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조메노, 살라미니우스 헤르미아스 Sozomenus, Salaminius Hermias(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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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가. 출생 및 사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교회사가 소크라테스(Sokrates Scholasticus, 380?~450?)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열심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성 장하여 많은 학식을 쌓았으며 율리아누스 황제(361~363) 시기에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생 애〕 그의 저서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 나타난 것 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이에 따르면 소조메노는 팔레스티나의 가자(Gaza) 근처 베텔리아(Betelia)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포시오(Photius, 820~891)의 저서 《도서관》(Bibliotheca, XXX)에 의하면 그 의 그리스식 이름은 '살라마노스 헤르메이오스 소조메노 스' (Σαλαμάνος Ἑρμείος Σωζομένος)이다. 헤르메이오스 가 성(姓)인 것 같은데, 흔히 '구원받은 자' 라는 뜻의 소 조메노라고 불렸다.
소조메노가 전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성서 해 설로 존경을 받던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따 르면, 이교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할아버지는 온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창기 베텔리아 주민 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개종은 사막에 서 은수 생활을 하다가 307년에 가자에서 멀지 않은 마 이오우마(Maïouma)라는 곳으로 옮겨 은수 생활을 하던 수도자 힐라리온(Hilarion, 291~371)이 같은 지역 사람으 로 마귀에 들린 알라피온(Alaphion)을 기적적으로 치유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는데, 힐라리온의 명성은 329년에야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아마도 329년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로니모(Hieronymus, 341?~420)는 자신의 저서 《힐라리온의 생애》(Vita Hilarionis)에서 이 기적적인 사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소조메노의 할아버지는 교양을 갖춘 인물로 특 히 수학에 재능을 보였으며, 개종 후에는 성서 공부에 전 념하였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362년에 그리스도교 박해 를 시작하자 온 가족과 함께 베텔리아를 떠났다가 박해 가 끝난 후 되돌아왔다. 알라피온의 후손들은 힐라리온 의 제자가 되거나 가자 지역에 수도원과 교회를 세웠는 데, 소조메노도 어렸을 때는 알라피온 집안 사람들 중 이 미 연로한 수도자들의 수도원을 왕래하였다고 한다.
소조메노는 베텔리아 혹은 가자 지역의 한 수도원에서 읽기 · 쓰기 · 산수 등 초보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 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이 기간에 신 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계속해서 수도 생활에 대해 찬사 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법이나 문학과 같 은 교양 과목과 수학 · 기하학 · 음악 등과 같은 교육은 가자나 다른 곳에 있는 공립 학교에서 배운 것 같다. 이 교육이 끝나고 법학과 같은 고급 교육을 받기 전에, 5~ 6세기 당시에 유명하였던 가자의 수사학 학교 과정을 이 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페니키아의 도시인 베리투 스(Berytus)에서 법학을 연구하였는데, 당시 콘스탄티노 플에는 대학이 없었고 로마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자에서 가까운 베리투스에서 공부하였을 것이 다. 당시 베리투스의 대학은 동로마 제국의 유일한 법과 대학이었고, 로마의 법과대학과는 경쟁 상대에 있었다.이 대학은 4년의 과정을 거쳐야 했고 수업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공부를 마친 후 443년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할 때까지 의 생애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소조메노가 로마에 체류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로마에 체류했었음을 증명하는 문헌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사》 가 쓰여질 당시에 체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리고 443년부터는 콘스탄티노플의 법원에서 변호사(αχολαστικός, 법에 관해 자문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사용된 명칭)로서 아퀼리노(Aquilinus)와 함께 일했다. 하 지만 소조메노가 콘스탄티노플에 온 것은 426년 이후, 즉 아티코(Aticus, +426) 총대주교가 사망한 후였던 것 같 다. 왜냐하면 소조메노 자신이 아티코 주교를 알지 못한 다고 《교회사》에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Ⅷ, 27. 1).
소조메노의 사망 연도 역시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 나 프로클로(Proclus, 390?~446)가 총대주교로 있던 기간 에 생존해 있었음은 분명하다. 《교회사》 제9권에 프로클 로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직을 수행할 당시(434~446) , 자신이 40명의 순교자 유해를 옮기는 데 일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조메노가 이 《교회사》 제9권 을 저술하던 시기는 이미 프로클로가 사망한 후였고, 다 룬 주제 역시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다.
〔저 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 황제에게 헌정된 전 9권의 《교회사》에는 324~439년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450년에 사망하였고, 《교회사》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시기가 439년까지이므 로 저술 시기는 439년과 450년 사이로 여겨진다.
관련 저서 및 연구 자료들 : 그의 《교회사》는 에우세비 오(Eusebius Caesariensis, 260?~339)의 《교회사》를 계속 이 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이 나오기 전에 2권으 로 된 다른 책 즉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323년에 콘 스탄틴 대제(306~337)가 동부 로마 제국을 맡고 있던 리 치니우스 황제(308~324)에게 거둔 승리까지의 교회 역사 를 기술한 책이 이미 있었으므로, 《교회사》 제1장은 바 로 이 책의 보충판임을 알 수 있다. 《가 글레멘스 강론》 (Homiliae pseudo-Clementis)의 저자인 글레멘스(Clemens) 와 예로니모에 따르면(《명인록》 2), 소조메노가 저술한 이 첫 작품은 2세기경에 처음으로 교회 역사를 다룬 《회상》 (υπομνηματα)의 저자 에제시포(Egesippus), 천지 창조부 터 221년까지의 역사를 다룬 《연대기》(Χρονογραφιαι)의 저자 율리오 아프리카노(Julius Africanus, +240) , 그리고 에 우세비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작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소조메노와 같은 시대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 역시305~439년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교회사》를 저술하 였는데, 이 두 《교회사》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고 몇 몇 단어 외에는 차이점이 없는 부분도 있을 정도로 상호 의존적이다. 특히 소조메노는 소크라테스의 《교회사》를 일부 인용하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수집한 막대한 양의 자료들을 가능한 한 자신의 《교회사》 안에서 선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소조메 노가 《교회사》에서 주로 참고한 자료는 루피노(Tyrannius Rufinus, 345~410)의 《교회사》,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와 《콘스탄틴의 생애》(Vita Constantini), 아타나시오(Athanasius, 295~373)의 몇몇 작품, 팔라디오(Palladius, 363/364~ 431?)의 작품들,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문서고 및 개인 도서관에 흩어져 있는 다수의 문헌들, 즉 교회 회의의 문 서, 황제들과 주교들의 편지와 같은 문헌들 등이다. 때로 는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329330-389390)가 리바니오 (Libanius)와 아폴리나레(Apollinae)에게 행한 강론들 (orationes)에 관한 언급도 나타나지만, 요한 그리소스토 모(Joannes Chrysostomus, 347~407)와 예로니모의 작품들에 대한 흔적은 불확실하다.
또 소조메노는 에프렘(Ephraem, 306~373) · 안티오키아 의 에우스타티오(Eustathius, +337?) · 에우노미오(Eunomius, +394) · 에우트로피오(Eutropius, 4세기 말~5세기 초) 등의 작품도 알고 있었으며, 특히 《교회사》 제9권에서는 테베의 올림피오도로(Olympiodorus)의 작품을 많이 이용 하였다. 《교회사》에서 '그라파이' (γραφαι)로 언급되고 있는 편지 모음은 헤라클레아의 사비노(Sabinus)의 《모음 집》(συναγωγή)을 지칭한 것 같다. 또한 시리아 자료와 소크라테스가 알지 못한 자료들, 예를 들어 소조메노가 페르시아 순교록에서 발췌한 샤푸르 2세(Shapuhr Ⅱ, 310~379) 시절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박해에 관한 기록들 (2, 9-14)도 나타난다.
방법과 내용 : 소조메노는 고전적인 역사 기술 방법을 통하여 이 자료들을 체계화시키면서 주로 지식층을 겨냥 하여 저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에서 소조메노 는 '진리' 와 '객관성' 이라는 자신의 역사 기술 방법을 설명하였는데, 즉 모든 것은 진리에 따라, 그리고 역사에 개인의 사적 요소를 덧붙이지 않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 는 정통 진리를 의미하며, '객관성' 은 참된 교의에서 벗어난 일련의 오류들을 알리 고 편파적이고 오류에 찬 정보를 보도하여 간혹 술책으 로 그리스도인들을 혼돈하게 하는 일부 역사가들을 거부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소조메노가 《교회 사》에 수록한 <헌정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보편 교회가 많은 적들과 싸우면서 어떻게 자신의 목적지에 다다랐는 가를 보여 주는 것이 《교회사》를 저술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교회사》에 나타난 호교론은 그 강도가 매우 약하다. 이는 소조메노가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 인 것 같다. 그래서 간혹 이단들을 다른 분파와 구별하는 미묘한 차이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 리스도교적 삶 즉 다양한 형태의 신앙 표현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소개하고 있다. 우선 전례와 문화적 쇄신 에 대한 관심은 의심의 여지없이 소조메노가 살았던 5세 기에 행해진 중요한 논쟁들에서 기인하거나, 각 교회 회 의를 통해 교의와 함께 전례를 정형화하려는 노력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래서 소조메노는 각 지역 전통에 따라 다양한 전례를 생동력 있게 표현하였다. 즉 로마 전례· 콘스탄티노플 전례 · 리비아 전례 · 페니키아 전례 등과 그 외 다른 지역의 예식 안에서의 각 전례 봉사자 및 집 전자의 역할 · 사순 시기 · 전례가 거행되는 날(토요일이나 주일) · 참회자들에게 부과되는 일들 · 세례성사 · 노바시 아누스주의자들과 몬타누스주의자들과 안식일주의자들 사이에서 다르게 거행되는 부활절 전례 등을 기술하였다.
그는 4세기의 영성을 대표할 만한 생활로 수도 생활을 꼽았다. 그는 교회사 연구의 정당성을 소개한 후에, 수도 생활이 시작된 동기와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다. 즉 명상과 묵상의 필요성과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가운데 지내는 비밀스러운 삶의 필요성( I , 12, 10), 당대의 이완주의(laxismus)에 대한 반동으로 성적 욕망에 대한 포기( . 11, 7-8), 신비스러운 부르심과 깨 끗한 영혼을 통한 하느님 흠승( I . 12, 4) 등이었다. 그는 이를 실천하는 은수자들의 지혜와 그들의 철학 즉 금욕 생활을 그리스도인이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고양된 이상 (理想)이라고 소개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생활이 란 인간으로 하여금 절제 · 온유 · 자기 포기 · 육신에 대 한 경시 · 하느님의 선함과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는 수도 생활의 덕행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신념에 적합하게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은수 생활의 특성들에 대한 소조메노의 이러한 선호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와 관용에 대한 역사가의 비판적 성찰 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교 세계의 그리스도교화 상황에 서 그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교화를 수용하는 방 법을 모색하였는데, 그리스도교의 수용을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며 콘스탄틴 대제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찬사를 보내면서 폭력에 호소한 일부 주교들을 비판하였 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조메노는 초대 교회사가로서 당시 이민족들 사이에 전파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와 4세 기 전반에 걸쳐 탄생한 수도 생활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복음화 운동에 대해 소개하였다. 소조메노에 의하면, 이 민족들 사이에 그리스도교가 확산된 것은 계속적인 전쟁 으로 인한 것이고, 계속적인 이민 정책 또한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소조메노의 가장 고유한 입장은 이단과 관련된 것으로, 특히 아리우스주의를 이해하는 것에 가장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 또 그는 인간적 불충분함을 설명하기 위하 여 하느님의 섭리와 중재를 호소하였는데, 예를 들어 콘 스탄틴 대제의 승리가 하느님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아타나시오가 주교직에 오른 것도 하느님의 도움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주의 외에 다른 이단에 대 해서는 일체의 해석을 피하고 단지 이름만을 언급했다.
문체와 사본 : 소조메노의 문체는 소크라테스의 문체 보다 더 유연하고 단순하며 용이하다. 그의 문체가 소크 라테스보다 훨씬 낫다(estque Sorate in stylo praestantior, Bibliotheca, XXX 평한 포시오의 견해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조메노의 《교회사》에는 많은 전설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고, 또 그가 신학자가 아 니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감각이나 비판적 판단 등이 명백하지 않은 면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사본 중 6세기 에 만들어진 라틴어 사본은 카시오도로(Flavius Magnus Aurelius Cassiodorus, 485/490~580)의 지도로 수도자인 에피 파니오(Epiphanius Scholasticus, 5~6세기)가 만든 것이고, 동방의 다른 언어로 된 번역본은 남아 있지 않다. (→ 교회사학 ;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
※ 참고문헌  Photius, Bibliotheca, 《PG》, 103/ Sozomene, Histoire Eccléciastique, Sources Chrétiennes 306, Les Éditions du Cerf, Paris, 1983/ J. Quasten, Patrologia, vol. 2, trad. italiana del N. Beghin, Marietti, Roma, 1992/ S. Mansel, A Dictionary of Christian Biography, ed. by H. Wace .W.C. Piercy, Hendrickson Pub., Peabody, 1994/ B. Altaner, Patrologia, vol.2, trad. italiana di A. Babolin, Marietti, Roma, 1992/ G. Barby, 《DTC》 14, pp. 2469~2471/ A. Labate, 《DPAC》/ Erik Peterson, 《EC》.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