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판도, 지롤라모 Seripando, Girolamo(1493~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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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추기경.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설교가. 반종교 개 혁에 기여한 신학자. 철학자. 본래의 이름은 트로이아노 (Troiano). 1493년 5월 6일 이탈리아 페루지아(Pengia)의 트로 이아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2세 때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나, 1507년에 성 요한의 아우구스티 노 은수자회로 옮긴 후 지롤라모라는 수도명으로 서원하 였고 그곳에서 문법 · 교회법 · 신학 · 철학 등을 공부하 였다. 1511년 로마에서 공부할 때 그는 같은 수도회 형제로 10년 연상의 루터(M. Luther, 1483~1546)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둘은 아우구스티노회의 문화적 · 영성적인 형성 과정을 같은 시기에 거쳤지만 세리판도는 교회 안 에서 루터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였다.
설교에 재능이 있던 세리판도는 1513년에 사제 서품 을 받고, 비테르보(Viterbo)의 관구장인 가니시오(Egidio Canisio)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가니시오 관구장의 인도로 인문주의적 · 철학적 · 신학적인 지식을 얻었고, 여기서 얻은 지식들과 더불어 성서와 교부학과 아우구스티노에 정통한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자신이 속 한 수도회뿐만 아니라 전 가톨릭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 가니시오 관구장의 영향으 로 '펠라지우스' (Pelagius, 354~420?) 사상에 대항하는 이 론을 알게 된 세리판도는 1516~1517년에 철학과 신학 을 새롭게 공부하면서 설교가로서의 초기 활동을 시작하 였다. 그러나 1518년부터는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을 가 르쳤고, 1523년에 로마와 나폴리로 돌아온 후에는 설교 활동과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사 상〕 가톨릭 개혁 노선 : 당시 나폴리에는 스페인의 발데스(Juan de Valdés, 1490?~1541)가 창설한 '발데스 영 성 운동' 이 성서 주석과 편지를 통하여 활발하게 전개되 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리판도는 나폴리에 신플 라톤주의를 꽃피우는 데 한몫을 담당하였으며, 나폴리의 인문주의자들과 학술원에 소속된 학자들로부터 호의와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플라톤에 대한 연구를 109개 질 문으로 완성시켰다. 또 발데스 개혁 운동가들과 친밀한 유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 운동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몇 명의 종교 개혁자들(P. Carnesecchi, I. Manriquez, B. Ochino, P.Vermigli, G. Priuli, A. Coccoano)과 친분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발데스 사상에 동의하기에는 세리판도가 너무 정통적이 었고 가톨릭적이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일어난 이 영성 운동이 가톨릭 교회를 위한 진정한 개혁이라기보다는 공 공연히 교회에 대항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1535년에 이 운동에 반대하였다. 이로써 자연히 이탈리아 종교 개혁자들과 멀어지게 되었지만, 그는 가톨릭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심각히 감지하고 있 었다.
또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리기 10년 전인 1531년 10월 26일에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로부터, 그 후에는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로부터 공의회를 준 비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의 서적을 읽어도 좋다는 공식 적인 허락을 받았으며, 교황을 직접 알현하여 서로의 의 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종교 개혁 자들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의 특정 문제점들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정통 아우구스티노 사상과 사도 바오로의 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도록 하는 데 영 향을 주었다. 또 베로나의 참사 위원장으로 임명받은 후 에는 베네토 · 피렌체 · 베로나 지역으로 파고드는 종교 개혁 사상에 대처하기 위하여 개혁자들과의 논쟁에서 야 기되는 문제들, 즉 은총의 효과 · 원죄 · 개인의 죄 · 구 원 · 자유 등에 대해 가톨릭적인 확실한 응답을 주기 위 하여 아우구스티노의 '펠라지오 반박' (anti-Pelagio)에 대 한 저서 《성령과 글》(De Spiritu et littera)을 깊이 연구하였 다. 인문주의나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교회에 대한 호교론적인 입장 앞에서는 부차적인 것이었 다. 그가 신플라톤주의와 인문주의에 관심을 보였던 것 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생활을 잘하기 위해 계시 사건들을 더욱 분명히 이 해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도회 총장이었던 아프루티노(Giovanni Antonio Aprutino)가 사망한 후 1538년에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아 우구스티노회 총장 대리로 임명된 그는, 이듬해에 열린 관구장 회의에서 총장으로 선출되어 1551년까지 총장직을 수행하였다. 1546~1547년에는 수도회에 루터주의 의 영향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회원들을 방문했고, 프로테스탄트적인 경향을 가진 회원들은 추방 하였다. 또 독일 관구 비서인 호프마이스터(Johannes Hoffmeister, 1509~1547)와는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하였다.
의화론 : 1542년에는 체르비니(Cervini) 추기경의 신 임을 얻어 트리엔트 공의회의 첫 작업을 위한 공의회 의 안 작성 회의에 참여하여 설교의 중요성과 가치, 설교가 사제나 수도자에게 맡겨져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주장하 였다. 그리고 1546년에는 오래 전부터 문제로 대두되었 던 신앙의 '이중 의로움' (duplex justitia)을 토론 주제로 제안하였다. 루터의 사상은, 인간은 그 자신의 죄 때문에 도덕적으로 공덕을 쌓을 수 없고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 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화된다는 것으로 '오직 신앙'(sola fidei)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의 가 치를 경시하는 루터의 사상과는 달리 세리판도는 하느님 안에서 의화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선를 행하 고 공덕을 쌓을 수 있으며, 은총에 의해 근본적으로 쇄신 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선과 악 사이에 살면 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나약한 인간성을 고려할 때, 인간 존재의 의화는 인간이 행한 선한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 해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 장하였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접목됨으로써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모든 것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세리판도의 이러한 주장은 루터의 신앙주의(fideismus) 와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사상적 배경을 가 지고 있었다. 세리판도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신앙 · 신뢰 · 자비 · 정의 등을 통합시키려고 노 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의견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채택되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1547년에 폴 (Reginald Pole, 1500~1558)과 함께 초안을 많이 수정하여 의화 과정에서의 신앙과 공덕의 역할 등을 내용으로 한 '의화' (justificatio) 사상을 전개하였고, 이를 공의회의 제 6 회기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의화와 공덕에 대 해 인간학적이며 법적인 개념을 따르던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 의해 거부되었다.
〔사목 직무 및 공의회 활동〕 1550년에 나폴리로 돌아 온 세리판도는 아베르사(Aversa) 교구의 주교직을 위임 받았으나 거절하였고, 이듬해에는 건강 문제로 수도원 총장직마저 사임하였다. 그 후 연구에 전념하면서 나폴 리 카르보나라(Carbonara)의 성 요한 도서관을 설립하였 고, 1553년에는 카알(Karl) 5세 황제에 의해 나폴리 시 대표로 외교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브뤼셀에 파견되었 으며, 이듬해 5월 15일에는 시스티나 경당에서 주교로 성성되어 살레르노(Salerno)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 다. 우선 사목을 위한 방법의 연구에 착수한 세리판도는, 주교직이란 남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봉사로써 이루 어지는 사랑의 직무라고 생각하였고, 주교의 본질적인 의무는 설교와 신자들의 영혼을 구하는 데 있다고 확신 하였다. 주교로서 그는 신망애(信望愛)의 대신덕을 겸비 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전하 고 수호하는 것이 주교의 첫째 과업이라고 생각하였다.즉 교회의 정통 교의를 신자들에게 전하고 그것을 반대 하는 자들로부터 교회의 진리를 옹호하는 일이라고 확신 하였다. 그리고 설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전 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였으며, 실제로 설교를 통하여 성 서나 도덕적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 한 교육에 힘썼다. 그의 설교의 주요 주제는 바오로 서간 이었고,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모방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1560년에는 교황 비오 4세(1559~1565)에 의해 나폴리 왕국의 제1 궁정 사제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이듬해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성서 보급 확산에 대응하여 가톨릭 성서와 교회 서적을 통해 가톨릭 문화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교황청 인쇄소를 설립 할 것을 교황에게 촉구하면서 인쇄소 경영을 마누치오 (Paolo Manuzio)에게 맡기도록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그 해 11월 말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져 실행되었다.
1560년 11월 29일 트리엔트 공의회가 다시 개최되자 세리판도는 이듬해 3월 25일 다른 3명의 교황 특사들(S.Osio, L. Simonetta, E. Gonzaga)과 함께 트리엔트로 파견되어 공의회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공의회의 의안 결정에서 발생하는 상반되는 불화를 해결 하려고 노력하였고, 정확성과 화해의 정신으로 교회 안 에 개혁을 가져오도록 하는 데 전력하였다. 그리고 공의 회를 위해 수도회 · 결혼 · 교회 제도 · 수도원 · 신학자 들 · 미사 등 6개의 개혁안을 준비하였다.
신권(神權) 문제 : 당시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교구 주 교들은 본래의 사목직을 망각하고 개인적으로 일정한 부 를 보장받고자 부유한 대교구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신의 교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또 어떤 추기경들은 사목 자가 아니라 세속적인 교구 소유자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리판도는 성서에 근거하 여 주교들의 주거지 정착에 대한 의무를 1562년 4월 7 일에 비준하게 하였다. 따라서 성품성사 · 성무 · 교회 법 · 주교에게 위탁된 신자들 등으로 구분된 '신권' (Ius Divinum)을 거론함으로써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 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공의회에서 거부되고 말았고 주 교의 '신권' 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표명 때문에 교황 눈 밖에 나게 되었다. 그 후 1564년까지 설교가로 활동하 였는데, 1562~1563년 사이에 발생한 수도회의 성사 및 주교 주재지 논쟁에서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 였다. 그 후 과도한 일과 건강 약화 그리고 그를 배척하 는 분위기와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1563년 3월 17일 "예수님께 나의 영혼을 맡긴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 다. 아직 편집되지 않은 것을 포함한 수많은 성서 주해와 신학 저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교화하는 글을 남긴 세리판도는, 생전에 원했던 대로 트리엔트에 있는 아우구 스티노회의 성 마르코 성당에 묻혔다.
〔주요 저서〕 세리판도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다음과 같 은 것들이 있다. 《아우구스티노회의 새로운 회헌》(Novae constitutiones Ordinis augustiniani), 《카알 5세 황제 장례식 에서의 강론》(Oratio in funere Caroli V Imperatoria max.) , 《니체아 신경과 성 아타나시오 신경을 더불어 설명하는 사도 신경에 관한 설교》(Prediche sopra il simbolo degli apostoli, dichiarato coi simboli del Concilio Niceno et di Santo Athanasio, Venezia, 1567), 《신경에 대한 설교》(Prediche sul simbolo), 《대다수 시민들이 요청하는 주교직에 대하여》(De multis in civitate necessariis Episcopis), 《바오로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주해》(Pauli epistulas ad Romanos et Galatas Commentaria, Napoli, 1601), 《주님의 기도에 대한 설교》(Prediche sul pater noster), 《바오로 신학이 가르치는 주교직》 (Episcopi descriptio ex Pauli doctrina), 《주교들의 큰 권한》 (De episcoporum maximo pondere) , 《진리를 보존하고 옹호 하는 주교의 주된 직무》(De Episcopi principali officio, defensione videlicet et tutela veritatis), 《바오로가 보낸 갈라디아서 주해》(Commentarium in epistolam divi Pauli ad Galatas, Venezia, 1569), 《강론 방법에 대하여, 혹은 사도 신경 해설》 (De arte orandi, seu expositio Symboli Apostorum), 《의화론》 (Trattato sulla giustificazione) , 《바오로가 보낸 고린토서와 데살로니카 전서 주해》(Commentaria in epistolas divi Pauli ad Corinthios et in I ad Thessalonicenses) 《신적 본성의 문제》 (Quaestiones de natura divina) , 《트리엔트 공의회의 이모저 모》(Farrago gestorum in Concilio Tredentino) 《그리스도교적 의로움과 자유》(De iustitia et liberate christiana) , 《일기》 (Diarium).
〔의 의〕 1903년에 편집된 그의 일기는 공의회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 분위기와 이 속에서 평온하지 못했던 그의 영혼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Diarium, 1513~1562) .세리판도의 사상에 반대하였던 많은 사람들도 그의 인 격 · 예리한 정신력 · 진지한 신앙심 · 위대한 사상은 인 정하였다. 가톨릭 교회 개혁의 진정한 선구자였던 세리 판도는 개혁에서 야기되었던 수많은 문제점과 어려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른 사상을 가진 반대자들의 이론을 존중해 주었다. 더구나 루터와는 달리 교회 전 통 · 가르침 · 교도권을 존중하였으며 교황권에 복종하고 충실하였다. 교회의 단일성을 사랑하였던 그는 쇄신된 '하나' 인 교회를 원하였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개 혁에 대한 그의 확고한 사상과 신학은 가톨릭 신앙 보급 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세리판도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 정하였고, 교황의 칙서를 통해 하느님의 신적 의지를 알 수 있다고 확언하였다.
세리판도는 주교 · 신학자 · 평신도 운동의 대표자로서 그리고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한 '복음주의' 혹은 교 회에 충실한 인문주의' 를 피력하며 이에 한몫을 담당하 였다. 가톨릭 교회에 전적으로 충실하였던 그는 교회를 위하여 교회 안에서 살고 죽기를 원하였다. 또 그 당시의 교회 분열에 대하여 가슴 아파했으며, 성체를 교회 일치 의 표징으로 여기고 성체는 지역 교회뿐만 아니라 전 교 회의 일치를 위해 필요하며 사랑의 빵을 영하고 이것을 실천할 때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의 일치(ecumenismus)를 위해서도 노력한 사람이었으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 심도 두터웠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에 따라 마리 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는데, 성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아 준 육체적인 어머니일뿐만 아니라 신앙으로 잉태한 영적 어머니이기도 하다고 주장 하였다. 성 요한의 아우구스티노회에 기증되었던 그의 도서 및 저서들과 서한들은 현재 나폴리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반종교 개혁 ;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 의화론 ; 트리엔트 공의회)
※ 참고문헌 A. Marranzini, Il ministero episcopale del cardinale Girolamo Seripando nell'arcidiocesi di Salerno(1554~1563), Salerno, 1993/ 一, Dibattito Lutero-Sripaando, Brescia, 1981/ A. Trapé, La dottrina de S. acerca de la concupiscencia, Ciudad de Dios 159, 1946/ -, Dibattito Lutero-Seripando su Giustizia e Libertà del cristiano, Humanitas 1, 1982/ D. Gutiérez, Testi e note su I'ultimo quadriennio del generalato di Seripando, Analecta Augustinian 28, Roma, 1965/ E. Pontieri, Girolamo Seripando e la cittta di Salerno sua sede arcivescovile(1 Rassegna storica salernitana 26, 1965/ F. Linguiti, Prediche di Girolamo Seripano, R. Migliaccio, Salerno, 1856/ F.C. Cesareo, The Image of Bishop in the Sermons of Girolamo Seripando, Augustinian Heritage 38, 1992/ G. Crisci, Fra Girolamo Seripando, Il cammino della chiesa saleritana nell'opera dei suoi vescovi(sec. V-XX), Napoli, Roma, 1976/ H. Jedin, Girolamo Seripando Leben und Denken im Geisteskampt des ХⅥ Jahrhunderts, Würzburg, 1937/ R. Abbondanza ed., Girolamo Seripando tra Evangelismo e Rifomma Cattolica, Napoli, 1981/ V. Grossi, La giustificazione secondo Girolamo Seripando nel contesto dei dibattiti tridentini, Analecta Augustiana 41, 1978.〔李再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