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경북 경주시 성동동 386-6 소재. 1926년 5월 30일 부산진(釜山鎮, 현 범일)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9월 1일 성건(城乾) 본당을 분리하면서 본당 이름을 '경주 본당'에서 '성동 본당' 으로 바꾸었다. 주보는 천상의 모후. 관할 구역은 성당동, 불국동, 보덕동, 동천동, 월성동, 중 부동, 황남동, 황오동, 외동읍 전 지역과 용강동, 탑정동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입실, 모화 2개소. 〔교 세〕 1928년 325명, 1935년 380명, 1942년 501명, 1950년 681명, 1967년 1,928명, 1975년 2,647명, 1981년 3,671명, 1987년 5,219명, 1992년 6,926명, 1997년 6,383명. 〔역대 신부〕 초대 이성인(李聖仁) 야고보(1926. 5~1931. 12), 2대 카다스(J. Cadars, 姜) 요셉(1931. 12~1945. 4), 3대 정행만(鄭行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945. 4~1947.4), 4대 안국목(安國牧) 마카리오(1947.4~1948), 5대 신원식(申元植) 루가(1948. 8~1950. 12), 6대 김경우(金慶佑) 알렉시오(1950. 12~1955. 1), 7대 윤광제(尹光濟) 다윗(1955. 1~1960. 12) , 8대 김광록(金光錄) 베드로(1960. 12~1961.6), 9대 이기수(李基守) 야고보(1961. 6~1962. 1), 10대 이창호(李昌鎬) 안드레아(1962. 1~7), 11대 박춘택(朴春澤) 베드로(1962. 7~1964. 7), 12대 이창호 바오로(1964 7~1970. 1), 13대 최시동(崔時東) 요한(1970. 1~1972. 11), 14대 강찬형(姜贊亨) 파스칼(1972. 11~1973. 5), 15대 이성우(李聖雨) 아킬레오(1973. 5~1977. 7), 16대 김용길(金容吉) 바오로(1977. 7~1980. 1), 17대 박도식(朴道植) 도미니코(1980. 2~1983. 8), 18대 최휘인(崔輝寅) 바오로(1983. 9~1986. 1), 19대 손상오(孫尚五) 루가(1986. 1~1988. 7), 20대 정재완(鄭在院) 니콜라오(1988. 7~1991. 3), 21대 최영수(崔榮壽) 요한(1991. 3~1995.7), 22대 황용식(黃龍式) 타대오(1995. 7~현재).
〔전사 및 공소 시대〕 경주 일대는 경상북도에서도 가장 먼저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역으로 산내면 단석산 일대가 그 중심지였다. 또 이곳에는 대구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 의해 1883년에 산내면의 '진목정(眞木亭) 공소' 가 설정된 후 계속하여 여러 개의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912년 가을부터는 대구의 정준수(鄭駿秀, 스테파노) 회장이 경주 읍내에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서병문(徐丙文)이 현 경주시 성동의 가옥과 대지 400여 평을 희사함으로써 1913년 2월 15일에 부산진 본당 주임 줄리앙(M. Julien, 權裕良) 신부에 의해 '경주 공소' 가 설정되었다. 이어 언양 상선필(上善弼) 공소의 박영숙(시몬) 회장 가족이 이곳에 정착한 뒤부터 공소 신자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경주 공소는 1926년 5월 30일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이성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정착과 변모〕 본당 설립 직후 성당 건립 공사에 착수한 경주 본당에서는 이듬해 목조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1932년 5월 29일에는 진목정에 안장되어 있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 김종륜(金宗倫, 루가) 등 병인박해 순교자의 유해를 대구의 교회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신축 고딕 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고, 1946년 8월 25일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1950년에는 근화(槿花)유치원을, 그리고 이듬해 10월 5일에는 근화여자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한편 한국 전쟁 이후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 신자들의 노력으로 다시 성당을 신축하여 1959년 5월 6일 교황사절 람베르티니(E.R. Lambertini) 대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본당 신자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1967년에는 안강(安康) 본당을 분리함과 동시에 250여 명의 교적을 이관하였으며, 이듬해 1월 14일에는 본당 주보를 창간하였다. 그리고 1976년에는 사제관과 교리실을 신축한 데 이어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본당 설정 50주년을 기념하여 《경주 본당 50년》을 발간하였으며, 1983년 10월 31일에는 성건(城乾) 본당을 분리했고, 1986년 5월 1일에는 설립 60주년 기념으로 《경주 성당 예순돌》을 발간하였다. 또 1987년에는 본당 월보(月報)인 <한마음>을 발간하였고(1991년 8월 휴간), 이듬해 2월에는 레지오 마리애 '평화의 모후' 꾸리아가 창단 30주년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2년 4월 1일 새벽에 발생한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성당이 소실되고 말아 지금은 근화여자고등기술학교의 옛 교사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자 성동 본당에서는 1993년 10월 7일 황성(皇城) 본당을 분리한 데 이어 1995년 4월 30일에는 양남(陽南) 본당을 분리하였다. (⇦ 경주 본당 ; → 대구대교구 ; 범일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慶州本堂五十年》, 경주 천주교회, 1976/《경주 성당 예순 돌》, 천주교 성동 교회, 1986. 〔李裕林〕
성동 본당
城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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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설립 이듬해 지어진 목조 성당(왼쪽)과 1959년에 신축되어 사용해 오다가 지금은 화재로 소실된 성동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