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마 다케야와 프란치스코 다케야

武谷(또는 竹谷)

글자 크기
1
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 부자(父子). 일본 교회의 205위 복자 중의 한 사람. 일본의 26성인 중에 포함된 다케야와는 다른 인물이다.
고스마 다케야(1582?~1619) : 고스마는 조선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당시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1살이었다. 그 후 예수회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나가사키 근처 구루미(久留米)에 사는 어떤 일본인 부잣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그의 충실함을 어여쁘게 보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따로 집을 사주고 자신의 농장 관리까지 맡겼다. 이렇게 꽤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박해로 쫓기고 있는 신부와 수사들에게 몰래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그들의 전교 활동을 도와주었다. 이때 그의 집에는 도미니코회의 도밍고(Juan de Domingo) 신부가 있었는데, 그는 필리핀에서 조선에 들어가 전도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불가능해지자 일본으로 건너와 1618년, 같은 회의 오르수치(Angel Orsucci) 신부와 함께 고스마의 집에 숨어서 일본 말을 배우던 중이었다. 박해의 손길이 고스마의 집에 뻗힌 것은 그 해 12월 13일이었다. 이때 포리(捕吏)들은 밤중에 고스마의 집을 갑자기 습격하고 고스마와 함께 두 신부를 체포하여 나가사키 감옥에 가두었다. 그중 도밍고 신부는 감옥에서 사망했으나, 고스마는 다음해 11월 18일 4명의 일본인 예수회원과 함께 화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 다케야(1611?~1622) : 고스마 다케야가 아네스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여 얻은 두 아들 중 하나로, 고스마가 순교한 지 3년 후 형제가 모두 순교하였다. 이에 앞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순교 후 히라도(平戶)의 한 기리시탄 집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1622년 박해가 재연되면서 순교자들의 자식들까지도 사형에 처하라는 지시가 내렸고, 이때 프란치스코는 어머니와 함께 붙잡혔다. 재판관은 귀엽고 영리한 프란치스코에 감탄한 나머지 만일 그가 배교를 하면 석방하고 또 자신의 집에서 키우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그 유혹을 일축하였다. 어머니가 참수 순교한(42세) 다음날인 9월 11일, 프란치스코는 형장에서 다른 순교자들에게 인사를 한 후 조용히 형리의 칼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12세 때였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 고스마, 일본인 어머니 아네스와 함께 1867년, 일본인 순교자 205명에 포함되어 시복되었다. (⇦ 프란치스코 다케야)
※ 참고문헌  Pagès 1. pp. 393 n. 2, 422~425, 519, 528 n. 3/宗門史 中, pp. 20 n. 20, 73, 82, 110~112, 234~242, 270/ Profillet 1. pp. 178, 200~201, 206~207, 229~232, 361/ Anesaki, n. 73a, 82, 115~117.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