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회

聖嬰會

[라]Sancta Infantia · [프]Saint Enf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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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성영회 사업으로 운영한 서울의 성 바오로 보육원(왼쪽)과 제물포 고아원의 원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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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성영회 사업으로 운영한 서울의 성 바오로 보육원(왼쪽)과 제물포 고아원의 원아들.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올봉 장송(Holbon Janson)이 창설한 고아 구호 단체. 죽을 위험에 처한 아이에게 대세(代洗)를 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양육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영회를 창설할 당시 프랑스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빈곤에 놓여 있었고, 이 빈곤 때문에 버려진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봉 장송은 성영회를 통해 어린이 구호 사업을 전개하였고, 그 후 성영회 사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전교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많은 성과를 보게 되었다.
〔한국의 성영회〕 한국에 성영회(또는 嬰孩會)가 소개된 것은 1852년 말 한국에 도착한 메스트르(Maiste, 李) 신부에 의해서였다. 그는 1854년경부터 어린아이들을 신자 가정에 맡겨 양육하도록 하고 대세 줄 사람을 임명하는 등 성영회 사업을 전개했으며, 1854년 10월 22일에는 성영회 본부에 편지를 보내 성영회 사업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영회 사업을 보다 체계화시킨 사람은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였다. 1856년에 성영회 본부로부터 6,000프랑의 지원을 받은 베르뇌 주교는, 이듬해 8월 2일 <장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에 '영해회 규식' 을 첨부하여 각 지역 공소로 보냄으로써 성영회 사업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그 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결과 1859년에는 성영회의 기금으로 43명의 고아들을 양육할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일시 중단되었던 성영회 사업은 1880년대 초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는데, 블랑 주교는 이때 고아 위탁 사업을 재개하여 버림받은 아이들을 각 신자 가정에서 양육하도록 하였고, 1885년 3월에는 서울 곤당골(美洞, 을지로 1가)에 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1887년 7월 16일에는 한국의 고아 사업을 담당할 수녀들을 파견해줄 것을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요청하였다. 그 요청에 따라 이듬해 7월 22일 제물포에 도착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은 그 해 9월 8일 블랑 주교로부터 서울의 고아원(1977년 9월 폐원) 운영을 인수 받았고, 1894년에는 제물포에, 1915년에는 대구에 수녀원을 설립하면서 고아원을 함께 운영하기 시작하였다(현 인천의 해성 보육원과 대구의 백백합 보육원). 그래서 당시 조선의 성영회 사업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가게 되었으며, 동시에 신자 가정에 아이들을 맡기는 기존의 위탁 양육 방식도 병행되었다. 이것은 1913년까지도 서울교구에서 성영회 기금으로 신자 가정에 위탁한 아이가 443명에 이른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의 성영회 사업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위축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성영회 본부의 지원이 전쟁 중인 1915년 이후 급격히 감소하였고,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를 전후하여 일시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수녀들은 고아원 시설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자회를 개최하는 등 여러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한국 교회는 광복 이후에도 아동 복지 사업을 꾸준히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성영회 규식] 성영회의 규식(規式)은 1857년 8월 2일에 반포된 <장 주교 윤시 제우서>의 '영해회 규식' 을 통해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성영회 사업은 각 지역을 맡고 있던 신부들의 책임 아래 공소 회장 중에서 성영회장(聖嬰會長)을 정해 고아들의 선정 및 관리를 맡기고, 각 공소 회장들이 그 지시에 따라 그 지역 성영회 사업을 전개해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신자 가정에는 일정한 액수의 요전(要錢)이 지급되었으며, 남자 아이는 6세 이하, 여자 아이는 8세 이하를 양육 대상으로 삼았다. 또 두 돌이 차지 못한 아이는 유모가 없는 경우 받지 말도록 하였 고, 부모가 있는 아동의 경우는 친권을 포기한다는 부모의 각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남자 아이의 경우 18세가 되면 임의로 양육받던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규식에는 영해회의 목적과 함께 고아의 양육에 관한 절차만이 기록되어 있어 이것만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 성영회가 조직되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또 다른 성영회 관련 규식은 1886년에 필사된 《미과수원》(美果收園)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에는 영해회의 목적 · 입회 자격 · 회원의 의무 · 이를 통해 얻는 은사(恩赦) 등이 기록되어 있다. 신자 자녀만이 영해회 회원이 될 수 있으며, 이들은 21세가 되면 전교회(傳敎會)에 가입하도록 권고되었고, 회원들은 날마다 성모경을 한 번 외운 뒤 그 끝에 "동정이신 마리아는 우리와 불쌍한 외인 영해를 위하여 빌으소서"를 외워야 하며, 매년 일정한 회비를 내고, 회에서 정한 날에 고해 영성체를 하면 대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미과수원》에 수록되어 있는 각 단체들이 당시 한국 교회에 존재하였던 단 체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86년에 이러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 것은 당시 성영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아울러 1886년 이후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장 규조》에 《미과수원》과 같은 내용의 '성교 영해회' 가 수록되어 있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1923년에 간행된 <회장 직분》에는 성영회 사업이 신자 아이들이 낸 자선금으로 유지되며, 조선에는 아직 성영회가 설립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영회 사업을 신자 아이들이 낸 자선금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미과수원》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회원의 자격이 신자 아이에 한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조선에 아직 성영회가 설립되지 않았다는 것은 1854년경부터 시작된 한국의 성영회 사업이 자체의 성영회 조직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외국 성영회 조직의 원조를 받아 실시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고아 구제 사업이 전적으로 외국의 지원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1854년
메스트르 신부가 파리의 성영회 본부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 전에 이미 아이를 맡아 기르는 이에게 8프랑씩 위탁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과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이 성영회 본부의 지원과 함께 열심한 신자들의 자선금으로 충당되었다는 것은 조선 교회안에서도 이를 위한 비용이 마련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런 비용들이 성영회 회원들이 납부하는 회비가 아니었고, 따라서 한국에는 성영회가 조직되지 않은채 성영회 본부의 도움으로 그 고유 사업만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영해회 ; → 가톨릭 복지 사업)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달레 교회사》 張主教輪示諸友書〉, 1859,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美果收園》, 1886,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회장 규조》,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선 남방 천주 공교회 편, <회장의 본분》, 1913/ 《경향잡지》 339호(1915. 12. 15), p.531/ 르 장드르, <회장 직분》, 1923/ 유홍렬, 《韓國天主教會史》, 가톨릭출판사, 1962/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교구 연보》 I~Ⅱ, 明洞天主教會 200年史資料集 第1輯, 명동 천주교회, 1984, 1987/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성영>,《교회와역사》 275호(1998. 4), pp. 10~13.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