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오 1세 Sergius I (?~701)

글자 크기
7
세르지오 1세 교황.

세르지오 1세 교황.


성인. 교황(687~701). 축일은 9월 8일. 출생 연도는 모 르나 시칠리아의 팔레르모(Palemo)에서 안티오키아 출 신으로 시리아계 가문의 상인인 티베리우스(Tberius)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후, 아데오다토 2 세(672~676) 교황 때 로마에 있는 '음악 학교 (schola cantorum)에 들어가 교회 활동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680 년경에 시종품을 받고 683년 6월 27일에 교황 레오 2세 (682~683)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예로니모 순교 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에 따르면 그 해 8월 11 일 성녀 수산나 성당의 명의 사제(titulus)로 임명되었다 고 한다. 687년 9월 21일 교황 코논(686~687)이 사망하자 로마 시민들은 후임 교황 선출을 놓고 두 파로 크게 나뉘었는 데, 일부 로마 시민들은 교황 요한 5세(685~686)의 사망 이후 교황 후보로 지명되었던 대사제 테오도로(Theodorus)를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다른 일부는 라벤나에 있던 동로마 제국의 총독인 플라티나(Giovanni Platina)의 지지 를 받은 대부제 파스칼(Paschalis)을 교황으로 선출하였 다. 교황 요한 5세가 사망하였을 때 역시 후보로 올랐던 파스칼은 코논 교황의 생존시에도 교황이 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결국 테오도로는 자신 의 지지자들과 함께 라테란 궁내에 자리를 잡았고, 파스 칼은 성 실베스텔 경당에서부터 궁 외부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분열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들이 교황직에 오 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본 고위 성직자들은, 훗날 교황 이 된 요한 7세 교황(705~707)의 아버지 플라톤(Platon) 에 의해 새롭게 단장된 팔라티노(Palatinus) 궁전에 모여 로마 성직자단의 일원으로 성녀 수산나 성당의 명의 사 제였던 세르지오를 성 체사리오(St. Cesarius) 경당에서 교 황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세르지오 는 같은 해 12월 15일 교황으로 서임되었다.
테오도로는 새 교황에게 즉시 순명하였지만, 파스칼은 플라티나 총독에게 로마로 와서 선거 결과를 번복하도록 비밀리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로마에 온 총독은 세르지오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보고 곧바로 새 교황 선거는 적법한 것이었다고 인정하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교황 세르지오 1세는 플라 티나 총독의 동의가 필요하였고, 이 동의는 파스칼과 총 독 간에 약속했던 금 100파운드가 지불된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파스칼은 692년에 새 교황을 인정하고 계속 대부제직에 머물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 술을 한다는 혐의와 다른 과실로 인해 그 직분에서 파면 되었고, 수도원에 감금되어 회개의 삶을 살다가 5년 후 사망하였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전례와 성사의 발전 도모 : 교황 세르지오 1세는 선임 교황들이 행하던 사도직을 이어받 아 완성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우선 그는 전례를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켰다. 즉 미사 중 성체를 쪼개는 동안 사 제와 신자들이 함께 세 번에 걸쳐 '하느님의 어린 양' (Agnus Dei)을 노래하도록 하였고, 네 개의 성모 마리아 축일(현재의 주님 탄생 예고 축일 · 성모 성탄 축일 · 주님 봉헌 축일 · 성모 승천 축일) 때에는 성 하드리아노 성당에서부 터 성모 마리아 대성전까지 '성모 호칭 기도' 를 바치며 행렬하도록 하였다. 이는 이미 로마 전례에 도입되어 있 던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하였을 뿐이지만, 이로 인 하여 이 축일들이 로마 교회에서 지내는 성모 마리아의 4대 축일로 정착되었다. 또 교황은 예수가 매달렸다는 십자가 일부를 발견하였고, 베드로 대성전 · 바오로 대성 전 · 성녀 수산나 성당 등 다수의 성당 복원 공사와 장식 에 힘을 기울였으며, 베드로 대성전 안에 무덤을 만들어 교황 레오 1세(440~461)의 유해를 이장하고 그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찬 비명을 만들어 세웠다. 이로써 레오 1세 가 베드로 대성전에 묻힌 첫 교황이 되었다. 세르지오 1 세 교황은 또 세례받지 않고 사제 서품을 받은 이를 면직 시키고 정기적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를 받은 후에 다시 서품을 받아야 한다는 결정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선교에의 기여 : 선임 교황들의 영국 선교 열의 를 되살려 영국의 종교 문제에 계속적인 관심을 보인 세 르지오 1세 교황은 689년 4월 10일 성토요일에 로마로 성지 순례를 온 웨식스족(Wesex)의 왕 체드왈라(Caedwalla)에게 라테란 대성전에서 세례를 주었으며, 693년 에는 캔터베리의 대주교 브리드월드(Brithwald)에게 팔리 움(pallium)을 보내 앵글로 색슨족의 교회에 재치권을 사 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빌리브로르도(Wilibrordus, 658~ 739)를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랑크 왕국으로 파견하 였고, 695년 11월 27일에는 프랑크 왕국의 궁정 대신 페핀(Pepin)의 간청을 받아들여 성 체칠리아 성당에서 빌 리브로르도를 프리지아(Fisia)의 대주교로 서임하면서 글레멘스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팔리움도 주었다. 아울러 700년에 역시 페핀의 간청을 받아들여 빌프리도(Wilfridus, 633~709)에게 요크(York)의 주교좌 복권을 허락하였 다. 교황은 또 영국의 지역 교회 문제를 상의하고자 베다 존자(Beda Venerabilis, 672/673~735)가 수도 생활을 하던 제로우(Jarow) 수도원에 서신을 보내어 교황청으로 소 환하였는데, 훗날 교회 학자란 칭호를 받은 베다는 영국 교회의 역사를 기록으로 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로마 교회의 권위 수호 :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685~695)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교황의 동의도 없이 692년 에 콘스탄티노플 궁전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면서 교황 을 초대하지도 않았다. 24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던 이 회의를 '귀니섹스툼(Quinisextum) 교회 회의' 라고도 하지만, 황제 궁전의 커다란 원형 거실(trullus)에서 개최 되었다고 해서 '트룰라눔(Trullanum) 교회 회의' 라고도 한다. 이 교회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주교들은 콘스탄 티노플 주교좌의 위상을 격상시키자는 결정을 하였는데, 이는 칼체돈 공의회(451)의 제28 조항을 인정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와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 회(680~681)의 결정 사항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한 성직자들을 교회에 받아들이자는 결정은 이미 서 방 교회에서는 사라진 그리스 정교회의 관습인 사제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교회 회의의 조항 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것 을 금지하는 조항과 서방 교회와의 차이점을 보이는 사 순 시기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102개 조항이 담겨 있는 이 교회 회의 문헌은 6개의 사본으로 만들어졌으며,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는 이 것을 로마로 보내 교황의 서명을 받도록 하였다. 로마로 보내진 이 사본에는 이미 황제의 서명이 되어 있었고, 그 다음 란이 교황의 서명 자리로 비워져 있었으며, 그 다음 에는 콘스탄티노플 · 안티오키아 · 예루살렘 · 알렉산드 리아 총대주교들의 서명과 참석 주교들의 서명이 있었 다. 그러나 교황은 이 교회 회의에서 결정된 조항들이 교 회의 전통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였고, 공 식적으로 이 문헌이 읽혀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교황은 황제의 노여움을 샀고, 황제는 콘스탄 스 2세(641~668) 황제가 교황 마르티노 1세(649~653)에 게 한 것처럼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황제는 교 황의 두 참모를 체포하고 자카리아(Zacharias) 장군에게 교황을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해 오도록 체포 명령을 내렸 다.
그러나 이 시기는 마르티노 1세 교황 때와는 다른 상 황이었다. 황제의 이 처사에 로마 시민들뿐만 아니라 라 벤나와 펜타폴리스(Pentapolis), 그리고 인접 지역에서 교 황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군들을 동원하여 교황의 체포를 막았다. 그러자 겁에 질린 자카리아 장군은 교황에게 자 신의 생명을 구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라벤나 군대가 로 마 시로 입성하자 로마 시민들은 라테란 궁전 앞에서 이 들을 환영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 황제의 권한을 종식시킨 반면에 교황의 권한을 강화시켜 교황이 이탈리아의 최고 권한자임을 입증하는 결과를 가 져왔다. 또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교회 전통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보여 주는 사건이 되었다. 유스티니 아누스 2세 황제는 695년에 면직되었고, 그 후 교황 세 르지오 1세가 황제의 후임자인 레온티우스(695-698)와 티베리우스 3세(698~705)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전 해 오는 바가 없다.
교황은 서방 교회 내에서 로마의 권위를 강하게 부상 시켰는데, 로마 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 사이에 현존하 던 분열을 종식시켰고,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는 다마소 (Damasus)를 라벤나의 주교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699 년에는 롬바르디아의 왕 쿠니페르토(Cunipertus)가 553 년 교황 비질리오(537~55)에 의해 단죄되었던 삼장서 논쟁(三章書論爭, controversia de tribus capitulis)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한 아퀼레이아(Aquileja) 관구와 화해할 것을 청해 옴으로써 롬바르디아와 로마와의 친교가 다시 회복 되었다. 그리고 코르몬스(Comons)의 총대주교에게 롬바 르디아 지역의 재치권을 인정해 주었다. 깊은 신심과 박 학 다식을 겸비하였던 교황 세르지오 1세는 701년 9월 8일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공 경〕 교황의 무덤은 베드로 대성전에 마련되었다. 빌리브로르도의 전례력은 교황을 기억하며 행한 예식이 교황 사망 직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고, 《로 마 순교록》(Martirologium Romanum)에는 축일이 9월 8일 로 수록되어 있다. (→ 삼장서 논쟁 ; 영국)
※ 참고문헌  L. Duchesene, E. De Boccard ed., Le Liber Pontifcalis, Texte, Introduction et commentaire, Paris, 1955/ 《ODCC), p. 1486/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86/ Antonino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cverso 2000 anni di storia, Roma, Futura Edizioni, 1997/ Luigi Trepepi, Ritratti e Biografie dei Romani Pontefici, Roma, Tipografia della Pace, 1879/ Institutum Patristicum Augustinianum, Patrologia, vol. 4, Roma, Marietti, 1996/ A. Amore, 《EC》/ A. Di Bernardino, 《DPAC》/ Jean Durist, trad. di Francesco Saba Sardi,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Milano, Bompiani, 1996/ Niccolo Del Re, Bibliotheca Sanctorum, Roma, Istituto Giovanni XXIII della Pontificia Università Lateranense, 1968/E. Amann, 《DThC》.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