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동 본당

高等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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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고등동 78-1 소재. 1959년 11월 25일 수원 본당(현 북수동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노동자 성 요셉. 관할 구역은 고등동, 매산 1 · 2 · 3가 전지역과 교동 일부. 〔교 세〕 1959년 2,023명, 1966년 4,114명, 1968년 1,191명, 1978년 2,989명, 1983년 3,254명, 1993년 4,297명 〔역대 신부〕 초대 이종철(李鍾澈) 스테파노(1959. 11~1967. 1), 2대 장금구(莊金龜) 그리소스토모(1967. 1~1968. 12), 3대 김종진(金鍾振) 다미아노(1968. 12~1969. 12), 4대 정덕진(丁德鎮) 루가(1969. 12~1970. 7), 5대 박지환(朴址煥) 요한(1970.7~1975.4), 6대 황익성(黃益性) 아우구스티노(1975. 4~1981. 6), 7대 김정원(金正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981. 6~1987. 9), 8대 최경환(崔京煥) 마티아(1987. 9~현재).
〔설립과 정착〕 해방 당시 수원에는 본당이 하나인 데 비해 신자들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에 당시 수원 본당의 제4대 주임으로 재직하던 폴리(Polly, 沈應榮) 신부는 해방이 되자마자 제2 본당의 분리 설립을 추진하여 기금을 저축하였으나, 1948년 천안 본당(현 오룡동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그 후임자인 이복영(李福永, 요셉) 신부가 이 사업을 인계받게 되었다. 이 신부는 부임 이듬해 매산로 40번지 소재의 대지와 건물을 임대차 계약하는 등 본당 분할을 위해 노력하던 중 6 25 동란의 발발로 인해 이것마저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 수원 본당에서는 1954년부터 다시 사업을 재개하여 여러 차례 대지를 매입하였으나, 위치상으로 맞지 않은 탓에 매각과 매입을 되풀이하다가 제6대 임종구(林鐘求, 바오로) 신부 재임시인 1959년 10월에야 현 성당 터와 부속 건물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지와 임시 성당 건물이 마련되자 서울교구에서는 같은 해 11월 25일자로 '고등동 본당' 의 신설을 발표하고 초대 주임으로 이종철 신부를 임명하였다. 당시 본당 신자수는 2,099명이었고, 관할 구역은 수원시 매산로, 고등동, 서둔동, 세류동, 평동 전지역, 화서동 일부, 그리고 화성군 안룡면(태안면)과 반월면 일부까지였다. 이종철 신부와 신자들은 본당 설립 직후 성당 건립 계획을 실행에 옮겨 1960년 3월 성당 기공식을 갖고, 동년 11월 5일에는 121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성장과 변모〕 성당 초창기인 1963년 10월 7일, 서울 대교구로부터 수원교구가 분리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윤공회(빅토리노) 주교는 고등동 성당을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본당은 교구장 착좌식은 물론 여러 차례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으며, 1974년 11월 21일에는 제2대 교구장 김남수(안젤로) 주교 또한 본 성당에서 성성식 및 착좌식을 가졌다. 그러나 교구의 성장과 함께 주교좌 성당으로서의 위치와 규모가 적당치 않게 되면서 1977년 5월 18일자로 조원동 성당이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고, 고등동 성당은 준주교좌 성당으로 남게 되었다. 그 동안 본당에는 1961년 7월 21일자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소화 유치원' 이 개원되었으며, 제2대 장금구 신부 재임시인 1968년에는 서둔동 본당과 세류동 본당을 분리 신설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심 단체의 활성화에도 노력하여 각종 단체를 설립하고 1978년에는 본당 최초로 꾸리아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해 11월 또다시 화서동 본당을 분리하였다. 그 결과 본당의 관할 구역은 물론 교세의 변모가 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7대 김정원 신부 재임시인 1982년에는 교육 회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으며, 제8대 최경환 신부 부임 이후에는 성당 신축 계획을 수립하여 1992년 10월 3일 마침내 새 성당 봉헌식을 갖게 되었다. (→ 수원교구)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