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가지 본당
- 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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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薪枝里) 소재. 1898년 4월에 섶가지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지만, 1902년에 영유(永柔) 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가 1931년에 숙천(肅 川) 본당이 설립되자 또다시 이곳으로 소속이 변경되었 다. 〔역대 신부〕 초대 샤플랭(O. Chapelain, 채시걸) 오스 칼(1898. 4~1901), 2대 멩(J. Meng, 明若一) 요한(1901~ 1902) 신지리(일명 섶가지) 일대는 평안도 지역에서 가장 일 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 가운데 하나였다. 즉 1864년경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평안도 지역을 순방할 때 은산(殷山)의 천성산(天聖山) 밑에 있는 '적뢰동 공 소' 에서 세례를 받은 강 요셉과, 평양 부근의 '광너울 공 소' 에서 세례를 받은 강용홍(康龍洪, 베드로) · 김덕삼 (金德三, 요셉) · 김의경(金義慶, 안토니오) 등이 고향 섶가지로 돌아와 전교하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곳 신자들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각지로 흩어졌다 가 후에 다시 모여 교우촌을 형성하였는데, 1892년경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황해도 수안(遂 安)의 덕골〔德谷〕에 거처하게 되자 그곳까지 가서 성사 를 받기도 하였다. 이어 르 장드르 신부는 1895년 9월 에 평양 외성(外城)으로 거처를 이전하여 본당(관후리 본 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는데, '섶가지 공소' (회장 : 강용홍) 가 설립된 것은 그 이듬해였다. 이때부터 양덕현(梁德 鉉, 힐라리오)의 사가(私家)를 강당으로 개조하여 공소 예절을 본 신자들은 1898년에 섶가지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샤플랭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맞게 되었다. 샤플랭 신부는 회장에 김양익(金養翼, 요한), 복사에 양덕현을 임명하고 신자들과 함께 해창(海倉)의 와재(瓦 材) 창고를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그런 다음 의주 · 개천 · 순천 · 은산 · 영유 · 갈원 · 가래골 · 당리 · 안주 · 탄정 등지에 공소를 설립하는 등 본당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다가 1901년 봄 판공 성사 후 서울로 전임 되었다. 이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멩 신부가 1902년에 군청이 있는 영유읍으로 본당을 이전함으로써 섶가지 본 당은 영유 본당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곳 신자들은 1908년에 성숙학교(聖肅學校)를 설 립하였으며, 1913년에는 강당 신축과 함께 로마에서 종 을 구입해 오는 등 본당 부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1931년에 숙천 본당 공소로 소속이 변경되었 고, 광복 이후에는 공산당의 탄압으로 공소마저 폐쇄되 고 말았다. (→ 평양교구 ; 숙천 본당 ; 영유 본당) ※ 참고문헌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平壤 教區史編纂委員會 編,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李裕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