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공경

聖人恭敬

[라]cultus Sanctorum · [영]veneration of Sa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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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공경은 죽은 이 공경의 한 형태로, 주로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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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공경은 죽은 이 공경의 한 형태로, 주로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성인들의 축일을 기념하며 특별히 전구(轉求)를 청하고 그들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신심 행위. 성인 공경은 전승을 통하여 내려오는 가톨릭 교회 영성의 중요한 한 요소로서, 신자들의 영적 및 전례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신앙이 성숙되고 성인들의 전구로써 도움을 받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성인들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경배를 장려하고 있다(교회법 1186조).
거룩함(聖性)은 하느님과 '유일한 성인(聖人)이시며 유일한 주님' 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해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성성을 당신 백성에게 선물로 주셨으며(출애 19, 5-6), 그리스도는 이 성성을 당신 교회와 당신 몸의 지체를 이루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 주었다(1베드 2, 9).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성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로마 15, 25). 그러나 '성인' 이란 명칭은 이미 그전부터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며 살았던 그리스도인, 즉 순교자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부여하였던 명칭이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2세기 중엽부터, 서방 교회에서는 3세기 초부터 공동체의 기억 속에 순교자들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는 매년 순교자들의 탄생일인 하늘 나라에 들어간 날, 즉 죽은 날을 기념하고 그들의 중재를 청하였으며, 그들을 하나의 모범으로서 공동체에 제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시작되었고, 훗날 성인 공경으로 발전하였다.
I 기 원
〔순교자 공경〕 순교자 공경은 죽은 이 공경의 한 형태이다. 초기의 성인 공경은 주로 고대에 죽은 자들의 공경과 같이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공경 방식을 따른 것으로, 영혼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갔어도 그리스도를 증거한 이들의 무덤은 남은 생존자들로 하여금 이승에서 그들과 통교할 수 있게 하는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로마인들은 죽은 영웅들을 숭배하는 한편, 특별히 영웅들의 무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장례일이나 장례 기념일에 무덤 옆에서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천상의 연회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신적인 관습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순교자를 공경하는 의식으로 바꾸어 순교자들의 축일을 정하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순교자 공경의 일반적인 형태는, 신자들이 순교자의 무덤이 있는 성당에 모여 유해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으며, 기도와 더불어 그 순교자의 행적을 낭독함으로써 순교자의 증언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은 그가 지상에서 태어난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그가 죽음을 당한 날이며, 그날은 거룩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참된 탄생의 날(dies natalis)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교자 공경은 점차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순교자에게 바치는 예배는 부분적으로는 죽은 이를 공경하는 것과 같지만, 순교자 공경과 죽은 이 공경과의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순교자 공경은 친척들뿐만 아니라 신자 공동체가 드린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교자를 하느님 곁에 있는 힘있는 중재자로 인식하였고 그들에게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260년경 로마의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사도들의 기념" (Memoria Apostolorm)의 낙서들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순교자들의 유물이나 유해가 안치된 곳과 가까운 장소에 자신들의 무덤을 준비하려고 애썼으며, 이러한 신자들의 열심한 신심은 순교자들의 무덤에 새겨진 묘비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점차 순교자들을 기념하면서 각 지역 교회는 치프리아노(?~258)가 지시한 것처럼 신앙을 고백한 이들, 즉 증거자의 이름과 그들이 죽은 날과 묻힌 장소가 기록된 목록을 도입하게 되었다.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으로 테르툴리아노(160~223)는 순교자들의 장례 때 노래를 불렀다고 증언하였으며, 《치프리아노 행전》(Acta Cyprian)에서는 위대한 승리를 찬송하고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주교의 시신을 땅속에 내려놓았다고 하였다. 한편 기념일에도 이와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이날 지내는 미사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순교자가 아닌 성인들의 공경〕 박해 시대 이래 순교자를 기념하여 이루어지던 공경이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신앙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감옥이나 광산에 갇혔던 이들에게도 확대되었다. 일찍이 치프리아노도 순교자가 아닌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을 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공경을 표하였고, 그들이 죽은 후에는 중재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올림푸스의 성 메토디오(Methodius Olympiensis, +311)는 정결을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 라고 하였는데(Symposium 7. 3), 금욕과 정결을 성인의 척도로 간주하는 관점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있다. 이에 따라 성인 공경은 점차 그 범위가 고행자나 수도자 또는 주교 등으로 확대되었고, 금욕적인 동정녀의 삶 역시 순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신앙의 증거자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예로서 서방 교회에서는 유배 중에 죽은 교황 본시아노(230-235)와 사제 히폴리토(?~235)와 로마 근교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에서 유배 중에 죽은 교황 고르넬리오(251~253)를 성인으로 공경하였으며, 동방 교회에서는 최초의 주교로 간주하는 기적자 그레고리오(213~270?), 이집트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251~356), 아타나시오(295~373), 요한 그리소스토모(347~407) 주교 등을 공경하였다. 이처럼 성인 공경이 확대되면서 순교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었다.
II . 발전과 변화
[발전 요인] 한 성인의 공경이 전파되는 데 있어 첫째가는 요인은 당연히 성인의 명성이다. 4세기 중반부터 전 교회가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축일을 지냈고, 로마 교회에서 아프리카의 순교자들인 치프리아노,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스의 축일을 기념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황 다마소 1세(366~384)는 자신의 집을 성당으로 개축하여 성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봉헌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의 경우 그들의 유해를 옮기거나 나눔으로써, 또는 성인과 관계된 곳으로 성인전에 언급된 장소들에 대해서도 공경이 이루어지면서 그들에 대한 공경도 전파되었다. 성지 순례 역시 성인 공경이 확산되는 요인이 되었다. 성지 순례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종교 자유 허용 이전에 이미 시작되어 4세기에 크게 발전했다. 이스라엘과 로마에 있는 성지 외에도 프랑스의 몽생 미셀(Mont Saint-Michel), 투르의 성 마르티노 무덤, 스페인의 콤포스텔라(Compostela) 등을 순례하였다.그러나 모든 성지 순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과 로마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었다.
〔유해 공경〕 순교자 공경이 신자들의 신심으로 성행하는 가운데, 교회는 유해 공경을 통하여 순교자 공경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각 지방의 성당들에서는 순교자의 유해를 모시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유해를 안치함으로써 신자들을 순교자와 직접 접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박해 시대 이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아내어 성당에 모시거나 유해를 나누어 다른 공동체로 옮기는 운동이 일반화되었다. 이는 이미 4세기경에 동방 교회 지역에서 먼저 행해졌던 것으로, 안티오키나 · 알렉산드리아 · 콘스탄티노플 · 가이사리아 등 주요 도시들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유해 안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서방 교회의 주교들도 순교자들의 유해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브레시아의 성 가우덴시오(+410)는 유해를 얻기 위해 동방의 주요 지역 교회들을 방문하였고, 성암브로시오(340~397)는 특히 밀라노와 볼로냐에서 이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오에 의하여 발견된 성 제르바시오(Gervasius)와 성 프로타시오(Protasius)의 시신과 훗날 볼로냐에서 발견된 성 라자로와 성 비탈레와 아그리콜라의 시신들로 인해 자극을 받은 성인 유해에 대한 열망은 또한 거짓 계시와 남용을 낳게 되었다. 유해가 널리 퍼짐으로써 한 성인의 공경이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그 공경은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그 성인의 유물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티칸 성당에서는 성인 공경이 물질적인 대상과는 관계 없이 이루어졌다.
유해를 나누는 행위에 대해 오랫동안 교황청은 반대해왔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유해를 나눠 갖는 관행이 성행하였다. 성인의 유해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는 것을 다른 교회들에 비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로마 교회는 순교자의 무덤에 닿았던 천이나 그의 시신 앞에서 밤새불을 밝혔던 기름 등잔과 같은 대리 유물들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무덤에 닿았던 단순한 유물들, 즉 무덤에 접촉하는 가운데 거룩하게 된 아마포나 직물의 조각들을 성체함 형태의 상자 안에 넣거나 조그마한 금상자나 은상자 안에 넣어 주교나 사제들이 목에 걸고 다니게 하였다.
유해 문제에 있어 교황들의 엄격한 지침에도 불구하고 준수되지는 않았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로마에 있는 순교자들의 가장 유명한 무덤들도 도시 밖에 있었으므로, 개별적으로 유해를 훔치거나 침입자들에게 유해를 약탈당할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410년 알라리히(Alari-ch)의 반달족과 435년 가이세리히(Geiserich)의 반달족은 도시뿐만 아니라 교외에 있는 순교자들의 무덤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더 큰 피해는 545년에 있은 고트(Gothi)족의 공격과 약탈로 인한 파괴였다. 이에 교황 비질리오(537~555)와 후임 교황들인 요한 3세(561~574), 세르지오 1세(681~701), 그레고리오 3세(731~741)는 순교자들의 무덤을 옮기려고 노력하는 한편, 순교자들에 대한 예식 거행을 계속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8세기 말에는 유해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도시 외곽에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도시 안의 성당으로 옮겼고, 그래서 한 성인의 유해를 모시게 된 각 성당이 그 성인에 대한 공경의 새 중심지가 되었다. 761년에 교황 바오로 1세(757~767)는 가장 유명한 순교자들의 무덤을 열어 유해들을 로마에 있는 성 실베스텔 성당으로 옮겼는데, 이때 100명 이상의 이름들이 적힌 2개의 큰 비명판도 성당 정원으로 함께 옮겨졌다. 그 후 818년에 파스칼 1세 교황(817~824)은 성 프라세데(Prassede) 성당에 2,300명의 순교자들의 시신을 옮겼고, 세르지오 1세 교황과 레오 4세 교황(847~855)도 성 실베스텔 성당과 마르티노 성당에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들을 안치하였다.
이렇게 유해들을 옮김으로써 성인들의 유해를 소유하려고 했던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765년에 교황 바오로 1세는 메츠(Metz)의 크로데간고(Cro-degango)에게 성 고르고니오(Gorgonius)와 나보르(Nabor)와 나자리오(Nazanius)의 시신들을 선사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프랑스 북동부의 알자스(Alsace) 지방은 성 비토(Vitus)와 히폴리토와 알렉산드로를, 현재 독일의 바이에른(Bayern) 지방은 성 고르디아노(Gorianus)와 에피마코(Epimachus)를, 현재의 마인츠(Mainz) 지역은 성 체사리오(Caesarius)를, 네덜란드 프리스란트(Fiesland) 지방은 성 알렉산드로와 유스티노를, 이탈리아 남부 베네벤토 지방은 성 메르쿠리오(Mercunis)를, 아퀼레이아(Aqui-leia) 지방은 성 마르코를, 독일 북서부 지방인 마그데부르크(Magdeburg)는 성 펠리치타스와 그 두 아들을, 잘츠부르크(Salzburg) 지역은 성 에레메테(Eremete)와 빈천시 오의 유해를 소유하게 되었다.
유해를 옮기는 것과 더불어 유해 분할도 이루어졌는데, 9세기에 교황들은 성인 유해의 주요 부분을 로마에 보존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다른 곳으로 보냈으며, 유명한 많은 순교자들의 머리들은 그들의 시신에서 분리되어 로마의 여러 성당에 안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해들에 대한 열망과 이에 따른 유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9~11세기에는 유감스러운 현상과 함께 유해의 위조 · 상품화 · 악용 · 절도 등을 초래하였다. 894년 독일 성 엠메라노(Emmerano)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벌인성 디오니시오 시신의 위조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유해의 상품화는 특히 알프스의 여러 지역에서 성행하였는 데, 부제 데우도나(Deudona)는 성 베드로와 마르철리노의 무덤 안에 안치된 순교자들의 유해들을 독일에 팔아넘기기도 하였다. 또 치유 목적의 약을 만들기 위해 유해를 사용하는 등의 유해 악용은, 돈을 벌기 위해 대중적 신심을 악용하는 것처럼 성당과 수도원 건축비를 충당하려는 목적에 자주 남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해 절도도 비일비재하였지만 아무도 이것을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운 좋게 영광을 얻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1098년에 제노바의 십자군 기사들이 미라(Mira)에 있는 성 시몬 수도원에서 세례자 성 요한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해를 약탈한 다음 자기 나라로 가져 가자, 교회는 여러 지역의 교회 회의를 통하여, 특히 1282년의 밀라노 교회 회의를 통하여 유해 절도에 대해 엄격히 단죄하였으며 엄격한 교회법적 규정을 덧붙였다. 그리고 교회와 주교들은 한편으로는 성인 유해에 대해 의식이 없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광신적인 사람들 때문에 참된 유해가 아니거나 혹 권위적이 아닌 유해들이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이려고 애썼다. 성 바실리오는 성 디오니시오의 유해들을 밀라노에 있는 성 암브로시오에게 보내면서 그 유해의 실체를 보증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라고 강조하였다. 또 401년에 열린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교부들은 "순교자들 유물은 만일 확실한 유해나 시신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자가 거주했고, 혹 그 장소가 순교자에게 속해 있었거나 혹 그곳에서 순교자가 고통당했는지 신중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인정하지 않는다"고 엄격히 규정하였다. 그 이후에도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와 트리엔트 공의회, 그리고 예부성성(현 전례 성사성)에서도 거짓 유해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였다.
〔성인전 문학과 전례력〕 성인 자신이 쓴 글 이외의 성인전 또한 성인 공경의 확산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순교전기(acta martyrum) · 수난기 · 순교자에 관한 전설과 생애는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성인에 대한 공경을 대중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현재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더 간결한 문헌들인 전례력과 순교록이다.
전례력은 본래 1년 동안 축일들을 거행하기 위한 하나의 지역 교회의 안내서였다. 성인 공경을 위한 미사의 거행과 관련이 깊은 날짜와 장소 및 성인들의 이름이 수록된 이러한 전례력들은 초기부터 있었는데, 이 가운데 4세기 때의 전례력 두 개는 훗날 로마 교회의 성인록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되었다. 즉 354년의 전례력에는 주교들과 순교자들의 기념일 목록이 수록되어 있고, 360년경의 니코메디아(Nicometia) 전례력은 411년의 시리아 순교록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전례력에는 순교자들의 이름만 수록되어 있다.
전례력들과는 달리 순교록들은 같은 날 기념하는 성인들의 이름을, 그 축일을 어디서 지내는지에 상관없이 적고 있다. 따라서 순교록 그 자체만으로는 어느 특정 교회에서 어떤 성인의 공경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알기 어렵다. 순교 전기는 성인전 문학에서 가장 정확한 자료이지만, 가필 없이 전달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또 수난기는 이보다 후대에 나온 기록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기가 어렵지만, 간혹 성인 공경의 장소가 어디인지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어 성인들의 생애를 다룬 성인전들이 등장하였는데, 가장 오래된 성인전은 그의 부제였던 피오니오(Pionius)가 저술한 《성 치프리아노의 전기》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 성인 공경은 대중적인 신심에서 생겨났지만, 교회 예식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교황의 견해를 따르며 주교들의 통제하에 있어야 하였다.
최초 1,000년 간의 성인 공경 인정 : 순교자 공경은 그 공적인 특성 때문에 처음부터 죽은 이에 대한 예배와 구별이 되어 왔다.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은 "로마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순교자들의 이름, 장소, 날짜를 알고자 고심한다" 고 하였는데, 이 말을 통하여 전례에서 참된 성인 공경을 위해 갖추어야 할 법적 필요 요소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즉 가톨릭 교회의 신앙의 증인으로서 참된 순교자의 이름과 모임을 가져야 할 장소와 날짜를 아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의 신앙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신자들과 주교들이 세심한 관찰을 하게 되는데 성 아우구스티노의 유명한 말처럼, 벌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신앙이 원인이 되어 순교를 당한 것(non poena fit martyrium, sed causa)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0년까지는 한 성인의 공경을 인정하는 것이 어떤 명백한 절차를 걸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신학적인 발전 : 순교자 공경의 의의를 최초로 신학적으로 규정한 교부는 오리제네스(?~254)였다. 그는 '모든 성인의 통공 이라는 교리 안에서 그 정당성을 설명하였고, 신자들이 성인들의 삶을 모범으로 따르는 정도에 따라 성인들의 중재 기도가 더 효력을 발휘한다고 하였다. 성인 공경 신학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중세 교부들로는 교황 레오 1세(440~461)와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요한 다마세노(Joannes Damascenus, 675?~749) 등을 들 수 있 다. 교황 레오 1세는 성인들이 자신들의 기도로써 지상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주는 특별한 중재자들이라고 주장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대화집》(Dialogues)에서 신자들에게 성인들의 보호하에 자신들을 맡기도록 권하면서 성인 공경 예절을 장려하였으며, 요한 다마세노는 성인 공경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로 나아감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한편 초기 신학자들은 비록 성인 공경과 하느님께 대한 흠숭을 구분하였으나, 그에 해당하는 알맞은 용어를 찾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께 대한 흠승을 '라트레이아' (λατρεία, adoratio) 즉 흠승지례(欽崇之禮)라고 표현하였다 그 후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에서는 아우구스티노가 사용한 용어와 더불어 성인 공경에 해당하는 용어를 '둘레이아' (δουλεία, veneratio)즉 공경지례(恭敬之禮)로 결정함으로써 신자들의 혼란을 피하게 하였다(DS 601).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성인 공경이나 성인의 유해를 공경하는 것은 성인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공경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교도들이 죽은 이에게 신적인 제사를 바치는 것 같은 오류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였다(《신학 대전》, 3a 25, 6). 다시 말해 성인들의 중재는 그리스도가 못다 한 구원 중재를 본질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구원이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교회 구성원 전체에게 협력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인들은 그들의 지상 업적과 천상에서의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가 더욱 큰 열매를 맺도록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신학 대전》, 3a 26, 1).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행위와 성인들을 공경하는 행위를 구분하면서, 성인 공경은 특별히 성인들의 탁월한 덕행과 그들에게 은총으로 주어진 중재를 향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신학 대전》, 2a2ae 103).
시성 전례 : 10세기 말까지만 해도 성인 공경의 규제 안에는 교황의 어떤 개입도 없었다. 그러다가 11세기 이후 주교들은 어떤 이를 성인 반열에 올리는 자신의 권한을 계속 수행하는 가운데 이 일을 교황의 권위에 의거하고자 하였고, 특히 죽은 지 몇 년 안되는 사람을 제대에 안치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교황에게 요청하여한 성인에 대한 공경을 인정받은 최초의 경우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였던 성 울리코(+973)였는데, 교황 요한 15세 (985~996)는 993년 라테란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 도중 이에 대한 승인을 하였다. 1175년경에 교황 알렉산델 3세(1159~1181)는 "교황의 승인 없이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공적으로 공경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으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는 예부성성을 설립하고 시성 준비를 이 부서의 소관으로 맡겼다. 1634년에는 시성을 위한 첫 단계가 제도화되었는데, 이는 일정한 지역이나 수도회에서 어떤 이를 하느님의 종으로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끔 허락하는 시복이었다. 최초의 시복은 1665년에 시복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였다.
시성을 위한 조사는 본질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대상자 신앙의 정통성으로서 만일 그가 글을 남겼다면 그의 글이 정통적인 것인지의 여부, 복음적 덕행들을 영웅적으로 수행하였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의 전구로 얻어진 기적들이 있는지의 여부 등이다. 그러나 순교자의 경우에는 기적 심사가 면제되었다. 서방교회에 비해 동방 교회에서는 시성이 드물게 이루어졌다. 1972년 시노드에서 결정되고 총대주교가 선포한 시성의 경우는 사도 바오로가 세례를 준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사도 16, 11-16)였고, 이보다 앞서 러시아 정교회가 행한 최근의 시성은 1907년에 거행된 사로프의 세라펌 (1759~1833)이었다.
쟁점과 교회의 조정 : 중세 시기에 성인 공경이 두드러지게 확산되고 발전하자 성인 공경에 대한 지나친 광신이나 미신적인 열성에 대해 교회는 이를 우려하게 되었다. 이에 1209년의 아비농 교회 회의와 제4차 라테란 공의회 등 여러 차례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광신적인 성인 공경은 가타리파(Cathari) · 발도파(Valdesii) · 보고밀파(Bogomili) 등 13세기 이교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 이교들은 성인들의 중재와 신자들의 기도를 전구한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견해에 맞서 천상 영광중에 있는 성인들과 신자들 사이의 생명적인 교류를 교회의 전통 신앙으로 수용하였다.
특히 종교 개혁 시대에는 개혁가들에 의해 성인 공경이 부정되었다. 그들은 성인들의 존재나 모범적인 삶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즉 그들은 성인들을 하느님의 은총과 승리의 표징으로, 또 신자들의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의 모범으로는 간주하였으나 성인들의 특별한 전구나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부정하였다. 멜란히톤(P.Melanchthon, 1497~1560)은 루터(M.Luther, 1483~1546)로부터 지지를 받아 1530년에 발표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fesio Augustana) 21항에서, 성인들의 모범을 수용하면서도 중재자로서 신자들의 기도를 전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라는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1531년에 개작하여 출판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응호문》(Defensio Confessionis Augustane)에서는 성인들이 신자들의 기도를 듣고 전구한다는 것을 여전히 부정하면서도 그들이 전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였다. 그렇지만 이 견해는 성인 공경이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칼뱅파와 츠빙글리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오늘날까지도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성인들의 전구를 부정하고 있으나,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는 성인의 고유한 역할에 대한 자각은 커지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룬 1563년의 트리엔트 공의회 제25 회기에서는 <성인의 전구, 성인 공경 및 유해 공경, 성화상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nvocatione, veneratione et reliquiis Sanctorum, et sacris imaginibus)을 가결하였다(DS 984~988). 그리고 공의회의 주교들은 사도 전승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호소하면서, 성인들이 인간을 위해 전구함과 성인에게 간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얻을 수 있음을 신자들에게 믿을 교리로 가르치도록 제시하였다. 그 후 성인 공경은 보다 학술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벨라르미노(R.F.R. Bellar-minus, 1542~1621) 추기경은 가톨릭의 입장을 종합하여 성인 공경에 대한 가르침의 주요한 원칙을 정립하였고,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신부 볼랑(J. Bolland, 1596~1665)에 의해 시작된 예수회의 볼랑디스트들(Bollandistae)은 그리스도교 성인들의 일대기를 수록 · 편집하였다.
전례에서의 성인 공경 : 처음부터 순교자 공경은 순교자의 무덤 주위에서 그의 기념일에 철야 기도를 지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박해 시대에는 성 폴리카르포의 축일에 사제 피오니오(Pionio)가 두 여인과 함께 지냈던 것처럼 간소하게 밤 기도를 하며 보냈으나,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에는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사는 보통 두 번 봉헌되었는데, 첫째 미사는 밤기도 마지막 무렵 무덤 근처에서, 둘째 미사는 오전에 무덤 근처에서 봉헌되었다.
성인 축일의 독서와 기도 및 노래들은 그리스도교 신비 안에서의 각 성인의 위치를 드러내 주고 있다. 시성될 때부터 각 성인에게는 기도문이 부여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성인을 존경하여 미사와 시간 전례를 구성하였다. 미사에 있어서는 적어도 본기도와 독서를 마련하였고, 시간 전례에서는 성인의 축일 부분 첫머리에 성인에 관한 전기를 짧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례문들을 통해서 성인의 영성적 특성이 축일을 기념하는 공동체에 소개되었으며, 성서 독서의 선택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범의 시각에서 하느님 말씀에 대해 묵상하게 하였다.
Ⅲ.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의 성인 공경
〔공의회 문헌에서의 성인 공경〕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력에서 성인들의 축일 기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개정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였다. 이는 전례력의 근원인 파스카 신비와의 관계 안에서 성인들의 예식 거행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특히 <전례 헌장>에서는 전례 거행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드러내야 된다는 의미를 다시 강조하면서 성인들의 축일 거행에 대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 언급하였다.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충실히 살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로부터 공경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범이 되고 하느님 백성의 힘있는 중재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성인들에 대한 기념은 성인들의 축일 부분과 고유 축일 부분 사이에 더 큰 평행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명백히 언급하였다. "신자들의 마음은 일 년을 통하여, 특히 구원의 신비를 거행하는 주의 축일들을 지향하여야 한다. 그와 동시에 시계(시절) 고유 축일들은 성인들의 축제에 앞서 합당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구원 신비의 완전한 주기가 마땅히 경축되도록 해야 한다" (108항).
성인들을 공경하고 축제를 지내는 것은 성인들의 생활 속에 실현된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기 위해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처럼 성인들에 대한 공경과 기념의 근본 의미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의 거행이라는 관점에서 취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성인들의 천상 탄일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양된 성인들 안에 이루어진 파스카 신비를 전하기"(104항) 때문이라고 밝힘으로써 순교자들과 다른 성인들에 대한 축일 거행의 의미와 이유를 분명히 하였다.
<교회 헌장>(Lumen Gentium) : <교회 헌장>은 좀더 특별하게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언급하였다. "지상 여정 교회의 종말적 성격과 천상 교회와의 일치" 라는 제목을 가진 제7장의 49~51항은 순례하는 교회의 구성원들과 영광을 받는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성인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50항은 먼저 성인 공경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짧게 서술한 뒤, 그분들의 표양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언급하면서 마지막에는 전 교회의 일치를 강화시키는 형제적 사랑의 표현 속에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지상 여정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치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인도하는 것과 같이 성인들과의 일치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주는 것이니, 온갖 은총과 하느님 백성의 생명이 그 원천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친구요 공동 상속자들이며, 우리의 형제요 탁월한 은인들인 성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기 위하여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기도와 도움을 바라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또 51항에서는 '우리 선조들을 공경하는 신앙' 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 내용은 제2차 니체아 공의회와 피렌체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와 연관해서 새롭게 제안한 것이다. "진정한 성인들의 공경은 외적 행사의 복잡성에 있다기보다는 모름지기 우리의 행동적 사랑의 깊이에 있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겠다.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성인들의 생활에서 모범을 찾고, 통공에서 일치를 찾으며 전구에서 도움을 찾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와 천상 형제들과의 교류는 신앙의 충분한 빛을 받아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절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흠숭을 약화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욱 완전하게 한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유해 공경과 성상 공경〕 성인 유해와 성상(聖像) 공경은 <전례 헌장>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전례와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통에 따라, 성교회는 성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확실한 유해와 성상도 존중한다"(111항).
초기 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유해와 미사의 관계를 인지하였으며,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더욱 가까이에서 통교하였던 이들의 유해를 제대 밑에 안치할 수 있음을 기뻐하였다. 중세에는 이러한 신심이 더욱 발달하여 제대 위에 칠보와 보석들로 장식된 성해함(聖骸函)을 설치하였고, 미사 중에 여기에 분향하였다. 동방 교회에서 성인의 그림이나 조각들은 단순히 장식으로서의 역할에 그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면서 특별한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전례 헌장>은 "신자들이 공경하기 위해 성당에 성상을 모시는 관습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이상한 감을 주거나, 혹은 덜 건전한 신심을 조장하지 않도록 수효는 조정되어야 하고, 모셔 두는 위치도 올바른 순서를 지켜야한다"(125항)고 규정하였다.
성인의 유해와 성상에 관한 공경은 그 성인의 이름을 따서 성당이나 제대를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성당봉헌 예식서》 제4장 10항에서는 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언하고 있다. "제대는 본질적으로 하느님 한 분께 봉헌된다. 미사 성제가 하느님 한 분께 봉헌되기 때문이다. 성인들의 이름을 붙여 성인들을 공경하기 위하여 제대를 축성하는 교회의 관습을 이런 뜻으로 알아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이것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대를 설치할 때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치하지만 절대로 그 어느 순교자를 위하여 설치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순교자들의 하느님을 위하여 설치하는 것이다' (Contra Faustum XX, 21)."
〔교회법에서의 성인 공경〕 1917년 교회법전에는 "교회법적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려진 분들에 대해서 공경(cultus duliae)을 드려야 한다. 성인들은 세계 어디서나 모든 종류의 공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복자들은 교황이 윤허한 장소와 방법에 따라서만 공경을 받을 수 있다" (1277조 2항)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현 교회법은 성인 공경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가 성인들이나 복자들의 명부에 올린 하느님의 종들만을 공적 경배로 공경하도록" 규정하였다(1187조), 그래서 복자에 대한 공경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시성한 성인은 다음과 같은 공적 경배를 받을 수 있다. 첫째, 성인으로 호칭되고 성인으로서 세계 어디서나 공경을 받는다. 둘째, 신자들의 기도의 중개자로서 교회의 공식 기도문 안에 포함된다. 셋째, 미사와 시간 전례에 포함된다. 넷째, 축일이 정해지고 교회 축일표에 등록되어 경축된다. 다섯째, 신자들이 유해를 공적으로 경배하도록 전시된다. 여섯째, 성당과 제대가 그 성인에게 봉헌된다. 일곱째, 성당이나 경당 또는 교구, 관구, 국가의 주보 성인으로 선정된다.
〔신학적인 의미〕 조직 신학에서 성인 공경이 차지하는 위치는 교회론에 속하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 주제를 <교회 헌장> 제7장에서 다루었다. 즉 세상 여정에 남아 있거나 죽어 단련을 받고 있거나, 하느님의 모습을 실제로 보며 영광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한 교회를 이루며, 이러한 일치 속에서 지상 여정 중에 있는 교회는 종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처럼 지상 여정의 형제들과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잠든 천상 교회의 형제들인 성인은 교회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서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고 영신적인 보화의 교류로 말미암아 더욱 강해지므로, 양자 모두가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이다. 성인들은 이 종말론적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일부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성부께 전구하며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서 쌓은 공로를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지상 여정의 신자들은 성인들의 형제적인 배려로 많은 도움을 받는다(49항).
따라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성인 공경의 의의를 수용하면서, 외적인 공경 행사보다는 신자들이 보이는 행동적인 사랑의 깊이에 따라 참다운 성인 공경의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사랑으로써 신자들은 성인들의 생활에서 그 모범을 찾고 통공에서 일치를 찾으며 전구에서 도움을 찾는다(《가톨릭 교회 교리서》,946~948항). 성인들과의 참다운 교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 바쳐지는 흠숭을 약화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완전하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정을 형성한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지극히 거룩한 성삼을 함께 찬미함으로써 서로 교류할 때, 교회의 깊은 내적인 사명을 다하는 것이며 완성된 영광의 전례를 미리 맛보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경지례 ; 유해 ; 유해 공경 ; → 모든 성인의 통공 ; 볼랑디스트 ; 성인 ; 성인전 ; 성인 전기학 ; 성지 순례 ; 순교록 ; 순교 전기 ; 시복 시성)
※ 참고문헌  AA.VV, Nuovo dizionario di liturgia, Roma, 1984/ A.G.Martimort, L'église en priere, vol. 4(ls liturgie et le temps), Paris, 1983/ M.Righetti, Manuale di storia liturgica, vol. 2(l' anno liturgico il breviario),Milano, 1956/ Karl Hausberger, 《TRE》 14, pp.646~660/ 《ODCC》, 1444~1445/ P. Séjourné, 《DTC》 27, pp. 870~871, 962~966/ C. O'Neill, 《NCE》12, pp. 962~963/ H. Schauerte, 《LThK》 5, pp. 104~108/ Ernst Niermann,《SM》 5, pp. 398~400/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41, 50, New York, McGraw Hill Book Co., 1972, pp. 33~45, 185~188, 207~210/ K.Bihlmeyer · H. Tüchle, 대건신학대학 교회사연구회 편역, 《교회의 역사》, 대건신학대학 교회사연구회, 1984, pp. 250~253, 560~563/ 김성태, 《세계 교회사》 I, 바오로출판사, 1986, pp. 252~2551 아우구스트 프란츤, 최석우 역, 《敎會史》 , 신학 총서 22, 분도출판사, 1982, pp.311~314/I.H. Dalmais · P. Jounel, 김인영 역,《전례 주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6, pp. 130~156/ 김희중, <16세기 '가톨릭 革命' 과 '反宗教改革 에 對한 教會史的 考察〉, 《神學展望》 124호(1999. 봄), pp.107~108/ 정진석, 《교회법 해설 - 교회의 경배법》 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pp. 83~95/ 《가톨릭 교회 교리서》 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p. 360. 〔鄭義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