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적인 실존이 인간이 되기 이전부터 생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용어.
선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 특히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에서 언급되는 주요한 신학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로고스(말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으로부터 일치를 이루는 성자 하느님,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고 부활한 종말론적인 구세주라고 믿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 구세주의 위격적인 실존은 영혼과 육체를 취해 인간이 됨으로써 비로소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생성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세상에 몸소오기 전부터 영원 가운데 이미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 위격적인 친교를 나누면서 함께 실존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재는 바로 이러한 영원 가운데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파견과 그 신적인 출처 및 하느님과의 영원한 위격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구약성서적인 배경] 구약성서에서는 한결같이 오로지 창조주 하느님만이 영원 속에 실존해 있다고 한다. 하느님은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보다 앞서 존재해 있는 이로서,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특히 시편에서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있어 엄위로우며 길 이길이 그러하고(시편 93, 2-5), 당신의 지혜로 온갖 것들을 다 만들었다고 찬미한다(시편 104, 24). 하느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특히 지혜 문학서들에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잠언 1-9장 ; 집회 24장 : 지혜 6-9장). 여기서 지혜는 세상 피조물보다 앞서 실재한 본질로서 의인화되어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즉 지혜는 세상 만물 가운데 첫 번째 피조물이요(잠언 8, 22-31), 하느님의 입에서 나와 온 땅을 뒤덮고(집회 24, 3)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는 광채이며 하느님의 선함을 보여 주는 형상이요(지혜 7, 25-26),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면서(지혜 8, 3) 하느님의 왕좌에 자리한 반려자이다(지혜 9, 4. 10). 또한 지혜는 하느님의 영(지혜 1, 5-6 : 7, 7. 22)과 하느님의 창조 말씀(지혜 9, 1-2)과도 동일하게 언급된다. 그리고 지혜는 세상 창조 때 하느님의 조언자요 협조자였으며(잠언 8, 27-30 : 지혜 8, 4 : 9, 2. 9) , 마치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처럼 세상 모든 것을 통찰하고 관장하며 (지혜 7, 24 : 8, 1. 5) 인간 역사에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지혜 10, 1-19). 이런 지혜는 안식처를 찾아 다니다가(집회 24, 6-7) 마침내 시온의 거룩한 장막(성전)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율법(Torah)으로 정착하게 된다(집회 24, 8-19. 23 ; 바룩 3, 15-4, 4). 따라서 생명을 얻고자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하느님의 우주적인 창조 지혜는 이제 율법에서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에 지혜는 인간들에게서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다시 하늘로 되돌아간다(《제1 에녹서》 42, 1-3). 이 지혜는 계시의 전달자요 가르치는 교사이며 길의 안내자로서(잠언 3, 17 ; 8, 12-16. 32-33) 사람들에게 깨달음과 생명과 구원을 제공한다(잠언 1, 32-33 ; 2, 5. 10 ; 3, 2. 16).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느님께 하늘로부터 지혜를 내려보내달라고 간청할 필요가 있다(지혜 9, 10. 17). 지혜는 거룩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가 되게 한다(지혜 7, 14. 27-28). 그리고 파견된 지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의인은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게 된다(지혜 2, 12-18). 이 지혜는 바오로가 말하는 파견된 영(靈)과 병행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갈라 4, 6 : 로마 8,14-15).
이와 같은 지혜 문학적인 표상과 표현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 분명하지만, 이 지혜가 그리스도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표현상 의인화되었을 뿐 육화한 로고스처럼 하나의 위격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증언 및 메시지〕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였다고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는데(요한 3, 16-17 ; 1요한 4, 9 ; 갈라 4, 4-5 ; 로마 8, 3-4), 이 증언은 예언자들의 파견과는 달리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로 한다(히브 1, 1-2 : 마르 12, 1-9). 특히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그리스도 찬가(필립 2. 6-11 ;골로 1, 15-20)에서는 하느님과 동일한 위격체로서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가 잘 명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필립 2. 6) 하느님의 모상이요(골로 1, 15),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감추어진 하느님의 신비라는 것이다(골로 2. 2-3). 로고스 찬가(요한 1, 1-18)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한 로고스가 육이 되어 인간 가운데 거처함으로써(요한 1, 14) 믿는 사람 모두는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요한 1, 16 ; 3, 16-17), 육화한 로고스는 신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요한 1, 18 : 12,45 : 14, 9).
요한 복음서의 관련 진술 : 공관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독생자' 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를 말한다(1, 14. 18 : 3, 16. 18). 뿐 만 아니라 이런 '육화 그리스도론' 적인 관점이 요한 복음서의 전체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말과 행적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을 계시하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로서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6, 38 : 7, 29 : 8, 42 : 16, 28) 다시 아버지 하느님께로 귀환한다(7, 33 : 16, 5. 28). 그러므로 아들은 파견되기 이전에는 이미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1, 1 ; 7, 29).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 역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다시 하느님께로 귀환한다(3, 13-14 ; 13, 31-32 ; 참조 : 6, 62 ; 8, 28).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적인 선재에 관한 언급은 요한 복음서의 도처에서 볼 수 있다(1, 1. 14 : 3, 31-32 ; 6, 46 ; 8, 38. 58-59 ; 17, 23-24). 이러한 언급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신적인 혜안(慧眼)이나 지식(1,47-48 : 4, 24-25 : 11, 41-42 : 13, 11. 18-19. 24-26), 하느님과 일치 가운데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일(5, 17-18)및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존칭한 표현(1, 1 ; 20, 28) 등 은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지닌 아들로서 예수의 정체를 시사한다(10, 30. 38 : 12, 45 : 14, 9-10 : 17, 11). 이러한 예수는 인간 세계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이요(1, 18 : 14, 6-9) 동시에 믿음과 경배의 대상이다(3, 17.36 ; 5, 23 : 9, 35-38 : 20, 31).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내용(5, 24 : 8, 51 ; 12, 48 ; 14, 24 : 15, 3 : 17, 14. 17) 역시 그 맥락을 같이한다.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요(12, 49 : 17, 14)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이루어지며(14, 10. 24 ; 17, 8),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고(3, 34) 하느님이 가르쳐 준 것만을 말할 뿐이다(8, 28 : 12, 50 : 14, 10 참조 : 11, 49-50).
예수 신원의 부각 : 이러한 예수의 신원과 정체 및 사명은 예수의 자기 계시적인 문구, 이른바 '나는 나이다' 라는 표현 안에 총괄되어 있다. 이 문구는 예수가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뜻을 주로 가리키는데, 문맥에 따라 느낌의 차이는 있다. 예수는 이미 계시한 자기 자신을 알려 주거나 확인시키려 할 때 이 문구를 사용하였는데, 이 경우 "나요" (요한 6, 20 : 18, 5-8)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문구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출애 3, 14 ; 이사 43, 10-11)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에는 "나는 있습니다"(요한 8, 58) 또는 "내가 (그)이다"(8, 24. 28 : 13, 19)라고 옮겨진다. 뿐만 아니라 이 문구는 다양한 서술적인 형상어와 함께 사용되기도 하였다. '생명의 빵' 혹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6, 35. 41),'생명의 물' 혹은 '생수의 강' (4, 13-14 : 7. 38), '세상의 빛' (8, 12 ; 9, 5), '문' (10, 7. 9), '목자' (10, 11. 14), 부활과 생명' (11, 25), '길 · 진리 · 생명' (14, 6), '포도나무' (15, 1. 5) 등이 그 예이다.
이렇게 볼 때, 요한 복음서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지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 가운데 구원 행위를 펼치고 다시 아버지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역사적인 삶의 길을 거닌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재와 육화에 관한 신학적인 사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정체 및 사명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선재와 육화 그 자체보다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였다는 그리스도론적이요 구원론적인 신학 사상이 요한 복음서를 위시하여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지배하고 있다. 아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유일무이한 계시자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 구세주이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은 아들 예수의 형상 안에 참으로 실존하며 아들 예수와 함께 일치한다. 이와 같이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일치가 지상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음이 강조된다. 달리 말하자면,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내재적인 본질의 일치보다는 구원 경륜사적인 차원의 일치, 즉 하느님의 원의와 일치된 예수의 행적이 강조된 것이다. 이러한 일치가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영원한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깊이 곧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에 대한 신학 사상을 전망하게 해준 것이다.
〔신학 사상 및 올바른 이해〕 구원론적인 이해 :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 그 자체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요한의 공동체에서도 볼 수 있었던 '그리스도 가현설' (docetismus)에 빠질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다(1요한 2,18-19 ; 4, 2-3 : 5, 6 : 2요한 1, 7).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언급되었거나 시사된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나 육화는 영원한 말씀의 신성이 예수의 지상적인 삶의 길에 기초가 되고, 동시에 그 길을 가능하게 하며 유지한다는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구원이 우리 자신 밖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 하고자 한 것이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와 파견이라는것이다.
또한 나자렛 출신 예수를 통해 볼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세상과 대면한 데서 비롯한 것들 즉 하느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안에서 활동한 것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적인 선재에 관한 언급은 그리스도의 선재적인 상태나 지위에 대한 추상적인 사변보다는 오히려 우리 인간의 구원에 대한 근거나 확증을 말해 주는 일종의 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선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진 구원의 차원에서 언급되고, 육화 역시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재 는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한 예수의 관계도 말해 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로서 창조주라는 것이다(1고린8, 6 : 요한 1, 1-4. 9. 16-18). 그러나 예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요 창조주이다. 하느님은 그저 단순히 인간이 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국한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된다.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은 그리스도 자신이 몸소 걸어온 지상의 삶에 그 기초를 둔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이룩한 구세사적인 길이 그리스도의 선재나 육화에 관한 신학 사상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죽고 부활한 예수는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관계 속에서 언제나 일 치를 이루는 그리스도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죽음과 부활은 부활 이전의 지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의 육화 및 선재로 시선을 돌리게 하였고, 그 결과 영원 가운데 하느님과 함께한 그리스도는 지상에 와서 하 느님과의 영원한 일치 속에서 인간 구원을 이룩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은 구세사적인 관점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선재나 육화는 인간 구원의 역사와 연계된 하느님의 구원 경륜사적인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고찰되어야만 한다.
하느님과의 신적 관계의 표상 : 선재라는 표현 자체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신적인 출처를 말하는 이 용어는 시간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하려는 잘못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성도 시간적인 차원에서 신화적으로 이해하려는
위험성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사실상 선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위격적인 관계 및 하느님의 자기 계시나 자기 기여를 말해 주는 데 그 핵심이 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언제나 영원 가운데 친교를 나누며 함께 현존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요, 언제나 하느님께로 향하는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은 삼위 일체론적이요, 삼위 일체론은 그리스도론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론 ; 독생자 ;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 ; 육화)
※ 참고문헌 B. Gut, Präexistenz Christi, 《LThK》 8, p. 6751 H. Kessle, Christologie, Handbuch der Dogmatik, Bd. 1, Düsseldor, 1992, pp. 41~4421 E. Schweizer, Zur Herkunft der Priexistenzvorstelung bei Paulus, Neotestamentica, Ziirich, 1963, pp. 105~109/ D. Wiederkehr, Entwurf einer systematischen Christologie, 《MySal》3-1, pp. 477~6481 이영헌 역주, 《요 한 복음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4, 분도출판사, 1996,pp. 41~45. 〔李永 憲]
선재
先在
〔라〕praeexistentia · 〔영〕pre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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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파견한 것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로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