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

聖地巡禮

〔라〕peregrinatio · 〔영〕pilgr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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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란 성지나 성역을 방문하여 경배를 드리는 신심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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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란 성지나 성역을 방문하여 경배를 드리는 신심 행위이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스러운 땅 즉 성지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거나 성인들의 유적지인 성역(聖域)을 방문하여 경배를 드리는 신심 행위.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성지인 팔레스티나에서 유명한 성역들로는 나자렛 · 베들레헴 · 요르단 강 · 가나 · 타브가 · 가파르나움 · 코라진 · 베싸이다 ·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 갈릴래아 호수 · 타볼 산 · 예리고 · 베다니아 · 예루살렘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세계 도처에 있는 성인 유적지나 순교 사적지 등 성역도 넓은 의미의 성역에 해당된다. 종교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지나 성역의 순례란 신(神)의 발현이나 위대한 종교적인 인물 때문에 신성시되는 장소를 참배하러 가는 여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들 성지를 찾아가 축제와 예배에 참석하며, 그 장소에 얽힌 종교적인 전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일체감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의미의 순례는 물론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전통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이슬람교나 불교 등 다른 종교들에서도 행해지는 보편적인 관습이다. 따라서 이러한 순례 행위는 사회적 · 역사적 · 문화적 · 경제적 등 여러 측면을 부수적으로 동반하므로, 순례는 한 신앙인이 자신의 종교적 삶을 이루어 나가는 문화적 · 역사적 · 사회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에서의 순례〕 성지 순례는 고대 근동 지방의 셈족 사이에서 행해지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관행이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이 성조들에게 발현하여 계시를 한 거룩한 성소들이 여러 곳 있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땅과 후손을 약속한 세겜(12, 6-7), 베델과 아이가 보이는 곳(12, 8), 헤브론의 마므레(13, 18) 등이 있고, 이사악에게 나타났던 브엘세바(26, 23-25)나 야곱에게 나타났던 베델(28, 16-19) 등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지방 성소들에는 보통 제단 · 석비(石碑) · 거룩한 나무들이 있었는데,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성소들을 찾아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12, 8 ; 13, 4 ; 21, 33 ; 33, 20), 기름을 붓고(28, 18 ; 35, 14), 정화 예식을 거행하고(35, 2-4) 축제와 제사를 지냈다. 이런 곳들은 본래 가나안 사람들의 성소였는데 훗날 이스라엘 역사와 결부되면서 이스라엘의 성소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런 지방 성소들이 점차 종교 혼합주의의 온상이 되어 야훼 신앙을 오염시키자, 요시야 왕(기원전 640~609)은 지방 성소들을 폐쇄시키고 모든 전례를 예루살렘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시나이 산도 야훼의 계시가 이루어진 거룩한 장소로 이스라엘의 전승 안에 나온다. 지리적인 위치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계시되고 하느님과 백성 간에 계약이 체결되었으며 율법이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약 200년 동안 부족 동맹 체제를 유지하였는데, 부족 동맹 체제는 일종의 제의 공동체로서 계약의 궤가 안치된 중앙 성소에서 거행되는 계약 갱신 축제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신원을 확인하고 지파들간의 결속을 다졌다. 노트(Martin Noth, 1902~1968)에 의하면, 맨 처음 계약 갱신식을 가진 세겜(여호 24장)이 중앙 성소였으나, 후에 계약의 궤는 베델로 옮겨졌고 그 다음에는 길갈, 그리고 판관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실로에 안치되었다고 한다(1 사무 3, 3). 그러나 올브라이트(WF. Albright, 1891~1971)와 같은 학자는 부족들의 중심지가 몇 차례 바뀌기는 하였으나 중앙 성소는 실로 한 곳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왕정이 시작되자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은 키럇여아림에 오랫동안 방치된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왔고, 그 후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궤를 안치함으로써 예루살렘은 정치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거소(居所)' 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축제들과 제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왕국이 분열된 후에도 계약의 궤가 안치된 예루살렘은 계속 순례의 중심지였다(1열왕 8, 2-6 ; 2역대 11, 13-16).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는 단과 베델에 신전을 지은뒤 계약의 궤 대신 금송아지상을 세워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객들을 막아 보려고 하였으나, 순례 중심지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기원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이 패망한 후 히즈키야 시대에 북부 지파 일부와 남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교절 축제를 지냈으며(2역대 30, 11 이하), 히즈키야의 손자인 요시야 왕은 지방 성소들을 폐지하고 모든 제의를 예루살렘에 집중시킨 후 과월절 축제를 지냈는데, 일찍이 어느 왕도 지킨 일이 없을 만큼 성대했다고 기뻐하였다(2역대 35, 17-18). 기원전 587년의 예루살렘 패망과 더불어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는데 유배지에서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조속한 귀환을 기다렸다(시편 137편).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귀환한 이들은 즉시 성전을 재건하고 성서에서 명한 3대 순례 축제에 관한 규정을 충실히 지키며 성전을 돌보았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1년에 세 번 축제에 참석할 수 없으면 한 번이라도, 일 년에 한 번도 올 수 없는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이라도,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죽어서 뼈라도 예루살렘에 묻히기를 바랐다.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델 대왕(기원전 356~323)에게 점령당한 이스라엘은 기원전 198년부터 시리아 셀레우쿠스 왕조의 통치를 받다가 기원전 63년에는 로마 제국에 정복되었는데, 이때 로마의 후원으로 왕이 된 이두메아 출신의 헤로데 대왕(기원전40~4)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 마당을 확장하고 그 위에 웅장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매년 축제를 지내러 성전에 오는 순례객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성전 언덕의 북쪽 모서리에 '안토니아 요새' 를 짓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때 이 순례객 가운데에는 12세의 예수와 그의 부모도 끼어 있었으며(루가 2, 4), 예수는 공생활 중에도 여러 차례 축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다(요한 2, 13 ; 5, 1 ; 7, 14 ; 10, 23 이하 ; 12, 12). 이 성전은 서기 70년 에티투스(Titus Flavius Sabinus Vespasianus, 39~81)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지만, 유대인들의 순례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순례자들은 폐허 속에서도 '구원의 날' 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교 백성들이 함께 모이게 되리라는 예언자들의 말에 종말론적인 희망을 갖고 지금도 성전 마당의 서쪽 벽이었던 '통곡의 벽' 앞에 모여 축제와 기도를 드 린다.
〔역사적 변천〕 초기의 그리스도교 : ① 팔레스티나 성지 :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를 순례하게 된 것은 2세기경부터였다. 이때의 성지 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밀접하게 관련된 팔레스티나의 장소들이나 성인들 특히 순교자들이나 기적과 관련된 지역의 참배로 이루어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을 간청하기 위해서 참회나 감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가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eae, 260~340)는 2~3세기의 성지 순례 사례를 전하고 있으며(《교회사》 4, 26, 14 ; 6, 11, 2), 콘스탄틴 대제(306~337)와 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250~330)는 325~330년에 팔레스티나에서 예수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곳에 주의 무덤 성당 즉 '성묘 성당 (聖墓聖堂)을 건축함으로써 성지 순례를 활성화시켰다고 기술하였다(Vita Constantini, 3, 25~40). 또 헬레나가 예수가 못박혀 죽었던 십자가를 발견하였다는 전설도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에우세비오가 전한 것이 아니라 4세기 말에 여러 사람들(암브로시오, 요한 그리소스토모, 예로니모, 루피노, 소크라테스, 에테리아 등)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콘스탄틴 대제와 헬레나에 의하여 4세기에 성지 순례 운동이 활성화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후 예로니모(Hieronyus, 347~419/420)에 의해서 이 지역들이 교회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로니모는 가장 유명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지 순례자였을 뿐만 아니라 성지를 순례함으로써 얻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성지 순례를 활성화시켰다. 그의 이러한 영향으로 점차 많은 수도자들과 은수자들이 이 지역에 순례를 와서 수도원을 설립하였으며, 4세기에는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사이 지역에도 여러 개의 수도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순례자 에제리아(Egena)가 이 당시에 예루살렘과 자신이 여행하였던 지역에서 거행된 전례를 기술한 《에제리아의 여행기》(Peregrinatio Egeriae)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도 당시 성지 순례를 한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한 것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처럼 성지 순례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고 행해졌었다. 당시의 성지 순례는 긴 여행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내야만 했으므로 성지 순례에는 그리스도교 신심이라는 의미와 극기와 고행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순교자 공경의 전형적인 신심 행사로서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다른 성역들을 찾아 순례하기도 하였다.
② 이집트와 로마의 성역들 : 아타나시오(Athanasius, 295~373)가 쓴 《성 안토니오의 생애》(Vita Antonii)는 지중해 지역의 수도원을 더욱 활성화시켰으며, 금욕 생활을 하는 사막 교부들의 조언을 들으려고 이 험악한 지역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늘어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6세기 초까지도 로마는 팔레스티나 성지들만큼 중요한 성역으로 꼽히지는 못하였지만, 카타콤바의 벽화들은 이 당시 이곳으로의 순례가 꾸준하였음을 증명하고있다. 교황 다마소 1세(366~384)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카타콤바를 복구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예로니모는 자신이 직접 로마의 카타콤바를 순례한 이야기와 그곳의 순례자들에 대해 언급하였다(Comm. in Ezech., 12, 50 Comm. in Epist. Galat., 2). 그리고 프루덴시오(Prudentius, 348?~395?)는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황제의 박해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서방 세계에 정착된 이후 순교자 공경과 순교 사적지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역들을 순례하는 것이 교회 내에서 중요하게 대두되었음을 증언하였다(Peristephanon, 11). 로마로의 순례 행렬은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6세기에는 교황 심마코(498~514)가 성 베드로와 바오로와 라우렌시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근처에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7세기에는 프랑스에서 로마 순례를 오는 순례자들이 증가하였다.
③ 그 밖의 성역들 : 4세기에는 가시아노(Casianus, +250)와 펠릭스(Felix, 3세기경) 순교자를 공경하기 위해 로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몰라(Imola)와 놀라(Nola)로 모여드는 순례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리고 4세기 중반에는 프랑스도 순례의 장소로 유명해졌는데, 그것은 테베의 성 마우리시오(Mauricius)의 순교지 때문이었다. 5세기경에는 치유의 기적을 받으려고 순례를 오는 많은 순례자들 때문에 큰 여관과 진료소가 설립되었고, 6세기에는 아곤(Agaune)의 성 마우리시오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또 투르의 성 마르티노(Martinus, 316~397)의 유해가 묻힌 곳 역시 프랑스에서 유명한 성역이 되었다.
중세와 현대의 그리스도교 : 그리스도교에서 성지와 성역을 순례하는 신심 행위는 중세에도 전체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확산 · 발전되었다. 팔레스티나 성지를 제외한다면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과 바오로 대성전이 가장 유명한 순례의 장소가 되었으며, , 그 다음으로는 다른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곳들이 순례되었다. 중세에도 널리 확산된 그리스도교의 순례는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 및 건축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가 매우 유명하였다.
① 중세의 순례와 순례식 성당의 건축 :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가 11세기에 터키의 침입으로 위험해지자, 스페인의 나바르(Navare) 왕은 베네딕도회의 클뤼니 연합회에 요청하여 스페인의 수도원들을 재정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클뤼니 연합회의 사제들은 당시까지 스페인 서북부에서 소규모의 지방 성역에 지나지 않았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프랑스 신자들에게 순례 여행지로 소개하였고, 이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중세에 가장 인기 있는 범유럽적인 순례지로 발전하였다. 순례자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시작하여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고 스페인을 횡단하는 고행자의 모습으로 순례를 하였
다. 당시 신자들의 순례 여행은, 엄격한 봉건 사회에서 신분과 빈부의 차별 없이 순례자들의 영혼은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는 교회를 믿고, 오직 평화를 상징하는 조개 껍데기 달린 모자와 희망을 상징하는 순례자의 지팡이와 구원을 상징하는 가죽 물통만을 메고, 고행자로서 하느님 앞에 동등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거룩한 곳을 향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한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중세 초기의 혼란 상태에서 벗어난 서유럽에서는 대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의 성당 건축은 스페인 북부에서부터 프랑스, 라인 강 계곡의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까지 반원 아치 · 종탑 · 장십자가 플랜의 사용이라는 형식상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 여행 길을 따라 세워진 '순례식 성당' 을 건축함으로써 형식상 가장 혁신적이고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11세기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순례 여행 길을 따라 세워진 순례식 성당은 당시 엄청나게 늘어난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건축적 대안으로 세워진 교회로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은 주로 동쪽 끝의 성가대와 성직자의 자리가 있는 부분이었다. 순례식 성당의 첫 번째 특징은 동측단부에 주 앱스(apse) 주위로 회랑(回廊)을 두르고 여기에 경당들을 방사형으로 덧붙인 '방사상 평면' (radiating plan)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성당의 출입문을 서쪽에 이어 북쪽과 남쪽 익랑(翼廊) 부분의 좌우로 두 개를 더 만들어 세 개로 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측단부 지하에 모셔진 성인 유해를 공경하러 모여드는 순례자들이 서쪽 정문으로만 들어오는 혼잡을 피하고, 남쪽과 북쪽 양쪽으로 난 문을 통하여 곧바로 동쪽 제단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와 같은 특징들을 완벽하게 갖춘 순례식 성당으로는 프랑스 남서부 지방의 툴루즈에 위치한 '생세르냉(St. Sernin) 성당' 과 '콩크(Conques) 성당' 을 들 수 있다. 1300년의 성년 선포 이후 성지 순례는 더욱 큰 의
미를 갖고 이루어지게 되었다.
② 종교 개혁 이후의 순례 :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상업적이거나 미신적인 의미로 오용되는 순례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순례를 신자로서의 의무로도, 순례를 통하여 얻어지는 영적인 은총으로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순례는 유럽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되었으며, 17세기에는 미국에서 새롭게 복음화된 지역들도 순례지로 부상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이른바 순례의 르네상스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많은 성인 유해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고 성역들과 묘지들이 불태워지거나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성지나 성역의 순례는 끊이지 않았으며, 그리스와 러시아 동방 교회 신자들의 순례도 확산되었다. 그리고 점차 성모 발현지가 순례의 장소로 늘어났는데, 멕시코의 과달루페 · 프랑스의 루르드 · 포르투갈의 파티마 등이었다. 20세기 초에는 페기(C.P. Pé-guy)의 영향으로 순례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는데, 순례를 보다 학술적인 관심에서 하게 된 것이다. 이후 과학 만능주의와 실증론의 영향으로 더욱더 그러한 관점으 로 순례가 행해지는 경향이 커 갔다.
〔의미와 정신〕 순례란 단순한 관광 여행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지를 순례하는 것은 본래 지존한 하느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여행이다. 성지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묘소나 성당 등 성역들을 순례하는 것 역시 신자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신앙을 길러 주며, 또 사도직 수행에 자극을 주는 일이므로 매우 중요한 신심 행위이다. 그래서 1990년 4월 18일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미셀 사바는 성지 순례에 관하여 각국 주교 회의 의장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는 이 서한에서 순례를 관광으로 혼동하는 나쁜 경향을 경고하면서 성지는 묵상하는 장소이며 바로 이것이 구세주의 성지에 대한 순례의 첫째 목적임을 강 조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3대 순례 축제인 과월절 · 오순절 · 초막절에 참석하는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 축제들은 본래 순수 농경 축제였으나, 후에 야훼가 당신 백성에게 보여 준 놀라운 권능을 경축하는 민족적인 축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이런 축제들은 단순히 과거의 회고나 기념이 아니라 전례를 통한 구원 사건의 재현이었으므로, 그들은 이 전례나 축제에 참례함으로써 하느님을 뵙고 그 사건의 의미를 실존적으로 체득하는 계기로 삼았다. 또 이 축제를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결속을 다졌다. 그래서 순례자들에게는 경건한 마음의 준비가 필수적이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문에 도착하여 "어떤 사람이 이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고 물으면, 성전 사제는 "손과 마음이 깨끗하고,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으며, 거짓 맹세를 않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한다(시편 24, 3-6). 하느님을 만나러 올라온 순례자는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경건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대표적인 순례의 시편인 84편에는 경건한 순례자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는데, 1연에서는 "야훼의 성전 뜰 안을 그리워하여 내 영혼이 애타다가 지치옵니다"라고 함으로써 성전에 찾아와 그 뜰 안을 거니는 순례자의 행복감을 마치 '새끼 칠 새가 보금자리를 찾은' 기쁨에 비유하고있다. 2연에서는 순례의 길이 "메마른 골짜기를 지나갈 적에" 전능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체험하며 마침내 하느님을 뵙게 된 순례의 길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고 노래한다. 3연에서 시인은 "주의 집 뜰 안이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의 편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을 택하리이다" 고 노래하며,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주는 야훼는 성채요 방패라고 신뢰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오늘날 성지를 찾아가면 예전의 화려했던 모습이나 원형은 사라져 버리고, 그 폐허나 흔적 혹은 후에 지은 기념물들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구세사의 현장에 왔다는 감흥과 함께 일종의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한편 순례자는 인간이 손으로 지은 것은 변하고 사라져 결국 보이지 않게 되지만 마음에 지은 것만은 남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격은 새 성전이 되어 제자들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상에는 더 이상 성소로서의 장소가 없어지고 말았고, 따라서 하느님 백성의 진정한 종말론적인 순례는 예수의 인도 아래 이 루어지는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영적 순례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례는 신앙과 기도 안에서 친교의 기회를 제공해 주며, 이 지상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이루어지는 순례의 길임을 깊이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성지나 성역의 순례는 곧 자기 수련이며 성지나 성역의 발전과 활성화라는 종교 활동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순례자들의 축복〕 교회는 순례자들에게 순례의 고유한 영성적 성격을 충분히 설명하여 마땅한 준비를 갖추도록 배려하며, 순례자들이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여행한다는 것을 깨달아 순례의 결실을 풍부히 거둘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 순례의 시작이나 마침 때에 알맞은 예식을 거행하여 순례자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베풀고 있다. 즉 미사나 시간 전례 또는 다른 전례를 통해 순례를 시작하거나 마치는 이들을 축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축복 예식은 《축복 예식서》 409~419항의 떠나는 순례자들의 축복과 420~430항의 돌아오는 순례자들의 축복 예식으로 거 행되는데, 개회식과 말씀 전례에 이어 신자들의 기도와 주례자가 하는 축복의 기도와 폐회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 성년 ; 성인 공경 ; 성지 ; 팔레스티나)
※ 참고문헌  김민수, <고대 이스라엘 전승에 나타난 순례 개념>, <신학 전망》 57호(1982. 여 름), 대건신학대학 전망 편집부, pp. 18~28/정양모 · 이영헌,《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Yohanan Aharoni, The Land of the Bible, 1967/ 《ERE》 10, pp. 10~28/Teddy Kollek · Moshe Peariman, Pilgrims to the Holy Land, 1970/ S.M.Polan · M.C. McCarthy · E.R. Labande, 《NCE》 11, Pp. 362~366/ J.Z.Smith ed., The HarperCollins Dictionary of Religion, San Francisco Harper Co., 1996, p. 8441 X. Leon-Dufour ed., <순례>, 《성서 신학 사전》, 광주 가톨릭대학 전망 편집부, 1984, pp. 323~324/ 박성은, <기 독교 미술의 태동과 전개 Ⅲ>, 기독교 사상》 439호(1995. 7), 대한기독교서회, pp.194~204/ \《축복 예식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6, pp. 134~143/《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 60호(1990. 7), p. 30. [金敏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