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유스티노 신학교

聖 - 神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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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0월에 신부와 신학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쓰기 위해 마련한 '성 니콜라오 별장' (왼쪽)과 별장 식당에서 식사하는 신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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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0월에 신부와 신학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쓰기 위해 마련한 '성 니콜라오 별장' (왼쪽)과 별장 식당에서 식사하는 신학생들.

1914년 10월 3일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3월 19일 폐교되었다. [역대 교장] 초대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1914. 5~1920.4), 2대 페네(Peynet, 裴嘉祿) 신부(1920. 4~1928. 10), 3대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1928. 10~1940.6), 4대 리샤르(Richard, 李東憲) 신부(1940. 6~폐교). (교수] 페셀(Peschel, 白鶴老) 신부(1914. 5~1915. 10), 줄리앙(Julien, 權裕良) 신부(1915. 10~1932. 9),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신부(1918. 1~1929. 5), 타케 신부(1920. 8~1928. 10), 서정도(徐廷道, 베르나르도) 신부(1924. 10~1926. 9) 고군삼(高君三, 베네딕도) 신부(1929. 5~1931. 1), 베르트랑 신부(Bertrand, 1929. 5~?) , 주재용(朱在用바오로) 신부(1931. 5~1940. 1), 이필경(李弼景, 안드레아) 신부(1931. 5~1936. 3), 타케뵈프(Taqueboeuf) 신부(1936. 2~8, 1937. 7~폐교) 이약슬(李若瑟, 요셉) 신부(1936. 3~1942. 6), 최덕홍(崔德洪, 요한) 신부(1936. 6~1937. 2, 1937. 7~1940. 6) , 박삼세(朴三世, 요셉) 신부(1937. 2~6), 프루아드보(Froidevaux, 趙) 신부(1940. 6~폐교) ,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신부(1942. 1~6) ,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신부(1943. 2~폐교), 장병화(張炳華,요셉) 신부(1943. 2~폐교).
〔설립 과정] 1911년 4월 8일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Demange, 安世華)주교는 대구에 부임한 첫 주일(7월 2일)에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 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 사업은 그 해 7월 5일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이 주교관과 수녀원 부지를 기증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신학교 건립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였고, 그 결과 1912년 11월에는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교구에서는 1913년 9월 4일 신학교와 부속 성당의 기초공사를 시작하였으며, 공사가 진행 중인 1914년 5월 3일 드망즈 주교는 샤르즈뵈프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페셀 신부를 신학교 교수로 임명하였다. 당시 교구에서는 그 해 9월 19일 학생을 선발하여 개교할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짐에 따라 개교일이 연기되었다.
〔설립과 변모] 드망즈 주교의 노력으로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 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 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3 · 1 운동이 일어나자 성 유스티노 신학생들은 3월 7일 교내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으며, 3월 9일에는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과 서정도가 주동이 되어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독립 선언문 복사 및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교장 신부에게 알려짐으로써 시위 계획은 무위로 끝났고, 그 결과 방학이 5월 1일로 앞당겨 실시되었다.
3 · 1 운동의 여파가 가라앉으면서 그 해 6월 13일 신학교 확장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드망즈 주교는, 1920년 1월 포교성성에서 2명의 신학생을 로마로 파견하라는 지시에 따라 송강정(宋康正, 안토니오)과 전 아우구스티노를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1922년 9월에는 소신학과 입학을 준비하는 '예비반' 을 신설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달성군 성당동에 신학교 별장인 '성 니콜라오 별장' 을 개설하여 신부와 신학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1930년대 들어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 · 소신학과의 분리라는 학제상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 · 소신학과의 분리는 신학생들에게 일반 교양 과목을 가르침으로써 신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1928년 말 서울 신학교에서 먼저 도입하였다. 그 결과 용산의 소신학생들은 1929년 9월부터 남대문상업학교(동성상업학교의 전신) 을조(乙組)로 편입되었고, 대구의 소신학생들은 1930년 12월 16일 드망즈 주교가 뮈텔 주교와 연합 소신학교 구성을 협의함에 따라 1931년부터 혜화동의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 · 대구 · 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 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그 후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7명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철학과 학생들은 1945년 2월 23일 '경성 천주공교신학 교 (京城天主公教神學校)가 인가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공부하였으며, 부제품을 받은 4명은 대구교구 사제 휴양소에서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의 지도로 수업을 받다가 1945년 12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다. (→ 가톨릭대학교 ; 대구 효성 가톨릭대학교 ; 성신중고등학교)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천주교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대구 본당 백년사》, 계산 본당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위원회, 1986/ 윤광선,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영남 교회사 연구》 16~24호, 1993.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