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아노 Sebastianus(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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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체칠리아의 지하 묘소에 그려진 토가를 입은 세바스티아노.
성인. 3세기 말경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황제의 대박해 때의 순교자. 축일은 1월 20일. 성 암브로시오(340-397)는 세바스티아노가 프랑스의 나르본(Narbonne)에서 태어난 뒤 그의 부모가 태어났던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 세바스티아노가 디오클레티아누 스 황제의 대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진술하였음 이 그의 지하 묘지에 의해 확증된다고 하면서(In Psalmum, cxviii ; Sermo, XX, no. sliv PL 15, 1497), 암브로시오 시대에 밀 라노에서는 이미 성 세바스티아노를 공경하고 있었다고하였다.
〔생애와 전설〕 450년경 아르노비오(Arnobius)라는 수 도자에 의해 쓰여진 《성 세바스티아노의 수난기》(Pasio S. Sebastiani) 외에 5세기경에 쓰여진 그의 행전들이 전하 는데, 이 작품들은 다소 역사적인 확실성이 부족한 전설 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이에 따르면 세바스티아노는 고 향에서 누리던 화려한 경력을 포기하고 감옥에 갇힌 그 리스도인들을 가까이에서 돌보기 위해 283년경에 로마 군대에 입대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신임을 얻 어 황제를 호위하는 친위대의 지휘관이 된 그는 박해로 붙잡혀 온 신자들을 비밀리에 도와 주었는데, 감옥에 갇 힌 마르코(Marcus)와 마르첼리노(Marcellianus) 형제 증거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다른 여러 순교자들이 고통과 죽음을 인내롭게 견디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 며, 붙잡힌 신자들을 감시하던 교도관들을 개종시키기도 하였다. 처음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세바스티아노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리스 도인들에게 행한 자신의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를 세바스 티아노가 공공연히 비난하자, 286년경에 한 배교자의 고발을 통하여 그가 신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 다. 세바스티아노는 두려움도 없이 황제 앞으로 나가 자 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하였다. 황제가 그 에게 "나는 너에게 총애를 베풀었고, 너는 내 궁정에서 살았다. 그런데 네가 황제와 신들의 적이란 말인가?" 하 고 묻자 세바스티아노는 "나는 항상 당신의 구원과 이 왕국의 개종을 위하여 예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천상의 하느님을 흠숭해 왔습니다" 라고 응답 하였다. 황제는 격노하여 그를 모리타니아의 궁수들에게 넘겨 온몸에 수많은 화살을 맞아 죽게 하였다. 그러나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쓰러져 있는 세바스티아노를 우연 히 발견한 카스툴로(Castulus) 순교자의 미망인인 이레네 (Irene)가 그를 정성껏 간호하여 기적적으로 회생시켰다.
회복된 후 세바스티아노가 황제 앞에 나타나자 황제는"너는 내가 궁수들에게 넘겨 죽도록 한 세바스티아노가 아니냐?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그는 "구세주 께서 나를 치유해 주셨고, 모든 백성들 앞에서 이 왕국의 가장 충실하고 선량한 시민들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짓 밟는 황제의 불의한 박해에 대항해 저항하도록 하셨소"하고 맞섰다. 이에 화가 난 황제는 세바스티아노를 몽둥 이로 때려죽이도록 한 다음 로마의 하수구인 '클로아카 막시마' (Cloaca Maxima, 큰 시궁창이라는 뜻)에 던져 버렸 다. 그의 죽음과 용기는 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한편 순교한 후에, 세바스티아노는 로마에 사는 루치나 (Lucina)라는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하수구에서 자신의 시 신을 찾아서 지금의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이 있는 자리 근처의 지하 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의 시신은 루치나 부인에 의해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지하 묘지 (in catacumbas in initio cryptae iuxta vestigia Apostolorum)에 묻혔다.
〔의의와 공경〕 데치우스(249~251) 황제 때 시작된 박 해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계속 이어졌는데,이 박해는 그리스도교를 없애 버리려는 로마 권력자들의 최후의 시도였다. 이 긴 박해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바로 이 혹독한 시련의 시기에 세바스티아노는 용기와 인내로 박해를 이겨내고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도록 힘을 북돋아 주었고, 그가 순 교한 후인 4세기경에는 그를 공경하는 신심이 로마와 밀 라노 등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는 마르코와 마르 철리노 형제 증거자와 함께 군인 순교자로 공경을 받았 는데, 특히 이 공경은 중세기에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교황 가이오(282/283-295/296)는 그에게 '교회의 수호자'(defersor ecclesiasticus)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하였다.
354년경의 《순교자 증언록》(Depositio Marytrum)과 《예 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 그리고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에는 세바스티아 노가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 있는 지하 묘지에 묻힌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교황 파비아노(236~ 250)와 더불어 나란히 전례력에 수록되었다. 367년에는 교황 다마소 1세(366~384)가 세바스티아노가 묻혀 있는 지하 묘지 근처에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을 설립하여 봉 헌하였으며, 1612년에 스치피오네(Scipione Borghese) 추 기경에 의해 복구되었는데, 이 성당은 로마의 7대 총대 주교좌 대성전 중 하나이다. 교황 식스토 3세(432~440) 는 성 세바스티아노의 지하 묘지를 기념하는 카타콤바를 지었다.
680년 로마에 페스트가 전염되었을 때 로마인들은 페 스트가 멈추기를 기원하며 세바스티아노의 유해를 모시고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자 그 뒤로 페스트가 사라졌다 고 한다. 또 1575년에 밀라노, 1599년에는 리스본(Lisbon)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성 세바스티아노의 보호를 기원하는 이런 예식이 거행되었었다. 이러한 공경 예식 을 통하여 사람들은 점차 성 세바스티아노를 성 베드로 와 바오로 다음의 로마의 주보 성인이자 페스트와 전염 병 희생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하게 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여러 지방으로 옮겨졌는 데, 성 메다르도(Medardus Noviomensis, 470~558) 주교에 의해 프랑스 수아송(Soissons)으로, 그리고 교황 그레고 리오 4세(827~844)에 의해 바티칸과 풀다(Fulda)와 파르파(Farfa)를 비롯한 다른 여러 지역들로 옮겨졌다. 이렇 게 이전된 유해에 대한 공경은 많은 기적들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성 화〕 성 세바스티아노를 주제로 한 미술 작품으로 는 두 가지 유형의 작품이 전해 오고 있다. 첫 번째 유형 은 노년의 궁정 관료 모습으로, 로마의 성 갈리스도 카타 콤바에 있는 성녀 체칠리아(Cecilia)의 지하 묘지에 있는 5세기경의 프레스코화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 작품 에는 토가를 입은 세 명의 순교자(Policamus, Sebastianus, Quirinus)가 그려져 있다. 또 하나는 7세기에 만들어진 로마 의 성 베드로 사슬 성당의 모자이크로, 세바스티아노가 궁정복을 입고 손에는 보석이 박힌 왕관을 든 백발 노인 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성화는 15세기 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였다. 15세기의 한 작품에는 세 바스티아노가 천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하늘에서 예수 그 리스도가 쏘는 페스트의 화살을 막기 위해 자신의 망토 를 넓게 펼쳐 마을 주민들을 감싸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Benozzo Gozzoli, Scènes de la Vie de Saint Augustin, 1465, 산 지 미냐노의 산 아고스티노 성당 소장). 또 세바스티아노 성인 이 노년의 로마 병사의 모습으로 갑옷에 창과 검과 방패 를 들고 있는 13세기의 작품도 있다(Pietro Cavallini, 로마 벨 라브로의 산 조르지오 성당 소장).
13세기부터는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지다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 옷을 벗은 청년 세바스 티아노가 궁수들 앞에서 영웅적인 병사처럼 기둥에 묶여 화살이 박힌 채 있는 두 번째 유형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Rogier Van der Weyden, Polyptyque du Jugement dernier, 1445~1450). 특히 수많은 미술가들은 이런 유형의 주제를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루었다(Giovanni del Biondo, 1379, 피렌체 박물관 소장 ; Botticeli, 1473, 베를린 달렘의 회화 갤 러리 소장 ; Mantegna, 1481,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 Hans Holbein il Vecchio, 1493, 모타코 고대 화랑 소장). 이러한 유형에서 약간의 변화가 피에로(Piero della Francesca)에 의해 시도 되었는데, 이 작품은 화살을 맞은 세바스티아노가 기둥이나 나무에 묶여 있지 않고 등뒤로 손이 묶인 채 있는 장면의 성화이다(Polyptyque de la Miséricorde, 1445~1448, 보르고 산 스폴크로의 화랑 소장). 드물게는 베네딕도회 수도복 차림을 한 이레네가 세바스티아노 몸에 박힌 화살을 빼는 장면이 그려진 성화가 등장하기도 하였다(Georges de La Tour, 1649, 베를린 달렘의 회화 갤러리와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 참고문헌 E. Hoade, 《NCE》 13, p. 18/ A. Amore, 《LThK》 9, pp.557~558/ Richard P. McBrien ed., The HarperCo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San Francisco, Harper Co., 1995, p. 1179/ Klemens Löffler, The Catholic Encyclopedia, New Advent Inc., 1997/ Rev. Clifford Stevens, The One Yearbook of Saints,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Inc., 1989, p. 281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Great Britain, 1983, p. 3471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Saints, Oxford, 1988, pp. 380~381/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the Roman Calendar, New York, 1992, p. 18/ André Mandouze, Storia Dei Santi e Della Santit Cristiana 2, Grolier Hachette International, 1991, pp. 238~243/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naire Hagiographique, Brepols, Belgique, 1991, p. 450/ Gaston Duchet Suchaux · Michel Pastoureau, La Bible et Les Saints, Paris, Flammarion, 1990, pp. 309~310/ L. Jaud, Vie des Saints, Tours, 1950, pp.38~40/ V. Saxer, Encyclopedia ofthe Early Church, British Library Cataloguing in Publication Data, 1992, p. 765. [梁蕙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