 9). 그러므로 믿음에 토대를 둔사랑의 선업은 바오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법(갈라 6, 2)이자 율법의 완성(로마 13, 8. 10)인 것이다.
〔선 업〕 구약성서 : 신명기 15장 7-11절에서 분명하게 규정된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자선 행위는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구하게 실천해온 선업들 가운데 하나였다(시편 112, 9 : 잠언 19, 17 :28, 27 : 집회 3, 30-4, 10 : 29, 8-13 : 참조 마태 19, 21 : 루가 19, 8 ; 요한 13, 29 : 사도 9, 36 : 2고린 9, 9 : 갈라 2, 10). 선업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약은 구약 시대 후기의 작품인 토비트서에 언급되어 있다(4, 3-19 : 12, 6-9). 토비트서는 "주님 친히 모든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신다"고 강조하면서(4, 19) 중요한 기본 선업으로 세 가지 신심행위인 기도 · 단식 · 자선을 꼽고 있다(12, 8-9). 그리고 이 세 가지 기본 선업은 유대교를 거쳐 신약성서로 이어지는데, 특히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세 가지 선업에 대한 실천은 예수가 추구하였던 정신에 따라 더욱 철저하게 요구되었다(마태 6, 1-6. 16-18 : 사도 10, 31).
신약성서 : 신약성서 전편을 통해 윤리적 선행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부각되었으며 아울러 선한 의향 및 내적 행위의 중요성도 함께 부각되었다(마태 5, 16 ; 사도 9, 36 : 로마 13, 3 : 에페 2, 10 ; 야고 2, 17 ; 1베드 2. 12). 신약성서에서 윤리적 선행 및 선업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선업은 한편으로는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예를 기리는 일에 봉사하고(마태 5, 16 ; 요한 15, 8 ; 로마 2, 7 : 2고린 9, 11 ; 골로3, 17), 다른 한편으로는 최후의 심판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마태 25, 31-46).
① 신약 전반 : 신약성서에 따르면 선업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추구되거나(마태 6, 1-18 : 23, 5 ; 갈라 6, 4 ;골로 3, 23 ; 1디모 5, 21) 인간의 속마음과 분리된 채 추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의향 또는 의도가 행위의 선함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마태 7, 15-20). 사실 순수한 의향을 지닌 사람(마태 5,8)이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을 수 있고(루가6, 45 : 마태 12, 34-35) 양질(良質)의 인간이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는다(루가 6, 43-45 ; 마태 7, 21-27). 왜냐하면 행업은 인간의 '질' (質) 곧 인간의 '내적 기본 자세'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내적 기본 자세는 세례받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믿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선행도 있을 수 없으며(요한 6, 28-29 : 골로 1, 21-23), 거꾸로 믿음 안에서는 모든 행동이 선이 된다(갈라 5, 19. 21). 결국 선업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의 결실을 의미한다(갈라 5,6). 이런 선업은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는 계기를 만들고(마태 5, 16 : 요한 15, 8)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상급의 기준을 제공한다(로마 2, 6-7).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업에 따라(로마 2, 6-8. 13), 정확하게 말해인간이 행한 사랑의 선업에 따라(마태 25, 31-46) 하느님으로부터 종말에 갚음을 받을 것이다(2고린 5, 10).
② 공관 복음서 :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선업의 근본 정신이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역설하였다(마태 12, 50 : 마르 3,35 : 루가 8, 21 ; 참조 : 마태 5, 48 : 루가 6, 36). 그래서 예수는 산상 설교에서 '바리사이적 의로움' 과 제자들의 '참된 의로움' (마태 5, 20 : 6, 1), 즉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행하는 '바리사이적 선업' 과 순수한 지향을 갖고 숨어서 행하는 제자들의 '참된 선업' 을 구분하였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선업은 남을 의식한 채 업적을 쌓기 위해 행하는 바리사이적 선업과 는 달리,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및 내적 유대를 심화시키는 순수한 차원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마태5, 48 ; 6, 4. 6. 18).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대교의 전통적 신심 행위이자 세 가지 기본 선업인 자선(6, 2-4) · 기도(6, 5-6) · 단식(6, 16-18)을 순수한 의향을 갖고 숨어서 행하는 그리스도교적 선업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순수한 지향을 갖고 숨어서 행하는 선업(6, 4. 6. 18)과 사람들 앞에서 끝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선업(5, 16)은 같은 것이다. 왜냐 하면 선행 또는 선업에 있어서 중요한 차원은 외적 행위자체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을 의식한 채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지향 및 의도이기 때문이다(6, 33).
③ 바오로의 서간 : 바오로는 윤리적 선행 곧 선업을 의화 및 성령과 관련하여 파악하였다(로마 6, 18-19 : 2고린 9, 10). 바오로에 따르면, 아직 구원되지 못한 인간은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죄의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겪는 존재이다(로마 7, 19-24). 그래서 이런 인간이 율법에 대한 순종 속에서 행하는 행업 또한 무력하기 마련이다. 바오로는 이런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이제 단 하나의 구원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로마 3, 28 : 6, 18 ; 7, 5-6 : 8, 1-2).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의화가 그것이다. 바오로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근거는, 하느님 아버지가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믿는 이들을 위한 생명의 원천으로 받아들인 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통하여 죄인이었던 인간을 의롭고도 거룩하게 만듦으로써(1고린 1, 30)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존재론 적 사실에 있다(갈라 6, 15). 그런데 이처럼 구원된 인간의 실존 및 윤리적 삶을 인도하는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생명력은, 바오로에 따르면 다름아닌 성령이다(로마8, 14). 왜냐하면 성령의 힘으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론적 사실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인간은 영에 따른 윤리적 삶을 영위할 수있기 때문이다(에페 2, 10 골로 1, 21-23). 그러므로 "의화되었다" 는 '직설법' 과 "영을 따라 거닐라"(갈라 5, 16.23)는 '명령법'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이다.사실 세례받은 이의 선업은 예수의 구원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 안에 하느님의 선물인 영이 베풀어졌다는 증거이자 세례받은 이들 안에 머무르는 성령이 작용한 결과이다(로마 8, 2-5. 13-14). 그래서 바오로는 선업을 하느님의 선물(2고린 9, 8. 10)이자 예수의 선물(골로 3,17 : 2데살 2, 17), 그리고 성령의 열매라고 정의하였다(갈라 5, 22). 바오로에 따르면 '영의 열매' 인 선행들은 많은 '육의 행실' 인 악행들에 대립되며(갈라 5, 19. 22), 영의 열매인 선행들 중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사랑이다(갈라 5, 22). 이런 사랑의 선업은 하느님의 뜻과 생명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영예를 기리는 계기를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로마 2, 7 ; 2고린 9, 11) 종말에 있을 영원한 생명과 상급의 잣대가 된다(로마 2, 6. 7. 10 : 1고린 3, 13 ; 갈라 6, 9-10 : 에페 2. 10).
④ 야고보의 편지 : 야고보는 선행에 대한 바오로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여 자신들의 생활에서 믿음의 실천을 소홀히 하던 그리스도인들을 거슬러 선업의 가치를 옹호하였다(야고 2, 24 : 로마 3, 8). 야고보에 따르면 사랑의 행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업은 살아 있는 믿음의 필연적 결과로서 믿음은 단지 행업에 의해서만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야고 2, 14-26). 그러므로 바오로처럼 야고보에게 있어서도 선업의 실행은 신앙의 실천과 관련되었다. 이렇게 볼 때 바오로와 야고보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들은 행업이라는 단어를 다른 문맥 안에서 사용하였을 뿐이다. 바오로는 율법의 행업으로 의화된다는 바리사이적 신심에 젖어 있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야고보는 신앙의 실천을 무시하거나 게을리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을 뿐이다.
⑤ 요한 복음서 및 요한의 편지 : 요한에 따르면 선행은 "진리를 행하는 것"요한 3, 21 ; 1요한 1, 6) 또는 "진리 안에서 거니는 것"(2요한 1, 4 ; 3요한 1, 3-4)과 관련되어 있다. '진리를 행하는 것' 또는 '진리 안에서 거니는 것' 은, 율법의 규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뜻하는 것 이 아니라 예수의 진리를 충실히 고수하는 믿음을 뜻하며, 요한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요구되는 행업은 믿음이었다(요한 6, 28-29). 즉 죄인의 전형적 행업은 불신앙이고 세례받은 이의 전형적 행업은 믿음이었던 것이다(요한 3, 19-21). 그런데 '진리를 행하는 것' 또는 '진리 안 에서 거니는 것' 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 기준 및 선행의 기준을 자기 자신 안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계시한 진리 안에 두는 것을 뜻하였으며, 따라서 '진리를 행하는 것' 또는 '진리 안에서 거니는 것' 은 동시에 그분이 몸소 가르치고 보여 주신 "사랑의 계명 안에서 거니는 것" (2요한 1, 6)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믿음' 과 '행업'또는 '믿음' 과 '선업' 에 관한 바오로와 야고보 사이의 강조점 차이는 요한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아울러 요한에 따르면 믿는 이들의 선업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치와 내적 친교로부터 이루어지는 결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어떻게 예수와의 일치 및 친교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상징어' (요한 15, 1-10)에 잘 표현되어 있다. 요한은 이러한 일치 및 친교의 필수적 열매를 사랑이라고 하였다(1요한 3, 23). 요한에 따르면 사랑은 하느님이 믿는 이들에게 선사한 선물이자(1요한 3, 1 ; 4, 7. 10), 하느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의 내적 본질이 현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1요한 3, 9-10).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랑의 선업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게 되므로(요한15, 8), 선업을 실천하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1 요한 4, 7 : 3요한 1, 11) 하느님 안에 머무르다가(요한 15, 5), 하느님께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5, 29) .
IV . 교의 신학적 관점
〔교의의 역사〕 교의사적으로 행업 또는 선업의 문제는 아우구스티노(354-430)가 펠라지우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부터 대두되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과 악을 동등하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으며 따라서 본성의 선' 을 통해 인간 스스로 선업을 쌓아 완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지우스(Pelagius, 354?~?)를 거슬러, 아우구스티노는 선업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는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고 반박하였다(아우구스티노, 《펠라지우스의 움직임》XⅣ, 37).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삶에 있어서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의지에 더 중점을 두는 반(半)펠라지우스주의(semipelagianismus)를 거슬러, 믿음의 시작은 인간의 선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하였다(아우구스티노, 《성인들의 예정》 II , 3~5). 529년에 열린 제2차 오랑주(Orange) 교회 회의 역시 반펠라지우스 주의를 거슬러, 의화를 준비시키는 모든 인간적 선업은 은총의 선물이며(DS 376) 따라서 모든 선업의 시작에는 구원 활동을 펴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한다(DS 397)고 선언하였다.
선업의 문제는 초기 및 후기 스콜라 학파 안에서 다시등장하였다. 스콜라 학파는 은총을 받기 위한 인간의 성향을 규정하면서 기도와 통회와 같은 선업을 인간이 해야 하는 의화 준비의 원인으로 묘사하였다. 이와 함께 의화의 기초가 '사랑에 의해 형성된 믿음' (fides caritate for-mata)뿐만 아니라 은총은 의화된 사람 안에서 선업과 함께 성장하며, 이 경우 선업은 공로의 성격을 갖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루터(M. Luther, 1483~1546)는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심지어 선행에 있어서조차 죄를 지으며, 따라서 인간의 선업은 언제나 죄스러울 뿐이라고 주장하였다(바이마르판, 《루터 전집》 7, 438, 7). 트리엔트 공의회는 루터의 이런 주장에 대하여 선업의 긍정적인 가치(DS 1535, 1574, 1582)와 선업에 의한 은총의 증가 가능성(DS 1539, 1575)을 옹호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루터의 기본 주장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의화된 사람 안에서 작용하여 모든 선업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즉 그리스도의 힘이 의화된 사람들의 행업에 앞설 뿐만 아니라 동행하며 뒤따른다는 것이었다(DS 1546). 아울러 트리엔트 공의회는 선업을 행한 채 끝까지 참고 견디며 하느님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영원한 생명이 제공된다고 가르쳤다. 첫째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녀들에게 자비롭게 '은총' 을 주겠다고 한 약속에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 제공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이 선업과 공로에 대하여 충실하게 '상급' (merces, 갚음)을 주겠다고 한 약속에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 제공된다(DS 1545)는 것이다. 이처럼 트리엔트 공의회는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 과 '상급' 으로 정의하면서 '하느님의 약속' 이라는 성서적 범주를 활용하였고, 여기에 덧붙여 선업의 높은 가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쳤다(DS1548). 아울러 교회는 바이우스(M. Baius, 1513~1589)의 주장(DS 1925)과 케넬(P. Quesnel, 1634~1719)의 주장(DS2459), 즉 비신자들의 모든 행업이 죄스러운 것이라면서 비그리스도인들과 죄인들의 선업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들의 기도마저도 죄스러운 것으로 여겼던 극단적인 주장들에 대항하여 비그리스도인들과 죄인들이 행하는 선업의 긍정적 가치를 천명하였다.
〔은총과 선업의 관계〕 은총 신학에 따르면 행업 또는 선업은 의화 뒤에 믿음으로부터 성장하는 사랑의 행위를 뜻하며, 행업 및 선업의 문제는 은총 신학 안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어 왔다. 선업의 문제는 특히 은총의 문제와 관련되었다. '은총과 선업의 관계' 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5세기 펠라지우스주의의 교리 및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교리와의 대립을 통하여 심화되었는데, 양측의 쟁점은 "우리 인간은 은총 없이도 '선업' 을 행할수 있는가?" , "은총은 모든 '구원적 행업' (actus salutares)에 필수적인가?" "은총으로 의화된 사람의 선업은 구원을 위해 '공로' (meritum)의 성격을 갖는가?" 등이었다.
첫째 질문은 다시 말하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윤리적선업에 있어서 은총이 필수적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행위를 자연적 행위와 초자연적 행위 곧 자연적 선업과 초자연적 선업으로 구별해야 한다. 이 구별의 유효성은 바이우스의 교리를 단죄한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확인되었다(Ds 1934, 1961).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신학에 따르면, 아담의 원죄 이 후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기는 했지만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부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죄스런 본성의 상태에서도 초자연적 선업이 아닌 자연적 선업의 일부를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인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 전부 죄인 것은 아니며,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연적 선업의 전부가 아닌 그 일부는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윤리적 선업에 있어서, 곧 초자연적 선업뿐 아니라 자연적 선업에 있어서도 은총이 필수적이라는 후스(DS 1216), 루터(DS 1481~1482, 1486), 바이우스(DS 1927~1928, 1930, 1937), 얀센주의자(DS 2401, 2438), 케넬(DS 2401, 2438)의 과장된 표현들을 배척하였다.
둘째 질문은 "인간이 초자연적 행복 및 구원을 향해 질서 지워진 '구원적 행업' 을 행하는 데 있어서, 곧 구원으로 인도하는 모든 초자연적 행업 및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은총이 필수적인가?" 하는 물음이다. 가톨릭 교회는 은총의 도움 없이는 어떤 초자연적 선업도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는데,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은 분명히 가톨릭 교리의 중요한 일면에 속한다.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분명히 선포하였으며 (요한 15, 5), 사도 바오로도 신적 도움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신자들에게 가르쳤다(필립 1, 6 : 2. 13 ; 2고린 3,5). 또 아우구스티노는 "우리가 원하도록 하느님이 작용하시건 혹은 우리가 원할 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작용하시건 간에, 그분 없이는 우리는 신심 행위로서의 선업들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다" (《은총과 자유 의지》 XVI, 33)고 하였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가톨릭 교회는 특히 의화의 시작에 있어서 도움의 은총이 필수적이라고 가르쳤으며, 아울러 상존 은총(gratia habitualis) 또는 성화 은총(gratia sanctificans)을 지향하며 행하는 이런 선업은 도움의 은총(gratia actualis)이 사람 안에 일으킨 결과라고 천명하였다(Ds 375, 377, 1525, 1553, 1559). 그러므로 모든 구원적 행업에 있어서 은총은 필수적이다.
셋째 질문은 "의화 뒤에 의인이 행하는 선업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여기에서 의화 뒤에 의인이 행하는 선업 곧 - '공로적 행업' (actus meritorii)은 오직 은총에 의해 달성이 가능한 초자연적 목표에 참으로 비례하는 의인의 선업을 의미한다. 이 공로적 행업에 관한 문제는 인간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되며 인간의 선업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한다는 루터의 명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선업과 구원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명제는 부분적으로는 반펠라지우스주의에 기울어져 있던 일부 신학자들의 저술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의화 은총(gratia iustificationis)에 의한 인간의 내적 변형을 부정하는 루터 자신의 기본 입장을 담고 있다. 사실 루터는 인간이 의화되었을 때조차도 초자연적 목표에 참으로 비례하는 선업 곧 '공로적 행업' 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 및 신학은 인간이 의화' 또는 '성화' 에 의해 죄의 상태로부터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룩함의 상태로 변화됨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내적으로 변형되었다고 선언하였으며(DS 1520~1583), 따라서 이런 의인의 '공로적 행업' 은 인간의 초자연적인 목표에 참으로 비례한다고 가르쳤다(DS 1576, 582). 곧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은 선업은 결국 구원을 위하여 공로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로적 행업은 단지 은총의 결과로서 가능할 뿐이다. 왜냐하면 공로적 행업에는 '상존 은총' 과 주입덕(注入德, virtus infusa)으로 인간과 그의 능력이 고양되고 완성되어있음이 전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현실 안에서 공로적 행업을 행할 때에도 실제로 그때마다 '도움의 은총' 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교회 일치 운동에 따른 전망〕 루터와 다른 종교 개혁가들은 당시 유행하던, 행업을 통해 성화를 이룬다는 견해 곧 선업을 수단으로 자기 성화를 이룬다는 견해를 거슬러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수호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선업을 두 가지 원리, 즉 '은총만으로' (sola gratia)와 '믿음만으로' (sola fide)에 종속시켰다. 결국 루터는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업이 믿음의 열매인 까닭에 선업도 믿음과 함께 증가하기 마련이며, 더 나아가 선업으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높일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찬미하고 높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HeidelbergerKatechismus, 1563)에서는 "왜 우리는 선업을 행해야 하는 가?" 하는 물음(제86문)을 제기한 뒤 이에 대한 답으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 곧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기 위해, 믿음의 열매인 선행들로부터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의 이웃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등이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오직 믿음만으로 의화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도 믿음은 윤리적 행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로 인해 오늘날 가톨릭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이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교회 일치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곧 "인간은 믿음으로 의화된다. 그러나 믿음은 사랑의 선업을 통해 활성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업을 행하는 일은 믿음을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최후의 심판 또한 우리 인간의 행업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인간의 참다운 토대인 데 반해 선업은 구원을 위한 토대이다."
〔조직 신학적 성찰〕 선업의 문제는 매우 밀접하게 은총 · 의화 · 믿음 · 사랑 · 심판과 관련되어 있는데, 가톨릭 신학에서의 이에 대한 최근의 성찰은 다음과 같다.
① 은총과 선업 : 아무도 자기가 행한 선업으로써 구원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능력과 공로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선업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으로 성취하는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는것이기 때문이다.
② 의화와 선업 : 선업은 의화의 열매이다. 곧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의화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선업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의화가 선업과 관계없이 홀로 하느님의 선물인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데 반해, 그리스도인의 선업은 오히려 그런 의화의 결과이다. 선업은 인간이 의화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나 이루는 데 있어서 원인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③ 믿음과 선업 : 선업은 의화 뒤에 믿음으로부터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업과는 별도로 의화를 이루는 믿음은 의화를 이룬 다음에 필연적으로 선업 안에서 다시금 활성화되기 마련이다. 곧 믿음 안에서 시작되고 선사된 의화는 행위 안에서 견고해져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결국 직설법으로 표현되는 '구원의 선물' 과 명령법으로 표현되는 '구원의 과업' 사이에는 내적 일치가 있다.
④ 사랑과 선업 : 의화된 사람의 믿음은 사랑 안에서 비로소 효과를 낸다. 그러므로 사랑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 믿음이나 사랑으로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무익할 뿐이다. 그런데 사랑의 행위인 선업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현존의 표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행하는 선업은 그 자신이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사랑과 감사의 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온 인류의 자비로운 아버지로 찬미하고 현양하게 하는 계기(기회)이기 때문이다.
⑤ 심판과 선업 : 최후의 심판 때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인은 자신을 하느님사랑과 이웃 사랑에 오롯이 헌신한 사람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에 한해서이다. 왜냐하면 선업 또는 선행은 우리가 어떻게 심판받을지에 대한 기준과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 구원 ; 사랑 ; 선善] ; 은총 ; 의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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