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기사 수도회 聖殿騎士修道會 〔라〕Ordo Templariorum, Templarii 〔영〕Knights of Templars, Temp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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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년 9월 7일 아냐니에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체포하는 기사 수도회의 배신자 기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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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년 9월 7일 아냐니에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체포하는 기사 수도회의 배신자 기욤.

위고 데 페이앙(Hugh des Payens, +1136)이 1119년에 7명의 프랑스 기사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현재의 El Aqsa Mosque)에서 예루살렘의 총 대주교 바르문드(Warmund)에게 청빈 · 정결 · 순명 등의 서원 외에 무기를 휴대하여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순례에 동행할 것을 서원한 기사 수도회. 특히 성지에서 무슬림과 노상 강도들로부터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하였다. 예루살렘의 왕 발두인 2세(Baldwin Ⅱ , +1131)가 그들을 자신의 궁전 일부 지역인 솔로몬 성전에 묵게 함으로써 '성전 기사 수도회' 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수도회 회칙에 따라 생활하고 매우 청빈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솔로몬 성전의 그리스도의 가난한 형제들' (Pauperes commilitoress Christi templi Salomonici)이라고도 불렸다.
〔형성과 발전〕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에 의해 작성된 이 수도회의 규칙서가 교황 특사인 알바노의 마태오 추기경이 의장을 맡은 트루아(Troyes) 교회 회의에서 1128년 1월 13일에 승인되었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스테파노가 1130년에 이를 보완하였다. 베르나르도의 저서 《새 군사들의 찬미》De laude novae militiae, 1128)로 급속히 성장한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은 수도회 복장에 시토 수도회의 백색 망토를 착용하였었다. 1139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2세(1130~1143)는 이 수도회를 면속 수도회로 선언하였고,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 때에 수도회 회원들은 망토에 붉은 색 십자가를 그들의 고유 표시로 하고 다녔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1100~1300년 사이에 설립된 12개의 기사 수도회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본래적인 의미의 기사 수도회로서 다른 기사 수도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성전 기사 수도회의 조직이 완성된 것은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1139년 3월 29일에 공포한 교서 〈옴네 다툼 옵티뭄>(Omne datum optimum)을 통해서였다. 이로써 성전 기사 수도회는 생활 규범을 교황으로부터 승인받았으며, 성지의 방어자 또는 교회의 수호자로 간주되어 면세와 그 밖의 상당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인노첸시오 2세 교황에 의해 수도 사제회로 규정되면서부터는 귀족 출신인 기사 · 종교적 기능만 맡은 수도회 사제 · 갈색 또는 검정색 옷을 입으며 무기를 만들거나 수공업을 담당하는 수도자 등 세 등급으로 나누어졌으며, 기사 수도회의 최고 지도자는 기사들에 의해 선출된 기사단장이 맡았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특별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 총회의 자문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153년 이전까지 성전 기사 수도회의 많은 수도원들이 여러 그리스도교 국가에 설립되어 왕과 귀족들은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한 재정적인 후원을 하는 재속 형제 · 자매 수도회도 설립이 되었다. 이러한 재속 형제 · 자매 수도회는 교황으로부터 많은 특권을 받았다. 특히 성전 기사 수도회는 성지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협하는 비그리스도교인들과 전투를 벌여 정예 부대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8세기에 스페인을 침략한 무어인들을 무찌름으로써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많은 전투에서 입증된 성전 기사 수도회의 용맹성은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 사이의 시(詩)에 많이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명성으로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많은 경제적인 후원과 증여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 수도회는 설립된 후 100년 이상 강력하고 영향력 있으며 부유한 국제적인 수도 단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수도회들과 마찬가지로 성전 기사 수도회도 약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각 지역에 설립된 수도원들은 재산과 회원수로 서로 경쟁하였고 때로는 수도원들 상호간에 소규모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보다 성전 기사 수도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1187년 10월에 있은 무슬림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이었다. 이후 기사 수도회들은 새로운 목표를 세워 변화를 모색하였는데, '자선 기사 수도회' 는 지중해에서 아랍인 해적들과 싸우는 해상 경찰이 되었고, '독일 기사 수도회' 는 발틱 지역에서 이교도였던 슬라브인들을 상대로 선교에 전념하였다.
〔수도회의 박해와 투쟁〕 프랑스 왕의 박해 : 1291년 성지에 있던 수도회의 마지막 거점을 잃은 후에도, 십자군 운동은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십일조 부과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그 이념은 계속 이어졌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은 프랑스 파리를 자신들의 중심지로 삼았는데, 프랑스 왕실과 평민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이 수도회에 맡겨 둘 정도로 이 수도회는 부(富)의 보고였다. 한편 이 시기에 성전 기사 수도회의 문제에 전념하였던 프랑스 왕은 모든 기사 수도회를 합병하여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획책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의 박해· 와해 · 폐지를 위한 실질적인 동기는
폭 넓게 알 수는 없으나, 기사 수도회의 자주성과 토지를 비롯한 막대한 경제적 부는 소위 민족 국가의 절대적인 권력에 방해가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 다. 따라서 틀림없이 중상 모략도 많았을 것이다. 즉 수도회가 모든 예식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이단적인 요소가 행해지고 있다는 나쁜 소 문들이 40년 간 어떠한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퍼져 나갔던 것이다. 이 소문들은 맨 먼저 아라곤의 왕에게서, 그 후에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 1285~1314)가 왕좌에 오른뒤 이 기사 수도회의 배신자로 유명한 에스키우(Esquiu de Floyran)와 기욤(Guillaume de Nogaret)에 의해 유포되 었다.
1307년에 필리프 4세는 수도회에 대한 비난문을 작성하여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에게 보내면서 이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프랑스에 있는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을 모두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으로 그들을 심문하였다. 이를 통해 그들을 화형에 처하기 위한 자백이 강요되었는데, 고문받은 회원들이 자백한 내용은 십자가 모독, 십자가에 침 뱉기, 비도덕적인 입맞춤, 짐승과의 성교 요구, 수도회 입회 예식 때의 우상 숭배 등이었다. 하지만 수도회에 대한 이러한 비난에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자백들은 고문과 이에 대한 두려움에서 강요되었기 때문에 가치도 없었다. 더욱이 스페인에서의 성전 기사 수도회는 당시에도 평판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자백들은 교황에게 전해졌고, 교황은 이들의 자백에 근거하여 모든 국가의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서만 이 수도회를 와해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전세계에 널리 퍼진 성전 기사 수도회를 폐지하려고 하였으므로 이를 위한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였다. 1308년 여름 푸아티에(Poitiers)에서 개최된 모임에서 필리프 4세는 교황을 이단의 비호자로 규정하면서 그 책임을 전가하였고, 추기경 회의에서도 교황은 빌헬름에 의해 작성된 연설을 통하여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한편 일부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은 교황앞에서 이전에 자신들이 허위로 자백한 내용들을 되풀이하도록 강요받기도 하였다. 또 국왕은 지역 기사 수도회의 수도원장과 기사단장을 푸아티에에 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신에게 아부하는 추기경들에게만 회원들을 심문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교황의 철저한 저항에 부딪히자 국왕은 프랑스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에 대한 소송을 개시하였으며,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에 대한 주교들과 심문자들의 권한 행사도 중지시켰다.
얼마 후 필리프 4세는 두 종류의 심문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이 위원회에서는 수도회 전체뿐만 아니라 회원 개개인들을 조사하였다. 각 교구에 있던 성전 기사단원들은 주교위원회의 위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100개가 넘은 질문으로 심문을 받았으며, 수집된 자료는 지방 교회 회의에 제출되었다. 교황은 프랑스 지역 이외의 회원들에게서도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고문을 사용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포된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무죄와 수도회의 무죄를 선언함으로써 많은 지역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당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던 생(Sens)의 대주교 는 1310년에는 하루에만 54명을, 그리고 이후에 이보다 적은 숫자의 회원들을 화형에 처하였는데, 회원들은 불길 속에서도 이전의 강요된 자백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아라곤 왕의 박해 : 아라곤의 왕 하이메 2세(Jaime Ⅱ, 1295~1327)는 성전 기사 수도회의 수많은 성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이 기회를 이용하였는데,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라곤의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은 그들의 성채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하였다. 여기서도 때때로 고문이 자행되었지만,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은 자백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 독일 · 스코틀랜드 · 아일랜드와 같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특히 수도회의 본거지인 키프로스에서 행해진 심문에서도 성전 기사 수도회의 유죄가 입증되지 않았다.
교회의 해결 시도와 결정 : 공의회에서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는 마침내 1311년 10월 1일 비엔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의 공의회 개회식에서 교황은 성전 기사 수도회 문제의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언급하였으며, 소집 교서에 열거된 십자군 · 교회의 개혁에 관한 다른 과제들은 부수적으로 다루고자 하였다. 교황의 제안에 따라 여러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많은 성전 기사 수도회 회원들이 대위원회에 소환되었다. 위원들 대다수가 수도회에 변론을 보장해야 한다는 데 찬성하자 회원들은 수도회를 변론하였는데, 이는 결국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
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위원들은 교황의 분노와 국왕의 통분에 몹시 불안해 하였다. 왜냐하면 교황은 프랑스 왕의 뜻을 고려하여 수도회를 폐지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311년 12월에 공의회는 성전 기사 수도회에 대한 비난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도회의 폐지를 압도적으로 반대했다. 그 후 교황청과 프랑스 정부 사이에 비밀 협상이 이루어졌고, 마리니(Enguer-rand de Marigny, 1260~1315)가 주도적 역할을 한 프랑스 대표단은 이 협상에서 교황으로부터 수도회를 폐지하도록 한다는 행정 처분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 3월 20일 필리프 4세가 수많은 수행들과 함께 비엔으로 오자 이틀 후 대규모의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때 위원 대다수가 수도회를 폐지시키는 교황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공의회의 두 번째 공개 회의인 4월 3일에 교황은 수도회의 폐지를 선포하였다.
수도회 재산 소유 투쟁 : 이후 성전 기사 수도회의 재산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의 재산을 새로 설립되는 기사 수도회에 넘겨주기를 원하였으나, 교황과 마리니가 주도하는 프랑스 정부는 요한 기사 수도회에 넘겨주기로 합의하였다. 성전 기사 수도회의 재산 협상에 관한 아라곤 지역 대표단의 보고에 의하면, 공의회가 폐회되기 바로 직전인 5월 2일에 성전 기사단의 재산은 이베리아 반도(카스틸리아 · 아라곤 · 포르투갈 · 말로카)를 제외한 지역의 요한 기사 수도회에 넘겨졌다. 그런데 수도회의 재산이 요한 기사 수도회의 소유가 되도록 한 결정은 부분적으로만
실행되었으며, 영주들은 당연한 권리처럼 성전 기사 수도회의 재산을 요구하였다. 더욱이 요한 기사 수도회에 넘겨주기로 한 결정의 실행은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수십 년 동안 지연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 성전 기사단 재산의 대부분은 필리프 4세가 차지하였고, 회원들은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다시 자백하도록 강요당하였다. 마지막 기사단장인 몰레(Jacques de Molay)는 수도회의 무죄 를 확언하였기 때문에 1314년 3월 19일 파리에서 화형당하였다.
〔평 가〕 지금에 와서는 성전 기사 수도회 전체에 가해진 비난들이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도회 잘못도 없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 다. 몰라(G. Mollat)를 비롯한 학자들은 수도회가 무죄임을 표명하면서 필리프 4세의 조처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왕의 개인적인
책임이 어느 정도이며, 그의 행위에 종교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왕국의 절대적인 권력 소유와 자신이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위협하는 성전 기사 수도회의 와해와 폐지에 필사적이었으며, 수도회의 재산을 자신의 수중에 넣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인 책임 또한 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헬름의 책임이 더 크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회원들에 대한 조치가 거의 모두 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기사단장 몰레에 대한 평가가 서로 상반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가 처음 자백한 후에 이를 철회하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수많은 압력이 가해졌음을 암시한다. 또 그가 고문을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는 교회 법원에 출두하여 수도회 입회 때 십자가를 모독하였다는 자백에 대하여 교황과 추기경들 앞에서 진실을 밝히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에게 큰 비극이었고, 또 수도회에 변론의 기회를 주지 않은 교황에게도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기사 수도회 ; 비엔 공의회 ; 십자군 ; 요한 기사 수도회 ; 이단 심문)
※ 참고문헌  M. Barber, The New Knighthood. A History ofthe Order of the Temple, Cambridge, 1994/ H. Finke, Papstum und Untergang des Templerordens, Bde. 2, Minster, 1907/ H. Jedin Hg.,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Freiburg, Bd. 3-1, 1966 ; Bd. 3-2, 1968/ K. Hofmann, templer, 《LThK》 9, pp. 1361~1363/ G. Grosschmid, templars, 《NCE》 13, pp. 992~994.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