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1600)

小西行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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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리시탄(吉利支丹) 다이묘(大名) 중의 한 사람.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출신 가문은 불확실하다. 장성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신임을 얻어 영주가 되었고, 1583년 도요토미를 따라 오오사카(大阪)에 주둔하고 있던 중 영주 다카야마(高山右近)로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다음해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침략군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다가 퇴각, 웅천성(熊川城, 현 경남 진해시 웅천동 소재)에 주둔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천주교 신자 병사들의 영신 생활을 돕고자 일본의 예수회 부관구장인 고메스(Pierre Comez) 신부에게 종군 신부를 청하였고, 고메스 신부는 이때 세스페데스(Gregorop de Cspedes) 신부와 후깐 에이온(Foucan Eion)수사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들 두 명은 일단 쓰시마(對馬島)로 가서 얼마 동안을 지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당시 조선에 출병해 있던 쓰시마의 도주(島主) 소 요시도시(宗義智, 다리오)의 부인인 고니시(小西) 마리아는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쓰시마를 떠나 1593년 12월 28일 조선에 도착, 1년 남짓 웅천성에서 활동한 뒤 1595년 4월 무렵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고니시의 딸 마리아는 이후 남편인 소 요시도시가 보내 온 조선인 포로 두 명을 자유인으로 만든 다음, 그중 조선 승지(承旨)의 아들인 큰아이는 곧 예수회 신학교로 보내고, 양반 가문의 자손인 작은아이는 신학교에 갈 때까지 데리고 있었다. 이때 신학교에 들어간 큰아이가 최초로 조선인 예수회원이 된 가베에(嘉兵衛, 권 빈천시오)로, 그는 훗날 전도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626년 6월 20일 나가사키(長崎)에서 화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1867년 시복되었다. 그 동안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4년부터 계속된 조선과의 화평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출병하였으며, 이듬해 도요토미의 사망과 더불어 퇴각하였다. 이후 그는 일본의 새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전횡에 대적하다가 패하였으나,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자결하지 않고 에도(江戶, 현 도쿄)에서 참수되었다. → 권 빈천시오 가베에 ; 세스페데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LeP. Charlevoix, Hist. du Christianisme au Japan, Passim. M. Léon Pagès, Hist. du Japan. Tome 3, passim(《日本切 支丹宗門史》, 岩波文庫, 상 · 중 · 하, 1938~1940)/ 上智大學 編, 《カ 卜 リ ツ 7 大辭典》 1, 1940/ 柳洪烈, 《한국 천주교회사》 상, 가톨릭출 판사, 1962/ 松田毅一,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인 복자와 치명자>, 《경 향잡지》 54권 9~10호, 1962/ 金良善, <壬辰倭亂 從軍神父 세스페 데스의 來韓活動과 그 影響>, 《史學研究 》 18집, 1964 / 崔奭祐, <日本 敎會의 한국인 순교자들>, 《敎會史研究》 6집, 1988.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