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완 (1915~1976)

宣鍾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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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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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완 신부.

원주교구 신부. 성서학자. 성모 영보 수녀회 설립자.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본관은 보성(寶城). 1915년 8월 8일 강원도 용소막(원주군 신림면 龍岩里) 544번지에서 선치태(宣致台, 라파엘)와 정치영(鄭致永, 가타리나)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나 1929년 3월에 원주 봉산(鳳山)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1년 4월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한때 성음악에 매료되기도 하였으나 교사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에게 감화를 받아 성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시절에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비롯하여 외국어 공부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14일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는 곧바로 성서 연구에 전념하지 못한 채 일본 츄오(中央)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하다가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1946년부터 천주공교신학교와 성신대학 교수로 활동하던 선종완 신부는 1948년 9월 마침내 로마로 유학을 떠나 우르바노 대학과 안젤리쿰(Angelicum) 대학을 거쳐 로마 성서대학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서 연구 대학원에서 성서를 연구하였다. 1953년에 귀국하여 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망할 때까지 후배 양성과 성서 연구에 몰두하였던 선종완 신부는, 1955년부터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958년 7월에 《창세기》를 발간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출애급기 ·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열왕기》, 《성영》, 《이사야 예언서》 등을 발간하였는데, 1963년 6월까지 그가 번역 · 발간한 성서만도 제2 경전인 바룩서를 비롯하여 구약 16권에 이른다.

한편 성서 번역 비용 충당을 위해 1957년부터 메추리를 사육하기도 했던 그는, 오래 전부터 계획하였던 수녀원 설립도 추진해 나갔는데, 이듬해 경기도 부천(富川)에 수녀원 건립 부지를 마련한 뒤 1960년 3월 25일에 마침내 '성모 영보 수녀회' 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이 수녀원은 1967년에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幕溪里)로 이전되었으며, 1969년에는 수녀원 내에 피정의 집을 완공하였다. 이에 앞서 선종완 신부는 1968년 1월에 신구약 성서 공동 번역 사업의 가톨릭 전문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 8년 동안 성서 번역 사업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1976년 7월 11일 간암으로 사망하여 과천 성모 영보 수녀원 내에 묻혔다.

《가톨릭 청년》 1947년 4~5월호에 <성서의 중심 사상>을 번역하여 연재하는 등 다수의 글을 남긴 선종완 신부의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올바른 사람도 믿어야 살 수 있다>(《가톨릭대학 논문집》 제2집, 1976, pp. 5~34)가 있으며, 그 외에 프로테스탄트측과 공동으로 번역하여 펴낸 《공동 번역 구약성서》(대한성서공회, 1977)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한편 용소막 본당에서는 1988년 11월 27일에 그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성당 구내에 건립하였다. (→ 성모 영보 수녀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교회와 역사》 57호(1980. 5), p. 5; 280호(1998. 9), pp. 13~17/ 성모 영보 수녀회 편, 《선종완 신부 유고 집, 말씀으로 산 사제》, 성바오로출판사, 1984/ 정양모,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金蓮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