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聖靈

[라]Spiritus Sanctus · [영]Holy Spirit

글자 크기
7
야훼의 영을 받아 지략과 용맹으로 백성을 구한 삼손( 구스타브 도레 작) .
1 / 8

야훼의 영을 받아 지략과 용맹으로 백성을 구한 삼손( 구스타브 도레 작) .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세 위격(位格, persona) 가운데 하나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견되어 인간을 성화시켜 성부께로 이끄시는 하느님.
I . 하느님의 영에 관한 계시
〔구약성서〕 구약에서 영(靈)을 가리키는 '루아흐'(רוח)는 원래 바람〔風) · 숨〔氣息] · 힘〔氣力〕 · 혼(魂)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이다. 구약성서에 378번 나오는 '루아흐' 를 내용에 따라 구분하면 첫째로 공기의 유동을 말하는 바람을 의미하는데, 주로 하느님 현존의 표지로 사용되었다. 바람은 하느님 창조의 기운이며(창세 1, 2 : 시편 33, 6), 하느님 능력의 도구로서(2사무 22, 16 ; 민수 11, 31 : 시편 18, 16) 하느님이 정의를 행할 때 이용되었다(출애 15, 10 : 이사 30, 27-28 ; 욥기 4, 9 ; 호세 13, 15 ; 예레 13, 24). 둘째로는 숨결로서 생명의 표지로 사용되
었다. 만물은 이 숨결에 의하여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창세 2, 7 : 6, 17 : 7, 15 ; 민수 16, 22 ; 이사 42, 5 : 욥기 12, 10 ; 시편 104, 29-30). 셋째로는 하느님의 영적인 힘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예언자들을 비추며 지도자들을 인도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판관들은 일시적으로 야훼의 영을 받아 초인적인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여 백성을 구하였다. '오드니엘' (판관 3, 10), '기드온' (판관 6, 34), '입다' (판관 11, 29), '삼손' (판관 13, 25 ; 14, 6 : 15, 14), '사울' (1사무 10, 10 : 11, 16) 등이 그 예이다. 다윗 역시 사무엘의 도유로 왕이 되면서 하느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 "사무엘은 기름 채운 뿔을 집어 들고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1사무 16, 13).
기원전 9세기부터 예언 현상이 하느님의 영의 작용으로 인정되었는데(호세 9, 7), 예를 들어 '모세' (민수 11, 17), '발람' (민수 24, 2), '사울' (1사무 10, 10 : 19, 20-24), '다윗' (2사무 23, 2)의 경우이다. 유배 시대부터는 하느님의 영이 예언의 원인이라고 확신하였다(느헤 9, 30 : 즈가 7. 12). '아마새' (1역대 12, 18), '아자리야' (2역대 15, 1-7), '야하지엘' (2역대 20, 14), '즈가리야' (2역대 24, 20), '이사야' (이사 48, 16 : 61, 1), '에제키엘' (에제 2, 2 : 3, 24 : 11, 5)의 예언이 그러한 예이다. 또 야훼의 영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신비롭게 다른 장소로 옮기고(1열왕 18, 12 ; 2열왕 2, 15-16) 기적을 행하게 하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이신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였고(이사 7, 14-16), 메시아는 하느님의 영이 가득한 왕이라고 하였다(이사 11, 1-2). 또 제2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는 하느님의 종인 메시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 길을 펴 주리라고 하였고, 제3 이사야서 61장 1절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메시아가 야훼의 영을 받고 선포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에게 속한 하느님의 백성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려 그들을 정화하고 갱신하여 충실한 백성이 되게 한다(이사 32, 15 ; 44, 3 ; 에제 36, 24-27 : 37, 5-6 : 39, 29). 또한 요엘 예언자는 메시아의 백성이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요엘 3, 1-2) .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지혜 문학에서는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고찰이 깊어지면서 지혜의 역할과 영의 작용이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지혜 1, 5-7). 지혜 문학은 점차 지혜를 인격화하고 있는데(잠언 8, 22-31 : 집회 1, 1-10 : 4, 11-19 : 24, 1-22 : 지혜 7, 22 이하 : 9, 17), 지혜의 작용이 영의 작용과 동일시되고 마침내 지혜는 사람을 사랑하는 영이 된다(지혜 1, 5).
구약에 계시된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힘으로서 창조와 생명의 원천이고, 영웅들과 왕들과 예언자들과 학자들에게 작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힘이며, 메시아를 메시아답게 하고 그 백성을 정화하고 갱신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그러나 구약 말기에 간혹 나타나는 영의 인격화 또는 '거룩한 영' 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영은 스스로 존재하는 위격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다만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속성인 만큼 신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구약의 영을 신약의 성령에 관한 계시의 전단계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신약성서] 신약성서에 언급된 하느님의 영도 성령의 위격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몇몇 본문들은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위격으로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와 성령 : 예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를 잉태하였고(마태 1, 18. 20 ; 루가 1, 35), 엘리사벳은 성령을 받아서 마리아의 잉태를 축하하였고(루가 1, 41-42), 즈가리야도 성령에 의하여 구세주의 장래를 예언하였으며(루가 1, 67), 시므온도 성령의 인도로 메시아를 알아보았다(2, 27). 예수의 세례 장면(마르 1, 9-11 ; 마태 3, 16-17 ; 루가 3, 21-22)은 성부의 말씀과 성령의 강림으로 그분이 메시아임을 대중에게 공표하고 있으며, 세례자 요한은 이 장면을 목격하고 그 의미를 증언하였다(요한 1, 33).
예수의 공적 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다(루가 4, 14 ; 요한 3, 34). 그래서 예수가 나자렛에서 설교를 시작할 때에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하면서 성령을 받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메시아의 사명이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선언하였다(루가 4, 18-21). 예수는 성령으로 유혹을 물리치고(마태 4, 1) 악령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풀어 주었고(마태 12, 28 ; 루가 4, 36) 병자를 치유하였으며(루가 5, 17 : 6, 19 : 8, 46; 13, 32 : 마태 9, 2), 이러한 기적들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예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일상사처럼 행하였다(루가 6, 19 : 8, 46).
성령으로 가득 찬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영을 줄 약속을 하였고 부활 후에 이 약속을 이행하였다. 예수가 세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성령이 예수의 인격과 행동 범위 안에서 작용하였지만(요한 7, 39), 예수는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면 성령이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것이라고 하였다(요한 16, 7 : 14, 16). 즉 성령은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배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고(요한 14, 26 ; 15, 26 : 16, 13), 박해 때에나(마르 13, 11 ; 마태 10, 20) 일상적인 투쟁 중에도 항상 그들과 함께 있을 것(요한 14, 16)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는 거듭 성령을 파견하겠다고 강조하였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들이 될 것입니다" (사도 1, 8).
초대 교회의 성령 체험 : 4복음서가 예수의 복음서라면 사도 행전은 '성령의 복음서' 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성령의 역사(役事)가 넘쳐흐르고 있다. 오순절에 불혀 모양으로 내린 성령을 받아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 1-14). 사도들은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대담하게 선포하였는데 (사도 4, 29-31 ; 28, 31), 민중 앞에서(사도 2, 14-36 : 3, 11-26), 법정과 의회에서(사도 4, 2-20 : 5, 26-42 ; 7, 1-53 : 23, 1-11), 그리고 관헌과 왕 앞에서(사도 24, 10-23; 26장) 성령이 주는 지혜와 언변으로 진리를 설파하여 당대의 학자들을 침묵시켰다(사도 4, 13-14 : 6, 10). 또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여러 가지 기적을 성령의 힘으로 행하였고(사도 3, 14 : 5, 15-16 : 8, 7. 39 ; 9, 32-41 : 14, 8-10 : 19, 11-12 : 28, 3-4), 가야 할 곳을 식별하였으며(사도 16, 6-7), 악인들의 생각을 투시하였다(사도 5, 1-11 : 8, 18-23). 그들은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사도 4, 1-22 ; 5, 17-42 : 8, 1-3 ; 12, 1-5 ; 13, 50-51)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항상 성령의 인도로 전도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사도 7. 54-60 ; 12, 1-2). 사도들을 통하여 신자들도 성령을 받아서(사도 8, 14-17 : 10, 44-48: 11, 15 : 19, 6-7) 방언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언을 하였다(사도 10, 47 : 11, 28 ; 19, 6: 20, 23 : 21, 4. 11). 또 성령은 초기 신자들에게 뜨거운 형제적 사랑을 주어 그들을 일치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재산을 공유할 정도로 서로 도왔으며, 기도와 찬미와 애찬의 공동체를 이루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보고 경탄하였다(사도 2, 43-47 : 4, 32-37).
성령은 사도들에게 만민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린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오순절에 사도들은 언어의 특은을 받았고(사도 2, 4) 사람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모국어로 들었으며(사도 2, 6. 11), 사마리아인(사도 8, 4-17)과 고르넬리오와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사도 10, 44-48 ; 19, 10),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도 개종하여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 11, 26). 그래서 사도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인정하여(사도 13, 2) 주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게 하였다(갈라 2. 9). 또 사도들은 신약의 백성을 구약의 율법에서 해방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사도 15, 6-29) "성령과 우리는··· 짐도 더 이상 지우지 않기로 뜻을 모았습니다"(사도 15, 28)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役事)는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복음을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면서 예수의 이름과 성령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였으며(사도 4, 12. 29-31 ; 16, 18 ; 19, 13), 그들의 활동을 성령이 지도하고 결실을 맺게 하였다(사도 16, 6-7 ; 19, 20 : 13, 52)
이와 같이 사도 행전은 주로 성령의 카리스마적인 역할을 전하고 있지만 사도 바오로는 주로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령 체험을 증언하고 있다. 성령에 의하여 사도로 간택되었다고 확신하는(2고린 3, 2-3) 바오로는 성령의 지시대로 행동하고(사도 20, 22-24) 설교하였다(1고린 2, 3-4). 바오로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부활시킨 성부는(로마 8, 11) 성자가 생명을 주는 영이 되게 하고(1고린 15, 45) 성령이 부활한 예수의 영광이 되게 하였다(2고린 3, 18)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은 성령으로 인하여 전파되고 사람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인다(1데살 1, 5-6 : 1고린 2, 4-5. 13 ; 갈라 3, 1-5).
신자는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성령이 주는 새로운 생명을 받았으며(로마 7, 6 ; 8, 2 ; 2데살 2, 13 ; 1데살 4, 7-8), 이로써 성령은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한다(에페 1, 14 : 2고린 5, 5 : 3, 18). 성령은 우리 안에 살아 있어서(로마 8, 11 : 1고린 3, 16 : 16, 19)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고(로마 5, 5) 우리를 구약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하여(로마 7, 6 : 2고린 3, 6 ; 갈라 5, 18)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한다(갈라 3, 13). 성령은 죄로 죽은 인간을 영신적인 인간으로 재생시키고(로마 8, 10) 성령의 여러 가지 열매(덕행)를 맺게 하여(갈라 5, 19-23) 하느님의 진노를 벗어나서 평화를 누리게 한다(1데살 1, 6). 진리의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깊은 경륜을 깨닫게 하고(1고린 2, 10) 그것을 바로 고백하게 하여 (1고린 12, 3)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명해 주고(로마 8, 15-16 : 갈라 4, 6)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한다(에페 2, 1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로마 8, 1)성령에 의하여 산다는 것(로마 8, 5)이므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않고 있다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 8, 9)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령에 힘입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1고린 12, 3)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은 또한 교회를 형성한다. 신자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1고린 12, 13 : 에페 4, 3) 성령의 궁전이 된다(1고린 3, 16 ; 6, 19 ; 2고린 6, 16).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은사를 베푼다(1고린 12, 4. 7. 11). 즉 말씀의 은사를 비롯하여 지혜 · 지식 · 믿음 · 치유 · 기적 · 예언 · 방언 · 해석 · 식별 · 봉사 · 격려 · 지도의 은사들이 주어지고(로마 12, 6-8 : 1고린 12, 4-11), 사도 · 전도사 · 교사는 그 자체로 은사이고 직책이다(1고린 12, 28-31). 그중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은사가 가장 귀중하다(1고린 12, 28 ; 에페 4, 11). 그리고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선물은(1고린 13장 ; 2고린 6, 6 : 갈라 5, 22 : 로마 5, 5)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묶어 준다(에페 4, 3-4) .
성령의 위격 : 복음서나 사도 행전이나 사도들의 서간 등에 언급된 영은 많은 경우 하느님의 능력으로 볼 수 있지만, 때로는 성령을 행위의 주체로 표현하고 있다. "영은 모든 것을 살피시고, 하느님의 깊이까지도 샅샅이 살피십니다"(1고린 2. 10), "바로 이 영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친히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십니다"(로마 8, 16), "이 모든 것은 같은 한 영이 이루시며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 나름의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1고린 12, 11),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1고린 3, 16 : 6, 19)등의 표현은 성령을 위격화하고 있다. 또 요한 복음서의 최후 만찬 기사에서 예수가 언급한 영인 협조자는 분명히 성령의 위격을 가리킨다. 즉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협조자(요한 14, 16-17), 진리를 증언할 협조자(요한 14, 26 ; 15, 26), 예수가 보낼 협조자(요한 16, 7) 등이다. 이러한 성령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간택하여 키프로스 섬으로 보낸 성령(사도 13, 2-4)이다. 요한 묵시록에는 여러번 "귀 있는 자는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라" (묵시 2, 7. 11. 17. 29 : 3, 6. 13. 22)라고 표현되어 있다.
한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나란히 열거함으로써 성령의 위격을 분명히 하는 구절도 있다. "은사는 물론 (여러가지로) 나뉘어 베풀어지지만 영은 같은 영이십니다. 또 봉사(의 직책)도 (여러 가지로) 나뉘어 베풀어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일도 (여러 가지로) 나뉘어 베풀어지지만 모든 이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영을 드러내는 은사가 베풀어지는 것은 공익을 위한 것입니다" (1고린 12, 4-7). 고린토 후서의 결문 인사는 이를 더욱 명백하게 진술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 13). 또 마태오 복음 끝 부분에는 명시적으로 삼위 일체가 언급되어 있다.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보시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마태 28, 19-20). 이 구절은 예수의 세례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초기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 때 사용하였던 서식(書式)을 수록한 것으로서 늦어도 1세기 말에는 성서에 포함되었고,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 구절의 정경성(正經性, canonicitas)을 의심하지 않는다.
II . 성령에 관한 신학의 형성 역사
성령에 관한 신학적인 논고는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 일체 안에서 세 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의 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의 위상이 무엇이고,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두 가지 면을 학문적으로 논하는 것이다.
〔성령론의 발생기(1~3세기)〕 이 시기는 교회가 박해받던 시대로서 성령 신학보다는 성령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고대의 세례 신경들은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관습이 적어도 마태오의 복음서가 최종 편찬된 초세기 말에 교회 안에 정착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령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이 당시 최초의 기록으로 교황 글레멘스 1세(90/92~101?)가 95년에 쓴 《제1 고린토 서간》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성령은 예언적인 영감의 원천이요(13, 1; 45, 2) 성화의 원리이며(46, 5-6) 사도적인 열성의 원천(42, 3)이라고 하였다. "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과 역시 살아 계신 주 예수와 성령을 증인으로 삼는다. 이 셋은 선택된 자들의 믿음과 희망이다"(58, 2). 교황 글레멘스 1세는 고린토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내렸음을 인정하고 각자는 다른 이가 받은 은사를 존중하라고 권하였다(38, 1).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35~107)는 《제2 고린토 서간》 13장 13절의 삼위 일체에 관한 구절과 비슷한 말로 인사하면서(Ad Mag. 13, 1~2), "성령을 속이지 말라.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시고···비밀을 투시하시고·내가 주교에게 일치하라고 말하였을 때에 사실은 성령께서 주교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Ad Phil. 8, 1-2)라고 하였다. 또 폴리카르포(69~155)의 순교록에는 그가 한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당신의 영광을 노래하나이다" (Mart. Polycarpi 14, 3)라고 하였다. 그리고 익명의 저술인 《디다케》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가르치고 있다(7, 1).
유스티노(100~16)는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특히 예언을 중요시하였고(Apologia 1 13. 44. 61 ; Dialogus 38, 2 ; 87, 1) 세례와 성찬 전례에서 성부 · 성자 · 성령을 부르고 있지만(Apol. 1. 61~62), 락탄시오(250?~321?)처럼 하느님과 말씀과 영을 혼동하였다. 그리고 이레네오(130~200)는 그노시스주의(Gnositicism)의 이원론(二元論)을 반박하면서 성령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인간들에게 성부와 성자의 구원 경륜을 알려 준다고 하였다. 또 우리는 죄의 사함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De-monstr. 3)고 하면서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계시고, 하느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 교회와 모든 은총이 있는데,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Adv. H., Ⅲ. 24, 1)라고 하였다. 그래서 진리의 영을 받아 주교직을 계승한 원로들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다(Adv. H., Ⅳ. 26, 2). 히폴리토(170~236)는 성령이 거룩한 전통의 보존을 보증한다고 주장하였으며(Tacditio Aportolica 서문),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는 성령이 우리에게 내리어 우리가 진리를 알아서 신자가 되고 영성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고 설명하였다(Paedagogia 1, 6). 테르툴리아노(160~223)는 본체적으로 한 분인 하느님이 정도와 모습과 여러 국면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Adv. Praxeam, 2).
노바시아누스(200?~?)는 그의 저서 《삼위 일체론》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질적인 신성을 강조하면서도 성령에 대해서는 그 신성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은사를 거론하면서 이 은사들로 교회를 완성한다고 하여 간접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였다(De Trinit. 29~30). 오리제네스(?~254)는 성부 · 성자 · 성령의 신성과 성부 · 성자의 동일 실체를 인정하고 성령이 성화의 원리라고 하면서도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불확실한 표현들을 사용하였다(Peri Archon ; In Rom ; In Joan). 그리고 성령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그의 제자인 기적자 그레고리오(Gregorius Thaumaturgus, 213~270?)가 성령의 발출(發出)을 설명할 때 사용되었고, 후에 동방 교회 신학의 성령론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성령 신학의 형성기(4~6세기)〕 그리스 교부들의 논쟁 : 초대 교회에서도 성부 · 성자 ·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박해 시대의 교회나 교부들도 삼위 일체의 신앙을 고백하였지만, 신학적으로 이 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대두하였으며 때로는 이단까지 등장하였다. 그리스도론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Arianism)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 단죄되었으며, 정통 교리가 정리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령에 관해서 간단하게 '성령을 믿는다' 고 하였다(DS 125~126). 또한 성자는 성부와 완전히 동질(同質, ὁμοούσιος, consubstantialis)이라고 결의하였지만 동질성을 유사성으로 해석하려는 아리우스파의 소동은 계속되었고, 반(半)아리우스주의자들인 마체도니우스파(Macedoniani)는 성령의 신성마저 거부하였다. 그래서 아타나시오(297~373), 바실리오(329~379),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329/330~389/390),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 같은 그리스 교부들이 이들에 대항하여 정통 신앙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아타나시오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신성을 가지고 같은 본체 안에 하나라고 주장하였으며(Ad Serapionem Ep., 1, 28), 바실리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이라고 하면서 이 말이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영광"이라는 종래의 영광송과 같은 뜻이라고하였다(De Sp. Sto ; Epist., 125, 3).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삼위의 구별은 삼위의 내적인 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한다(Oratio 25, 16 : 31, 29)고 하였다. 그래서 성령은 신적인 영이며 같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세 위는 한 본성이라고 하였다(Camina Ⅲ, 71). 니사의 그레고리오도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성령론》을 발간하였다(De Spit. Sto, PG 45, 1301~1334). 이와 동시에 아리우스주의와 그 아류들의 소동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교부들은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자세히 부연하며 삼위에 대한 교리를 표명하였다. 즉 성령에 대하여 "또한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며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을 받으시고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을 믿나이다"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결의는 로마에 보고되었고 교황 다마소 1세(305?~384)는 382년에 로마 교회 회의에서 공의회의 결의와 같은 선언을 하였다(DS 150~177).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전에, 에프렘(306~373)은 성령은 교회를 낳고 세례성사 · 견진성사 · 성체성사를 통하여 작용한다고 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주교 치릴로(315~386)는 자신의 교리 문답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실체이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 일체에 달려 있다는 정통 신앙을 가르쳤다.
라틴 교부들의 논쟁 : 동방 교회의 삼위 일체 논쟁에서 떨어져 있던 라틴 교부들 중에서 할라리오(315~368)는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같은 신성을 가진다고 하였고(De Trinit., VⅢ 26), 암브로시오(340~397)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같은 본성과 같은 권한을 가진다고 하였다(De Sp. Sto., Ⅲ . 28, 158).
이후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자신의 저서 《삼위 일체론》(De Trinitate)에서 삼위 일체의 교리를 깊이 다루었는데, 여기서 그는 성서에 의하여 언급된 세 위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요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며 성령은 성부의 영(마태 10, 20 ; 로마 8, 11)임과 동시에 성자의 영이니(갈라 4, 6 ; 로마 8, 11) 성부와 성자의 일치의 매듭(Sermo 71, 33)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서 구별되지만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된 영이기 때문에 공통된 거룩함이요 공통된 사랑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에(1요한 4, 8. 16)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된 이 사랑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실체적인 영원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Ⅵ, 5, 7).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과 성부에 대한 성자의 사랑이 바로 성령이니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와 이 사랑 자체를 세위라 한다(Ⅵ, 8)"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부도 영이고 성자도 영인데 영이라는 호칭은 성부나 성자에게보다 성부와 성자의 공통한 영인 성령에게 더 고유하게 해당된다( XV, 19, 37 ; XV, 17, 28. 30. 31).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요 사랑이므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한다. 그러나 성자도 성부에게서 나기 때문에 주로(principaliter) 성부에게서 발한다( XV, 17, 19 ; 26, 47). 그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많은 본문들을 성서에서 인용하였다(요한 20, 22 ; 15, 26 ; 17, 15 ; 루가 6, 19 : 8, 4-6). 또 아우구스티노는 성령의 경륜에 대해서 말할 때 성령을 하느님의 선물(donum)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서 구절들(사도 2, 37-39 ; 8, 18-20 ; 10, 44-46 : 11, 15-17 ; 에페 4, 7-8)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의 백성이 일치한다(sermo 71, 12, 18 : 12, 19 ; 17, 28)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은 신자의 영성 생명의 원리이며 또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활력의 원리라고 하였다. "인간 육체에 대한 영혼의 작용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하여 성령께서 작용하신다"(Sermo 267, 4, 4).
이렇게 아우구스티노는 후대의 '필리오궤' (Filioque) 논쟁과는 상관없이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한다는 서방 교회 성령론의 기틀을 세웠다. 그 후 서방 교회에서는 성령의 본체론에는 큰 변화가 없이 주로 성령의 경륜론이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성령 신학의 동 · 서 논쟁]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의 성령에 관한 결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성자 종속설과 성령 종속론을 단죄하는 것이었지 동방 교회의 정통 신학이나 서방 교회의 정통 신학을 선택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동방 교회에서는 대개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발한다고 하였고, 서방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한다고 이해하면서 각각 결의문을 해석하였다. 결국 각기 자신들의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의 결의문을 받아서 검토한 로마에서는 그 이듬해인 382년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성령은 아버지나 아들만의 영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였지만(Decretum Damasi : DS 178), 본문 자체를 수정하지는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전부터 서방에서 사용하던 다마소 신경' (Formula Fedes Damasi, DS 71)이나 '아타나시오 신경' (Symbolum Athanasianum, DS 75)에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한다고 되어 있었고, 그리스 교부인 증거자 막시모(580~662)는 동방의 해석이나 서방의 해석이 같은 뜻이라고 하였다(PG 91, 136). 그러나 제3차 톨레도 교회 회의(589)에서는 서방 신학의 표현인 성부와 '성자에게서' (filioque)를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Symbolum Nicaemo-Costantinopolitanum)이 삽입하였다. 이 신경은 점차 보급되어 마침내 교황 베네딕도 8세(1012~1024) 때인 1014년에 로마에서도 채택되었으나, 그 후 '필리오궤' 의 문제는 동 · 서방 교회 대분열(1054)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필리오궤' 의 주장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 제2차 리용 공의회(1274) 피렌체 공의회(1439)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피렌체 공의회는 교회 일치를 위하여 동방 교회 주교들도 참석하였는데, 공의회가 양 교회의 신경이 같은 의미라고 해석하였기 때문에 동방 주교들도 서명하였지만(DS 1300~1302)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이 문제에 대한 동방 교회의 입장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일부는 이 문제를 신앙 교리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로 보고, 일부는 절대적인 반대를 하고 있으며, 극소수는 '성자를 통하여' 나 '성자에게서' 는 같은 내용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쟁점은 구세사 안에서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인간 성화의 작용을 동방 교회 신학에서는 배타적으로 성령에게 돌리고(proprium) , 서방 교회 신학은 삼위의 작용이지만 주로 성령에게로 돌린다appropiatio)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령 신학〕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피렌체 공의회 이후 각자의 주장을 고수하면서 구세 경륜 안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서방 교회 안에서 소위 종교 개혁의 열풍이 불면서 프로테스탄트측에서 교회의 교도권에 도전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가톨릭측에서는 교도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치중하여 성령론은 침체하였다. 그 결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동방 교회 · 프로테스탄트 · 성공회에서는 가톨릭이 성령의 역할을 마리아와 교황으로 대체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과거 400년 동안의 가톨릭 신학계가 다소 호교론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에 대한 신앙이나 신학이 소멸된 순간은 없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저하게 성령론을 펼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먼저 교회의 존립 근거를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고찰하였다. 성부의 인간 구원의 계획(교회 2항)과 성자의 구속 사업(교회 3항), 성령의 내주(內住)로 교회가 성립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에 바탕을 두고 모인 백성이 교회라고 하였다(교회 4항). 또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 그리스도의 몸 · 성령의 궁전이며(사제 1항), 교회 신비의 최고 표본과 원리는 삼위 일체 안에서의 성부 · 성자 · 성령의 단일성(일치 2항)이라고 하였다.
공의회 문헌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속 사업으로 불러모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어 신비로운 당신의 몸을 형성하였으며(교회 7항 : 사제 2항), 성령은 머리와 지체들 안에 현존하여 몸 전체를 살리고 통합하며 움직인다(교회 7항). <교회 헌장>(Lumen Gentium)에서는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간접 인용하면서 사람의 영혼이 육체안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성령이 교회 안에서 이루는 역할을 대비시켰으며(7항) 교회의 모든 가시적인 구조도 성령에 봉사함으로써 몸을 자라게 한다(1항)고 하였다. 또 성령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복음을 현실화한다(계시 8항, 23항). 그분은 수도 생활을 일으키고(교회 44~45항), 사도직과 선교 사업을 일으킨다(선교 4항, 29항). 교회 일치 운동도 성령의 영감으로 진행되고(일치1항, 4항), 타교파 안에서도 성령의 활동을 볼 수 있다(교회 15항 ; 일치 3~4항).
성령은 주교를 중심으로 모인 지역 교회에도 작용하며 (교회 26항 : 주교 11항), 지역 교회들을 하나로 일치시킨다(교회 13항). 그래서 성령의 도유를 받은 신자들의 총체는 성령이 주는 신앙심으로 인하여 오류 없이 신앙을 유지하고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한다. 그리고 성령은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베풀어 교회를 성장시킨다(교회 12항). 또 성령은 우주에 충만하며(사제 22항 ; 사목 11항) 역사를 이끌고 세상의 변모를 주도하며(사목 26항)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여(사목 41항) 신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사목 22항, 37항) 공의회의 명령(전례 25항)으로 개정된 전례 예식서들에도 성령의 역할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새로 제정된 '감사 기도' (제2~4 양식)에는 성체 축성 전에 성령의 힘을 청하고(epiclesis) , 성체 축성 후에 일치를 기원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청하고 있다. 세례성사나 견진성사는 물론이고 고해성사의 '사죄경' 에도 성령의 내림을 청하고 있으며, 성품성사의 '주교 축성문' 과 '사제 축성문' 에도 성령으로 후보자를 축성해 주기를 청하고 있다.
이렇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모든 문헌에서는 성령의 현존과 역할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론의 활발한 전개를 가능하게 하였다.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새로운 사도직과 새로운 영성 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교황 요한 23세(1958~1963)와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예견하고 소망한 새로운 성령 강림의 기풍이 조성되고 있다.
Ⅲ . 교의 신학적 성령론
성서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계시는 삼위 일체 안에서의 성령의 존재와 위상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령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신학에서도 성령이 구세사 안에서 하는 일을 정리해 봄으로써 삼위 일체에 내재하는 성령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구원 경륜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 영이라는 개념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성령의 고유한 호칭으로서는 신적(神的)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고, 그러한 의미 안에서 구원 경륜이 진행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성령의 성(聖)은 성부나 성자도 성이기 때문에 각위(各位)를 구별하는 개념이 아니고 역시 신적인 의미를 지적하는 개념이다. 즉 세속이 감히 접근하거나 접촉할 수 없는 성격 내지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인간을 신적인 의미 안으로 끌어들이는 어떤 절대적인 힘으로서 구원의 경륜 안에서 인간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분이다. 즉 성령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강림하여 생명의 은총과 도움의 은총과 선물을 주고 신앙의 덕〔信德〕과 희망의 덕〔望德〕과 신적 사랑의 덕〔愛德〕 등 대신덕(對神德)의 씨앗을 심어 주고, 원죄와 본죄를 사해 주어 인간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가 되고 성령을 모시는 궁전이 되게 한다.
성령 칠은(七恩) : 성령의 은총으로 신자가 된 사람은 계속하여 다른 성사들을 받을 자격을 얻어서 각 성사를 받을 때마다 성령의 은총과 은사를 받아 신자로서의 모든 활동을 성화할 수 있게 된다. 신자 생활의 바탕에는 언제나 성령의 은총이 있지만 각각의 행위가 거룩하게 이루어지는 데에는 은총과 더불어 주어지는 선물이 크게 도움을 준다. 특히 인간의 지성을 비추는 네 가지 선물과 의지를 비추는 세 가지 선물이 있는데, 즉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과 현세의 잠정적인 사항을 구별하게 하는 지혜(sapientia) 영생의 진리를 가급적 깊이 깨닫게 하는 이해(intellectus),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는 지식(scientia), , 마땅히 행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는 의견(consilium)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게 하는 효경(孝敬, pietas) , 영생을 도모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는 용기(foritudo), 매사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까 염려하는 두려움(timor)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 칠은은 이사야서 11장 1-3절에서 말하는 메시아에게 주어질 은혜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일뿐이므로, 성령의 무수한 선물을 이 칠은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교회의 형성 : 성령은 의화(義化)된 개인에게 내주(內住)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궁전인 교회 안에도 항상 머무르면서 교회를 형성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성인(起成因)이라면, 성령은 교회를 교회답게 존재하고 활동하게 하는 형상인(形相因)인 것이다. 진리의 영(요한 16, 13)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진리를 올바로 깨닫게 하여 교회 전체가 믿음과 실천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였다(2디모 1, 14). 또 그 진리를 선포할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구조와 제도를 제정 · 유지 · 발전시키기 위하여 영감(靈感)을 주고 그 직책 담당자들에게 필요한 은사(恩賜, χάρισμα)를 주었으며(1고린 12, 1-10), 공식 직책을 갖지 않은 신자에게도 나름대로 신비체의 성장에 기여하는 여러 가지 은사를 준다(1고린 12, 11).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언제까지나 신자들과 교회안에 머물러 있는 성령은 초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는 교회 안에서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 보여 준다. 그래서 어떤 제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거나 편찬하도록 영감을 주었으며, 어떤 사람들을 사도로 세우고 그 후계자들을 배출시켜 교회를 사목하도록 배려하며, 수많은 복음 선포자를 파견하고 복음 증거자들인 수많은 순교자들과 수도자들을 배출하고, 많은 학자들이 진리를 깊이 연구하도록 인도하고, 뛰어난 평신도들이 크나큰 성덕과 사도직 활동으로 교회의 발전과 사회의 복음화에 기여하게 한다. 이를 <교회 헌장> 4항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성령께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을 성전 삼아 그 안에 거처하시고(1고린 3, 16 : 6, 19)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갈라 4, 6 ; 로마 8, 15-16). 성령은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요한 16, 13), 교류와 봉사로 일치시키시며 교계 제도와 은사의 여러가지 은혜로써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시며 당신 활동의 결실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신다(에페 4, 11-12 : 1고린 12, 4 ; 갈라 5, 22). 성령은 복음의 힘으로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며 항상 새롭게 하시어 신앙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완성시키신다."
일치의 원리 : 성령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치의 원리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의 원리인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불가시적인 신적인 요소와 가시적인 요소들을 결합시켜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사(sacramentum)가 되게 한다. 또 성령이 세례성사로 축성된 사람의 초자연적인 생명의 원리이므로 그런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하나의 몸으로 유지시키는 힘은 성령의 힘이다. "평화의 끈으로 영의 일치를 힘써 지키시오. 여러분의 부르심을 보아도 여러분이 하나의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몸도 하나요 영도 하나입니다"(에페 4, 3-4). 동일한 성령이 베푸는 은사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모든 은사들은 하나인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주어진 것(1고린 12, 7)이다. 따라서 성령은 분명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일치의 원리인 것이다.
〔삼위 일체 안에서의 성령의 위상〕 구약성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구세 경륜 안에서의 성부 · 성자 · 성령의 역사(役事)가 뚜렷이 계시된 신약성서에서도 삼위 일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은 존재를 뒤따른다는 원리에 따라서 하느님 각 위의 작용을 고찰하여 그 작용의 근거가 되는 각 위의 존재와 각 위 사이의 관계를 추론하는 방법으로 삼위 일체 하느님 안에서 성령의 위상을 찾는 방법이 있다. 따라서 삼위 일체론과 무관한 성령론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여기서는 이미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삼위 일체의 교리 중에서 성령에 관한 설명을 소개한다.
성령 발출설 : 삼위 일체의 교리는 유일하고 자존(自存)하고 영원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이 세 위격은 완전히 동일한 본성(natura)이요 본질(essentia)이며 하나의 실체(substantia)를 이룬다. 그러나 세 위격은 서로 구별되는데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지 않는 원천이요(principium originalis) ,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고(gene-ratio)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發出, processio)한다. 성령의 발출에 대해서 동방 교회의 신학은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발출한다고 하였으며, 서방의 신학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서로 반대된다기보다는 서로 보완할 수 있는 것이고, 피렌체 공의회도 보완한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 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심리적인 구조를 원용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영혼이 기억과 인식과 사랑의 세 가지 역할을 하는 것처럼 한 하느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구별된다고 하면서, 성부는 기억에, 성자는 인식에, 성령은 사랑에 해당될 수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정신이 지성적 인식과 의지적 원의를 가지면서도 이 인식과 원의는 정신에 내재하는 것처럼, 성부의 인식을 성자 또는 말씀이라 하였고 하느님의 의지적 원의는 성령 또는 사랑이라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의지는 지성으로 인식한 것을 원하는 작용이므로 성자의 발출은 제1 발출이고, 성령의 발출은 제2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발출한다는 동방 교회의 신학 이론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전통 신학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출한다고 하는 것은 절대 원리인 성부와 발출한 원리인 성자라는 두 개의 원리에서 성령이 발출한다는 뜻이 아니고, 성부의 신성이나 성자의 신성이 완전한 동일한 본성이기 때문에 이 신적 본성을 원리로 해서 성령이 발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도 완전한 신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적인 의미로는 성부가 성자의 아버지이고 성자는 성부의 아들이므로 성자의 발출은 출산(出産, generatio)이라 함이 마땅하고, 성령의 발출은 하느님의 의지적인 발출이기 때문에 기운을 불어 낸다는 의미의 기출(氣出, spiratio)이라 함이 더 적절하지만, 전통 신학은 그냥 발출이라고만 말해 오고있다.
일치와 사랑의 매듭 :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일치의 매듭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는 이론은 성부와 성자의 일치를 더 잘 설명하고 있다. 전통 신학에서 일치의 매듭 또는 사랑의 담보라는 명칭을 받은 성령은 세 위격의 일치를 담보한다. 이 말은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과 성부에 대한 성자의 사랑을 묶어 준다는 뜻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서 일치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전례 기도문의 결문에 "성자는 성부와 함께 성령의 일치 안에서 영원히 사시고 다스리나이다"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 망〕 그리스도교의 신비 중에서 가장 오묘한 신비인 삼위 일체의 신비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 것은 성서에 표현된 계시뿐이며, 이 계시도 제대로 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인간의 인식과 표현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삼위일체의 신비를 완전히 깨닫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비를 설명하는 신학적인 언어는 언제나 일의적(一義的, univoce)인 것일 수 없고 최대한도로 가까운 표현이라도 결국 유비적(類比的, analogice)일 수밖에 없다. 신학사 안에서 삼위 일체의 교리만큼 많은 유설과 논쟁이 오래 계속된 주제는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론 역시도 완전한 해석이나 설명이 불가능한 주제라 할 것이다. (⇦ 성령 칠은 ; 성신 ; 성신 칠은 ; → 삼위일체 ; 삼위 일체론 ; 영 ; 필리오궤)
※ 참고문헌  M.J. Le Guillou, 《Cath》4, pp. 474~497/1. Hermann · 0. Semmelroth, 《EncFoi》, 1965/ R. Laurentin etc., L'Esprit-Saint, Bruxelles, 1978/ H. Mühlen, L'Esprit dans I'Eglise, vol. 2, 1969/ Y. Congar, Je croisen I'Esprit-Saint, vol. 3, 1980/ 정하권, 《교회론》 II , 분도출판사, 1981, pp. 20~28. 〔鄭夏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