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상 논쟁

聖畫像論爭

〔라〕Controversia sacrarum imaginum · 〔영〕Iconoclastic Controver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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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3세(717~741)가 성화 상 공경 금지에 관한 칙령을 반포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 어 843년에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가 성화상 공경을 승인함으로써 끝난 사건. '성화상 파괴 논쟁' 이라고도 한다. 초상(肖像) 즉 화상(畵像)과 조상(彫像)을 뜻하는 '이 콘 (Icon)은 그리스어 '에이콘' (εἰκóν)에서 유래된 용어 이며,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 · 천사 · 성모 마리아 · 성 인 성녀들이기 때문에 성화상(聖畵像)이라고 부른다. 따 라서 성화상은 이콘의 예술성과 종교성이 종합된 작품이 라고 말할 수 있다. 이콘은 예수 그리스도 · 천사 · 성모 마리아 · 성인 성녀 등의 모상을 밀납법과 '템페라' (tempera) 화법(畵法)으로 목판에 채색한 판화나 동판에 에나멜로 채색된 판화를 의미하지만, 모자이크(mosaic) , 벽화 그리고 상아 조각이나 그 외의 재료로 제작된 예술 품들도 포함한다. 약 120년 동안 계속된 성화상 논쟁은 국가와 사회가 격심한 대립으로 양분되고 신자들에 대한 박해, 폭력 사태, 정치적 ·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 한 성화상 논쟁의 과정 속에서 성화상에 대한 교리 논쟁 을 거친 동방 교회는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를 통하 여 '성화상 신학' 과 '성화상 영성' 을 정립하였다. 〔배 경〕 성화상 파괴의 이론적인 근거는 이스라엘 백 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영적 본성을 형상으로 만들어 공경하는 것을 금지한 십 계명의 제1 계명(출애 20, 4 ; 레위 26, 1 ; 신명 4, 16-19) 에서 비롯되었다. 초대 교회 때 개인 집(사도 2, 46 ; 12, 12)과 다락방(사도 1, 13 ; 20, 8 ; 마르 14, 15)에 이어 전 례가 거행되었던 '카타콤바' 와 '사가 성당 (私家聖堂, Domus ecclesiae) 벽에는 아담과 에와, 다윗과 골리앗, 아 브라함의 제사와 같은 구약성서의 장면들과 사마리아 여 인, 라자로의 부활, 빵을 많게 한 기적, 예수의 세례와 같은 신약성서의 내용들이 그려졌다. 그러나 초대 교회 는 아직 유대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벽화 는 사실화가 아니라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 착한 목자, 의사, 착한 사 마리아 사람, 어부, 교회를 상징하는 배, 구원받는 그리 스도인을 상징하는 노아, 순교자와 증거자의 예형인 불 가마 속의 세 청년과 같은 상징적인 그림 등이었다. 이렇 게 간단하고 소박한 예술을 통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신비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 다. 초대 교회 때에는 새 영세자들이 적었기 때문에 상징 의 내용과 의미를 명백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으므로 상 징적인 표현이 가능하였지만, 4세기 이후 영세자들이 늘 어나자 그들 모두에게 상징적인 표현을 설명하기가 어려 워져 좀더 명백하고 구체적인 시각 표현이 필요하게 되 었다. 따라서 예수에 대해서 젊은 모습의 예수, 수염을 기른 예수, 구름 위에 계신 예수, 옥좌의 예수와 같은 직 설적인 묘사들이 나타났다. 692년에 콘스탄티노플 황궁 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상징적 모 상인 어린 양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 모습으로 표현되 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아울러 교회 예술품을 예술적 시각에서 평가하기보다는 교육의 도구로 본 초대 교부들 은, 진리를 얻는 도구를 보는 도구와 듣는 도구로 구분하 면서 설교를 듣는 도구로, 그리고 성화상은 보는 도구로 강조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순교자들의 일생을 그린 작 품이나 성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교회 내부를 장 식하도록 장려하였는데, 이는 문맹자(文盲者)들이 그림 을 보면서 성인들의 훌륭한 덕행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자극을 주기 위한 교육적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로 써 그리스도교 안에서 장식 예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성화상은 특히 동로마 제국의 동방 교회에서 많이 등 장하여 5세기에 이르러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공경의 대 상이 되었고, 6~7세기에는 성화상 공경이 개인 신심에 서 대중 신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신심은 성화상을 전례 행렬 중에 들고 다니거나 성화상 앞에 촛불이나 등불을 켜 두는 행위,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거나 향을 드리는 행 위, 성화상에 입맞추는 행위로 나타났다. 성화상 공경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모든 성인들의 통공(通功)' 의 교리 에 근거하여 신자들의 전구(轉求) 즉 중재(仲裁)의 기도 와 이에 따른 성인 공경에 있었는데, 신자들은 성화상이 인간사를 좌우하고 질병에 대한 효과 있는 구제약이며 하느님의 영적 은혜와 세속적 축복을 받는 유력한 통로 라고 믿었다. 그리고 성화상 신심이 발전한 이유는 일반 대중이 성화상에 대한 전설이나 기적을 너무 지나치게 경신(輕信)하고 공경한 데 있었다. 성화상 중에서 유명 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그려지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예 수의 초상과 루가 복음사가가 제작하였다는 성모상 '아 케이로포이에토스 (ἁχειροποίητος)이며, 그 외에도 하늘 에서 떨어진 성화상, 피를 흘리는 성화상, 도시를 수호하 는 성화상, 병자를 치유한 성화상 등과 같이 기적이 일어 난 성화상들이 있다. 〔논쟁의 전개 및 발전〕 처음에는 성당을 꾸미는 장식 예술품이었던 성화상이 경배의 대상이 되면서 동로마 제 국과 교회에서는 성화상 파괴 논쟁이 일어났다. 이때 예 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만을 주장하고 그분의 완전하 고 참된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이단인 그리스도 단성설 (monophysitismus)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성화상 공경을 배척하였다. 아울러 동방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도 성화 상 공경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 (模像)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우 상 숭배에 빠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람 모 습을 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신성을 나타내지 못하고 인간의 모습만이 표현됨으로써 성화상 공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이단인 네스토리우 스주의(Nestorianismus)에 빠질 위험도 있었다. 한편 성화 상 공경을 반대하는 논증에 대해 692년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므로(요한 1, 14 ; 필립 2, 6-7) 구약 시대의 모상 금지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선언 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제르마노스(Germanos, 715~730)도 독생 성자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의 모 상을 제작할 수 있으며, 그 형상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느 님의 모습이 아니라 강생하신 하느님께서 받아들인 사람 의 형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성화상 문제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성화상 파괴 운동으로 발전하였 다. 성화상 파괴 논쟁의 발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 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에 따르면, 성화상 공 경에 대한 반대는 소아시아의 주교들이 성화상 공경을 반대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교들은 724 년경에 제르마노스 총대주교에게 성화상 공경을 금지시 키도록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레오 3세 황제(717~ 741)에게 찾아가 동의를 구한 뒤 자신들의 교구로 돌아 가 성당에서 성화상을 제거하고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였 다. 이어 726년에 황제는 국민들에게 성화상 공경을 포 기하도록 칙서를 반포하고 황궁의 칼케(Chalke) 문에 있 는 예수의 초상을 제거하도록 조처하였는데, 이로 인해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성화상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세 편의 글을 발표하여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 를 연결시켜 성화상 공경을 옹호한 요한 다마세노(Joannes Damascenus, 675?~749)는 형상을 금지하는 십계명의 제1 계명은 우상 숭배에 떨어지기 쉬웠던 유대인들을 대 상으로 한 율법이며, 하느님께서 육체를 갖고 나타나신 이후 성화상 공경은 우상 숭배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성화상 공경은 성화상 자체가 아니 라 성화로 표현된 인물을 경배하는 것이며, 성모 마리아 와 성인들에 드리는 공경(προσκύνησις, veneration)은 하 느님께 드리는 흠승(λατρεία, adoration)과는 다르다고 설 명하였다. 그 후 레오 3세 황제는 제르마노스 총대주교에게 제국 의 성화상 금지 정책을 지지하도록 요구하였으나 받아들 여지지 않자 이를 교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에게 호 소하였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황제는 제르마노스를 해임하 고 교황에게 성화상 금지를 결정하는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지만 교황은 성화상 공경을 옹호하면서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에 730년 1월 17일 레오 3세 황 제는 성화상 공경 금지 칙서를 공포하고 성당의 성화상 철거를 명령하였다. 성인들의 유해가 파괴 또는 소각되 자 이에 대응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는 731 년에 로마 교회 회의를 소집한 뒤 성화상 파괴자들을 파 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성화상 파괴 운동은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741~775) 때 더욱 격심해졌 다. 황제는 754년 2월 10일 338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히에레이아(Hiereia)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참석 주교들의 만장 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규정 하고, 정통 그리스도론에 근거하여 성화상 공경은 이단 인 네스토리우스주의나 그리스도 단성설에 빠지게 된다 고 주장하였다. 이 교회 회의가 인정한 예수의 형상은 미 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체(聖體)와 성혈(聖血)뿐이었으 며, 성화상 공경을 주창하던 제르마노스와 요한 다마세 노를 우상 숭배자로 단죄하였다. 이어 황제는 성화상 공 경에 열성적인 대중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수도자들을 박해하였고 수도원을 폐쇄하였다. 그 후 레오 4세(775~780)가 황제가 되자 성화상 공경 을 지지하던 그의 아내 이레나(Irena)의 영향으로 성화상 공경은 묵인되었으며, 레오 4세 사망 후 콘스탄티누스 6 세(780~797)가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자 모후 이레나가 섭정하면서 786년에 성화상 신심은 회복되었다. 이때 동로마 제국에서는 히에레이아 교회 회의가 교회의 전체 공의회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성화상 공경을 승인할 전체 공의회를 소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황후는 교 황의 승인을 받아 787년 8월 1일(또는 17일) 콘스탄티노 플 '사도들의 성당' 에서 공의회를 개회하였으나 성화상 파괴를 주창하던 군인들의 난입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사태가 수습된 뒤 같은 해 9월 28일 니체아에서 제2차 공의회가 속개되어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단죄한 754년의 히에레이아 교회 회의의 결정은 무효라고 선언 하였다. 요한 다마세노의 견해를 근거로 하여 성화상의 신학과 성화상의 영성을 정립한 이 제2차 니체아 공의회 에서는 성인 공경과 성해 공경을 장려하고 성화상 공경 을 승인하였으며 '공경' 과 '흠승' 을 구분하였고, 성화상 공경의 의미와 효과를 설명하였다. 아울러 성화상 공경 을 사도들의 신앙 · 교부들의 신앙 · 정통 교회의 신앙이 라고 선언하면서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사람은 성무 집행 정지나 파문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처럼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성화상은 단순하게 시각적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에게 전 해지는 통로의 역할도 하는 성사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 며, 성화상은 하느님의 신비를 담고 있는 기록이라고 가 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화상 신학은 '색채 신 학' 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레오 5세 황제(813~820)에 이르러 성화상 파괴 운동은 다시 시작되었는데, 황제는 총대주교 니케포로스 (Nikephoros, 806~815)에게 성화상 문제를 논의하도록 지 시하였다. 그러자 총대주교는 성화상 문제는 이미 제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였 다. 이에 황제는 그를 해임 · 추방하고 성화상 파괴론자 인 테오도토스(Theodotos, 815~821)를 총대주교로 임명하 였는데, 새 총대주교가 교회 회의를 열어 히에레이아 교 회 회의의 결정을 다시 인정함으로써 성화상 공경자에 대한 박해가 재발되었다. 〔논쟁의 해결〕 레오 5세를 계승한 미카엘 2세 황제 (820~829)와 테오필루스 1세 황제(829~842)의 시대에도 성화상 파괴 정책은 계속 시행되었으나, 나이가 어린 미 카엘 3세(842~867)가 황제로 등극한 후 황후 테오도라 (Theodora)가 섭정하면서 성화상 파괴 운동은 서서히 수 그러들기 시작했다. 황후는 총대주교 요한 7세(832~842) 를 파면하고 성화상 공경자인 메토디오스 1세(842~846) 를 임명하였으며, 30여 년 동안 성화상 파괴 운동으로 투옥된 성화상 공경자들을 석방하였다. 또한 새 총대주 교는 843년에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제2 차 니체아 공의회의 성화상 공경 법령을 다시 확인하였 고, 성화상 파과자들을 파문함으로써 성화상 논쟁은 끝 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3월 11일 사순 시기 첫째 주일에 정통 신앙의 승리를 공표하고, 이러한 승리를 기 념하여 사순 시기 첫째 주일을 '전통 신앙의 주일' 로 제 정하였다. 〔의 의〕 성화상 공경의 승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결 과를 가져왔다. 첫째, 비잔틴 종교 예술의 특징인 교회 장식에 있어서 새로운 양식이 도입되어 성화상이 화려하 기보다는 신학 · 성서 내용 · 전례 집전에 맞게 제작되었 다. 성화상 공경은 모자이크나 벽화 등의 종교 예술에 제 한된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유해 공경으로 이어져 국가 와 도시들은 수호 성인의 유해를 모시게 되었다. 둘째, 성화상 파괴 세력의 패배로 수도원의 부흥 시대가 이루 어졌다. 수도회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가 커지면서 수도 회 자체도 엄격한 수도 규칙을 준수하는 공동체로 개혁 되었고 위상도 강화되었다. 수도회는 중세 동방 교회의 예술 · 문학 음악 · 전례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셋째, 동방 교회의 위상이 향상되었다. 황제 교황주의 (caesaropapismus)에 따라 국가가 교회 내정 특히 교리 문 제에 간섭하던 과거와는 달리 교회는 황제의 개입에서 벗어나 자율권을 갖고 전통 교리를 수호하고 간직할 수 있었다. 황제는 대관식에서 교회의 정통 신앙을 보호하 겠다는 선서를 장엄하게 하고 교회의 공의회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넷째, 성화상 공경자들은 성화상 을 옹호하였던 로마 교회를 전통 신앙의 수호자로 보았 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교회 안에서 교황의 권위가 인 정받게 되었다. (→ 니체아 공의회 ; 동로마 제국 ; 동방 교회 ; 성화상) ※ 참고문헌  Denzinger · Schonmetzer, Enchidirion Symbolom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Barcione · Friburgi Brisgoviae · Romae · Neo-Eboraci, 35th ed., 1979/ L. Ouspensky, Theology of the Icon, New York, St. Vladimir Seminary Press, 1978/ William Ragsdale Cannon, History ofChristicomity in the Middle Ages. From the Fall ofRome to the Fall of Constantinople, New York · Nashville, Abingdon Press, 1960/ John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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