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考古學

〔라〕archeologia · 〔영〕arc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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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에서 발굴된 4세기경의 "교사인 그리스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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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에서 발굴된 4세기경의 "교사인 그리스도" 상.

I . 그리스도교의 고고학(〔라〕archeologia christiana) 고대(古代) 그리스도교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그리스도교적 기념물들을 연구하는 학문. 고고학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아르케올로지아' (archeologia)란 말은 고대의 역사 또는 그에 관한 이해와 지식을 뜻하는 라틴어의 '안티퀴타테스' (antiquitates)란 말과 상통한다. 고대란 넓은 의미에서는 과거의 모든 시대, 그리고 문화사적인 면까지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가장 오래된 시대인 고대, 그리고 그 시대의 역사 유적에 관한 연구에 국한된다. 이러한 고전적인 고고학에서 성서 고고학과 그리스도교 고고학이 발생하였다. 그리스도교 고고학은 고전적인 고고학과는 달리 일반적인 유적이 아닌 그리스도교적 건축, 조각, 회화, 비명(碑銘) 등의 기념 건조물들을 통하여, 일반적인 고대가 아닌 그리스도교적 고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문헌 자료들은 원칙적으로 여기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유적들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보완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중요하다. 이러한 연구는 물론 고고학자의 전문적인 연구 방법을 전제로 한다. 즉 역사적인 방법과 조직적인 발굴과 함께 객관적인 연구여야 하고, 무엇보다도 호교적인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교 고고학은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사와는 구별된다. 후자는 기념물의 미학적(美學的)가치를 중요시하는 반면에 전자는 기념물이 나타내는 과거에 대한 증언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품을 신앙의 증언이란 관점에서 연구할 때는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일부가 된다. 신앙이나 종교 사상의 증언이란 점에서 그리스도교 고고학은 역사신학의 한 부분이다. 역사신학은 신앙의 증언의 역사를 위해 고고학적 자료까지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신학만이 아니고 신학사, 교회사, 신심사, 전례사 등 과거의 신앙과 생활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학문은 모두가 그리스도교 고고학과 함께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 아니 불가결의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고고학이 연구하는 고대는 그 개념에 있어서 동방과 서방이 서로 다르다. 서방에서는 그리스 로마권에서의 그리스도교 생활과 사상의 시기인 고대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사망한 604년에 끝나는 반면에 동방에서는 그 시기가 7세기 너머까지 연장된다.
〔역 사〕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기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종교개혁 이후 초기 교회의 성격과 관습에 관한 신학적이고 호교적인 논쟁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교적인 고대는 이미 15세기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나 그때는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평가에 그쳤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종교 개혁가들은 그들 개혁의 근거와 정당성을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찾으려는 의도 에서 막데부르크(Magdeburger Zenturien, 1559~1674)의 《세기별 교회사》와 같은 저술들을 통해 가톨릭적 그리스도교 고대에 대해 편견적인 해석을 내렸다. 즉 가톨릭 교회가 초기 교회에서 이탈하였으므로 가톨릭 교회도 초기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가톨릭 측에서 반박에 나섰고, 이리하여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유적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로마 교회가 초기 교회에서 빗나간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자 가톨릭 측에서 처음으로 나선 사람은 아우구스티노회의 판비노(Onafin Panvino, 1530~1568)였다. 그는 로마의 바실리카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그 결과를 1554년에 간행하였고(De praecipuis urbis Romae sancioribus basilicis), 이어서 로마의 묘지에 관한 연구도 발표하였다(De ritu sepeliendi mortuos apud veteres christianos et eorum coemeteriis, 1568). 그 후 바로니우스(Caesar Baronius, 1538~1607)는 그의 연구 결과를 연대기(Annales ecclesiasti-ci a Christo nato ad annum, 1598)로 펴내고 거기에 판비노의 연구 결과를 포함시켰다.
이와 같은 연구는 보시오(Antonio Bosio, 1576~1629)에 이르러 로마의 카타콤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그의 연구는 1593년 로마 카타콤바에 대한 조직적인 발굴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그의 끈질긴 관찰의 결과는 그의 사망 3년 후인 1632년에야 오라토리오회의 세베라노(G. Severano)에 의해 《지하 로마》(Roma Sotterranea, 1632)란 이름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 그것은 로마 카타콤바에 관한 연구의 걸작으로, 그의 비판적이고 학문적인 방법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는 이어 라틴어로 번역되고(1651) 파리와 쾰른에서 중판이 나옴으로써(1671) 곧 세계 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프로테스탄트 학자들까지 카타콤바 연구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스트라스부르크의 신학자 베벨(Balth. Bebel)은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체계적인 서술을 시도하게 되었고(Antiquitates ecclesiasticae, 1679), 빙갱(W. Bingham)은 초기 교회의 교계, 조직, 규율, 교회력에 관한 중요한 저술을 펴냈다. 그것은 문헌 자료에만 의지하였고 또한 보시오의 《지하로마》를 이용하지 못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특기할 만한 저술이었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는 예수회의 볼랑 학파(Bollandistae)와 베네딕도회의 마비용(J. Mabillon, +1707)을 위시한 생 · 모르 학파(Mauristes)들이 역사적, 비판적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고고학을 촉진시켰다(Th. Ruinart, B. de Montfaucon). 이탈리아에서는 볼데티(M.A. Boldetti)가 묘지에 관해, 호교적이었고 비록 비판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치있는 연구 업적을 남겼다(Osservazioni sopra i cimiteri dei santi martiri e antichi cristiani di Roma, 1720) .
그러는 동안 그리스도교 고고학이 미술 분야로 확대되었는데, 독일의 빈켈만(Joh. Joachim Winckelmann)은 처음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사를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로마로 와서 교황으로부터 고대학의 위원(antiquario della camera apostolica)으로 임명된 후(1784) 로마의 발굴과 복원을 총지휘하면서 그리스도교 고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기념비들의 연대를 밝히고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서루 다쟁쿠르(Seroux d'Agincourt)는 빈켈만을 따라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을 재정리하려 하였다. 아우구스티(J.Ch.W. Augusti)는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체계적 서술을 시도하였으나 유적 자료들을 등한시하였다(Die christliche Altertümer, 1819 Beiträge zum christlichen Kunstgeschichte, 1841). 나폴레옹 시기의 전쟁과 혼란은 그간의 고고학적 성과를 손상시켰다. 부흥 시기에 와서도 이렇다 할만한 발전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롯시(G.B. de Rossi, 1822~1894)의 등장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고고학은 다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로마 카타콤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이미 롯시의 스승인 마르키(G. Marchi, S.J.)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843년부터 로마 카타콤바 발굴 작업을 감독하면서 초기 교회 미술에 관한 그의 저서의 첫째 권을 발표하였다(Monumento delle arti cristiani primitive 1, 1844). 그러나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망하자 롯시가 그의 작업을 계속하여 완성시키게 되었다. 롯시는 법률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카타콤바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남달리 역사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바탕으로 기념물을 해석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비명들을 널리 활용하였고 나아가서 로마 순교록의 연대를 확인하면서 중요한 발견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1852년 고르넬리오 교황 묘, 1854년 갈리스도 카타콤바에서 3세기 교황들의 묘, 1873년 도미틸라 카타콤바에서 네레오와 아킬레오의 바실리카, 1882년 순교자 히폴리토의 묘 등). 이러한 발굴들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묘지의 지방 분포상을 재구성케 하였는데 그는 그 결과를 그의 기념비적 저서인 《그리스도교적 지하 로마》(Roma sotterranea cristiana 3권, 1864~1877)에 남겼다. 그는 또 1863년에 그리스도교 고고학지(Bulletino di archeologia cristiana)를 창간하였는데 그것은 1895년에는 《Nuovo Bollettino》로, 1923년에는 《Rivista》로 발전하였다. 그는 그 밖에도 비문에 관한 연구(Inscriptiones chris-tianae urbis Romae septimo saeculo antiquiores, vol. 2, 1861)와 모자이크에 관한 연구(Mosaiquess des églises de Rome antérieure au Xve siècle, 1872)도 남겼다. 롯시의 발굴과 그 연구 결과는 거의 모든 나라의 고고학자들을 많은 발굴과 전문적인 연구로 자극하여 일찍이 없었던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부흥을 초래하였다.
이탈리아에서 롯시의 뒤를 따른 학자들로는 가루치(R. Garrucci)를 비롯하여, 아르멜리니(M. Armellini), 마루키(O. Marucchi), 스티븐슨(E. Stevenson), 스토르나이올로(C. Stornaiolo), 갓디(G. Gatti) 등이 있는데, 마루키는 그리스도교 고고학에 관해 300편이 넘는 저술과 논문을 발표하였고, 아르멜리니, 스티븐슨과 더불어 묘지와 묘지 성당들을 새로 발견하는 업적도 올렸다. 프랑스에서는 마르티니(J.A. Martigny), 르블랑(E. Le Blant), 뒤센느(L. Duchesne), 플뢰리(Ch. Ronault de Fleury) 등이었는데, 그중 르블랑(1818~1897)은 갈리아의 초기 그리스도교 비명들을 연구 발표함으로써 프랑스의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마르티니는 그리스도교 고고학 사전을 처음으로 냈는데(Dictionnaires des antiquités chrétiennes) 곧 다른 나라에서 그것을 모방했다(W. Smith and Cheetham, Dictionary of christian Antiquities, vol. 2, 1880 ; F.X. Kraus, Real-Encyclopädie der christlichen Altertümer, vol. 2, 1882~1886 ; K. Wessel, Reallexikon zum byzantinischen Kunst, 1963). 독일에서는 피퍼 (F. Piper) , 크라우스(F.X. Kraus), 뮐러(N. Müller), 키르슈(J.P. Kirsch), 바알(A. de Waal), 빌페르트(J. Wilpert), 사우어(J. Sauer), 슐체(V. Schultze), 픽케르(J. Ficker), 스치코프스키(J. Strzygowski, 카우프만(C. M. Kaufamann) 등, 고고학자들이 제일 많이 나왔다. 카우프만과 스치코프스키는 특별히 동방의 그리스도교 고고학을 위해 노력했다. 롯시의 작업은 특히 빌페르트(1857~1944)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묘지의 벽화, 로마 교회의 모자이크에 관한 연구들을 잇달아 간행하였다(Die Male- reien der Katakomben 1903 ; Mosaique et peintures des églises romaines du IV au XIlle s. 1917). 빌페르트와 더불어 기념물을 해석하거나 재현하는 방법이 매우 정확해졌다. 영국에서는 노스코트(S. Northcote), 댈톤(O.M. Dalton) 킹(C.W. King) 등이 나왔고, 러시아에서는 콘다코프(N.P. Konda-kow), 스미르노프(J.Smirnow) 등의 고고학자가 나왔다.
20세기에 와서 그리스도교 고고학은 연구소의 설립, 대학 강좌의 신설, 잡지, 전문지의 간행, 국제 대회, 발굴 등 조직 면에서 놀라운 진전을 보였다. 국제 대회는 지금까지 7회 있었다. 즉 1894년에는 스팔라토-살로나(Spalato-Salona), 1900년은 로마, 1932년은 라벤나, 1938년은 바티칸, 1954년은 엑스 · 앙 · 프로방스, 1962년은 다시 라벤나, 1965년은 트리어에서 개최되었다. 그리스도교 고고학부로 말하면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이 그 좋은 예이고 그 밖의 대학들은 그리스도교 고고학 연구소들을 설립했다(Heidelberg, Erlangen, Göttingen, Kiel, Marburg, Würzburg, Bonn, Roma, Nijmegen, Princeton) . 로마 교황청에는 이미 2개의 연구소가 있었지만(Pontificia Accademia Romana di Archeologia, Commissione Pontificia de Archeologia Sacra) 그것을 폐지하지 않고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제3의 연구소로서 그리스도교 고고학 연구소 (Institutio Pontificio de Archeologia Cristiana)를 신설하였다. 이후 이 연구소는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중심 역할을 하며 젊은 고고학자들까지 양성해 내고 있다. 그리고 베를를린, 런던, 로마, 바티칸, 파리, 아를르, 트리어, 카르타고, 카이로, 아테네, 이스탄불, 워싱턴 등 거의 모든 주요 박물관에 고유한 그리스도교 고고학 관계 전시관이 부설되었다.
〔발 굴〕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발전은 발굴 분야에서였다. 동서방을 막론하고 도처에서 새로운 발견들이 잇달았다. 동방의 발굴에서는 그리스도교 미술의 동방 기원이 밝혀지고, 로마 카타콤바의 발굴에서는 카타콤바와 그 안의 그림들에 대한 연대가 정확히 밝혀졌다. 그때까지는 로마, 특히 로마의 카타콤바를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의 형성지로 보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스치코프스키(Strzygowski)는 그의 두 저서(Orient oder Rom?, 1901 ; Klein Asien, 1903)에서 그러한 종래의 주장을 뒤엎고 그 기원이 서방이 아니라 동방이라는 사실을 밝혀 내고, 그 근원지로 소아시아, 안티오키아 등을 지적하였다. 그 후 불프(O. Wulff)와 댈톤(O.M. Dalton) 등은 그 지역을 알렉산드리아까지 더욱 동쪽으로 확대시켰다(Dalton, East christian Art, 1925) . 그리고 게르케(F.Gerke)는 이러한 사실을 연대기로 작성하였다(ldeengeschichte der ältesten christlichen Kunst, 1940). 또한 시리아의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 발굴에서도 그것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그러한 사실을 더욱 정확히 확인하려는 목적에서 1930년대에 와서는 고대 후기 미술과 그리스도교 미술과의 비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연구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고대 후기 미술 발전의 한 부분 내지는 하나의 양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은 그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교 예술은 아니고 그리스도교적 고대 예술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고고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처음부터 이교적 표현을 거부하고 그들의 신앙과 종교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주장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교 미술 즉 로마 고대 후기 미술을 모방하면서 그것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가 3세기에 이르러서야 모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로마의 카타콤바와 그 안의 그림들에 대한 종전의 연대 주장도 그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때까지 그리스도교 고고학자들은 카타콤바나 그리스도교적 그림들을 교회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예컨대 도미틸라와 프리쉴라 같은 카타콤바들은 그 안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묘들이 발견된 관계로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1928년 이래 이러한 주장들이 잘못된 주장이었음이 입증되기 시작했다. 슈나이더(A.M. Schneider)는 1세기 후반의 그리스도교인으로 알려진 도미틸라 카타콤바의 소위 플라비우스 가족의 묘실(墓室, Sepulc-hrum Flaviorum, Hypogaeum Flaviorum)이 2세기 중엽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Der Eingang zum Hypgaeum Flaviorum, 1928). 그 후 스티거(P. Styger)는, 그러므로 로마 카타콤바도 그 안의 그림들도 2세기 중엽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Die römischen Katakomben, 1933, Römische Martyrergrufte, 1935). 요컨대 2세기에 속하는 그리스도교 그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르트(F. Wirth)는 카타콤바의 그림들과 동시대의 이교 그림들과를 비교 연구한 결과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그림들이 3세기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Römische Wandmalerei, 1934). 그 후에도 슈나이더, 비트, 모리 등이 계속 같은 결론을 내렸다(Schneider, Die ältesten Denkmäler der römischen Kirche, 1951; J. De Wit, Spätrömische Bildnismalerei, 1938; C. R. Morey, The beginnings of christian Art, 1957). 석관(石棺)에 조각된 그리스도교적 표현에 대해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 3세기 전반기의 것이라는 사실이 빌페르트, 쇠네베크와 모리 등의 연구로 입증되었다(Wilper, I sarcofagi cristiani antichi, 1929~1937 ; H.U. von Schoenebeck, Die christliche Sarkophagplastik unter Konstantin, 1936, Die christlichen Paradeisos-Sarkophage, 1937 ; C.R. Morey, Early christian Art, 1942) . 요컨대 동서방을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미술의 기원은 2세기가 될 수 없고 3세기 전반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 발굴에서는 먼저 1915년 바알(A. de Waal)과 스티거(P. Styger)가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에서 시작한 발굴에서 유명한 '사도들의 기념물' (Memoria Apostolorum)과 성 베드로와 바울로 사도에 대한 청원과 함께 수백개의 그라피티(graffiti)와 비명들이 발견되었다. 그 후로는 주로 카타콤바들이 여기 저기서 발견되었는데, 1920년 구 살로나가(Via Salona)에서 성 판필로(Panfilo)의 묘가 발견되었고, 1921년에는 신 살로나 가에서 조르다니(Giordani)의 묘가 발견되었으며, 1926년에는 한 익명의 카타콤바가 비아 티부르티나(Via Tiburtina)에서 발견되었다. 1955년에는 비아 라티나(Va Latina)에서 카타콤바와 함께 신구약 성서의 주제들과 이교적 장면을 그린 벽화들이 완전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것은 그 전에(1919) 아우렐리에서 발견된 이교 묘실(hypogaeum)과 함께 미술사에서 이교와 그리스도교 사상 사이의 경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카타콤바는 로마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었다. 특히 나폴리에서의 카타콤바의 발견은 그때까지 로마 카타콤바만이 높이 평가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H. Achelis, Die Katakomben von Neaple, 1935). 특히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굴(1939~1949)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콘스탄틴 대제 이전의 무덤들과 함께 180년 가이오(Caius) 로마 사제가 언급한, 베드로의 무덤을 덮었던 기념비가 발견됨에 따라 베드로 사도의 로마 체류와 그 순교 사실이 재확인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페인, 프랑스, 독일의 발굴에서도 바실리카, 묘지 성당, 세례 성당들이 발견되었고 북아프리카의 발굴에서는 여러 바실리카와 함께 수도원의 유적도 발견되었다.
1946년 이른바 나그 함마디(Nag Hammadi) 문서의 발견은 금세기 최대 발견의 하나가 되었다. 이집트 나일강의 동쪽 강가 룩소르(Luxor) 북쪽 약 100km, 옛 케노보스키온(Chenoboskion) 근방 나그 함마디 근처의 한 수도원 터에서 항아리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콥트어로 된 일련의 문서들, 구체적으로 약 1천 매에 달하는 파피루스에 쓴 13종의 철본(綴本)이 들어 있었고 그 13개 사본에는 또 49종의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나그 함마디 문서 또는 그노시스주의 문서로 불리게 되었다. 그중 44개 문서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기껏해야 그 이름만이 알려진 것들이다. 모두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경에 그리스어에서 콥트어로 번역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토마스 복음' (신약 외경의 토마스 복음과는 同名異書) 등 아주 적은 분량만이 간행되었다. 그노시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널리 활용되고 있다.
팔레스티나, 특히 시리아에서 많은 바실리카들이 발견되었다. 그중 시리아 사막의 옛 도시인 두라-에우로포스의 모래 속에서 1931 ~1932년에 걸쳐 가옥 교회(House Church)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점에서(232~233년의 것)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콘스탄틴 이전 시기의 가옥 교회의 최초의 보기로서 본디 사가(私家)였던 것을 그리스도교인 공동체를 위해 개조하였다가 260년경에 버려진 것이다. 아마 심한 박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가옥 교회와 함께 3세기 초엽의 세례 성당과 벽화들도 발견되었다. 교회 건물은 콘스탄틴 대제가 종교 자유를 허락한 4세기 초부터 신앙 승리의 상징으로, 그 외형적 표시로 초기 그리스도교적 바실리카 건축 양식으로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처음 3세기 동안은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사가나 지하 묘지들을 전례 장소로 사용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점차 신자수가 증가하자 신자 공동체에 적응시켜 큰 저택들을 장방형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두라-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가옥 교회는 바로 이런 유의 성당의 하나였을 것이 확실하다.
에페소에서의 발굴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565) 때 세워진 요한 사도의 바실리카를 사도의 무덤과 함께 발견하게 하였으며,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던 시기(431)에 성모 성당과 함께 많은 작은 성당들도 발견하게 하였다. 바실리카의 장방형과 그 후의 원형 건축이 혼합된 이스탄불의 유명한 소피아 성당(532~537)은 교회로 사용이 금지된 후인 1934년 이래 그리스도교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발굴 결과는 유스티니아누스 이전의 역사와 현 건물의 역사를 밝히는 지식을 제공하였고 또한 성당의 모자이크를 연구하던 중 벽화들을 새로 발견하는 중요한 성과도 올렸다. (→ 교회사학)

※ 참고문헌  0. Marucchi, Elements d'Archiologie Chrétieme, 3 ts. R., 1900/ H. Leclercq, Manuel d'Archéologie chrétienne, vol. 2, Paris, 1907/0. Wulff, Altchristiliche und byzantinische Kunst, 2 Bde., 1914/ C.M. Kaufmann, Handbuch der christlichen Archäologie, Paderbon, 1922~1923 / J. Sauer, Neues Licht auf dem Gebiet der Christlichen Archäolgie, 1925/P. Testini, Archeologia cristianan, Roma, 1958/ B. Bagatti, L' archeologia cristiana in Palestina, Florence, 1962/ F.X. Kraus, Die römischen Katakomben, 1892-2/ L. Voelkl, Archäologie, Christliche, 《LThK》 Bd. 1/J. Quasten, Archaeologie, Christian Ⅲ, 《NCE》 1/J. de Mahuet, Archéologie chrétienne, Catholicisme, t. 1/ K. Wessel, Archaiologie, Christliche, 《RG》 Bd. 1. 〔崔奭祐〕
II . 성서학의 고고학(〔라〕archeologia biblica)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시대와 성서와 연관된 지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 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 고고학은 성서학의 제분야 중 하나라기보다는 고고학의 한 분야로 분류된다. 학문적 관점에서 고고학이 지리적 제한을 받는 이상 성서 고고학은 실제로는 1948년에 독립 국가로 탄생한 이스라엘의 고고학이다. 시대적 범위에서 성서 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서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3300-2200)부터 신약 시대인 기원후 1세기까지의 고고학이 된다.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성서 고고학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팔레스타인에서 농경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기원전 8500-4300)부터 신약성서의 배경인 초기 로마 시대(기원전 63~기원후 135)까지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서 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는 주로 이스라엘로 국한되며,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인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 이란, 키프로스, 그리스 및 이탈리아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지난 1970년대 초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고고학(New Archaeology)의 영향으로 용어에 있어서 '성서 고고학' 을 좀더 중립적인 지리적 용어인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 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 명칭의 지리적 범위가 성서의 지역들을 모두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전통적 명칭인 성서 고고학으로 불려진다. 이러한 지리적 한계는 "이스라엘 고고학"에서도 드러나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이 아랍 국가들로서 더 이상 자국의 고고학을 유대인들의 경전인 성서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정치적 배경에서는 오늘날의 이스라엘 고고학이 실질적인 성서 고고학이라고도 볼수 있다.
〔발굴의 역사〕 초기의 성서 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서의 여러 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려 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 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서의 지명들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 작업이 수행되어졌다. 성서 고고학이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재구성된 역사 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초기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주로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리 연구에 몰두하여, 성서에 나타나는 고대 도시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많이 하였다. 1865년에 영국에서 결성된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 (Palestine Exploration Fund)은 성지의 고고학, 풍속, 지리, 자연 환경 등을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의 영국 여왕을 후원자로 하여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이 기금으로 설립된 학회의 목적은 '성서의 쉬운 이해를 위한 성지의 역사, 고고학, 지리학, 관습 등의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 이다.
19세기 말부터 일반 고고학의 발굴이 그 이전까지의 도굴과 유물 채집의 수준을 벗어나 차층 과학적인 방법론들이 도입되면서부터 성서 고고학도 단순히 성서에만 의존하는 것을 탈피하여 고대 이스라엘 지역의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 고고학의 발굴의 기원은 1890년 페트리(F.M. Petrie)에 의한 텔 엘헤시(Tel el-Hesi) 발굴로부터 시작된다. 이곳을 성서의 라기스로 착각한 페트리는 이집트에서 쌓은 발굴 경험들을 토대로 주거층에 따른 토기 모양들의 변화에 착안하여, 주거층론과 토기 연대 추정을 확립하였다. 페트리의 발굴 이후에 계속해서 젤린(E. Sellin)의 타아낙(Taanach) 발굴(1902~1904) 마칼리스터(R.A.S. Macalister)의 게제르(Gezer) 발굴(1902~1909), 젤린(E. Sellin)과 바찡어(C. Watzinger)의 예리고(Jericho) 발굴(1907~1909), 하바드 대학 팀의 사마리아 발굴(1908~1910), 올브라이트(W.F. Albright)의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발굴(1926~1932), 시카고 대학 팀의 므
기또(Megiddo) 발굴(1925~1939), 펜실베니아 대학 팀의 벳스안(Beth Shean) 발굴(1921~1933), 페트리의 텔 엘 아줄(Tell el-Ajjul) 발굴(1930~1934), , 스타키(J. Starkey)의 라기스(Lachish) 발굴(1932~1938) 등이 이어지면서 발굴 방법론이 점차 발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적 발굴 방법인 소위 휠러-케년(Wheler-Kenyon)식이 케년(K.M. Kenyon)의 예리고 재발굴(1952~1958)에서 적용되어 텔의 가장자리에 깊은 홈(trench)을 파서 주로 주거층들의 수직적인(연대적인) 상관 관계를 일목 요연하게 규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라이트(G.E. Wright)가 중심이 된 미국 팀의 세겜 발굴(1956~1964)에서는 텔 전체에 산재한 주요 건축물들의 시대적 상관 관계를 규명하는 수평적 개념의 발굴 방법이 강조되었다.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의 게제르 재발굴(1964~1973)에서는 앞의 두 방법론을 적절히 조화시켰으며, 특히 삼차원적으로 규정한 특정 위치의 임의의 공간을 '로쿠스' (Locus)로 독립시킴으로써,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을 위상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한 발굴은 그때까지 축적된 발굴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많은 유적지에서의 대규모 발굴들이 지속되었다. 야딘(Y. Yadin)의 하솔(Hazor) 발굴(1955~1958)과 마사다(Masada) 발굴(1963~1965)을 통하여 고고학 역사상 처음으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한 발굴이 체계화되었다. 1994년 현재 이스라엘에서 진행 중인 성서와 관련된 주요 발 굴들은 다음과 같다. 단(Dan), 가이사리아 필립보, 벳세다(Tel Julia), 하솔(Hazor) 도르(Dor), 벳스안(Beth Shean), 므기또(Megiddo), , 이즈르엘(Tel Jezreel), 에크론(Tel Miqne), 아스칼론(Ashkelon),
〔텔과 발굴〕 성서의 배경 지역들은 대략 오늘날의 중동 지역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데,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의 유적지들은 독특한 형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폐허의 언덕을 아랍어로 텔(tel)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선택하였다. 첫째, 근처에서 쉽게 물을 구할 수 있는곳, 둘째,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 셋째, 주위에 경작할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는 곳, 넷째,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 등이다.
현재 중동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텔은 원래부터 주위보다 현저하게 높았던 언덕에 위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너져서 퇴적된 흙벽돌들의 흙과 건물 벽의 기초로 사용되었던 돌들로 쌓여진 흙 언덕을 이루고 있다. 지역적 기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흙벽돌 건물들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열풍에 의한 풍화 작용으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 버린다. 그 다음에 다시 집을 짓기 위해서 무너진 흙벽돌의 잔재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주거지 밖에서 돌들을 가져다가 기초를 쌓고, 주위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흙벽돌로써 다시 벽을 올리고 새 집들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너진 옛 집터에 새로 집을 지을 때 바닥에 수북이 쌓인 돌과 흙더미를 치우지 않고 바로 그 위에 다시 새 집의 기초를 놓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마을 밖에서 마을 안으로 계속해서 건축 자재인 흙과 돌들을 유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집짓기 과정이 같은 장소에서 수천 년 동안 오래 지속되다 보면 주거지의 지반이 상당히 높아져서 오늘날 볼 수 있는 텔을 이루는 것이다.
고고학의 기초적인 방법론은 발굴인데, 성서 고고학에서는 특히 로마 시대의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흙언덕인 관계로 독특한 과정을 통해 축적된 텔의 발굴이 주된 방법론이다. 발굴 목적에 부합되는 텔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표 조사(surface survey)를 통하여 그곳의 주거 연대를 확인해야 한다. 다음은 발굴 예산을 확보하고 현장 지도와 분석을 맡을 고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스탭진과 발굴 작업에 직접 종사하는 일반인들로 구성된 발굴단을 조직한다. 이스라엘에서의 발굴은 건기(4~10월)에 주로 행해지며 예산에 따라 한 달에서 네 달까지 다양한데, 발굴이 여러 해 동안 지속되는 만큼 한 해의 수집된 유물들을 충분히 분석할 수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고려하여 해마다 발굴 기간을 결정한다. 성서 고고학 발굴의 초창기에는 텔을 발굴할 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장 마지막 시대의 주거층의 전체를 한 겹씩 벗겨 나가는 식으로 파내려갔지만 한 번 발굴된 것은 이미 그 역사적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특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요즘에는 텔의 몇몇 중요한 부분들을 선정하여 수직으로 파내려가서 특정 지역의 시대적 연속성을 규명해 보려는 발굴을 주로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텔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성벽 및 성문 지역, 텔의 중심부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궁전과 신전 및 부속 창고들, 그 외의 일반 주거 지역 등을 중점적으로 발굴하게 된다.
고고학적 발굴은 문자 그대로 땅을 파는 작업인데, 조금씩 파내려가면서 주거층의 흙 바닥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건물의 기초들을 보존하고, 그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온갖 종류의 유물들을 수집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대부분의 구약 시대 도시들의 집들은 돌로 쌓은 기초 위에 흙벽돌로써 벽을 올리고 나뭇가지를 걸쳐서 지붕을 엮었기 때문에 집의 무너진 잔재를 발굴하게 되면 불에 탄 지붕 재료, 무너진 흙벽돌의 퇴적층, 집 바닥에 널려 있던 토기 조각 및 기타 유물들, 그리고 단단하게 눌리어진 집 바닥층 등의 네 층으로 구분된다. 이 네 층을 모두 합쳐서 고고학적 용어로 한 주거층(stratum)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산악 지대에서는 돌을 많이 사용하였고 저지대나 광야 지역에서는 흙벽돌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약간 다른 발굴 방법
론이 적용되기도 한다.
〔연구 방법론〕 성서 고고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론인 발굴을 수행하고 나서는 밝혀진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분석 및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고고학에서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들은 첫째,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묘사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출토된 지점과 원래의 출처가 "어디인가"라는 유적과 유물의 지리적 기원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발굴물의 시대적 기원에 관한 "언제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의 유물들의 연대 추정에 관한 물음은 고고학적 연구의 최종적 결론인 동시에 성격상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다행히 같은 지점에서 발견된 역사적 문서 및 기록물들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연대 추정이 가능하지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는 달리 발굴 현장에서 기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서는 자연히 기록물 다음으로 연대 추정의 기준이 될 만한 특정 유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성서 고고학의 독특한 세 가지 연구 방법론은 주거층론(stratigraphy), 유형론(typology) 그리고 토기 연대 추정(pottery chronology)이다. 주거층론은 텔 자체가 여러 개의 주거층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 하에 상대적으로 밑의 주거층이 위의 것보다 더 오래 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연대 추정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특정 유물의 절대 높이가 매우 중요한데, 경사진 곳에서는 절대 높이의 비교로서 유적의 상대 연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집이 무너져도 원래의 상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돌 기초의 위치에 따라 주거층이 결정되는 등의 비교적 복잡한 분석과 판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유형론이란 주로 발굴에서 수집된 유물에 적용되는 방법론으로서 겉모양이 비슷한 것끼리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지리적 · 시대적 기원과 발전 등을 유추하는 분석의 한 방법론이다. 이 유형론은 특별히 토기 분류에 결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토기 연대 추정은 토기의 모양 중에서도 특히 아구리 부분(rim)이 시대적으로 자주 변천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30~50년의 단위까지 세분하여 상대 및 절대 연대의 추정이 가능한 일종의 토기 유형론에 의한 연대 측정 방법론이다.
19세기 말 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된 이스라엘 여러 지방의 다양한 시대의 토기들의 유형으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토기 달력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라도 비교적 정확하게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성서 고고학에서의 가장 믿을만한 시대 판단의 기준으로서 "비교 토기 연대"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토기 제작 시기(기원전 6000)이래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50년 내외의 연대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출판물〕 발굴의 결과는 현장의 유적과 수집된 유물들인데 이들에 대한 보고서의 출판을 통해서 비로소 일반 성서학자들이 발굴 결과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따라서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은 발굴은 학문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서 고고학계에서는 규정을 통하여 발굴이 끝난 후 정해진 기일 내에 최종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하고 있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매일 새롭게 파헤쳐진 유적은 사진 촬영과 실측도를 작성하여 단계별로 기록을 유지한다. 수집된 유물들의 경우 토기류는 크기에 따라 1/5 또는 1/10의 축소 그림과 사진으로 보관하며 기타 유물도 마찬가지로 사진과 축소 그림 또한 물질적인 분석과 유형론적인 비교를 시도한다. 이러한 분석이 끝나면 현장의 유적과 함께 유물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게 되는데, 출판 시점에 따라 초기 보고서(prelimi-nary report), 중간 보고서(interim report), 그리고 최종 보고서(final report)로 분류된다.
이 중에서 최종 보고서가 가장 중요하며, 여기에는 발굴에 관한 총체적인 평가 외에도 주로 건축물들로 구성된 유적의 객관적 묘사 및 해석과 유물들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주거층별 시대에 따른 유적지의 거주 역사가 일목 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최종 보고서의 부록 편에는 유적과 유물의 사진 및 그림, 특히 주거층별로 정리된 토기 도판이 수록된다. 성서와 관련된 한 장소를 발굴하여 마지막의 최종 보고서를 출판한 후에야 비로소 그 장소에 관한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발굴 보고서와는 별도로 성서 고고학에 관한 저서는 성서와 관련하여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해당 구절들의 고고학적 설명을 시도한 일반 서적과 이스라엘의 고고학을 시대별로 정리한 전문 서적으로 양분할 수 있다. 성서 고고학의 전문서들 중에서 대표적인 고고학 저자들로는 올브라이트(Albright, 1939), 라이트(Wright, 1957), 케년(Kenyon, 1960), 아하로니(Aharoni, 1982), 마자르(Mazar, 1990), 벤토르 편(Ben-Tor ed, 1992) 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지금까지 수행된 이스라엘의 발굴 결과들을 일목 요연하게 요약한 《성지의 고고학 발굴 백과 사전》은 성서 고고학의 필수적인 자료집이 되고 있다(Avi Yonah & Stern eds., 1975-8 ; Stern ed., 1993) .
〔시대 구분〕 일반 고고학계의 시대 구분은 전통적으로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로 나뉘어지는데 성서 고고학에서도 이 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단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일종의 금석 병용 시대인 동석기 시대를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
기원전 586년의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끝나는 철기 시대 이후의 고고학적 시대 구분은 당시 팔레스티나를 점령 통치했던 주변 강대국들에 따라 각각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586~530),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0~330), 그리스 시대(기원전 330~366), 로마 시대(기원전 366~서기 330), 비잔틴 시대(서기 330~630)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성서 고고학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고고학의 시대 구분의 기준에 따라 철기 시대까지만 범위로 넣고 있으며, 그 이후 시대는 역사학과의 밀접한 교류에 따른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포함하는 독립적인 고전 고고학(classical archaeology)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전 고고학의 중심지는 역시 현재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성서 고고학의 전통적인 시대를 기원전 586년으로 한정시키는 경향도 있다. 좀더 세분된 성서 고고학의 각 시대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기원전 8500~6000) : 이 시대의 문명은 나투프 문명(Natufian Culture)이라고도 불리며 소위 팔레스티나에서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예리고)가 건설되었고, 농업 혁명으로 인한 정착 경제의 발전과 목축업이 시작되었다.
②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기원전 6000~4300) : 이 시대의 문명은 야르묵 문명(Yarmukian Culture)이라고 불리며 이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토기가 특정 지역의 고유한 민족 집단에 의해 독특하게 제작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대 구분 및 인종 집단 구분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③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기원전 4300~3300) : 이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금속인 구리가 도구 제작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석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트랜스 요르단 사해 북부의 텔레일랏 가슐(Teleilat Ghassul)에서 이 시대의 거주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명을 가슐 문명(Ghassulian Cullture)이고도 부른다. 특히 엔 게디 남쪽의 미슈마르(Mishmar) 동굴에서 발견된 436점의 구리 제품은 이 시대에 벌써 고도의 구리 제련술이 발달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④ 초기 청동기 I시대(EB I, 기원전 3300~3050) : 이 시대는 고대 근동 전체에 있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고 이 여파로 정착 경제가 가속화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 이집트와의 문물 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팔레스티나에서 발견된 이집트 토기를 통하여 밝혀졌다.
⑤ 초기 청동기 Ⅱ시대(EB Ⅱ, 기원전 3050~2700) : 이 때부터 본격적인 도시 문명이 근동 지방 전체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소위 제1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가나안 지방에서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⑥ 초기 청동기 Ⅲ시대(EB Ⅲ, 기원전 2700~2250) : 이 시기는 도시 문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이며, 조직적인 국제 무역의 흔적을 토기나 장신구 등의 물질 문명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번창했던 도시들로는, 하솔, 벳 예라크, 벳스안, 므기또, 아이, 예리고, 야르뭇트, 텔 엘헤시, 텔 에라니, 텔 할리프 등을 들 수 있다.
⑦ 중기 청동기 I시대(MB I, 기원전 2250~2000) : 기원전 2250년을 전후하여 가나안의 초기 청동기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그 이후 250여 년 동안 일종의 쇠퇴기를 맞게 되며 이집트의 제1 중간기(제7~11왕조)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 시대는 수직갱 무덤(shaft tomb)이라는 독특한 매장 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데, 당시 성행했던 유목민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⑧ 중기 청동기 Ⅱ시대(MB Ⅱ, 기원전 2000~1550) : 이집트 중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역사 시대 전체 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다. 물질 문명의 척도인 토기 제작 면에서도 고속 물레(fast wheel)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멀리 이집트까지 수출되었고 파이안스(Faience)와 알라베스터(Alabas-ter) 용기들도 가나안 자체의 기술로 대량 생산되었다.
⑨ 후기 청동기 1시대(LB I, 기원전 1550~1400) : 이집트의 제15 왕조인 희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 국가들이 대부분 파괴되면서 약 100여 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집트 신왕국의 제18 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집트는 역사상 처음으로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⑩ 후기 청동기 Ⅱ시대(LB Ⅱ, 기원전 1400~1200) : 아마르나(Amarna) 시대라 불리는 기원전 14세기의 가나안은 이집트를 종주국으로 그 지배 하에 근처의 마을들을 통치하는 도시 국가들이 있었다. 발굴을 통하여 이집트식 신전 및 궁전이 므기또와 벳스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이집트가 이 도시들에 총독부를 두고서 가나안을 다스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⑪ 철기 I 시대(Iron I, 기원전 1200~1000) : 기원전 1200년을 전후해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암흑기(dark age)라고 불리는 문명의 위기가 발생하는데 이 쇠퇴기는 그리스에서 발생한 도리아족(Dorians)의 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특별히 지중해 연안을 휩쓴 해양 민족의 이동으로 막강했던 헷 제국이 몰락하고 시리아와 가나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파괴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의 유입이 발생하고, 가나안 지역에서는 주변의 권력 공백을 틈탄 약소 민족들이 각각 아람, 페니키아,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목이음 항아리"(collar rim jar)의 추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진입과 주거 분포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⑫ 철기 Ⅱ시대(Iron Ⅱ, 기원전 1000~586) : 다윗 왕조의 수립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명이 발전되었으며, 비교적 구약성서의 역사서의 기록과 발굴을 통한 주거 분포가 일치하는 등 이 시대는 성서 고고학의 중심 시대로 간주된다. 북쪽의 단(Dan)에서부터 남쪽의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와 쿤틸라트 아즈루드(Kuntilat Ajrud)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독특한 양식의 요새가 많이 건설되어서, 이스라엘의 실제적 통치 영역과 고유의 물질 문명의 지리적 분포를 쉽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 성서)

※ 참고문헌  Y. Aharoni, TheArchaeology of the Land of lsrael : From Prehistoric Begimingss to the End of the First Temple Period. tr. by A.F. Rainey, Philadelphia : Westminster Press, 1982/ W.F. Albright, The Archaeology of Palestine, Baltimore : Penguin Books, 1939/ M. Avi- Yonah . E. Stern eds., Encyclopedia ofArch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Jerusalem : Israel Exploration Society, 1975~1978/ A. Ben-Tor ed., The Archaeology ofAncient Israel, tr. by R. Greenberg,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2/ W.G. Dever, Recent Archaeological Disco- veries and Biblical Research, Seattle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0/ K.M. Kenyon, Archaeology in the Holy Land, London Ernest Benn, 1960/ A. Mazar, Archaeology of the Land of the Bible, 10000~586 B.C.E., New York : Doubleday, 1990/ W.M.F. Petrie, Tell el Hesy (Lachish), London : Palestine Exploration Fund, 1891/ J.B. Prichard,Archoeology and the Old Testament, 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8/ E. Stern ed., The New Encyclopedia of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Jerusalem : Israel Exploration Society, 1993/ J.A. Thompson, The Bible and Archaeology, Grand Rapids : Eerdmans, 1962/ G.E. Wright, Biblical Archaeolog, Philadelphia : Westminster Press, 1957. 〔金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