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영보 수녀회

聖母領報修女會

〔라〕Congreationis Religiosae Sororum Annuntiationis Beatae Mariae Virginis de Seoul · 〔영〕Sisters of the Annun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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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면 신천리에 있었던 성모 영보 수녀원 성당 내부 모습(왼쪽)과 1961년 9월 8일의 제1회 착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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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면 신천리에 있었던 성모 영보 수녀원 성당 내부 모습(왼쪽)과 1961년 9월 8일의 제1회 착복식.

1960년 3월 25일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가난한 생활을 통하여 가난한 이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써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창립한 수녀회. 본원은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文源洞) 115-433번지에 있다.
〔수녀회의 설립〕 1942년 2월 14일 사제 서품을 받은 선종완 신부는 19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24년 간 혜화동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성서 번역에 일생을 바친 학자 신부였다. 그가 수녀회 설립의 꿈을 갖게 된 것은 1954년경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고해 신부로 있을 때였다. 수도 성소가 있어도 가난하고 학력이 모자라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성서 안에서 완덕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 바로 이것이 선종완 신부가 수녀회를 설립하려는 근본 취지였다.
이 무렵 선종완 신부는 성서 번역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혜화동 대신학교 구내에서 메추리 사육을 시작하였는데, 이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더 이상 신학교에서의 사육이 불가능하게 되자 1958년 9월에 경기도 소래면 신천리 산 6번지의 부지 36,000평을 매입한 뒤 초가 두 채를 지어 이전하였다. 이듬해에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도 성서 번역 비용을 충당할 수 있게 되자, 선종완 신부는 그곳에 30평의 건물을 짓고 수녀회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메추리 사육장에서 일하던 3명의 자매들을 첫 입회자로 하여 1960년에 '서울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영보 수녀회' (Congregatio Religiosa Sororum Annuntiations Beatae Mariae Virginis de Seoul)를 설립하였다. 노동을 천시하는 사회 풍조 속에서 노동으로 모범을 보여 주고, 학력이 모자라 수도 생활을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성서대로 생각하고 성서대로 생활하는 수녀회를 설립한 것이다. 그 후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수녀회 명칭을 '성모 영보 수녀회' 로 결정하였고, 이듬해부터 성모 영보 대축일(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3월 25일을 수녀회의 설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어 1961년 9월 8일에 수련자들이 첫 착복을 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흙벽돌 성당(18평)을 완공하였으며, 설립 3년 만인 1963년 1월 10일에는 교황 요한 23세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수녀원의 이전과 성장〕 부천 신천리의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에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교통도 불편하자, 선종완 신부는 1967년 6월 14일에 교통이 편리하고 자연 경관도 좋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산 104-2번지로 수녀원을 이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30일 수녀원과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69년 8월 22일에는 초대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로부터 수녀회 인가를 받았으며, 1970년 4월 6일 첫 서원에 이어 1973년 9월 8일에는 첫 종신 서원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墨里)에 15,000평의 부지를 매입한 뒤 1975년 5월 1일 이곳에 수련소(240평)를 준공하였다.
한편 선종완 신부가 사망한 이듬해인 1977년 2월에 본원이 위치해 있던 막계리 일대에 서울대공원을 조성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이에 현 과천시 문원동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성모 영보 수녀회는 1978년 10월에 현 부지 3,000평을 매입한 후 이듬해 10월 공사에 착수하여 1982년 5월 11일 수녀원(403평)을 완공하고 다음달 6월 1일에 이전했다. 아울러 1987년 6월 4일에 '천주교 성모 영보 수녀회 유지 재단' 이 발족함으로써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안정을 찾게 되었으며, 1991년 12월 9일에는 용인 기도의 집(973평)과 피정의 집(457평)을 완공하였다. 1999년 4월 말 현재 종신 서원자 138명, 유기 서원자 35명, 수련자 6명, 지 · 청원자 4명 등 총 183명의 회원이 있다.
〔영 성〕 성모 영보 수녀회는 나자렛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 요셉을 모시고 드러나지 않는 생활 속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생활한 성모 마리아를 본받고 따르기 위해 기도하며 일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따라서 수녀회의 생활은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성체성사께 드리는 성모 마리아의 신앙과 사랑과 영성 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관상 생활로 집약된다. 모든 사도직 활동은 이 관상 생활에서 비롯되며, 삼위 일체와 성체성사께 드리는 흠숭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다.
물질이 풍족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태해지게 되고, 결국 노동을 천시하게 된다. 이에 회원들은 정신적으로 가난해야 한다는 서원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가난을 체험하면서 극기 생활을 하는 등 그 희생을 제물로 바치며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한다. 수녀회는 또한 가난한 생활을 통해 빈곤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과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고유한 창립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입회 자격으로 학력의 제한을 두지 않는 등 성소의 길을 넓게 열어 놓고 있다.
〔사도직 활동〕 부천 신천리에 첫 터전을 마련한 뒤 성모 영보 수녀회는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양계 사업과 목축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파인애플을 재배하거나 미사용 포도주를 제조하는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본원을 과천 막계리로 이전한 뒤에는 양계 사업과 각종 과수 사업을 병행하였으나 경험 부족으로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처럼 수도 생활이 너무 고된 탓에 한때는 성소자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나, 육체적 노동이 영성 생활에 더욱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설립자의 신념과 수녀회의 지도 이념에 따라 회원들은 더 엄격하게 양성되었다.
한편 성모 영보 수녀회는 1976년 9월 13일에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델) 신부가 운영하던 안양의 '성 라자로 마을' 과 '나병 연구원' 에 처음으로 회원을 파견한 데 이어 1978년 10월에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 소재한 결핵 복지 시설 '시몬의 집' 에도 파견하였으며, 1985년 8월 1일에는 서울시로부터 무연고 여성 질환자 보호 시설인 '서울 시립 남부 부녀 보호소' (현 서울 시립 영보 자애원)를 위탁받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31일 마산교구 결핵 복지 시설인 '예수의 작은 마을' 과 정신 질환 복지 시설인 '천사의 집' 에 회원을 파견하였고, 1987년 9월과 1991년 12월에는 각각 과천과 용인에 유료 양로 시설 '기도의 집' 을 마련하였다.
1990년 4월 17일에는 대만에 첫 진출하였으며(1998년 폐쇄), 이듬해 12월 11일에는 멕시코로 진출하여 현재 양로원을 신축 중에 있다. 아울러 1994년 10월에는 서울시로부터 '등촌 7 종합 사회 복지관' 의 운영을, 그리고 11월 16일에는 천안시로부터 노인 종합 복지관의 운영을 위탁받아 지역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또 1998년 11월에 수원시 화성군 봉담면에 무료 양로 시설인 '해뜨는 마을' 을 마련한 것 외에도 현재 두 곳의 나환우 정착 마을(전남 나주의 현애원, 전북 익산의 상지원)과 수원교구 교육원 등 20여 곳에서 봉사하고 있다. (→ 선종완 신부)
※ 참고문헌  성모 영보 수녀회, 《말씀으로 산 사제》, 성바오로출판사, 1984/ 성모 영보 수녀회, 《기도와 노동의 삶 35년》, 오늘의 말씀사, 1995/ 《수원교구 3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1993/ 한국 수도자 장상 연합회 양성위원회 편, 《오늘의 수도자들》, 분도출판사, 1983/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교회와 역사》 287호(1999. 4), 한국교회사연구소, pp. 13~16.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