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

聖潔敎

〔영〕Holiness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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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결교회의 모체가 된 '동양 선교회 복음 전도관' (왼쪽)과 1911년 3월 13일에 설립한 '경성 성서 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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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결교회의 모체가 된 '동양 선교회 복음 전도관' (왼쪽)과 1911년 3월 13일에 설립한 '경성 성서 학원' .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성결' 은 라틴어 '거룩한' (sanctus)에서 파생된 말이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미국 감리교의 성결 운동을 그 시발점으로 하며, 근원에는 감 리교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1907년에 시작된 한국의 성결교회는 자주적 · 비교파적 · 직접 전도의 전 통을 이어받아 장로교, 감리교와 더불어 오늘날 한국의 3대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발 생] 19세기 초에 미국 교회는 남북 전쟁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정신적 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18세기 영 국에서 있었던 웨슬리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영 향을 받아 기성 교회의 타락에 반발한 많은 목회자들은 소속 교단에서 이탈하여 교단을 창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생겨난 여러 군소 교단들을 통틀어 '성결파 교단' 이라고 한다. 아울러 미국 감리교의 성결 운동으로 많은 종교 단체들이 탄생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카우먼 (Charles E. Cowman)과 길보른(Earnest A. Kilborne)에 의해 창설된 '동양 선교회' (Oriental Missionary Society)였다. 동 양 선교회는 동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자 세워진 초교파적 선교 단체로 한국 성결교회의 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 성결교회의 모체인 전도관 (傳道館) 선교는 동양 선교회에서 경영하던 일본의 '동 경 성서 학원' 을 졸업한 김상준(金相濬, 1881~1933)과 정빈(鄭彬, 1878~?)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리하여 한국의 성결교회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이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것과는 달리,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단이 되었다.
〔한국 성결교회의 역사] 동양 선교회 복음 전도관 시 대(1907~1921) : 한국 성결교회의 창시자인 김상준과 정 빈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성서 학원' 에 입학한 것은 1904년이었다. 그리고 1907년 3월에 이곳을 수료한 두 사람은 고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준비를 서 두르는 한편, 동양 선교회 본부를 찾아가 성서 학원과 선
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그 해 5월 2일 카우먼 과 길보른 등과 함께 귀국하여 5월 30일에 염곡(鹽谷, 또는 염동)으로도 불리던 지금의 종로 1가에 '동양 선교 회 복음 전도관' (Oriental Missionary Society Jesus Doctrine Mission Hall)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성결교 회의 전신인 '복음 전도관' 의 시초이다.
김상준과 정빈은 길거리로 나가 북을 치고 큰소리로 복음을 외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직접 전도를 하였 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교회 조직을 갖출 생각이 없 이 단순히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적 열 의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전도한 많은 사람들 을 인근의 감리교회나 장로교회로 보냈다. 이러한 노력 으로 전도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1908년 겨울부터는 전도관을 찾는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1921년에는 전국 각처에 34개의 전도관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한 국에서의 전도가 예상 외로 큰 성과를 거두자 동양 선교 회에서는 1910년에 토머스(JohnThomas) 선교사를 한국 전도관의 초대 감독으로 파송하고, 이듬해 3월 13일에 는 전도관 안에 서울신학대학(현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 소 재)의 전신인 '경성 성서 학원' 을 설립하였다. 이 성서 학원을 통해 전도자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1914년에는 드디어 5명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 시대(1921~1945) : 1921년 동양 선교회 본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겨지 고, 또 전도관을 찾아오는 교인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교 단 조직이 불가피해졌다. 그리하여 1921년 9월에 전도 관 명칭을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 로 변경 하여 교단의 틀을 마련하였고, 1924년에는 교역자회를 조직하였으며 1929년에는 제1회 연회(年會)를 개최하 여 교단 헌법을 발표함으로써 조직 교단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22년에는 교단 기관 지 <활천》을 창간하여 현재까지 발간해 오고 있다. 한편 1930년에 들어오면서 교회수가 증가하고 한국인 교역자 수도 늘게 되자, 한국인 교역자들 사이에는 동양 선교회 중심의 교회 제도를 탈피하려는 민족적 주체 의식이 생 겨나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1932년에 자치 선언을 선포하고 이듬해 4월 제1회 총회를 개최하여 초대 총회
장에 이명직(李明植) 목사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재정적 인 자립도는 아직 약해 동양 선교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 었다.
자치적인 교단으로 변신한 성결교회는 이후 1년에 50 개의 신설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도 2,000명 이상씩 늘 어났으며, 만주 · 일본 · 중국 등에도 교회를 세우는 등 1937년까지 소위 '성결교회 발전 시대' 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제는 종교 에 본격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성결교 회는 '재림' 의 교리가 일본의 국체(國體)에 위배된다고 하여 1943년 9월에는 예배 중지령을 받고 일체의 예배 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해 12월 29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해산당하지 않은 다른 교단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교회당은 일본인들에 의해 군수품 제조 공장이나 가마니 공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시대(1945~1960) : 1945년의 8 · 15 광복은 동시에 성결교회의 해방이기도 하였다. 광복과 함께 재건된 성결교회는 1945년 9월 첫 주일에 '경성 성서 학원' 대강당에서 재흥 예배를 드렸고, 이어 9월 10~15일에는 성결교단 재건 총회를 소집하였다. 이 총회에서 교단 명칭이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로 개 칭되었는데, 이는 광복으로 말미암아 조선에서 대한 민 국으로 바뀐 국호를 반영하고, 동양 선교회는 단지 선교 기관으로서 성결교회와는 횡적인 관계임을 규정하려는 의도에서 동양 선교회라는 명칭을 뺀 것이었다. 이와 함 께 경성 성서 학원을 '서울신학교' 로 개명하고 교단 헌 법도 개정하였다. 그러나 교단의 재건을 맞은 기쁨도 잠 시, 성결교회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즉 6 · 25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예배당은 파괴되었고 신 자들은 다시 흩어졌으며, 많은 교역자와 신자들이 무참 히 학살당하였다. 전쟁 중에 약 155명의 신자들이 순교 를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충남 논산의 병촌 교회 신자 66명이 생매장당한 것과 전남 임자도의 진리 교회 신자 48명이 집단 학살을 당한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 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1951년 5월에는 부산에 임시로 총회 본부를 세우고 총회를 개최하였으며, 부산 동래에 임시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결과 휴전이 된 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교회 복구 사업에 주력할 수 있었다.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와 예수교 대한 성결교회 시대 (1961~현재) : 광복 이후 신사 참배 문제로 장로교회에 서 시작된 한국 교회의 분열의 역사는 1950년대에 들어 자유주의 신학 사상 대 보수주의 신학 사상의 세력 다툼 으로 이어졌고, 성결교회도 이 분열의 대열에 끼게 되었 다.
광복 후 성결교회는 '한국 기독교 연합회' (National Christian Council)에 가입하여 한국 교회의 연합 사업에 적극 협력하였고, 1955년에 열린 제10회 총회에서는 '복음 동지회'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에 가입 하였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연합회' 는 진보적인 교회 연합 기관이고 '복음 동지회' 는 보수적인 교회 연합 기 관인데, 이처럼 상이한 노선의 두 단체에 가입한 것이 교 단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급기야 1961년의 제16회 총 회에서는 '한국 기독교 연합회' 를 지지하는 세력과 '복 음 동지회' 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의 다툼으로 발전하였 고, 결국 '복음 동지회' 를 지지하는 세력이 총회를 탈퇴 하여 1962년에 독자적으로 '예수교 대한 성결교회' 를 세우면서 한국의 성결교회는 두 교단으로 분열하게 되었 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단 분열의 책임을 통감한 성결교 회의 지도자들은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두 연합 기관에 서 모두 탈퇴하여 지금까지도 '한국 기독교 연합회' 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이후 성결교회 내에서는 1965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교단 합동을 실시하였지만, 완 전한 합동을 이끌어 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징 및 교리〕 한국의 성결교회는 한국 사람에 의해 시작된 교회라는 특징 외에도 초창기에는 기성 교단들과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교파 교회가 아닌 순수한 복 음 전도에 입각한 비교파성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것은 든든한 배경이 없다는 단점 도 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은 각 교파에서 파송된 외 국인 선교사들의 갈등을 막기 위해 '네비우스' (Nevius) 정책에 입각하여 활동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교파 교회가 아닌 성결교회-정확하게는 전도관-는 여기에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신앙적인 형태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 었다. 거리에 나가 북을 치며 전도하고, 조용하고 경건한 예배의 선입관을 깨고 박수를 치며 열심히 성가를 부르 고, 집회 때마다 회개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나는 교회였 다. 통성 기도의 열기가 뜨거웠고, 봄가을에는 심령 부흥 회가 쉴새없이 열렸으며 노방 전도나 축호 전도가 유일 한 선교의 수단이었다. 지금도 한국 성결교회는 초창기 때의 이러한 신앙 형태를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 성결교회는 창시자들이 미국 성결 운동 의 결과로 파생된 선교 단체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기 때 문에 존 웨슬리의 신학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이 에 따라 감리교와 그 사상에 있어 별 차이가 없지만 특별 히 강조하고 있는 교리는 중생(重生) · 성결(聖潔) · 신 유(神癒) · 재림(再臨)을 의미하는 '사중 복음' (四重福
音)이다. 사중 복음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초 미국 교회 의 성결 운동 당시 심프슨(A.B. Simpson) 목사가 행한 설 교 제목인 '사중 복음' (Four-Fold Gospel)에서 비롯된 것 이다. 중생은 죄를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며, 성결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한 삶을 뜻한다. 그리고 신유는 병에서 치유됨을 가리키는 것이고, 재림은 종말 사상이다. 물론 이 교리들은 모두 생소한 것들이 아니며 다른 교단들 또한 인정하고 있다. 다만 한국 성결교회는 많은 교리들 가운데 이 네 가지 교 리를 특별히 우선시하여 초창기 때부터 강조하여 왔으 며, 현재는 교단의 고유한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 참고문헌  Lettie B. Cowman & Charles E. Cowman, Missionary Warrior, L.A.,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1946/ Donald W. Dayton, Discovering on Evangelical Heritage, New York, Harper, 1976/ B.K. Kuiper, The Church in History, Grand Rapids, Eerdmans, 1979/ W. Walker, 강근환 역, 《세계 기독교회사》, 대한기 독교서회, 1975/ 민경배, 《한 국 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83/ 백낙준, 《한국 개신 교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이명직, 《성결교회 약사》, 기성 출판부, 1952/ 안수훈, 《한국 성결교회 성장사》, L.A., 미주 성결교회 출판부, 1981/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역사 편찬위원회, 《한국 성결교회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92/ 정상운, 《성결교회와 역사 연 구》 1, 이레서원, 1997 . 〔白承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