셸러, 막스 Scheler, Max(1874~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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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독일의 철학자. 철학적 인간학 · 가치 윤리학 · 철학적 종교 현상학 · 지식 사회학의 창시자. 1874년 8월 22일 뮌헨에서 루터교 신자였던 아버지와 정통 유대교 신자였 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14세 때 가톨릭의 '사 랑' 에 이끌려 세례를 받았다. 뮌헨과 베를린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1895년에 딜타이(W. Dilthey, 1833~1911)와 짐 멜(G. Simmel, 1858~1918)에게서 철학과 사회학을 배웠으 며, 1897년에 예나(Jena)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899년에는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의 지도 교수는 190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이켄(R. Eucken, 1846~1926)이었다. 1900년부터 1906년까지 예나 대학교에서 가르쳤던 셸러는 1901년에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E. Husserl, 1859~ 1938)을 할레(Halle)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는 후설의 제 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줄곧 긴장되어 있었다.후설의 저술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셸러는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이란 저술을 하도록 예비해 주었다. 그리고 1907년부터 뮌헨 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베크(M. Beck) · 콘라트(T.Conrad) · 다우베르트(J. Daubert) · 가이거(M. Geiger, 1880~1937) · 힐데브란트(D.V. Hildebrand, 1889~1977) · 립 스(T. Lipps, 1851~1914) · 팬더(A. Pfaender) 등으로 구성된 소위 뮌헨 '현상학자 모임' (Priänomenologenkreis)에 가담 했는데, 부인의 의부증으로 인한 모함으로 1910년에 뮌 헨 대학교의 교수 지위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1910~ 1911년에는 괴팅겐 철학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곳에서 콘라트 · 콘라트-마르티우스(H. Conrad-Martius, 1888~ 1966) · 가이거 · 헤링(J. Hering) · 잉가르덴(R.W. Ingarden, 1893~1970) · 후설 · 코이레(A. Koyre, 1892~1964) · 라이나 흐(A. Reinach, 1883~1917) 등과 친분을 나누었다. 에디트 슈타인(E. Stein, 1891~1942)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 이었다.
1912년에 재혼하였으나 실패하고, 1924년에 다시 결 혼을 하였는데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유명한 교향악단 지 휘자 푸르트벵글러(W. Furtwaengler, 1886~1954)의 누이동 생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에 자원하였 으나 난시로 거절당한 셸러는, 야포 부대에 배속되었다 가 안질 때문에 제대한 뒤 1917년에 외무성의 사상 선 전 요원으로 오스트리아 · 네덜란드 · 스위스에 주재하였 으며, 전쟁 중 종교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1919 년에 쾰른 대학교의 철학 및 사회학 교수가 되어 1928 년까지 재직하였고, 그 해 5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사회 과학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는 여기에서 자신의 저술을 자주 언급하였던 카시러(E.Cassirer, 1874~1945) · 만하임(K. Mannheim) · 오토(R. Otto, 1869~1937) · 빌헬름(R. Wilhelm) 등과의 회동을 기대한 것 같다. 1927년에는 카이젤링 백작의 후원으로 다름슈 타트(Dammstat)에서 열린 학술 대회에서 '인간의 특수 지위' 라는 제목으로 4시간에 걸친 대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은 후에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 1928)라는 소책자로 출판되었으며, 그의 웅변하듯 하는 강의는 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다고한다.
셸러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1923년에는 베를린에서 러시아의 망명 철학자인 베르댜예프(N.A. Berdyajev, 1874~1948)와 만났다. 그는 1927년 초에 점증하고 있던 나치 운동과 마르크스주의의 위험을 공개 강연을 통하여 경고한 독일의 유일한 학자였는데, '정치학과 도덕' 및 '영원한 평화의 이상과 평화주의' 가 1927년 독일 정치 학회와 베를린의 국방부에서 발표한 강연의 주된 주제였 다. 또한 그는 스위스에서 국제 대학교의 설립을 주도하 였으며, 유럽 합중국의 이념과 평생 교육의 프로그램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 이면에는 당시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권력과 정신 사이의 간극이독일인이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최대의 방해가 되고이 간극이 독재를 유발하는 근원이 된다고 보는 그의 사 상이 바탕으로 깔려 있다. 실제로 그가 사망한 지 5년 후 나치의 독재(1933~1945)는 셸러의 저작을 판금 조치하였 다. 셸러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1928년 5월 19일 에 사망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N. Hartmann, M. Heidegger 등)은 그의 돌연한 요절로써 유럽 사상계가 크나큰 손실 을 입게 되었다며 애도하였다.
〔사 상〕 셸러의 사상은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 이 일반적이다. 제1기는 1897년의 학위 논문 발표부터 《인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에 관하여》(VomEwigen im Menschen, 1921)를 발표한 시기까지로, 그의 전집 제1~7권 에 이 시기의 사상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가톨릭 철학자 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1921년경부터는 가톨릭에 대해서 점점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동양의 범신론에 관심을 보였다. 제2기는 바로 이 시기 이후인 1922~ 1928년 동안인데, 그의 전집 제8~15권이 이 시기의 저 술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1기에서 그는 가치 윤리학 느낌의 문제 · 종교 철학, 특히 가톨릭 사상에 몰두하였다. 그는 자신의 현상학 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연구했는 데, 이 시기에 그는 《공감(共感)의 본질과 형태》(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 1923²) ·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 와 실질적 가치 윤리학》(D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 1913~1916) ·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것에 관하여》 등의 저술을 발표하였다. 그는 인간의 느 낌 · 사랑과 인격의 본질에 초점을 두었으며, 순수한 자 아와 순수한 이성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선험적 자아· 이성 · 의지 · 감각보다는 인간의 정신(Geist)과 사랑이 인간 실존의 본질을 더 잘 해명해 준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격은 사랑하고 있는 존재이며, 사랑은 수학적 논리나 이성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그 자신의 논리 즉 파 스칼(B. Pascal, 1623~1662)이 말하는 '마음의 논리' 를 가 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현상학적 가치론 즉 실질적 가치 윤리학에 의하면, 절대적 가치는 사랑의 작용에 의해 파악되고 신성감 과 외경(畏敬, Ehrfurcht)에 대한 가치의 느낌이 수반된다 고 하였다. 이러한 절대적 가치에 윤리적 가치가 기반을 두며, 이 절대 가치는 인간의 감각적 · 생명적 심리적 측면을 초월하고, 정신적 · 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나타나는 정신적 인격을 인격 가치라고 불렀다.또 그는 이 인격 가치가 도덕적 질서 속에서 근원적으로 선악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윤리적 가치는 인격 가치에 의해서만 성립되며, 도덕적 인격 가치는 인격의 고유한 사랑의 작용에 의해서만 인간에게 주어지고 느껴 지며 얻어질 수 있다. 사랑은 모든 지향적인 정서 생활의 최고 단계를 이룩하므로, 사랑은 모든 정신 활동(Akt)의 기초가 되고 도덕 생활의 근본 활동이며 인격의 근본 활 동이다. 그에 의하면 인격은 구체적 정신 활동의 통일이 며 정신의 본질에 필연적인 존재 형식이다. 이 인격은 궁 극적으로 하느님에 의해서만 해명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 신자는 하느님을 인격 중의 인격으로, 또 사랑 그 자 체라고까지 말한다는 것이다.
제2기에서 그는 철학적 인간학과 지식 사회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그는 이 기간에 《우주에 있어서 인간 의 지위》 · 《지식의 형식과 사회》(Die Wissensformen und die Gesellschaft, 1926) · 《철학적 세계관》(Philosophische Weltanschauung, 1929) 등을 발표하였다. 개인의 생활과 사회 생활에 있어서 무력해 보이는 이념에 만족할 수 없 었던 그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한 사회의 건립과 그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가 치 판단 체계의 건립은 설명될 수 있다고 보고 이것을 지 식 사회학의 과제라고 말하였다.
〔평가와 영향〕 셸러는 말년에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의 경제 공황과 나치즘 의 등장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인 무력함을 경험하면서, 특히 이혼한 후 전능한 정신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신 앙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프리스(H. Fries)는 "셸러야말로 역사적으로 보거나 사실 적으로 보거나 독일에서 가톨릭 종교 철학의 출발점이다. 그는 종교 철학의 형성과 구조에 결정적인 길을 제시 하였다" 고 옹호하였으며, 뎀프(A. Demp, 1891~1976)도 그 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저한 가톨릭 철학자라고 평하 였다. 셸러는 '현상학의 완성자' (J. Hirschberger), '우리 시 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 (T. Haecker, 1879~1945), 혹은 '거상(巨像)과 같은 철학자' 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심지어 하이데거는 "서양 현대 철학을 공부하려면 누구 나 셸러의 저서를 읽어야 한다" 고까지 하였다.
1928년에 셸러가 죽은 후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 1883~1955)는 추모사에서 하이데거가 금세기의 모든 철학자들처럼 셸러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였 다. 그리고 슈타인은 '철학을 넘어서는 길' 을 셸러에게 서 배웠다고 훗날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셸러의 철학 은 힐데브란트와 가다머(H.G. Gadamer, 1900~ ) · 플레스 너(H. Plessner, 1892~1985) · 바이작커(V. von Weizsacker, 1912~ ) · 바이텐디크(F.J. Buytendijk, 1887~1974) · 하르트 만(1882~1950) · 마르셀(G. Marcel, 1889~1973) · 사르트르 (J.P. Sartre, 1905~1980) · 메를로 퐁티 (M. Merleau-Ponty, 1908~1961) · 리쾨르(P. Ricoeur, 1913~ ) · 란트스베르크 (P.L. Landsberg, 1905~1944) 등 많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포함해 현대 가톨릭 사상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교황 요한 바 오로 2세 즉 철학자로서의 보이티야(K. Wojtyla, 1920~ ) 는 셸러의 철학으로 철학 교수 자격 논문을 썼을 뿐만 아 니라 셸러의 철학에 관하여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가치 철학 ; 슈타인 ; 인간학, 철학의 ; 현상학 ; 하이데거 ; 후설)
※ 참고문헌 Wilhelm Mader, Max Scheler, Bonn, 1955/ A. Demp Staude, Max Scheler, New York, The Free Press, 1967. 〔秦教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