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통고

聖母痛苦

[라]dolores Beatae Mariae Virginis · [영]sorows of Mary

글자 크기
7
시므온의 예언.
1 / 7

시므온의 예언.

성모 마리아가 겪은 고통. 그리스도인들은 성모 마리아가 생애 동안에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성모의 고통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고통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 안에서 설명된다.
〔근 거〕 성서 : 성모의 통고는 성모가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하며(요한 19, 25), 또 날카로운 칼에 찔리듯이 그녀의 영혼이 아파할 것이라는 시므온의 예언(루가 2, 35)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성모 마리아가 골고타 언덕에 있었음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예수가 반대자로부터 배척받으리라(루가 2, 34)는 시므온의 예언으로 인해서 받았을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언급함으로써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성모의 고통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전해 주었다.
교부들의 증언 : 인류 구원과 곧 뒤따를 부활을 생각하며 십자가 아래에 용감히 서 있는 성모를 묘사하였던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 : De inst. virg. 7 ; PL 16, 318)를 제외한 대부분의 라틴 교부들은 신약성서에 성모 통고와 관련된 구절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서방 교회에서는 성모 통고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였다. 한편 오리제네스(185-254)를 따르던 3세기의 그리스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루가 복음 2장 35절에 나오는 날카로운 칼이 예수의 수난 동안 성모 마리아가 품었던 의심이나 불신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멜로도(Romanus Melodus, 540~556)는 고통받는 예수와 성모가 대화를 나누는 형식의 전례시(典禮詩)를 통하여 동방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가 고통 중에서도 신앙을 지켜 나가는 모습을 묘사하였다(Pitra, Anal. sacra 1, 1876, pp. 101~107). 이후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 통고에 관한 언급이 6~10세기까지 성행하였으나, 성 안셀모와 성 베르나르도의 영향을 받은 수도회들 안에서 시작된 서방 교회에서는 11~12세기 사이에 성장 · 발전하였고 시토회 회원들과 성모의 종 수도회(Ordo Servorum Mariae, O.S.M.) 회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성모 칠고 신심〕 성모 통고 신심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발전되었지만, 성모 통고의 숫자는 확정되지 않았었다. 14세기 초에는 5개 혹은 15개 등으로 여겨지다가 15세기 말경에 성모 칠락(聖母七樂, septem gloriae B.V.M)을 본따서 7개 고통이라는 성모 칠고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7개 성모의 고통이란 ① 시므온의 예언(루가 2, 35), ② 이집트로의 피난(마태 2, 13-18), ③ 예수를 성전에서 잃음(루가 2, 41-50), ④ 예수 십자가를 짊(루가 23, 26-32), ⑤ 예수 십자가에서 죽음(루가 23, 44-46), ⑥ 예수를 십자가에 내림(루가 23, 53), ⑦ 예수 무덤에 묻힘(루가 23, 53) 등이다. 이러한 성모 칠고는 신약성서에 수록되어 있다. 14~15세기에 성 빈천시오 페레리오(St. Vincentius Ferrerius, 1350~1413)는 설교 중에 성모 칠고를 언급하였으며(De nativitate Beate Marie Virginis vel de septem gaudiis et septem tristitiis) , 1464년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알랑 드 라 로슈(Alan de la Roche, +1475) 수사가 '도미니코 묵주 기도 를 세 가지 신비로 나누어 묵상하도록 하면서 고통의 신비가 만들어졌다.
이 성모 칠고의 신심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1492년에는 여러 지역들(Reimerswal, Bruges, Abbenbroeck)에서 성모 칠고 신심의 평신도회가 결성되었고, 1495년에는 교황 알렉산델 6세(1492~1503)가 이 단체들을 인가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미셀 프랑수아(Michel-Francois de Lille) 신부가 성모 칠고 신심에 관한 저서인 《7개의 칼에 찔린 성모》(La Vierge aux sept glaives)를 간행하였다(Anal. Boll., 12, 1893). 그리고 성모 칠고 신심의 평신도회에서는 주로 성서에 나타난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에 영향을 받아 성모의 7개의 고통을 7개의 칼로써 상징적으로 묘사한 성화(聖畵)들을 널리 전파하였다.
〔전례 축일〕 1960년까지 교회에는 두 가지의 성모 통고 기념 축일이 있었다. 우선 1423년 쾰른 교회 회의에서 제정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후 금요일에 기념되었던 것으로, 후스(Huss)파가 성모 마리아의 성상들을 모독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자 이를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이다. 통고의 성모에 대한 전례문이 사용된 이 축일은 그리스도의 성혈을 경배하고 있던 브뤼즈(Brugs)에 전해졌고, 이후 프랑스에도 전파되었다.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는 1482년에 이 축일의 미사 기도문을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에 삽입시켰으며, 처음에는 개별 수도 단체나 여러 나라들에서 인정되었던 이 축일은 1727년에 교황 베네딕도 13세(1724~1730)에 의하여 모든 교회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당시 일부 교회에서 부활 시기에 거행되던 이 축일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 금요일에 거행하도록 확정하면서 <성모 통고 기도문(Stabat Mater Dolorosa)이 전례에 첨가되었다. 이 축일은 1960년에 기념일로 한 등급 낮추어졌다가 1969년의 전례력 개정으로 이 기념일마저 9월 15일의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합쳐졌다.
또 하나의 축일은 16세기에 성모의 종 수도회가 주로 지향한 신심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 수도회에서 성모 칠고와 성모 칠락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1600년경에는 9월 셋째 주일의 성모 미사와 행렬이 대중화되었다. 1668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11세(1676~1689)가 이날을 성모의 종 수도회의 고유 축일로 인가했고, 1672년에는 이 수도회의 베르나르디(Proper Bernardi)에 의해 성모 통고 축일 미사 기도문과 시간 전례 내용이 작성되었다. 또 1814년에 교황 비오 7세(1800~1823)는 이 축일을 모든 교회에서 기념하도록 하면서 9월 셋째 주일에 이 축일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이 축일은 1913년 교황 비오 10세(1903~1914)에 의해 9월 15일로 확정되었으며, 그 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으로 통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이 기념일로 거행되고 있다. (⇦ 성모 칠고 ; → 마리아 축일 ; 성모 신심)
※ 참고문헌  J.C. Gorman, 《NCE》 13, pp. 441~443/ 《CathEnc》 14, pp. 151~152/ 《ODCC), p. 1490/G. Jacquemet, 《Cath》, pp. 1055~1059.[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