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소

古聖所

〔라〕limbus · 〔영〕lim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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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소에 내리신 예수 그리스도(지오토 작 ) .

고성소에 내리신 예수 그리스도(지오토 작 ) .

거품 내지는 경계(境界)처럼 무엇인가 주변에 덧붙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튜튼족의 말 '림보' (limbo)에서 유래한다. 가톨릭 신학에 의하면 이미 죽은 사람들 중에서 천국이나 지옥 또는 연옥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말한다.
고성소는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그리스도가 강생(降生)하여 이 세상을 구할 때까지 구약의 성조(聖祖)들이 기다리던 곳(limbus patrum)과 명오(明悟)가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들이 머무르는 곳(limbus puerorum/ infantium)이다. 대기 중이던 구약의 성조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전자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신경에 나오는 '고성소에 내리시어.."는 5세기까지의 신경 원문(DS 25 : Fragmenta symboli Gallicani antiquioris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교회 문헌에 최초로 이 구절(descendit ad inferna)이 나타나는 것은 체사리오(Caesarius Arelatensus, + 543)가 쓴 '신경에 대한 강론' (Sermo de symbolo)을 첨가한 7~8세기의 《구 갈리아 미사 경본》(Missale Gallicanum Vetus, DS 27)이다.
'고성소' 라고 번역된 라틴어 '인페리/인페르나' (inferi/inferna)는 문자 그대로 '지옥' , '저승' , '명부' , '사계'(死界)라는 의미로 히브리어의 셰올(Sheol)이나 그리스어의 하데스(Hades)를 뜻한다. 이 용어는 원래 죽음을 넘어선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만 예수가 '세올' 에 들어갔음을, 곧 '죽었음' 을 뜻했다. 해당 구절의 우리말 번역은 고성소(limbus)가 실재한다는 특정 신학의 견해에 따른 번역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고성소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은 이들의 구원 문제이다. 명오가 열리지 않은 상태, 곧 이성(理性)을 사용하여 스스로 죄를 지을 수 없는 단위의 사람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었을 때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해석의 근거는 세례를 통한 은총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을 만큼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 5). 토마스 아퀴나스(1224/5~1274)를 필두로 여러 신학자들이, 이들은 자연적 상태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누리고 있
지만 초자연적인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을 누리지는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개념의 전개 과정〕 세례받지 못하고죽은 어린이들이 머무르는 상태나 장소로서의 고성소라는 개념은 성서에도 교부들의 저작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 용어가 내세(來世)의 영혼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부터 이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 이들이 감각적 고통을 겪으리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12세기 이후 스콜라 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아서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에 의견을 달리했다. 이들은 감각적 고통이 아니라 천국 본향(本鄕)에 가지 못한 실향의 아픔 · 슬픔을 겪을 뿐, 자연 상태에서는 최고로 행복한 경지에 머무른다고 본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8~156)에서도 이 문제는 명시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내세에서 원죄에 대하여 어떤 형태의 벌을 받을 것인가가 잠시 논의되었을 뿐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신학자들은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이가 죽고 나면 내세에서 어떤 종류의 벌을 받게 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감각적인 고통을 받지 않는 특별한 장소나 상태로 옮겨질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교회의 가르침도 그러했다. 그러나 일부 다른 신학자들은 고성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지옥불의 고통을 받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이의 구원 문제는 당시로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은 셈이다. 이들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과 권위에 근거하였다. 다른 한편 고성소의 존재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 논거를 대었다. 토마스는 원죄란 본성의 죄이지 개별 인격체가 저지르는 본죄가 아니라고 보았으며, 원죄에 대한 처벌과 전혀 다르다고 보았다. 오로지 본죄만이 감각적인 고통을 자아낸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주장의 흔적이 그 후에도 계속 나타난다. 1201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가르침(DS 780)이나 제2차 리용 공의회의 가르침(DS 858) 그리고 피렌체 공의회(DS 1306)에서 반복하여 확인되고 있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엄격주의인 얀센주의(Jan-senism)는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근거를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찾았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스콜라 신학자들이 말하는 고성소란 펠라지우스(Pelagius)가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며, 세례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가 지옥불에 떨어짐은 계시된 교의라는 것이다. 얀센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1786년 이탈리아의 피스토이아(Pistoia)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Synodus)에서 선언하고, 고성소의 존재를 내세우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몰아세웠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교회의 답변은 1794년 비오 6세의 회칙 <아욱토렘 피데이>(Auctorem Fidei)를 통하여 나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 드러나는 교회의 기본 태도는 중상 모략자들로부터 교회의 공통되는 가르침을 보존한다는 자세였다. 이러한 태도가 곧 고성소의 실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비오 6세의 회칙은 얀센주의자들의 고성소에 대한 공공연한 부인을 용인하는 한편, 다만 그들의 독선적인 부인 태도에 제동을 걸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비오 6세의 회칙은 아우구스티노 이래 지속되어 오던 엄격한 가르침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의 지옥행을 공공연히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들의 구원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배경에도 역시 고성소의 실재가 부인되지만, 안센주의자들과는 정반대의 이유에서이다.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들에 관한 문제를 고성소라는 개념으로 푼다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 구원을 위하여 세례가 필수 불가결의 요소임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고성소를 통하여 문제를 종결할 때, 하느님의 보편 구원 의지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정식의 세례 성사를 대체하는 '열망의 세례' 〔火洗〕를 내세운다. 죽음의 순간에 모종의 초자연적인 빛의 인도로 어린이의 명오가 열려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게 된다는 의견이다.
다른 신학자들은 부모나 교회에 의해서 제공되는 열망의 세례를 말하기도 한다. 특히 교회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때때로 죽음 자체가 세례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비명(非命)에 간 죽음 그 자체가 세례를 필요로 하는 표지라면 그리스도의 보편 구원 의지를 거부하는 꼴이 된다. 다른 이론에 의하면, 이와 같은 어린이들은 임시로만 고성소에 가게된다. 마지막 날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의 의〕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긍정하는 신학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분포상 아직 소수에 머무르고 있으며, 신학자들 사이에도 많은 비판과 반대가 있다. 이러한 어린이의 죽음 이후의 운명은 실로 복잡한 문제이다. 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들은 고성소로 간다. 거기에서 그들은 감각적인 아픔은 느끼지 않으며 실향의 아픔과 슬픔만을 간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죄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와 같은 고성소에 의한 해결을 분명하고 최종적인 해결로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고성소에 관한 문제는 신학 분야에서 아직까지 뚜렷한 해결이 나지 않은 문제이다. 고성소의 실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인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세례받지 않은 어린이와 그의 구원에 관한 문제는 아직까지 널리 공개된 문제도 아니다. 1958년 교황청의 권고(AAS 50)는 교회의 신중한 태도를 잘 나타낸다. 불확실한 구원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되도록이면 빨리 어린이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권고이다. 이렇게 볼 때 고성소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아직까지 미해결의 문제이지만 고성소가 지니는 중요성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는 세례가 절대 필요함을 부각시키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Henricus Denzinger-Adolfus Schoenmetzer S.J.,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Freiburg i. Br., 32 ed., 1963/ P.J. Hill, 《NCE》 8/ P. Gumpel, 《LThK》 6/ -, 《SM》 3/ Joseph Ratzinger, 장익 역, 《그리스도 信仰, 어제와 오늘 - 使徒信經에 관한 講義》, 분도출판사, 1974/ Herbert Vorgrimler, Der Tod im Denken und Leben des Christen, Duesseldorf : Patmos Verlag, 1978(심상태 역, 《죽음, 오늘의 그리스도교적 죽음 이 해》, 신학선서 5, 성바오로출판사, 1982)/ Gisbert Greshake, Staerkerals der Tod : Zukunft. Tod. Auferstehung. Himmel. Hoelle. Fegfeuer, Mainz : Mathias Gruenewald Verlag, 1976(심 상태 역, 《종말 신앙, 죽음보다 강 한 희망》, 신학선서 3, 성바오로출판사 , 1985). 〔朴日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