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 서임권 논쟁

聖職敘任權論爭

〔라〕Controversia de investituris · 〔영〕investiture Controver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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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4세는 대립 교황 글레멘스 7세를 내세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무력 대립을 벌임으로써 성직 서임권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인리히 4세는 대립 교황 글레멘스 7세를 내세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무력 대립을 벌임으로써 성직 서임권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 · 프랑스 · 영국에서 세속 군주가 주교와 수도 원장과 같은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던 관습에 대하여 교 황들이 교회의 자유를 내세워 반대함으로써 일어난 교회 와 국가 사이의 충돌 사건. '평신도의 서임권 논쟁' (Lay Investiture Controvey)이라고도 하나 좀더 정확히 표현하 자면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논쟁' 이라고 일컬을 수 있 다. '서임' 이라고 번역되는 라틴어 '인베스티투라' (investitura)는 본래 유럽의 봉건 체제에서 주군(主君)이 봉신 (封臣)에게 봉토(封土)를 양도하는 의식(儀式)을 의미하 였다. 서임 의식을 통해서 봉토에 대한 권리가 주군으로 부터 봉신에게 넘겨졌는데,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봉 신이 주군으로부터 봉토에 대한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이 었다. 서임은 봉신이 주군에 예속되는 사람임을 선언하 는 신서(臣誓)나 충성 선서와는 다르다. 서임은 봉토를 양도하는 것이었고, 신서는 주군과 봉신 사이에서 개인 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주군은 봉 신이 자신에게 속한 사람임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봉토를 양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임과 신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배 경〕 서임 의식 때 주군은 봉신에게 상징물을 건네 주면서 봉토의 소유권을 양도하였다. 이때 사용된 상징 물은 흙덩어리, 나뭇가지, 막대기, 장갑, 지팡이, 칼, 반 지, 십자가, 군기 등 다양하였다. 그리고 주군인 세속 군 주는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직책과 결부된 권리와 교회록(敎會錄)을 수여할 때 상징물로 목장(牧杖)과 반 지를 주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목장과 반지를 교회적 특 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반지는 그리스도와 그 의 신부(新婦)인 교회의 결합을 상징하였고, 목장은 영 혼의 돌봄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상징 물을 수여하는 서임 의식을 평신도가 집전할 수 없는 성 사 예식으로 여겼고, 고위 성직자의 권한을 드러내는 것 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서임권 논쟁은 주교와 수도원 장이 주군으로부터 교회 봉토를 받는 것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봉건 체제에서 주군이 그의 봉신인 주교에게 교 회록을 수여하는 것은 합법적이었지만, 그러나 교회는 주군이 교권(敎權)을 의미하는 반지와 목장을 수여하는 권리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11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서임에 대해 그레고리오 개혁가들은 교권 침해라고 비난 하면서, 반지와 목장을 상징물로 수여하는 것은 주교의 임무이며 그러한 서임은 평신도가 행사할 수 없다고 주 장하였다. 아울러 성직 매매 금지와 성직자들의 생활 쇄신을 내 세우며 교회 개혁을 주창한 그레고리오 개혁가들은 세속 군주의 성직 서임권이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걸림돌 임을 발견하고, 교권 독립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 래서 교황 니콜라오 2세(1058~1061)는 1059년 4월 13 일에 라테란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성직자의 독신 의무 를 강조하면서 모든 성직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평신도 에게서 교회 직책을 받지 못한다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또 교회 쇄신을 위해 고위 성직자의 자격을 갖춘 주교와 수도원장을 확보해야만 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 1085)는 1074년에 로마에서 사순절 교회 회의를 소집하 여 성직 매매 금지와 성직자의 독신 생활 준수와 같은 성 직자의 생활 쇄신을 강조하였다. 이때 교황은 평신도의 성직 서임을 금지하지 않았으나 교회 개혁 계획이 성과 를 거두지 못하자, 이듬해 '교황 훈령' (Dictatus Papae)을 발표하고 로마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1074년의 결 정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평신도 성직 서임을 단죄하면서 주교들이 세속 군주에게서 교회 직책을 받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어 세속 군주가 교회 재산 소유권을 수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이 1078년 11월과 1080 년 봄에 로마에서 소집된 교회 회의에서 발표되었으며 , 이러한 금령은 이후 개혁 교황들에 의해서도 계속 확인 되었다. 〔논쟁의 전개〕 프랑스 : 카페 왕가(Capet, 987~1328)는 프랑스의 77개 교구 중에서 22개의 교구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교구들은 귀족들의 지배 아 래에 있었다. 아울러 프랑스의 많은 주교들은 성직 매매 로 비난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49년에 교 황 레오 9세(1049~1054)는 랭스(Reins)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교회법 절차에 따라 주교를 선출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국왕 앙리 3세(1031~1060)는 이러한 교회 법령에 관심이 없었고, 주교 임명에 있어 주교 후보 가 교회 직책에 적합한 인물인가보다는 재력(財力)과 정 치력을 갖춘 인물인가에만 관심사를 두었다. 따라서 교 황들은 프랑스에서 교회법에 따른 주교 선출과 성직 매 매의 금지 및 성직자의 생활 쇄신을 교회 개혁의 대상으 로 삼았고, 교황 사절을 파견하여 프랑스 지역 공의회에 서 교황청의 개혁 교령을 반포하고 교회 쇄신을 시행하 였다. 그리고 주교 선임에 있어서 교회 내분이 일어났을 때 교황 사절들이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교황이 프랑스의 주교 서임에 개입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때 로는 교황청과 교황 사절의 개입이 내정 간섭으로 받아 들여져 왕가와 귀족들의 저항을 받기도 하였으나 양측은 서로의 요구를 조금씩 양보함으로써 교황청과 프랑스는 원만한 관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1073~1074년 사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는 국왕 필리프 1세(1060~1108)의 성직 매매와 성직 서 임에 대하여 파문 또는 해임하겠다는 경고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또 1074년 11월과 1075년 초에는 국왕의 잘못된 교회 정책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라는 요청 편지 를 귀족들에게 보냈고, 주교들에게는 교회 개혁에 미온 적인 태도를 책망하였다. 그러나 귀족들과 주교들은 국 왕을 지지하였고 개혁에 반대하였다. 이에 교황은 프랑 스의 교회 개혁을 위해서 프랑스 주교단과 교황청의 유 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1075년 로마 교 회 회의에서 프랑스 상주 교황 사절로 위그(Hugues de Die)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프랑스의 주교 선출에 개입 하여 성직 매매로 주교가 된 고위 성직자들을 해임한 위 그는, 1077년 9월에는 오툉(Autun) 교회 회의를 소집하 여 세속 군주에게 서임을 받은 성직자를 주교로 서품 주 는 경우 그 주교를 해임하겠다고 경고한 뒤 세속 군주의 성직 서임 금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푸아티에(Poitiers) 교회 회의에서 평신도의 서임 금령법 을 다시 반포하였고, 교회법 절차에 따르지 않고 주교가 된 성직자들의 성무(聖務)를 정지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프랑스 안에서 교황과 교황 사절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 으켰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의 프랑스 교회 정책은 전임 교황과는 달랐다. 교황은 국왕의 임명을 받 는 주교의 교구가 속권(俗權)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경우에는 국왕의 성직 서임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써, 프랑스에서의 서임권 논쟁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1097년에 샤르트르의 주교 이보(Yvo, 1040?~ 1115)는 주교 임명에 있어 교회의 왕가 불개입 원칙과 왕 가의 개입 정당성의 주장을 조정하여 서임권 논쟁을 해 결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교권의 수여와 교 회록(교회 재산)의 소유를 구분하였고, 주교의 역할을 영 적 지도자와 세속 제후로 설명하였으며, 반지와 목장을 사용하는 서임 의식의 성사적 성격을 거부하였다. 이보 는 자유로운 주교 선출과 주교 서품이 보장되면 교회와 국가 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세속 군주의 서임이 묵인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프 랑스 국왕은 주교 선거 다음에 반지와 목장을 수여하는 의식 없이 선출된 주교에게 교회 재산을 부여하고 신서 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104년 12월 파리에서 소 집된 교회 회의에서 교회와 화해한 필리프 1세는, 2년 후에는 아들 루이 6세와 함께 생드니(St.-Denis)에서 교 황 파스칼 2세(1099~1118)를 만나 관계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1107년 5월 트루아(Troyes) 교회 회의에서 교황 이 평신도의 주교 서임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루이 6세(1108~1137) 시대에는 더 이상 국왕의 주교 서 임은 없었다. 영국 : 프랑스의 노르망디(Nommadie) 공 기음(Guillaume)은 1066년에 영국을 정복하고 노르만 왕가를 창시 하여 윌리엄 1세(1066~1087)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영국 교회를 국왕의 통제 아래 있는 국가 교회로 여겼다. 교황의 서신은 먼저 국왕에게 제시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받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국왕의 허가 없이는 귀족이든 관리든 파문될 수 없었으며, 교황 사절은 어디 에든 초대되지 않았다. 또 캔터베리(Canterbuy) 대주교 가 소집한 교회 회의의 교령은 국왕의 승인을 받지 않고 서는 공포될 수 없었다. 그리고 1070년에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 공 시절에 측근이었던 랜프랭크(Lanfranc, 1010?~ 1089)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국왕의 도움으 로 영국 교회의 중앙 집권화 작업을 통해 캔터베리 대교 구의 수위권을 확립한 랜프랭크는, 영국 교회에서 수장 (首長)으로서 인정을 받자 그가 소집한 교회 회의 결정 은 영국 전역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교 회 회의는 왕실 회의와 연계되어 개최되었다. 한편 랜프 랭크 대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충성스러운 성 직자였으나 그레고리오 개혁을 전부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는 성직 매매를 금지하고 성직자의 생활 쇄신에는 노 력하였으나 교황이 가장 크게 반대하던 평신도의 성직 서임은 묵인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윌리엄 1세와 월리 엄 2세(1087~1100)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 다. 1093년 3월에 윌리엄 2세는 랜프랭크가 사망한 후 3 년 동안 공석 중이던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안셀모(Anselmus, 1033~1109)를 임명했다. 안셀모는 주교 서품을 받자 수도좌 대주교의 직무 수행에 필요한 '팔리움' (Pallium) 을 교황 우르바노 2세로부터 받기 위하여 로마에 다녀올 허가를 국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로마 방문 허가는 황제파 대립 교황을 지지하고 있는 영국이 로마의 교황 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셈이므로, 1095년 2월 25일 로킹 햄(Rockingham) 회의에서 국왕은 주교들과 귀족들과 함 께 안셀모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성직자들은 안셀모에 대한 순명 선서를 철회하며 대주교의 해임과 귀양을 주 장한 반면, 세속 귀족들은 원하지 않았다. 이때 교황 사 절이 방문하여 영국이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인정해 줄 것을 바라면서 그 반대 급부로 영국 국왕의 교회에 대한 주권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교황 사절은 안셀모 대주 교의 해임을 원하지 않았다. 오랜 협상 끝에 안셀모는 사 절이 캔터베리 대성당 제대에 갖다 놓은 팔리움을 받기 로 동의하였는데 이는 대주교가 왕으로부터 직접 '팔리 움' 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097년 성 령 강림 대축일에 안셀모 대주교는 국왕과 견해를 달리 한 국내 문제에 관해 교황의 조언을 얻기 위하여 로마로 가기로 결정하고 국왕에게 출국 허가를 요청하였다. 월 리엄 2세가 출국 불허 결정을 따르든지 대주교직을 사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자, 안셀모는 사 임을 선택하고 11월에 영국을 떠나 로마에 머물렀다. 1100년 8월 윌리엄 2세의 아들 헨리 1세(1100~1135) 의 요청으로 안셀모는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국왕이 성 직 서임권을 주장하면서 그에게 신서를 요구함으로써 양 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때 국왕은 교황 파스칼 2세 에게 서임과 신서에 대한 금령을 완화시켜 줄 것을 요청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03년 4월에 안셀모는 다시 로마로 떠났다. 그리고 1105년 7월에 국왕의 누이 동생 아델라(Adela)의 주선으로 안셀모는 노르망디에서 헨리 1세를 만나 국가가 몰수한 교회 재산을 돌려 받기 로 약속하고 교황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듬해 3월 23일 국왕의 사절을 만난 교황 파스칼 2세 는 안셀모에게 서임과 신서에 대한 금령을 준수할 의무 를 면제해 주었고 국왕의 서임을 받은 주교들의 파문을 풀어 주었으며, 대주교에게 왕에게 신서한 주교들이 서 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주교로 서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같은 해 6월 안셀모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1107년 8월 1일에 런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교회 회의가 소집되어 3일 동안의 토론 끝에 서 임권 논쟁은 해결되었다. 국왕은 그가 참석한 자리에서 선출된 주교에 대해 더 이상 서임을 주장하지 않았고, 교 회록을 받는 주교들은 서품 전에 신서하기로 결정하였 다. 독일 :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세속 군주의 성직 서임 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075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 제 하인리히 4세(1056~1105)는 공석 중인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에 테달트(Tedald)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교황 의 파문을 받은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1월 카놋사에서 교황의 사면을 받았으나, 대립 교황 글레멘스 7세(1080~ 1100)을 내세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무력 대립을 벌 여 로마를 장악해 버렸다. 그러다가 1092년에 로마에서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이 약화되고 1093년 말에 후임 교 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에 상주하면서 교황의 위상이 강 화되자, 1095년에 교황은 피아첸차(Piacenza) 교회 회의 와 클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성직 매매를 통한 서품의 무효화 선언 ·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에 대한 금 령 · 성직자의 세속 군주에 대한 신서를 금지하며 교권의 완전한 자율권을 주장하는 교령을 공포하였다. 또 1099 년의 로마 교회 회의에서는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금령 을 더욱 엄격하게 규정하여 서임한 세속 군주의 서임 대 상자와 서임 대상자를 서품하는 주교를 파문하기로 규정 하였다. 교황 파스칼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1102년 에 교황은 로마 교회 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에 대 한 금령을 선언했고, 황제를 파문하였다. 그리고 하인리 히 5세(1106~1125)가 성직 서임권을 요구하자 과스탈라 (Guastala) 교회 회의, 트루아 교회 회의, 베네벤토(Benevento) 교회 회의에서 그를 단죄하였다. 그러나 1111년 2월에 교황과 황제가 각각 파견한 대표들은 수트리(Sutr)에서 협상을 통하여 황제의 성직 서임권 포기를 받아 냈고, 신성 로마 제국이 양도한 교회 재산을 황제에게 돌 려주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교황 양측에서 심 한 반발이 일어나 황제는 합의를 파기하고 교황을 구금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은 황제를 대관하였고, 황 제는 주교 서품 전에 반지와 목장을 사용하는 서임을 허 용한다는 특권 즉 '맘몰로 다리(Ponte Mammolo) 특권' 을 교황에게 강요하여 받아 냈다. 그렇지만 추기경단의 항 의로 교황은 1116년 라테란 교회 회의에서 이 특권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교황 갈리스도 2세(1119~1124)는 하인리히 5세와 화 해를 모색하기 위하여 1119년 가을에 스트라스부르크 (Strasburg)로 특사를 파견하여 황제와 잠정적인 합의에 도달하였으나, 미묘한 쟁점에 대해서는 합의문에 명백하 게 규정되지 못하였다. 교황은 황제에게 성직 서임권과 교회 재산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였고, 하인리히 5세는 재산을 부여하는 조건하에 성직 서임권과 성직자들의 황 제에 대한 충성 서약을 원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황과 황 제가 1119년 11월 24일 무존(Mouzon)에서 만나기로 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121년에 하인리히 5세는 독일 제후들에게 교황청과 평화 협정을 시작하도록 위임 하였고, 교황도 이에 동의하여 추기경 3명을 독일로 파 견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하순부터 10월 초순까지 열 린 뷔르츠부르크(Würzburg) 제국 의회에서 황제측 협상 안이 정리되어 이듬해 9월 마인츠(Mainz)에서 황제 대표 단과 교황 대표단이 만나 예비 회담을 갖고 서로 합의를 본 후, 9월 23일 보름스(Woms)에서 정교 협약을 체결 하였다. '갈리스도 조약'이라고도 불리는 보름스 정교 조약에 따르면 황제는 반지와 목장을 갖고 서임하던 권 리를 포기하고 교회법에 따른 주교 선거와 주교 서품을 보장하였으며, 교황은 하인리히 5세에게 황제가 선거 장 소에 입회하는 것을 양보하였고 선거에서 분쟁이 일어날 때에는 황제가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황제 는 지명된 주교를 서임할 때 반지와 목장 대신에 홀(忽) 을 갖고 교회록을 부여하였다. 이 조약은 독일에서는 밤 베르크(Bamberg) 제국 의회에서 인준되었고, 교회에서는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에서 추인되었다. 〔결 과〕 보름스 정교 조약을 통해 이 오랜 논쟁은 해결 되었지만, 이는 독일의 역사 · 교황사 · 서유럽 그리스교 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성직 서임권 논 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정치적 역량은 기울어지 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이 논쟁은 황제의 위신을 많이 상실시켰고 교회에 대한 통치권도 잃게 하였으며 국내에 서는 주요 반대자들인 제후들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 주 었기 때문이다. 둘째, 오랜 논쟁으로 황제권이 쇠미(衰 微)되면서 독일은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 다. 셋째, 교황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왜냐하면 이 논쟁 은 교황들이 세속 군주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무엇보다도 교황들이 교황 중심의 중앙 집권 체 제 조직을 구성하도록 가속화시켰기 때문이다. 넷째, 그 리스도교는 이 논쟁으로 그 영향력을 극대화하였다. 교 황청과 국가 양측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일반 대중을 논쟁에 끌어들였고,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 서 처음으로 교회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심이 각성되었고, 이것은 일반 대중의 열광적인 신심으로 발전하여 십자군 운동과 신앙 부흥 운동으로 나타났다. (⇦ 서임권 논쟁 ; → 그 레고리오 7세 ; 그레고리오 개혁 ; 보름스 정교 조약) ※ 참고문헌  Denzinger-Schonmeter, Enchidir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Barcione · Friburgi Brisgoviae · Romae · Neo-Eboraci, 35th ed., 1979/ William Raggsdale Cannon, History ofChristicmity in the Middle Ages. From the Fall ofRome to the Fall of Constantinople, New York · Nashville, Abingdon Press, 1960/ Brian Tierney, The Midle Ages, vol. 2( Sources of Medieval History), New York, Alfed A. Knopf Inc., 3rd ed., 1978/ Arthur West Haddam · William Stubb eds., Councils and Ecclesiastical Documents Relating to Great Britain and Ireland, London, Clarendon Press, 1964/ Brian Tierney, The Crisis ofChurch & State 1050~1300,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64/ David Knowles · Dimitri Obolensky, The Christian Centuries, vol. 2(The Middle Ages), 2nd imp., London · Darton, Longman & Todd, New York, McGraw-Hill Co., 1972/ R.W. Southern, The Making of the Middle Ages, London, Hutchinson U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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