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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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의 개창조인 달마대사.

중국 선종의 개창조인 달마대사.

인도의 승려 보리달마(菩提達摩)가 기원전 470/520년 중국으로 건너와 선법을 전한 후 발전하게 된 중국 불교의 한 종파. 불심종(佛心宗) 또는 달마종(達磨宗)이라고도 한다.
〔특 징〕 선종의 종지(宗旨)는 경론(經論)을 근거로 삼는 교종(敎宗)과는 달리, 불립 문자(不立文字) · 교외별전(敎外別傳) · 직지인심(直指人心) · 견성성불(見性成佛)로 요약된다. 불립 문자란 언어나 어떤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교외별전이란 '교' (敎) 밖에서 별도로 전해진다는 뜻이고, 직지인심이란 곧바로 마음의 실상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또 견성성불이란 인간의 참다운 성품을 바로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선(禪)은 진정한 자기의 참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 핵심인데, 그것을 '깨달음' 이라고도 하고 본성을 본다고 하여 '견성' 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선은 구원자와 피구원자가 따로 있을 수 없으며, 믿는 자와 믿는대상이 따로 없다. 즉 구원자에 대한 신앙이나 귀의를 강 조하는 사상이 아니라 부처와 동등한 입장에 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인 것이다. 선은 어디까지나 일원적인 본래의 자기, 진실한 본성에 환귀하는 것이며, 밖을 향한 깨달음의 추구를 경계한다. 그러므로 선은 진실한 자아를 탐구함으로써 절대 주체의 자각 위에 우뚝 서는 독특한 종교적 수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의 선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살불 살조' (殺佛殺祖)의 선풍을 드날리게 되었는데, '살불 살조' 란 선 수행 과정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고 하는 유명한 임제(臨濟)의 경구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같은 수행 자세는 실로 인간자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선종〕 중국의 선종에서는 달마대사를 개창조(開創祖)로 여기지만 그 이전에도 선은 이미 중국에 들어와 있었다. 즉 나집삼장(羅什三藏)에 의하여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선비요법경〉(禪秘要法經), 《사유약요경》(思惟略要經)이 번역되고, 《달마다라선경》(達摩 多羅禪經),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등이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에 의하여 역출되면서 선법(禪法)이 연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보리달마 이후 육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는 동안 선은 중국 특유의 발전을 거듭하여 소위 조사선(祖師禪)을 성립시키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여기에서 말하는 선종 성립의 바탕이 되었다. 달마 이후 중국의 선은 스승과 제자가 이심전심으로 법을 잇는 독특한 '사자 전승' (師資傳承)의 전통에 의하여 2조 신광혜가(神光慧可), 3조 환공승찬(皖公僧璨, ?~606), 4조 쌍봉도신(雙峰道信, 580~651), 5조 황매홍인 (黃梅弘忍)으로 법맥이 이어졌고, 홍인의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에 의해 두 파로 나누어진 후, 우두종(牛頭宗) 정중종(淨衆宗) · 하택종(荷澤宗) · 홍주종 (洪州宗)으로 선법을 펼치다가 마침내 오가 칠종(五家七宗)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선종은 육조 혜능과 신수에 의하여 남종선(南宗禪)과 북종선(北宗禪)으로 양립하였으며, 혜능 이후남악회양(南嶽懷讓), 마조도일(馬祖道一)을 거쳐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에 이르러 비로소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즉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제정되어 청규에 기초한 엄정한 승당 총림(僧堂叢林)의 행지(行持)가 선종의 특색을 현저하게 드러냄으로써 선종의 실질적인 독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선종이라는 호칭은 황벽희운(黃檗希運, ?~850)이나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찬술에서 발견되는 것이 최초이고, 선종에서
'선' (禪) 한 글자를 중시하게 된 것은 종밀의 《도서》(都序)에서라고 추정되고 있다. 남종선과 북종선에 대해서는 옛부터 '남돈북점' (南頓北漸)이라고 하여 남종선은 갑작스럽게 깨닫는다는 의미의 '돈' (頓)을, 북종선은 점진적인 수행을 뜻하는 '점' (漸)을 각각 강조하였다. 돈 오' (頓悟)니 '점수' (漸修)니 하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종은 다른 선 사상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사자 상승(師資相承)의 가풍을 바탕으로 하여 오가 칠종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선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있다. 오가 칠종은 임제종(臨濟宗 : 黃檗希運, 臨濟義玄)위앙종(潙仰宗 : 山靈祐, 仰山慧寂 , 조동종(曹洞宗 : 洞山 良价, 曹山本寂), 운문종(雲門宗 : 雲門文偃), 법안종(法眼宗 : 法眼文益) 임제종 안의 황룡파(黃龍派 : 黃龍慧南)와 양기파(楊岐派 : 楊岐方會)를 가리키며, 이를 통틀어 오가 칠종의 달마 선풍이라고는 하나 모두 혜능의 남종선 계통에 속하는 선종이다. 이 중에서 임제계와 조동계가 후대에까지 번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임제계와 조동계는 선을 수행하는 방법으로 각각'간화선' (看話禪)과 '묵조선' (默照禪)을 주창하였는데, 광지정각(宏智正覺, 1087~1157)과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에 이르러 이러한 선 수행법을 놓고 의견이 나뉘게 되었다. 즉 조동계의 가풍을 이은 굉지의 '묵조선' 과 임제계 양기파의 가풍을 계승한 종고의 '간화선' 이 서로 상대방 가풍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묵조는 사선(邪禪), 간화는 구두선(口頭禪)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굉지 선사는 단지 묵묵히 앉아 마음을 비춤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지관 타좌(只管打坐)를 주장하여, 좌선(坐禪) 그 자체가 대용 현전(大用現前) 즉 진실 그 자체의 나타남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대혜(大慧)에 의해 대성된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참구하여 대오(大悟)하게 하는 선풍이다. 화두란 의문 덩어리〔疑團〕를 의미하며, 공안(公案)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데, 공안 은 조사들이 남긴 글이다. 마치 노련한 관리가 범인의 죄상을 헤아려 벌을 부과하는 것처럼 공안은 이것에 비추어 자기의 마음 바탕을 돌아보는 단초이다. 대혜는 심지를 개척하기 위한 공안의 사명을 어디까지나 주체적인 큰 의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옛부 터 화두에는 1,700칙이 있다 하여 '천칠백 공안'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도원(道原)이 지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1,701인이 수록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이것은 역대 조사의 전등 기어(機語)가 다 공안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조주의 '무' (無)자 화 두와 '이 뒷고 (是甚麼) '뜰 앞의 잣나무' (庭前栢樹子)등이 유명하다. 간화선의 선풍은 그 뒤 우리 나라에 전해져 한국 불교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선종〕 우리 나라에는 일찍이 신라의 법랑(法朗)이 4조 쌍봉도신으로부터 선법을 배워 오고 그 후도의(道義)가 남종선을 전한 이래 이른바 선문 구산(禪門九山)을 형성함으로써 선종이 융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선문 구산이란 ① 남종선을 전승한 도의의
가지산파(迦智山派), ② 홍척(洪涉)과 그 문하를 일컫는 실상산파(實相山派), ③ 지선(智詵)이 개창한 희양산파(曦陽山派), ④ 혜철(惠哲, 785~861)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일으킨 동리산파(桐裏山派), ⑤ 82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장경회휘(章敬懷庫)에게 사사하고 돌아온 현욱(玄昱, 787~868)의 봉림산파(鳳林山派), ⑥82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서 심인(心印)을 얻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웅주의 조합사(鳥合寺)에서 후학을 가르친 무염(無染, 800~888)의 성주산파(聖住山派), ⑦ 입당 구법하여 염관제안(塩官齊安)과 약산유엄(藥山惟嚴)에게 법을 배우고 847년에 귀국하여 강릉의 굴산사에 은거한 범일(梵日, 810~889)의 사굴산파(闍崛山派), ⑧ 당나라에 유학하여 법을 배우고 범일과 함께 귀국한 도윤(道允, 798~868)의 사자산파(師子山派), ⑨ 896년에 당나라로 들어가 동산(洞山)의 제자 운거도응(雲居道膺, ?~902)에게 심인을 얻고 911년에 귀국하여 개경의 수미산 경조사(慶照寺)에 은거하면서 조동종의 선법을 전한 이엄(利嚴, 870~936)의 수미산파(須彌山派)를 말한다.
이 가운데 실질적으로 한국의 선종을 수립한 초조(初祖)는 실상산파의 홍척이다. 홍척은 도의 선사와 함께 중국 구법 여행을 마쳤으며, 귀국 후에는 주로 마조(馬祖)의 법을 널리 펼쳤다. 그의 중국 구법은 도의보다 조금 늦었지만 하나의 학파로서 산문(山門)을 형성한 것은 더 이르기 때문에 그를 한국 선종의 초조로 간주하고 있다. 실상산파는 신라 하대의 경문왕(景文王)과 헌강왕(憲康王)이 이에 귀의함으로써 크게 종풍을 떨쳤는데, 여기에 속하는 인물로는 혜조(慧照, 혹은 惠昭)를 들 수있다. 혜조는 804년에 당나라로 가서 마조의 고제 신감 (神鑑)을 은사로 하여 득도한 뒤 830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육조 혜능의 영골을 모신 법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절이 바로 경남 하동에 있는 쌍계사(雙溪寺)이다.
선문 구산의 성립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 하대에는 여러 중국 계통의 선불교가 수용되었다. 이들은 대개 마조계통이었으나 위앙종 · 조동종 등도 함께 수입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고려 시대로 접어들어 이른바 오교 구산(五教九山)이라는 종파적 확 립이 있고 난 후 비로소 그 교세를 떨칠 수 있었다. 선종은 고려 태조의 숭불 정책으로 수대에 걸쳐 크게 번영하였지만 충렬왕(忠烈王) 이후 국운의 쇠퇴와 함께 선풍도 점차 그 위세를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보조 지눌(普照知訥) · 태고 보우(太古 普愚) · 무학 자초(無學 自招) · 나옹 혜근(懶翁 惠勤) 등에 의하여 한때 부흥하기도 하였지만, 조선 시대의 억불 정책에 의해 다시 그 기운이 꺾이고 말았다.
조선 시대의 선 중흥조로는 승병장으로 유명한 휴정(休靜)을 들 수 있다. 휴정은 선교도총섭(神敎都摠擔)이라는 관직까지 맡았지만 선과 교의 병행보다는 선과 교의 기초 위에 조사선을 지향하는 사교 입선(捨敎入禪)을 천명하였다. 휴정은 교를 선에 이르는 입문의 가르침으
로 파악한 반면에 선은 교와 타협할 필요조차 없는 독자적인 길이라고 보았고, 그 선은 조사선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의 저서인 《선교석》(神敎釋)은 선이교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우위에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고, 《선가금설록)(禪家金屑錄)에서는 조사선에 이르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시대의 선은 휴정의 문도와 휴정의 사제인 부휴(浮休)의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휴정의 문하에서는 사명문(泗冥門) · 편양문(鞭羊門) · 소요문(逍遙門) · 정관문(靜觀門) 등 4대 문파가 생겨났고, 부휴의 문하에서는 벽암 문(碧巖門) · 고한문(孤閑門) 등 7대 문파가 생겨나서 조선 후기까지 그 법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선종의 법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선만을 중시하지 않고 선과 함께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교학(敎學)과 정토 왕생(淨土往生)을 위한 염불에도 크게 치중하는 경 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혼란은 이 문제에 관해 약 150년에 걸쳐 초의(草衣) · 추사(秋史) · 우담(優曇) · 축원(竺源)등이 새로운 저술을 통하여 논쟁을 계속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와 같은 논쟁과 선 · 화엄 · 염불이 혼합된 수행으로 조선 후기의 선은 뚜렷한 맥락을 잡지 못하는 혼돈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 경허(鏡虛)가 나타나 조사선의 전통을 바로잡았으며, 그 법맥이 만공(滿空) · 한암(漢巖) 등에게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선종의 법맥을 잇고 있는 종파가 현재 한국 불교를 대표하고 있는 조계종(曹溪宗)이다. (→ 선)
※ 참고문헌  정병조, 《한국 종교 사상사》 I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선학 사전》, 불지사, 1995/ 동국대학교 출판부 편, 《불교학 개 론》, 1984/ 정성본, 《선의 역사와 선 사상》, 삼원사, 1994/ 해주, 《불교 교리 강좌》, 불광 출판부, 1993/ 關口眞大, 이영자 역, 《禪宗思想 史》 , 문학생활사, 1987. 〔鄭柄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