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직 제도

假聖職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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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말 북당의 선교사에게 보낸 이승훈의 첫째 편지(불역). 자신의 배교와 죄를 고백하고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을 청하고 있다.

1789년 말 북당의 선교사에게 보낸 이승훈의 첫째 편지(불역). 자신의 배교와 죄를 고백하고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을 청하고 있다.

한국 교회 초창기 지도급 평신도들이 신부를 자칭하면서 임의로 설립하였다가 폐지한 성직 제도. 이 제도 안에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등을 함부로 거행하였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임의로 성직 제도를 수립한 일은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초기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열심을 북돋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수립과 실행〕 한국 교회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영세입교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이벽(李檗, 요한)과 함께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일으켜 영세를 청해 옴에 따라 그들에게 영세를 주고, 그들과 함께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영세한 신자수는 곧 1천 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새로 영세한 사람들도 곧 전교에 참여 하게 되었다. 이때 이벽,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김범우(金範禹, 토마) 등이 특히 이승훈의 전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런데 1785년 봄 이벽이 김범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종교 집회를 주도하던 중 발각되어 교회는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을사추조적발 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불리는 이 첫 박해의 문초에서 김범우와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등은 그들의 신앙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권일신 부자를 위시한 일부 신도들도 자신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으니 함께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범우만이 유죄 판결을 받고 유배되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이 박해는 천주교도들의 기를 꺾기는커녕 용기를 더해주어 전교 활동에 더 열을 올리게 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외교인들의 개종을 촉진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른바 '가성직 제도' 를 세워 모든 성사를 집전하게 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위해 이승훈을 위시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1786년 봄에 모임을 갖고 우선 고해성사를 집전하기로 결정하였
고, 이어 가을 모임에서는 이승훈에게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한편, 이승훈은 같은 권한을 권일신, 홍낙민(洪樂敏, 루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등 10명에게 부여하고 그들을 신부로 임명하여 함께 성사를 거행하였다. 신자들은 열광적으로 성사를 받았다. 물론 영세를 제외하면 이른바 신부들이 집전한 성사는 모두 무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집 전한 성사는 기대했던 대로 신자들의 열성을 촉진시키고 신앙 전파에 새로운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중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중의 하나인 유항검이 그들이 집전하는 성사의 유효성에 관해 중대한 의혹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폐지와 의의〕 유항검은 신부로 임명된 후 성사에 관한 교리서(《성교절요)인 듯)를 숙독한 결과 그들의 성사 집전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이승훈 등 교회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밀사(密使)를 보내 필요한 지시를 구하도록 강력히 요구하였다. 유항검의 주장은 '사제직은 인호(印號)를 박아 주는데 이승훈은 그와 같은 인호를 북경의 선교사들로부터 받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사제직에 올릴 수 없으며, 따라서 사제품을 받지 않고 인호가 없는 성사를 집전하고 있으니 독성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었다. 이러한 유항검의 편지를 받은 이승훈의 처지는 매우 난처하였다. 이승훈 자신은 유항검의 편지를 받고 즉시 성사를 중단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나, 유항검의 편지를 보면 절대로 그렇지가않다. 그는 이후에도 이승훈에게 거듭 편지를 보내 성사의 중단을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성사 집전은 유항검의 이의가 있은 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승훈으로 하여금 성사의 중단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로 인해 신부들이 당하게 될 망신, 무엇보다도 중단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혼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연 이승훈도 성사가 중단된 후 신자들의 열심이 식어지고 그간의 많은 성과가 지속되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는 북경 교회에 밀사를 파견하여 필요한 지시를 얻으려는 문제 또한 계속되는 정부의 감시와 신자들의 가난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다. 실제로 1789년 말에 가서야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문제가 겨우 실현될 수 있었다.
이해 말 한국 교회는 동지사편에 신문 교우인 윤유일(尹有一)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 교회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북경의 북당(北堂)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이승훈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이승훈은 이 편지에서 자신이 영세하고 귀국한 이래 한국에 새로운 신자 집단이 형성되어 발전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무엇보다도 그간 마구 성사를 거행한 엄청난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한편, 성사가중단됨으로써 실의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에 하루 속히 구원의 손길을 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북경에 무사히 도착한 윤유일은 북당을 찾아가 이승훈의 편지를 전하였고, 북당 선교사들은 윤유일에게 회답을 써 주었다. 여기서 선교사들은 한국 신자들에게 상등통회(上等痛悔)를 해 구원을 받도록 노력할 것, 그리고 사제를 영입하여 성사를 받는다는 보다 확실한 구원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권고하였다. 윤유일은 이 회신을 가지고 다음해(1790) 봄에 무사히 귀국하였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의 권고에 따라 사제를 영입하기로 결의하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해 또다시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윤유일은 이번에도 이승훈의 편지를 가지고 때마침 북경으로 떠나는 특별사행(特別使行)을 이용하여 9월에 북경에 도착, 북당을 찾아가 이승훈의 편지를전하였다. 한편 선교사들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북경 주교에게 건의하였고, 북경 주교는 윤유일에게 다음해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이로써 다음해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는 입국에 실패하였으나, 그 뒤를 이어 파견된 선교사는 1794년 말 입국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 교회에서는 비로소 참된 성사가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가성직제도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사제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사제를 영입토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그 제도 자체가 불법이고 또 성사도 영세를 제외하면 모두가 무효였다 할지라도 신자들의 열심을 북돋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연구 과제〕 한국 교회가 창설된 벽두에 평신도들이 가짜 성직 제도를 만들어 가짜 성사들을 집전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1874년에 간행된 달레(Ch. Dallet)의 역사서에서 비로소 밝혀졌다. 그러나 그 근거로 '그 시대의 기록' 이라는 말 외에 구체적인 자료의 제시가 없었다. 한편 한국측 자료에는 '함부로 성사를 거행했다' , '동정을 지키지 못해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는 등 단편적인 기록은 있었지만, 달레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자세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0년대에 로마의 포교성성 고문서고에서 성사 거행에 관한 이승훈과 유항검의 서한들이 발견되었다. 이 서한들은 비록 번역문이기는 하지만 동 시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다. 이들 기록에 비추어 볼 때 달레의 기록은 대체적으로 고증될 수 있지만 시정되어야 할곳도 적지 않다. 그 두드러진 예로 주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권일신도 신부의 한 사람이었지 주교는 아니었으며, 신부단의 우두머리도 권일신이 아니고 이승훈이었다. 또 성사도 1787년이 아니라 이미 전해, 즉 1786년에시작되었다. 그밖에도 유항검에 의해 처음으로 성사의 유효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사실, 또 그가 그러한 의혹을 발견한 교리서의 이름도 밝혀지는 등 일련의 새로운 문제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의 발굴만으로 가성직제도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고, 더욱이 달레의 기록에 나오는 사실들을 모두 고증하려면 또 다른 사료의 발굴이 절실히 요구되는실정이다. 예를 들면, 달레의 기록에는 신부들이 미사 때 사용한 성작과 제의, 뒤늦게 여교우들이 고해성사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들이 자세히 나오지만, 이승훈이나 유항검의 서한에는 그러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승훈은 10명을 같은 신부로 임명했다고 기록하였는데, 실제로 밝혀진 신부수는 달레의 서술에 나오는 이존창(李存昌, 곤자가의 루도비코), 최창현(崔昌顯, 요한)을 포함해도 모두 6명밖에 안된다. 또 유항검의 서한에는 미사 예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달레의 기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또 성사 집전이 언제 시작되고 얼마 동안 계속되었느냐 하는 사실도 결론짓기 어려운 문제다. 이승훈의 편지에 의하면 1786년 봄에 시작되고 그 다음해 유항검의 편지를 받자 중단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유항검의 편지를 보면 이승훈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한편 달레는 1787년에 시작되어 2년 간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끝으로 과연 '가성직제도' 란 용어가 적절한 표현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것은 달레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그의 주장대로 신부 외에 주교가 있었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주교가 없었던 사실이 밝혀진 오늘에까지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동시대인도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다만 '망행성사' (妄行聖事)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 (→ 이승훈 ; 유항검)
※ 참고문헌  崔奭祐, 〈李承薰과 柳恒儉의 서한>, 《敎會史研究》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pp. 170~244/ 《달레 교회사》 上, pp. 323~324.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