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왕조
- 王朝
〔라〕Seleucidae · 〔영〕Seleuc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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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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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때 통용되던 화폐(왼쪽)와 셀레우코스 왕조 때 축조된 안티오키아 항구의 방벽.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의 장군들 중 하나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Seleukos I Nikator, 기원전 358/ 354~281)가 바빌론을 점령한 기원전 312년 8월부터 로 마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이 시리아를 로마의 속 주로 삼은 기원전 64년까지 시리아와 인접 지역을 다스 리던 왕조.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화 정책을 이어받은 셀레우코스 왕조는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리는 중심지로서 대도시 를 많이 건설했는데, 이 그리스화 정책으로 전통 문화를 고수하려던 유대인들과 많은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급 기야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기원전 175~164) 시절에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aeus) 일가의 항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였다(1마카 14장). 반면에 그리스도교가 퍼져 나가는 기반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사도 바오로의 전도 여행과 긴밀히 결부 되어 있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 소아시아 에 세워진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와 베레아(사도 13-18 장) 등은 모두 셀레우코스 왕조 때 건설된 그리스화된 도시였다.
〔성립 배경〕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의 임시 수도인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그가 이룩한 거대한 제국에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디아도코이' (Διάδοχοι, 후계자 · 계승자라는 뜻)라고 불리 는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여섯 장군이 제1차 영토 분할 협정을 맺었는데, 왕실 수비대의 사령관이었던 페르디카 스(Perdiccas)는 사령관으로 추인되어 제국의 아시아 지 역을 섭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크라테로스(Krateros)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알렉산더의 동생 필립포스 아르히 다이오스(Philipos Arhidaios)와 박트리아의 왕녀 록사네 (Roxane)에게서 태어날 알렉산더의 아이를 보호하는 '왕 실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페르시아가 다스리던 영토도 알렉산더 대왕의 네 장군 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무스(Antigonos Monophthalmus)는 프리기아 · 팜필리아 · 리키아 등 소아시아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였고, 리시마코스(Lysimachos)는 마케도니아 동쪽의 트라키아를 차지하였고, 행정관 출신의 에우메네스(Eumenes)는 소아시아 북부에 위치한 가빠도기아의 총독이 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경호원이었던 프톨레메우스 1세 소테르(Ptolemaeus I Soter, 기원전 323~285)는 제국의 남서쪽 외진 곳 에 위치한 이집트를 차지하였다.
알렉산더 제국을 여섯 등분해서 다스리게 된 장군들은 모두 자신의 영도하에 통일 제국을 이루려는 야심을 서 서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야심의 틈바구니에서 조 금씩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간 셀레우코스 1세는 제 국의 아시아 지역을 섭정하던 페르디카스 휘하에서 천인 대장이 되었다. 이어 페르디카스가 자신의 영도하에 바 빌론을 수도로 삼아 제국을 재통일하려는 야심을 드러냈 을 때, 그를 대적하는 다른 지방 장관들의 동맹에 참여하 여 페르디카스의 야심을 저지시킨 공로로 기원전 321년 에 바빌론 일대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야심을 드러낸 장군은 소아시아 중남부를 다스리던 안티고노스였다. 그는 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가 다스리던 지역의 북쪽과 동쪽 을 각각 다스리던 에우메네스와 셀레우코스 1세가 연합 해서 저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 케도니아의 지방 장관이자 섭정이었던 안티파트로스(Antipatros)가 죽기 전에 자신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은 데 대한 반발로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Kassandros)가 반 란을 일으키자, 안티고노스는 그와 적극 제휴하여 반대 편 진영을 후원하던 정적 에우메네스를 제거해 버렸다.이로 말미암아 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이 깨져 셀레우코 스 1세는 기원전 316년에 이집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 다(다니 11, 5).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빌론에서 축출되어 정치 생명이 끝난 듯이 보였던 셀레우코스 1세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안티고노스가 기원전 315년에 프톨레 메우스 1세로부터 빼앗은 팔레스티나를 되찾기 위한 설 욕전이 기원전 312년에 가자(Gaza)에서 벌어졌던 것이 다. 이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는 프톨레메우스 1세와 협력하여 팽창 일로에 있던 안티고노스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고, 그 승리의 대가로 바빌론 일대의 영토를 되찾 고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웠다.
〔왕조의 역사〕 초기 : 셀레우코스 1세는 왕조를 세우 자마자 곧바로 영토 팽창 정책을 펼쳐 바빌론 북쪽의 메 대(Media)와 동쪽의 수시아나(Suciana)를 곧바로 합병하 였으며, 기원전 311~306년에는 적극적으로 동진 정책 을 취하여 인도의 북서쪽 접경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었 다. 그러나 기원전 304년에 코끼리 500마리를 받고 그 일대의 통치권을 인도의 왕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게 양도하였다.셀레우코스 왕조는 기원전 305년에 뒤늦게 '왕' 이라 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알렉산더의 장군이라 는 의식이 남아 있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선불리 '왕' 이 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가는 각 지역을 분할해서 다스리는 알렉산더 대왕의 다른 장군들의 연합 공격을 받는 표적 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티고노스의 아 들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Demetrios Poliorketes)가 아테네를 기습 점령하고, 키프로스의 살라미스(Salamis) 근처의 전투에서 프톨레메우스 1세의 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한 사건이 벌어졌다. 안티고노스는 아들이 거둔 승리에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왕' 이란 칭호를 공 식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알렉산더 제국을 재통일하겠다는 강한 야심을 드러냈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지역을 다 스리던 알렉산더의 장군들인 셀레우코스 1세 · 프톨레메 우스 1세 · 리시마코스 · 카산드로스도 왕권을 요구하였 고, 야심을 드러낸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 하였다. 기원전 301년에 벌어진 입수스(Ipsus)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는 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안티고노스를 꺾음으로써 소아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 고, 그 후 기원전 300년에 시리아에 안티오키아를 건설 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 일대를 다스리는 제국의 서쪽 수도로 삼았다.
숙적 안티고노스를 제거한 후 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 전 283년에 해상권을 장악한 데메트리오스를 프톨레메 우스 1세와 연합하여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281년에는 트라키아의 실력자 리시마코스를 코루페디움(Corupedium)에서 격파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마케도 니아와 그리스를 정벌하기로 마음먹은 셀레우코스 1세 는 스스로 자신을 '마케도니아의 왕' 이라고 선포하였고 알렉산더 제국을 재통일하려는 야심을 가졌지만, 볼모로 잡혀 온 프톨레메우스 1세의 장남 프톨레메우스 케라우 노스(Ptolemaeus Keraunos)에 의해 리시마케이아(Lysimacheia)에서 암살되었다.
전개 : 셀레우코스 1세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지중 해 동쪽의 항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시리아 연안의 교역 중심지를 통제하고 있던 이집트와 여섯 차례에 걸쳐 전 쟁을 벌였다. 안티오쿠스 1세(Antiochus I Soter, 기원전 281~261)가 벌인 제1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74~271)의 결과는 명확하지 않으나, 코엘레 시리아(Coele-Sysia)는 여전히 이집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2세(Antiochus I Theos, 기원전 261~246)는 제 2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60~253)에서 마케도니아의 안 티고노스 2세(Antigonos I Gonatas)와 연합 전선을 펼침 으로써 소아시아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셀레우코스 2세(Seleukos II Callinicus, 기원전 246~225) 때 벌어진 제3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46~241)에서는 프톨레메우스 3세(Ptolemaeus Ⅲ Euergetes, 기원전 246~2221 221)의 침공을 받아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영토를 일시적 으로 상실하였다. 이후 영토를 회복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소아시아에서의 반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뒤이어 왕위 에 오른 셀레우코스 3세(Seleukos Ⅲ Soter, 기원전 225~223) 또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려고 애썼으나 곧바로 살해되 고 말았다.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Ⅲ the Great, 기원전 223~187)는 제4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21~217)에서 프 톨레메우스 4세(Ptolemaeus IV Philopator, 기원전 2221 221~205)에게 라피아(Raphia)에서 패하여 남부 시리아와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를 모두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렇 지만 제국에 반기를 든 소아시아 · 아르메니아 · 파르티 아 · 박트리아를 원정함으로써 제국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 이어 기원전 205년에 프톨레메우스 4세가 죽은 후 이집트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마케도니아 의 필립 5세(Philip V 기원전 221~179)와 연합 전선을 구 축한 그는, 제5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01~195)을 일으 켜 시리아 . 소아시아 · 트라키아에 있는 이집트 영토를 대거 양도받는 개가를 올렸다.
그리고 승전의 여세를 몰아 그리스로 진격했으나, 기 원전 190년에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로마에 대패하 여 소아시아 일대의 주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는 처지 가 되었다(다니 11, 10-19). 더욱이 아파메아(Apamea) 평 화 협정에서 요구받은 전쟁 배상금을 물기 위하여 기원 전 187년에 수사의 바알 신전 금고를 약탈하다가 결국 살해되고 말았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레우코스 4세 (Seleukos IV Philopator, 기원전 187~175)도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털려고 했다(2마카 3, 1-40).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기원전 175~ 164)는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그리스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마카베오가 독 립 전쟁에 불을 붙였지만, 제6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170~168)을 일으켜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 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지원 요청을 받은 로마 가 신속하게 개입함으로써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를 포기하고 철군해야만 하였다(다니 11, 30). 이후 이스라 엘에 그리스화 정책이 더욱 가속화됨으로써 급기야 기원 전 167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제우스 신에게 번제물이 봉 헌되기까지 하였다(다니 11, 31 ; 12, 11 : 1마카 1, 54 ; 마 르 13, 14).
몰락 : 안티오쿠스 4세가 죽고 난 뒤에 벌어진 왕조의 내분은 약해진 셀레우코스 왕국의 국력을 더욱 손상시켰 다. 파르티아 왕국이 미트라다테스 1세(Miithradates 1,기 원전 171~138)의 치하에서 영토를 팽창하는 가운데 이전 의 속국들이 독립 투쟁을 벌임으로써, 셀레우코스 왕국 은 이전의 명성을 잃고 아시아의 소도시 국가로 전락하 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팔레스티나에 하스모네(Hasmoneans) 왕조가 세워졌다.
안티오쿠스 7세(Antiochus Ⅶ Sidites, 기원전 139~129)는 왕조의 내분을 수습하고, 예전의 영화를 되찾으려 하였 지만 역부족이었다. 기원전 130년에 하스모네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 1세(기원전 134~104)의 도움을 받아 메 대 · 바빌로니아 · 페르시아 본토를 점령하며 침략해 오 는 파르티아를 무찌르고 바빌로니아를 되찾기는 하였지 만, 1년 뒤 파르티아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고 급기야 기원전 83년에는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1세(Tigranes I , 기원전 95~55)에게 시리아의 통치권까지 빼앗겼다.그리고 마침내 셀레우코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안티오쿠 스 13세(Antiochus XIⅢ, 기원전 69~65)는 기원전 64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굴복하여 로마의 속주로 전 락하였다.
〔문화 및 경제〕 셀레우코스 제국은 전성기 때 알렉산 더 대왕이 이룩하였던 제국의 4분의 3인 약 400만k㎡에 달하는 영토를 소유하였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 그리스화 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내부 의 결속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땅을 분배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아울러 도시와 토착 영주와 신전에 속한 땅에 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개인의 소유권 을 보호받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으로 제국의 통치자에게 협력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이란인 상류 층이나 다른 동방인들을 차별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 렇지만 마케도니아인이나 그리스인과 동등한 조건으로정사에 참여하는 길은 여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실제로 바빌론을 제외한 아시아의 도시에서 사회적 · 문화적으 로 상류층을 형성한 이들은 주로 그리스인과 그리스화된 동방인들이었는데, 이러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행정 정책 과 문화 정책은 원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원주민들은 한 결같이 제국의 그리스화 정책에 맞서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였고 고유한 문화 전통을 유지하려 하였다.실례로 행정 언어로 채택된 그리스어에 맞서 아르메니아 코이네를 만들어 통용시키기까지 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제국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통치 자 제의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중앙 집권식 예배를 엄격하게 고수해 나갔던 것 과는 달리, 각 주와 도시에서 독자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지방 분권 정책을 펼쳤다. 통치자 제의를 위하여 전 제국에 고위 신관이 최초로 임명된 것은 안티오쿠스 3세 때로 여겨진다. 이런 통치자 제의는 주민들에게 왕 조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 과 인종들이 통치자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를 조율하 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에까 지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국의 통치자가 항 상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도록 하였고, 이를 통하여 왕의 말이나 행동이 곧 제국 내의 규범이자 법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힘은각 주와 영지에서 보내 오는 조세였다. 티그리스 강 연안 에 세워진 제국의 동쪽 수도 셀레우키아와 제국의 서쪽 수도 안티오키아를 연결하는 길은 셀레우코스 제국을 먹 여 살리는 생명의 혈관이었다. 그 혈관에 피가 제대로 돌 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항 구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다. 이 때문에 셀레우코스 왕 조는 시리아 해안가를 차지하기 위해 여섯 차례에 걸쳐 프톨레메우스 왕조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또 제국 내 에 산재해 있는 독립 영지를 경제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화폐를 대거 발행하였는데, 제국의 기본 화폐로 은화 (銀貨)가 오랫동안 통용되었지만 순도가 떨어진 다음부 터는 많은 도시에서 주조된 동화(銅貨)가 은화를 대신하 였고, 큰 단위의 금액이 오가는 대외 무역에는 별도로 제 작된 금화(金貨)가 통용되었다. 국가의 수입은 토지세의 일부만이 현물일 뿐 대부분 화폐로 지불되었다.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마카베오서)
※ 참고문헌 Bo Reicke, Neutestamentiche Zeitgeschichte-Die biblische Welt 500v.~100n. Chr., Berlin, Walter de Gruyter & Co., 2nd ed., 1968(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 《신약성서 시대사》, 한국신학연구 소, 1992)/ John Whitehorne, 《AB》 5, pp. 1076~ 1077/ Helmut Koester,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History), Cultic, and Religion of the Hellenistic Age, U.S.A., Walter de Gruyter, 1995(이억부 역, <신약성서 배경 연구》, 은성, 1996)/ Moshe Kochavi, Antiochos, 《AB》 1, pp. 269~272/ Victor Ehrenberg, The Greek State, Basil Blackwell & Mott, 1960(김진경 역, 《그리스 국가》, 민음사, 1991)/《성서 백과 대사전》 6, 성서교재간 행사, 1980, pp. 448~4491 <안티오쿠스>,《성서 백과 대사전》 7, 성서교 재간행사, 1981, pp. 648~655. 〔李禹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