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반

聖盤

〔라〕patena · 〔영〕pa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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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에서 사용하였던 성반(왼쪽)과 현대적 감각의 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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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에서 사용하였던 성반(왼쪽)과 현대적 감각의 성반.

미사 중 축성될 제병, 특히 사제용 제병을 놓아두는 전례 용구. 둥글고 평평하면서도 약간 오목한 접시 모양으로, 주로 성작(聖爵, calix)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다. 성반은 일찍부터 미사 전례 안에 도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집전자와 복사들과 신자들의 영성체를 위한 제병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큰 성반"(《로마 미사 경본의 총지침》293항)을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구 교회법에서는 성반이 성작과 같은 방법으로 축성되며, 사용하다가 원래의 모양을 잃어버리거나 낡아서 고치거나 새로 도금을 입힌 경우에는 다시 축성해야 한다(1305조 1항)고 규정 하였다. 하지만 현 교회법에서는 성반이 성찬 거행 중에 정성껏 다루어지고 관리되도록 본당 주임 신부에게 책임을 부가하고 있다(555조 1항 3조 : 562조). 사제는 누구나 성반을 축성할 수 있지만, 성반이 미사 중에만 사용된다는 뜻을 신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미사 중에 신자들 앞에서 축성하는 것이 좋다(《성당 축성 예식서》 7장).
〔역사적인 변천〕 동서방 교회를 통하여 성반은 형태와 기능 면에서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는데, 그 변화의 경로는 동서방 교회 모두 거의 비슷하였다. 동방 교회 : 원반 형태의 성반(δίσκος)을 사용한 동방교회는 서방 교회보다 오래된 유물들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다. 동방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반은 일반적으로 폭이 넓고 평평한 접시 모양에 테두리가 장식된 원반 형태였지만, 5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파테르노(Paternus) 주교의 성반은 속이 깊게 파이고 지름이 61cm인 커다란 은 쟁반이었고, 527년경의 고든(Gourdon)의 성반은 직사각형이었다. 또 600년경 스투마(Stuma)와 리하(Riha)에서 유래한 비잔틴식 은 성반에는 소위 '사도들의 성찬식' 이 묘사되어 있고(이스탄불 박물관과 워싱턴 둠바르톤 옥스 콜렉션 소장), 이탈리아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에 보존되어 있는 11세기 비잔틴식 성반은 6개의 꽃잎 장식과 유약을 이용한 색채가 돋보인다. 후기 비잔틴 시대에는 구리 성반이 사용되었고, 이후에 특히 러시아에서는 손잡이가 달린 성반이 등장하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동방 교회의 비잔틴 전례에서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 지름 40cm의 넓고 큰 모양의 성반이 사용되고 있다.
서방 교회 : 서방 교회에서는 성반에 관한 많은 언급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정확한 형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성반이 구분되어 사용되었었다. 하나는 미사 집전자가 사용한 크고 무거운 성반이다. 이 성반은 성체 축성 전과 후에 제병으로 사용되는 빵을 놓아두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성체로 커다란 빵 덩어리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은 성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를 담는 커다란 접시와는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성반에는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가 달리거나 둥근 홈이 파였으며, 재질은 금이나 은 혹은 유리나 목재로 만들어졌다. 로마의 대성전에는 금이나 은으로 된 커다란 성반들이 많았는데,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기록된 교황 실베스텔 1세(314~335)와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선물 목록들 중에 이러한
성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J. Braun, Das christlicheAltargerat, p. 216). 특히 라테란 대성전은 콘스탄틴 대제로부터 약 9.82kg의 금 성반 7개와 30개의 은 성반 등 가장 많은 성반들을 기증받았다. 브라운(J. Braun)은 역사가 오래된 성반들은 깊게 파인 접시나 프라이팬 같은 모양이었다고 하였고(ibid, pp. 216~218), 투르의 그레고리오(538~594)는 저서 《순교의 영광》(De gloria martymm)에서 발을 다친 한 백작이 발을 치유하기 위해 발을 안에 넣고 씻을 수 있을 만큼 깊고 큰 성반을 성당으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커다란 성반에 대해 언급하였다(PL71, 781). 이 같은 성반은 오늘날의 성반과 같은 목적을 지닌 전례 용구가 아니라 오히려 성합(ciborium)과 같은 용도의 성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루카(Lucca)의 수녀원 성당에서 사용할 무게 2 파운드의 성반과 1.5파운드의 성작을 요청하기도 하였다(PL 77, 909). 다른 하나는 성유(聖油)를 담아 두던 다소 널따란 성반으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때 사용되는 성유를 담아 두거나 혹은 성유를 담는 그릇을 받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종류는 오로지 성당 장식을 위한 성반이다.
옛 성반들은 이따금 유리나 목재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금이나 금박을 입혀 만들어졌고, 보석을 이용하여 꽃 문양이나 십자가 · 물고기 · 양 · 바다 괴물의 입 속에 던져진 요나 등의 예언자들 · 화덕 속에 있는 3명의 히브리인들 · 사도들에게 직접 성체를 분배하는 그리스도 등의 그림들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러다가 카롤링거 왕조 때부터 점차 간소화되고 단순화되면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성반과 같은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9세기경에는 팔각형의 성반과 성작이 있었으며(할버슈타트 성당 소장), 10세기 후반 이후에는 내부가 파인 둥 근 접시 모양에 하느님의 어린 양 등이 묘사된 상당히 작은 성반이 등장하였다. 또 대표적인 초기 로마네스크식 성반은 5개의 잎이 달린 꽃과 보석으로 장식된 성반이었다(낭시 대성당 소장). 그 후 점점 많은 수의 잎이 달린 꽃문양이 그려진 성반이 등장하였는데, 12세기 후반의 잘 츠부르크 성 베드로 성당의 성반에는 13개의 꽃잎 모양에 꽃잎마다 예수와 12사도가 새겨져 있다(비인 예술사 박물관 소장). 후기 로마네스크식 성반은 십자가가 달리고 도금을 한 둥근 은 성반이 대부분으로, 폴란드 트레메센의 성당에 소장되어 있는 1180~1190년의 성반이 대표
적이다.
현재 미사 중에 사용되는 성반은 빵 대신에 얇은 제병이 사용되는 관계로 작고 간소화되었다. 성반은 성작을 덮을 만큼의 크기로 제작되는데, 대부분은 은으로 만들어지나 오늘날에는 쉽게 잘 닦이는 로듐으로 접시 표면을 제작하고 유약을 이용해 장식한 성반들이 사용되고 있다.
〔전례적 기능〕 옛 《로마 규범서》(Ordo Romanus)에 나오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이후의 미사에서의 성반 사용은 다음과 같았다. 교황은 평화 예식이 끝난 후축성한 빵을 작은 조각들로 쪼개어 제단 위에 놓는다. 그런 후 부제가 가져온 커다란 성반 위에 두 개의 빵 조각을 놓고, 부제들은 이 성반을 들고 교황의 뒤를 따른다. 차부제들의 도움을 받아 아마포로 만들어진 푸대를 들고 온 시종자들이 푸대를 열고 대기하고 있으면 주교는 제대 위에 남아 있는 빵 조각들을 그 안에 담는다. 그리고 이것을 주교들과 사제들이 각각 나누어서 교황의 신호가 떨어지면 빵을 떼기 시작한다. 동시에 부제들은 교황이 받아 든 성반 위에 놓인 빵을 떼기 시작한다. 이때 사용되는 성반은 매우 넓은 것이었다.
카롤링거 · 오토 황제 시대 이후의 미사에서는 주교가 부제로부터 성반을 받아서 그것에 친구(親口)하고 그 위에 성체를 쪼개 놓는다. 그런 다음 평화의 인사를 하고 그 성반을 시종자들에게 건네주었는데 이때 사용된 성반은 두 개로, 하나는 주교와 성직자의 영성체를 위한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신자들의 영성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반 위에 준비된 쪼개진 빵들은 성체 분배하는 사제들의 숫자에 따라서 다시 두 개 혹은 네 개의 성반에 나뉘어 담겼다(《로마 규범서》 V, . 10 : PL 78, 988). 950년경 마인츠에서는 평화 예식 후 성반을 가져다가 주교에게 건네주면, 영성체 때 주교는 성반 위에 놓인 성체를 영하고 나머지 성체 조각은 성반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1세기 뒤에 아브랑쉬의 요한(John of Avranches, +1079)의 미사 규범서에서는 이러한 성반의 기능이 자취를 감추었다. 1140년의 《라테란 교회 예식서》(Ordo eccl. Lateran-ensis, Fischer 86, 1. 13)에는 성체 분배 때 성반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세기 이후에 미사 집전자는 성반에 친구한 후나 그 이전에 성반에 십자표를 그었으며, 13세기 예식서의 특별 지침에서는 사제가 성반을 가지고 자기 얼굴이나 이마에 커다란 십자표를 긋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또 중세말에는 이외에도 몇 가지 행위들이 더 덧붙여졌는데, 성반으로 자기 얼굴과 가슴에 십자표를 그은 다음에 커다랗게 십자표를 긋거나 《사룸 미사 경본》(Sarum Missal)에 언급된 것처럼 성반에 친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왼쪽 눈위에 댄 다음 다시 오른쪽 눈에 대고 나서 그것을 가지고 십자표를 긋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독일에서도 확산되었으나, 치코니올라노(Louis Ciconiolanus)는 자신의 《성무 지침서》(Directorium div. Officiorum, 1539)에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이름을 부르며 오른쪽과 왼쪽 눈에 성반을 대는 관습에 반대하였다. 15~16세기의 카르투지오회 미사 예식서에서는 사제가 먼저 성반에 십자표를 긋고 나서 제병을 성반에 대고 친구하도록 하였다(Ordina-rium Cart., 1932). 그러나 이러한 전례 행위들은 교황 비오5세(1566~1572)의 미사 경본 발행 이후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다.
현재의 미사 경본에 따르면, 성반은 성찬 전례 시작 부분에서 제병이 담긴 성반을 들고 기도할 때 처음으로 사용된다. 이때 성반에는 사제용 제병이 담겨지며, 신자용 제병은 성합에 담겨져 성체포 위에 놓인다. 그리고 감사기도 중 성변화를 기원하면서 최후 만찬 때 예수가 한 말 을 한 후 성체를 들어 보여 준 후 축성된 빵을 성반에 내려놓는다. 감사 기도 끝 부분의 마침 영광송(doxologia)은 성반과 성작을 들고 하도록 되어 있다. 주님의 기도에 이어 평화 예식을 한 후 사제는 성체를 들어 성반 위에서 쪼개어 작은 조각을 성작 안에 넣으며 기도한다. 그 후 사제는 허리를 굽혀 절한 다음 성체를 성반으로 받쳐 들어올리고 신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를 크게 말한다. 성체와 성혈을 모신 사제는 성체를 담은 성반이나 성합을 들고 신자들에게 가서 영성체를 해주고, 영성체가 끝나면 성작과 성반을 깨끗이 닦으며 사제는 조용히 기도한다. (↔ 성작 ; → 성합 ; 전례용구)
※ 참고문헌  J.P. Lang O.F.M., p. 492/ Jean Lebon, How to Understand the Liturgy, Les Editions du Cerf, 1986, p. 83/ Richard P. McBrien ed., The HamperCo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San Fran- cisco, Harper Co., 1995, p. 965/ 《ODCC》, p. 1230/ K. Hofiman, 《LThK》8,p. 168/ 《Cath》 10, pp. 775~7761 C.W. Howell, chalice, paten, and veil, 《NCE》 3, pp. 432~4371 M. Burch, Liturgical Art, 《NCE》 8, p. 8721 VictorH. Elbern, 《TRE》 12, pp. 399~400/ Joseph A. Jungmann S.J. The Mass ofthe Roman Rite : Its Origins and Development Ⅱ, Benziger Brothers Inc., 1950, pp. 303~309/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미사 통상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6, pp. 103~107/ 《축복 예식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6, p. 125/ 《성당 축성 예식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78, p. 359. [梁蕙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