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영입 운동
聖職者迎入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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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1831년의 조선 대목구 설 정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하여 전개한 운동. 성직자 없이 교 회의 터전을 닦는 데 노력해 온 신자들이 성사의 은총을 얻고 복음 전파를 활성화하려는 목적에서 추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계획과 대박(大舶) 청래 운동이 함께 진행되었다. 이 성직자 영입 운동은 주 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여 순교하는 신유박 해(辛酉迫害) 이전까지의 제1차 영입 운동과 그 이후의 제2차 영입 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차 성직자 영입 운동〕 조선 신자들이 성직자의 중 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1785년 봄의 명례방 사건(明禮 坊事件)으로 초기 교회가 일시 와해되면서였다. 이에 그 들은 1786년 봄에 가성직(假聖職) 제도를 수립하고 일 부 지도층 신자들로 가성직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 나 1787년 무렵에 와서 이 제도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 고는 가성직단을 해체하였으며, 이때부터 성직자를 영입 하여 성사를 받아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 였다. 성직자 영입의 필요성은 곧 교회 밀사의 북경 파견 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이 최초의 밀사로 선발되어 1789년 말에 북경으로 출발 하였다. 윤유일이 처음 북경을 방문하고 1790년 봄에 귀국할 때, 남당(南堂)에 있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는 조선 신자들에게 첫 사목 서한을 보내면서 성직자의 입 국 방법과 입국로를 알아보고, 가능하다면 조선에서 몇 명의 젊은 신자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북경에 보냄으 로써 그곳 신학교에서 성직자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 는 방안을 강구하게 했다. 이 서한을 받아 본 조선의 지 도층 신자들은 이제 성직자 파견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 다. 그리고 성사를 받으려는 간절한 생각에서 그 해 5월 오(吳) 씨라는 예비 신자와 함께 다시 윤유일을 북경에 보냈고, 그들은 7월 초에 남당으로 구베아 주교를 찾아 가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와 함께 조선 교회의 상황을 정확히 논의한 뒤 성직자를 파견할 시기와 만날 장소 및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였다. 조선 신자들의 제1차 성직자 영입 운동의 첫 번째 단 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어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 들과의 약속대로 1791년 2월에 마카오 교구 소속의 레 메디오스(dos Remedios, 吳) 신부를 선발하여 중국인 안 내자들과 함께 봉황성(鳳凰城) 책문(柵門)으로 보냈다. 그러나 레메디오스 신부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시일 이 지체된 탓에 윤유일을 비롯한 밀사들이 이미 조선으 로 돌아간 뒤였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이듬해 4월 1일 교황 비오 6세로부터 조선 포교지의 보호와 지도를 위임 받게 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밀 사를 파견하지 못하다가 1793년에서야 다시 성직자 영 입 운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입 운동의 두 번째 단계였다. 당시 윤유일 ·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 지황 (池璜, 사바) 등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도움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1793년 말에 지황과 박(朴, 요한)을 북 경에 보냈으며, 지황은 이듬해 1월 23일(음 1793년 12월 22일) 구베아 주교를 만나 윤유일의 서한을 전한 다음 성 직자 영입 방도를 논의했다. 이때 구베아 주교가 조선 선 교사로 임명한 성직자가 바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였다. 주문모 신부는 구베아 주교로부터 성무 집행을 위한 통상적이고 또한 특별한 권한을 위임받고 염익작(閹益 爵)의 안내로 책문에 도착하여 조선 밀사들을 만났으나, 사신들의 왕래가 없는데다가 압록강이 얼지 않았으므로 약 8개월 동안 요동 지역을 순방했다. 그런 다음 1794 년 12월 3일(양 12월 24일) 지황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하 여 의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유일 등을 만날 수 있었고, 12월 14일에는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여 최인길이 마련 해 놓은 정동(貞洞, 현 서대문구 정동)의 거처에서 머무르 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주문모 신부의 주 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795년의 을묘박해(乙卯迫害) 이후 주문모 신부는 서울과 지방을 전전하면서도 같은 해 7월에 전라도 신자들의 천거를 받아 황심(黃沁, 토마 스)을 새 밀사로 선발하였고, 이듬해 겨울 그를 북경으 로 파견하였다. 황심에 이어 밀사로 선발된 신자는 보령 의 천민 출신 김유산(金有山, 토마스)과 황심의 인도로 입교한 평안도의 옥천희(玉千禧, 요한)였다. 그들은 이 때부터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주문모 신부와 조 선 신자들의 서한을 북경에 전하였는데, 그 목적은 우선 조선 교회의 상황을 구베아 주교에게 보고하고 전교 비 용으로 사용할 은자(銀子)와 성유(聖油)를 받아 오는 데 있었으며, 다음으로 중국에서처럼 대박 즉 서양 선박〔洋 舶〕과 함께 선교사가 입국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데 있 었다. 이것이 바로 '양박 청래 운동' 이었다. 양박 청래와 선교사 영입 계획은 1800년 말까지 꾸준 히 추진되었으며, 조선의 일부 지도층 신자들은 1801년 까지도 서양 선박이 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즉 그 들은 '양박 =선교사=선=신의 자유'라는 인식하에 서양 선박의 조선 원정과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어떠한 요청 서한도 서양으로 보 낸 적이 없었으며, 선교사의 부족과 박해로 조선 신자들 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와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함으로써 제1차 성직자 영입 운동은 끝 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진행된 '대박 청래' 는 당시 집 권자들에게 무력 개교(武力開敎)의 방안으로 받아들여 져 천주교 신자들을 반역의 무리로 단정짓게 하는 결과 를 초래하였다. 〔제2차 성직자 영입 운동〕 신유박해를 겪고 난 뒤 한 국 천주교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첫째 계속되는 박해 의 위협을 극복하고 신앙을 전파하는 일이었고, 둘째 북 경 교회와의 연락을 재개하여 다시 성직자를 영입하는 일이었다. 그중에서 전자가 비밀 신앙 공동체를 유지해 야 하는 교우촌 신자들의 몫이었다면, 후자는 새로 교회 를 이끌어 나갈 지도층 신자들의 몫이었다. 조선 신자들이 제2차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하게 된 것은 박해가 끝난 지 거의 10년이 지나서였다. 이 무렵 에 와서 교회 재건의 필요성을 절감한 몇몇 신자들에 의 해 성직자 영입 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는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를 비롯하여 이여진(요한) · 권기인(요한) · 홍우송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비용이 마련되어야 했으므로 1811년에 가서야 성직자 영입을 위한 밀사가 북경에 파견될 수 있었고, 이때 이여진과 또 다른 신자가 밀사로 선발되었다. 이여진이 그때 북경에 가지고 간 조선 신자들의 서한 은 모두 2통이었다. 즉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내는 1811 년 10월 24일(음)자 서한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1811 년 11월 3일(음)자 서한이었다. 특히 북경 주교에게 보 낸 서한에서 조선의 신자들은 제1차 성직자 영입 운동 때와 다름없이 교회 재건을 위하여 성직자를 파견해 주 고 약속한 대박을 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북경교 구장 수자 사라이바(J.d Souza-Saraiva) 주교는 박해 때문 에 북경으로 가지 못하고 마카오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 므로 1811년 말 북경에 도착한 이여진은 수자 사라이바 주교의 총대리 격으로 북경을 관리하던 남당의 리베이로 누네스(J. Ribeino-Numes) 신부를 만나 서한을 전하고 이듬 해 3월 귀국하였다. 다만 그가 전한 서한들은 다행히 1813년 겨울에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달되어 포르 투갈어로 번역된 뒤 교황청에까지 전달될 수 있었다. 그 후 이여진은 1812/1813년 말에 다시 북경으로 가서 성 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전하였다. 당시 중국 교회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인한 유럽 에서의 원조 감소, 그리고 중국 땅에서의 박해 등으로 어 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자 사라이바 주교는 리 베이로 누네스 총대리 신부에게 선교사 파견 방법을 모 색해 보도록 지시하는 한편, 포르투갈 왕에게 서한을 보 내 통상을 위한 상선 혹은 왕실 선박을 조선에 보낼 수 있는지를 물었으나 회답을 받지는 못하였다. 한편 교황 청에서는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받은 후 선교사 파견을 진지하게 논의하였으며, 이후 마카오 대표부의 포교성성 대표인 마르키니(Marchini) 신부와 남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선교사 파견을 강구해 보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중국 교회의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제2차 성직자 영입 운동의 첫 단계가 결실을 맺지 못 하면서 지도층 신자들의 활동은 일시 주춤하였다. 그러 다가 1816년에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에 의해 두 번째 단계의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함 경도 무산(茂山)에 유배되어 있던 조동섬(趙東暹, 유스 티노)을 찾아가 성직자 영입 운동을 협의한 뒤 서울로 돌아와 비용을 마련하였고, 1816년 겨울에는 북경으로 가서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이때 리 베이로 누네스 신부는 정하상의 입경 소식을 마카오에 있는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하였고, 수자 사라이바 주교는 1817년 초에 남경(南京)의 두 선교사를 조선으 로 파견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이 무렵에 정하 상을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신자로는 동정 부부로 유명 한 조숙(趙淑, 베드로)과 권(權) 데레사, 이경언(李景彥 바오로), 역관 출신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이었다. 정하상의 북경 왕래는 거의 매년 실행되었다. 그러던 중 1824년과 1826년에는 역관 출신 유진길(劉進吉, 아 우구스티노)과 마부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을 동료로 얻게 되었다. 그중에서 유진길은 정하상과 함께 조선 신 자들이 교황에게 보내는 1824/1825년 말의 서한을 가 지고 북경으로 가서 성사를 받았으며, 조신철은 1826년 에 유진길과 함께 북경을 다녀왔다. 1824년 말의 서한 은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의 움피에레스(R. Umpierres) 신부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교황청에 전달되 었는데, 이 서한에서 신자들은 다시 한번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해로를 이용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정하상 · 유진길 · 조신철의 북경 왕래는 그 후에도 계 속되었다. 한편 1826년에는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의 사 망으로 북경에 있던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G.F Pereira, 畢學源) 주교는 북경교구장 서리의 자격으로 조 선 포교지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에 앞서 1821 년에 포교성성 장관 루이지 폰타나(F. Luigi Fontana) 추기 경은 나폴리 성가정신학교(聖家庭神學校)에 입학한 4명 의 중국 신학생들로부터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전해 받고 선교사 파견을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다.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이를 위한 항구적인 대책도 마 련하려고 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보호권(保護權) 교구 인 북경교구에 위임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는 조선 포교 지를 다른 선교 단체에 위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 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교황청에서는 1827년부터 조선 포교지의 사목을 '로마 예수회'나 파 리 외방전교회'(ME.P.)에 위임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 는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Cappellari) 추기경의 노력과 마카오의 대표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이 주효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오랜 협의를 거쳐 1831년 7월에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조선 포교지를 대목구(代牧區)로 설정할 것을 의결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831년 9월 9 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 었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정하상과 동료들은 그때까지도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 직자 영입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34년 1 월 3일에 중국인 유 파치피코(중국 이름은 余恒德) 신부를 영입하게 되었고, 1836년 1월 13일(음 1835년 11월 25 일)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조선 입국에 노력하던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羅) 신부 를 영입할 수 있었다. 결국 제2차 성직자 영입 운동은 1 차 때와는 달리 순수한 교회 재건 활동의 일환으로 추진 되었으며, 1831년의 조선 대목구 설정과 파리 외방전교 회 선교사의 입국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 서울대 교구 ; 한국 천주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上 · 中/ 《가톨릭 사전》 Andreas Choi, 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 Suisse, Schöneck-Bekenried, 1961/ 《교회사 연구一선교의 자 유와 '대박 청래' 문제》 1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윤민구 역 주,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4집》,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 1999.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