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 역사적으로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초대 교회 이래 그리스도교는 성체와 관련해서 다음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유일하게 인정해 왔다. 즉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서 한 사건인 그분의 인간 구원을 위한 죽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재현하는 것이며, 미사 중 사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말들은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단에서 현존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봉헌되는 것을 가리킨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체 안의 실제 현존을 인정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둘러싸고 논쟁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 논쟁들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과 현존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첫 번째 논쟁(9세기)〕 첫 번째 논쟁은 842~853년에 코르비(Corbic)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장인 라드베르토 (Paschasius Radbertus, 790~860)와 같은 수도회 회원인 라트람누스(Ratramnus, ?~868) 사이에서 일어났다. 논쟁의 발단은 라드베르토가 831년에 출간한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De Corpore et Sanguine Domini, PL 120, 1263~ 1350)였는데, 그는 이 책의 내용들이 치프리아노(?~ 258), 암브로시오(340-397), 힐라리오(Hilarius Pictaviensis, 315~368) , 아우구스티노(354~430), 요한 그리소스토모 (347~407), 예로니모(343~420), 교황 그레고리오 1세 (590~ 604), 이시도로(560?~636) , 헤지키오(Hesychius Hierosolymitanus, 5세기), 베다 존자(Beda Venerabilis, 672/673~ 735)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로 암브로시오가 가르쳤던 것과 비슷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성사로서의 몸과 역사상의 몸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라트람누스는 두 가지 몸의 물질적인 정체보다는 영적이고 상징적인 관계를 강조하면서 그를 공격하였다. 라드베르토는 일단 이시도로가 내린 정의(《어원》 6, 19, 39)를 빌려 성사란 외적이면서 가시적인 행동이 그 어떤 내적이고 불가시적인 것을 일으키는 전례 예식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성사의 종류를 세 가지(세례 · 성유 · 성체)로 규정하면서, 그 까닭은 신적인 힘이 "물질적인 것들을 빙자한" 그것들을 통하여 작용하기 때문이고 또 교회 안에서 성령이 그것들을 효과적이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말씀의 성사도 서약이나 신비를 나타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라드베르토에 의하면 성사는 성령이 성서를 통하여 말씀할 때면 언제든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힘의 영향을 받을 때라면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3, 1~3). 그 이후 이전에 폭 넓게 사용되던 '성사'라는 용어가 좀더 한정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또 이로 인해서 근본적인 오해들도 발생하였다. 그래서 라드베르토는 성체성사가 하나의 상징(figura)인지 아니면 하나의 실체(veritas)인지 자문한 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신 그리스도의 참된 살은 사제가 발설하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통해서 성령에 의하여 제단에서 축성된 그분 살의 성사"(《주님의 몸과 피 에 대하여》 4, 3)라는 의미에서 외적 상징이자 내적 실체라고 자답하였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힘으로 축성의 말들이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을 때 취하였던 살과 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라트람누스는 같은 제목의 책을 통해서 우선 용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는 상징이란 언어의 형상을 뜻하고, 실체는 개방되어 있는 직접적인 표현이자 실체에 관한 지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가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요한 15, 5)라고 하였을 때는 그 분이 분명히 언어의 형상을 사용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다른 이들이 말하게 될 때의 그 언어는 단순히 실체에 대한 하나의 진술이라 는 것이다(《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5~8). 마찬가지로 비록 축성 이후에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태는 그대로 남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감각을 통해서 지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그 안에서 본다고 여겼기에, 그는 성체는 실체라기보다는 상징으로 불려야만 한다고 강조 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한 근거는 아우구스티노였는데 (PL 34~75), 그의 주장은 빵과 포도주는 물질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란 영적인 것이고, 그 효험은 그리스 도와의 영적인 친교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는 아우구스티노가 <보니파시오 주교에게 보낸 편지>(Epist. 98, 9)에서 축성된 빵이 성사로 있는 상태에서 성사와 실 체(res)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특성을 가르쳤다고(《주 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33~36) 밝히면서 라드베르토가 이시도로를 오해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암브로시오도 "살의 성사"를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살의 실체(《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57)와 구별하였다고 지적하면서(《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40~50) 예로니모와 풀젠시오(F.C.G. Fulgentius, 468~533)도 그렇게 구별했다고 밝혔다(《주님의 몸 과 피에 대하여》 70, 88, 90). 라트람누스의 주장은 오르베(Orbais)의 고트샬크(Gottschalk, 804~869)와 마우로(Rabanus Maurus, 780~856) 외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철저한 상징(figura)주의이자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이 아닌 것으로, 즉 어떤 변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결국 그의 주장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어떤 변화이든지 인지할 수 없다는 것, 즉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서만 성체로 현존한다 는 것, 따라서 축성 후에 "무슨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12)는 것이 그 요지였다. 결과적으로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에 대해 약간은 유치한 사실주의(physicalismus)와 그에 반발해서 단순히 표상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상징주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 라드베르토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 후 적어도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 의 현존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신학적인 이해가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두 번째 논쟁(11~13세기)〕 두 번째 논쟁은 투르의 마르티노 대학 학장 베렌가르(Berengar de Tours, 1010~1088)가 라트람누스의 주장을 옹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베렌가르는 라트람누스의 책이 스코투스 에리우제나(J. Scottus Eriugena, 810~877)에게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그를 변호해 주기 위해 수많은 철학적인 원리들을 그 예로 인용했다. 그러자 란프란코(Lanfrancus de Le Bec, 1010~ 1089)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에 대하여》(De Sacramento Corporis et Sanguinis Chrisi)라는 저서를 통해 베렌가르를 비난하였고, 이에 베렌가르는 1070년 이전에 쓰여 진 《거룩한 만찬에 대하여》(De Sacra Coena)를 통하여 그를 논박하였다. 베렌가르는 "신성한 실체의 표상"이 성사라는 아우구스티노의 정의를 빌려 성사라는 말은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을 뜻하고, 내적이고 불가시적이며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것은 성사가 아니라 상관적인 실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체 현존이란 그리스도의 어떤 역동적 현존, 즉 그분과 인간의 영적인 결합을 드러내는 것 즉 하나의 표상이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가 하나의 성사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표상이어야 하지 그 표상과 동일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그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만일 빵의 조각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논리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조각들로 있는 것이고 또 만일 포도주가 실제로 그분의 피라면 그 분의 피는 그분의 몸 안에 있지 않은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베렌가르가 성사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왜곡하면서 극단적이고 이단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란프란코는 베렌가르가 신성한 표상으로서의 성사라는 정의가 갖는 고유한 의미를 제대로 숙지하지 않고 제한적으로 말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에 대하여》 12). 란프란코는 그 정의를 가시적이면서 불가시적인 성사적 실체들과 연관 시켜 지속적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신법까지도 단 하나의 의미만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그리스도의 몸 과 피의 성사에 대하여》 19)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란프란코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몸의 성사는 그분의 살이 다"(14),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다"(19)라는 말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베렌가르는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이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들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사실상 하나의 성사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오직 축성된 가시적 · 물질적 · 일시적 빵과 포도주만이 그리스도의 불가시적 · 비물질적 · 영원한 실체(res)의 성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성체성사 안에 물질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논리적으로 하나의 성사일 수 없으며, 성체성사란 단지 신앙의 눈으로 인식한 것이며 영성체로써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영적 실체라고 생각한 그의 견해는 반복해서 단죄되었다(로마, 베르철리, 1050 ; 파리, 1051 ; 투르, 1054 ; 로마, 1059 : DS 690 ; 로마, 1079 : DS 700). 그 후 그 역시 "빵과 포도주는 축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 고 선언함으로써 축성을 통한 변화(conversio)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결과는 라드베르토의 주장이 적극적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이는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보고밀파(Bogomili) · 알비파(Albigenses) · 가타리 파(Cathari) · 페트로브루시아누스파(Petrobrusiani) 등을 단죄하면서 "빵과 포도주는 신적 힘에 의하여 몸과 피로 실체 변화된다"고 선언한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DS 802). 또 12세기 초 투르의 대주교 힐드베르(Hildebert de Tours, 1056~1133)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에 근거해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79~1180)가 1202년에 <리용의 전임 대주교 요한에게 보낸 서한>(Cum Martae Circa)에서 사용한 '실체 변화' (transsubstantiatio)라는 용어가 이 공의회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DS 782). 그런데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초대 교회 이래 믿고 있었던 바와 같이 성체성사 안에서의 '변화' 를 인정한 것이며, 빵에 대하여 "이것은 내몸"이라 하고 포도주에 대하여 "이 것은 내 피" 라고 함으로써, 빵과 포도주가 겉으로는 여전히 빵과 포도주로 보이더라도 성체성사 제정의 말씀이 사제를 통하여 발설될 때 '실체' (substantia)인 빵과 포도 주의 본질적인 존재는 '변하고' 반면에 '우유' (偶有, accidentia)인 외적으로 나타나는 형식들 즉 물리적 · 화학적 구조들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논쟁(14~16세기)〕 세 번째 논쟁은 스콜라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 둔스 스코투 스(Joannes Duns Scotus, 1265~1308) · 오컴(William Ockham, 1285~1349) 등이 받아들인 '실체 변화' 로서의 성체성사 교리에 반대하고, 축성 후의 빵과 포도주의 지속성에 관한 베렌가르의 견해를 받아들인 14~16세기의 사람들로 인해 발생했다. 베렌가르의 견해를 받아들여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가르친 위클리프(John Wyclif, 1330~1384)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 에서 단죄된 적이 있었는데(DS 1151~1153), 위클리프와 거의 비슷한 관점에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다른 종교 개혁가들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1274년의 제2차 리용 공의회에서 사용(DS 860)됨으로써 하나의 교리로 가르쳐 온 '실체 변화' 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하였다. 루터는 성서적인 근거가 없는 '실체 변화' 교리가 개인의 의견으로 주장될 수는 있지만 구속력을 지닌 신앙 교리로 선언될 수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 이유는 유일한 구속력을 가진 성서에서조차 사도 바오로가 성찬례의 빵을 성체 제정의 말씀이 있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빵' 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고린 10, 16 ; 11, 2628). 그러나 루터 자신도 성서의 증언대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령 불인 동시에 쇠붙이인 달구어진 쇠붙이, 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갖춘 그리스도를 예로 들면서 두 '실체' 속의 동시적인 공존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빵과 포도주의 본질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 양자의 본질들과 결합하여 공존할 수 있다는 성체 공존(聖體共存,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칼뱅(Jean Calvin, 1509~1564)도 그리스도가 영성체를 통하여 현존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체로써 참된 현존을 체험할 수 있고, 영적 은혜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후 만찬에서 그리스도가 한 말씀들을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형상 혹은 표상이었고 영성체로써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사를 통해서 영적으로 자양분을 얻고 강해지기 때문에(《그리스도교 강요》 Ⅳ, 17, 1) 그리스도야말로 영혼을 위한 참된 음식이자 음료(요한 6, 5)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 이외의 어떤 곳에 물질적으로 위치한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인 만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이 물질적인 요소들 안에 현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단지 빵과 포도주가 영해질 때 성령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 영양분이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성체성사에 대한 그의 견해는 실제 현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이 성령을 통해서 현존한다는 잠세력설(潛勢力說, virtualism)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을 말하였고, 칼뱅은 성사 안에서 강하게 해주고 구속하는 그리 스도의 힘의 현존을 말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성체성사 안에서의 신성한 현존을 순전히 정신적이거나 심리학적인 현존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저서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De Vera et Falsa Religione) 제2장에서 예수의 최후 만찬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최후 만찬과 수난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기념 의식으로만 보았다. 그리고 이 기념 의식에서 그리스도가 명한 대로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지만 그것들은 최후 만찬에서 그리스도가 그것들을 자신의 몸과 피로 바꾸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게에서 봉헌될 몸과 피를 뜻하는 빵과 포도주로서 한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체성사는 실제로 단순한 빵과 포도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물질적으로 인간들을 위해서 참아 받은 것에 대한 회상으로 그것을 감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1551년 10월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제 13 회기에서는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성체에 관한 가르 침들을 단죄하고 실체 변화 교리를 교의로 선포했는데, 그러나 이 교의가 성체성사에 관해 철학적 혹은 신학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준 것은 아니었다(DS 1642, 1651~ 1652). 그래서 설명이 부족한 이 교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루터 교회는 1577년의 <협화 신조>(solida declaratio)를 발표하고 루터의 표현이 그대로 들어 있는 성찬의 선물 '안에서' (in), 그것과 '더불어' (cum), 또 그 형상 '아래서' (sub) 그리스도의 몸이 신앙인들에게 주어진다는 신앙 고백 양식을 수립하였다. 〔결과와 전망〔〕 성체성사에 대한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완화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다.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1965년 9월 3일에 회칙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를 발표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을 재강조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가톨릭 교회 내에서조차 성체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쏟아졌다. 오늘날 한국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만남을 위한 발판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 안에서의 현존에 관한 공통된 이해일 것이다. 양자는 그 현존을 사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인 현존으로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아울러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가 비단 구원을 주는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성사에 고유하게 주어진 구원의 선물 자체로서도 현존한다는 것에 대해 견해를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상 '실체' 와 '우유' 라는 식의 '사물적' 표현들은 오늘날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면서 전통적인 '실재론' (realismus)을 버리지 않는 가운데 좀더 적절한 말로 표현해 보고자 힘쓰 고 있는 중이다. (→ 성변화 ; 성체성사) ※ 참고문헌 이경우 · 정한교 역, 《하나인 믿음》, 서강대학교 신 학연구소 · 한국신학연구소 편, 분도출판사, 1979, pp. 553~556/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WCC, 1982~1990/ Nicholas Lossky et alii. ed.,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WCC Pub., Geneva, William B. Eerdmans Pub. Co., 1991/ John A. Hardson, The Catholic Catechism, New York, Double day & Co. Inc., 1975, pp. 461~475/ Louis-Marie Chauvet, trans. by Patrick Madigan S.J. · Madeleine Beaumont, Symbol and Sacrament,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5, pp. 383~389/ Joseph Martos, Doors to the Sacred, London, SCM Press Ltd., 1981, pp. 265~2921 One Baptism, One Eucharist and a Mutualy Recognized Ministry, WCC, text of Accra, 1975/ J. Neuner S.J. · J. Dupuis S.J. The Christian Faith, London, Collins Liturgical Pub., 1982, pp. 403~420/ K. Rahner . C. Ernst . K. Smyth eds., Eucharist, 《SM》 1, London, Burns & Oates, 1968, pp. 257~2761 Report on the Process and Responses, WCC, 1990/ M. Thurian ed., Ecumenical Perspectives on BEM, WCC, 1983/ 一, Churches Responds to BEM, vols. 6, WCC, PP. 1986~ 1988/ M. Thurian · G. Wainwright eds., Baptism and Eucharist : Ecumenical Convergence in Celebration, WCC, 1984/ Herbert Vorgrimler, trans. by Linda M. Maloney, Sacramental Theology,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2, p. 15. [李順成]
성체 논쟁
聖體論爭
〔라〕controversia de Coena Domini · 〔영〕eucharistic controversies

역사적으로 성체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이 세 번 있었다(<성체 논쟁>, 라파엘로 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