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장 밥티스트 토마스 메데 Cécillle, Jean Baptiste Thomas Médéé(1787~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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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은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남경조약 체결식장을 참관하였다.

세실은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남경조약 체결식장을 참관하였다.


프랑스의 해군 장교. 외교가. 정치가. 한자 이름은 슬 서이(瑟西爾) 1787년에 프랑스 남부 루앙(Rouen)에서 태어나 해군 사관 후보생으로 임관하였으며, 1829년에 중령으로 승진한 데 이어 1838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1840년 아편 전쟁(阿片戰爭)이 발발하자 프랑스 극 동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에리곤(I'Érigone) 호와 파쥬(Page, 1807~1867) 함장의 파보리트(la Favorite) 호를 이끌고 이듬해 12월 중국 마카오(Macao)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전쟁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장차 대한 해협을 장악할 목적으로 일본 남쪽의 작은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며, 조 · 청(朝淸)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동시에 프랑스 단독으로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조선에 가지 못 할 경우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의 외교 사절 장시니 (D. Jancigny)를 파보리트호에 태워 조선으로 인도할 계획 을 세우는 등 극동에서의 정치적 · 상업적 이득도 취하고 자 하였다. 1842년 2월 15일에는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Maistre, 李) 신부와 마카오에 유학 중이던 신학생 김대 건(金大建, 안드레아)을 통역으로 삼아 마카오를 출발하 였으며, 마닐라와 대만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뒤인 8월 29일에는 중 · 영(中英) 간의 남경조약(南京條約) 체결 식장을 김대건과 함께 참관하였다. 그 동안 마카오의 또 다른 조선 유학생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은 파보리트호를 타고 8월 23일에 양자강 입구의 오송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남경조약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가 변화되자 세 실은 일본이나 조선으로의 원정을 포기하고 마닐라로 출 발하였고, 이에 분개한 메스트르 신부와 조선 신학생 일 행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말았다. 이어 세실은 1844년에 해군 소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중국 및 인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중 · 미(中 美) 간에 망하조약(望廈條約)이 체결된 후에는 중 · 불 (中佛) 통상 조약을 맺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 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마침내 프랑스 전권 대사 라그르 네(Lagrené)를 태우고 마카오에 도착한 군함을 이끌고 광 동으로 가서 중국 흠차 대신 기영(耆英)과 황포조약(黃 埔條約)을 체결하였는데, 이 불평등 조약으로 프랑스는 영국과 미국처럼 개항장에서의 여러 권한 및 통상에 관 한 최혜국 대우를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영국이나 미국 과는 달리 통상과 함께 종교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 결 과, 황포조약을 통해 청나라의 금교(禁敎) 정책까지 철 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개항지에서 성당 을 세울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계속된 무력 시위와 외교 협상을 통해서 1846년에는 중국인을 위한 그리스 도교 관용령까지 얻어내게 되었다.
그 후 세실은 다시 한번 조선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동시에 그는 조선 원정 계획을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게 보고하면서 1839년에 조선 정부가 앵베르(Imbert, 范) 주교 · 모방(Maubant, 羅) 신부 · 샤스탕(Chastan, 鄭) 신 부 등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데 대해 문책하 고, 황포조약과 같은 조약을 조선과 체결하여 조선의 천 주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적을 밝혔다. 그리고 1846 년 5월 군함 클레오파트르(le Cléopâtre)호를 이끌고 마카 오를 출항하여 도중에 빅토리외즈(le Victorieuse)호와 사 빈느(le Sabine)호를 합류시킨 그는, 제주도를 거쳐 북상 하던 중 8월 6일에 충청도 홍주(洪州) 연안의 외연도(外 烟島)에 정박하였다. 이때 세실은 조선의 재상을 만나 선교사 살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군함이 서해안을 항해하기 어려운데다가 한강 입구를 찾 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는 재상과의 면담을 포기 하고, 재상 앞으로 보내는 자신의 서한만을 조그마한 궤 에 넣어 해안에 남겨 둔 채 이듬해 회답을 받으러 오겠다 면서 중국으로 회항하였다.
실제로 프랑스 해군 당국에서는 1847년에 세실의 서 한에 대한 회답을 받으려고 중국 및 인도 주재 분함대장 (分艦隊長) 라피에르(Lapierre) 대령이 이끄는 글루아르 (la Gloire)호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신치도(薪峙島) 인 근에서 좌초하고 말아 실패하였다. 한편 이에 앞서 세실 은 프랑스로 귀국하여 1847년에 해군 중장으로 승진하 였고, 1849년에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후에 는 정계에 진출하여 1853년에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873년에 사망하였다.
세실의 대동양(對東洋) 정책과 시각은 황포조약의 체 결에서 드러난 것처럼 일반적인 서유럽 제국주의 세력들 과 다름없는 식민주의 정책 즉 외교적 · 상업적인 이득에 중점을 두었다. 아울러 동양에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 노선을 적용시키는 데 앞장섰던 그는, 이러한 제국주의 식민 정책과 종교 보호 정책을 조선에서도 실현하고자 하였는데, 그가 1846년에 조선의 재상에게 보낸 서한 내용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프랑스 무역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의도 를 갖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를 얻으 려고 하였다. 반면에 1846년에 이루어진 조선 원정은 조선 정부로 하여금 프랑스의 무력적인 위협과 선교사들의 활동, 천주교의 전파가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앞당기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日省錄》 《承政院 日 記》 Louis Wei Tsing-sing, La politique missiomaire de la France en Chine( 1842~1856), Paris, 1957/ 韓 佛關係資料(1846~1856)>, 《교회사 연구》 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 pp. 149~258/ 《달레 교회사》 下/ 李元淳, <19世紀中葉의 西歐勢 力과 朝鮮〉,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81/ 崔奭祐, 《韓國天主教 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一, 《韓國敎會史의 探究》 Ⅱ ,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張力 · 劉鑒唐, 《中國教案史》, 成都 : 四 川省社會科學研究院, 198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1집, 한국교회사연구 소, 1996/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 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趙珖, (朝鮮後 期 西洋과의 關係〉, 《한국사》 32, 국사편찬위원회, 1997.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