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 도밍고 데 Soto, Domingode(149~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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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스페인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자. 철학자.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영향을 미친 인물로 도미니코 수도회와 교회의 개혁에 많은 공헌을하였으며, 학술 저서들을 통하여 당시 학계에 퍼져 가던 토마스주의의 재생에 일조하였다. 〔생애와 활동〕 1494년 스페인 세고비아의 평민 가문 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는데, 이웃 마을 인 오칸도(0cando)의 성당지기를 지원할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512~1516년에는 알칼라 (Alcalá) 대학에서 빌라 노바의 성 토마스(Thomas a Villa Nova, 1488~1555)의 지도를 받으며 논리학과 철학을 연구 하였으며, 이때 훗날 아메리카 선교사가 된 베드로 페르 난데즈(Pedro Fernandez de Saavedra)와 친분 관계를 맺게 되었다. 1517년에는 파리 대학으로 옮겨 약 3년 간 신 학을 연구하면서 철학을 강의하였는데, 이 당시 그는 스 코틀랜드의 신학자 에크(Johann Maier Eck, 1486~1543)에 게서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의 학문적 영향을 받 았으며, 파리에 있는 성 야고보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서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1483~1546)의 강연을 듣 기도 하였다.
학문 활동 : 1519년 말 알칼라 대학으로 되돌아온 그 는 철학 강의를 하면서 신학을 연구하여 당시 유행하던 유명론을 상대로 토마스주의의 스콜라 신학을 노선으로하는 자신의 학문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특히 1520~ 1524년에 많은 철학 저서들을 집필하였으며,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1525년에는 부르고스(Bugos)의 산 바오로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이어 1532년까지 살라망카에 있는 산 에스테반(San Esteban) 도미니코회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으며, 훗날 교황 요한 21세(1276~ 1277)가 된 스페인의 베드로(Petus Hispanus, 1205~1277) 의 《논리학 선집》(Summulae Logicales)에 기초하여 논리 학 소책자들을 수집해 단순 명쾌한 논리학 저서(Summulae F. Diici Soto Segobiensis, Ord. Praed. Magistri, Burgos, 1529)를 편찬하 였다.
소토는 1532년부터 1549년까지 살라망카 대학의 신 학 학과장(chair of vespers)을 역임하면서 동시에 산 에스 테반 수도원 신학교의 교장까지 겸했는데, 이 당시 그는 학문 활동 못지않게 대학 행정에 힘썼으며 특히 1540~ 1544년 사이에 기근이 들자 가난한 학생들을 원조해 주 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예민하게 대두된 빈곤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빈곤의 원인에 대한 고찰>(Deliberaciόn en la causa de los pobres)이라는 소논문을 라틴어와 스페인어로 작성한 뒤 이를 황태자 필립(Philipe Ⅱ,1527~ 1598)에게 헌정하였다. 이 논문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그 밖의 나라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의 활동 : 독일 황제 카알 5세에 의해 왕실 신학자로 선정된 소토는 발라돌리드(Valladolid)의 산 그레고리오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동료 신학 자 카란자(Bartolomeo Carranza)와 함께 1545년 6월 6일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트리엔트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도미니코회 총장 카수아스(Albertus Casuas)가 공의회 개 회 직전 사망하고 말아 소토는 도미니코회의 총장 대리 로서 발언권만을 갖고 참여하게 되었고, 1546년에 새 총장이 선출된 후에도 계속해서 도미니코회의 대표로 제 5~6 회기에 참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미니코회의 대 표 신학자로서 카노(Melchior Cano, 1509~1560)와 가타리 노(Ambrosius Catharinus, 1484~1553) 등 유럽 각지에서 온 29명의 추기경과 주교들과 함께 공의회에 기여하였다.소토는 1547년까지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석하여 다방면 에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원죄(pecatum originale) · 예정 (praedestinatio) · 의화(justificatio) · 선업(opera bona) 등 프 로테스탄트 신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가톨릭의 교의를 옹호하고 교의 정식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 다. 그의 영향을 받은 트리엔트 공의회 교의의 기본 체계 는 베네딕도회의 오랜 전통과 연결된 그리스도교 인문주 의와 새롭게 갱생된 스콜라학이 혼합된 것이었다. 1547 년에는 《본성과 은총》(De Natura et Gratia)을 저술하여 공 의회 교부들에게 헌정하기도 하였다.
소토의 개입이 두드러진 것은 제4 회기 때부터였다.이 회기에서는 주로 성서에 관한 규정과 불가타역 성서 의 권위에 대하여 다루었는데, 소토는 다른 교부들과는 달리 성서 연구와 여타 이단들과의 논쟁을 위해 스콜라 신학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여 공의회 회기 중에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가치를 부상시켰다. 또 1546년 4 월 8일 마리아의 종 수도회(Ordo Servorum Mariae, O.S.M.) 의 총장 아고스티노(Bonuccio Agostino)와 벌인 논쟁에서 는 탁월한 변증과 학식으로 맞서 도미니코회의 승리로이끌기도 했다. 제5 회기 동안에는 소토가 수도회 총회 때문에 로마로 가야 했으므로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이 회기에서는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총장 세리판도(Girolamo Seripando, 1492/1493~1563)가 제안한 문제로 교 회 안에서 오래 전부터 대두되어 왔던 '이중 의화' (duplex justitia)가 토론되었다. 세리판도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근본적으로 쇄신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선과 악 사이에 살며 구원을 필요로 하는 나약한 인간성을 고 려할 때, 인간의 의화는 인간이 행한 선한 행위에 전적으 로 의존해서는 안되며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의존해야 한 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접목 함으로써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모든 것 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세리판도의 이러한 주장은 루터의 신앙주의와 차이가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사상적 배경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리판도의 의 견은 공의회에서 채택되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배후 영 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가 소토였다.
공의회 제1 회기 이후의 활동 : 공의회 제1 회기 동안 에 64명의 주교와 7명의 대수도원장으로 늘어난 공의회 의 활동은 1547년 봄에 갑작스레 중단되었다. 트리엔트 에서의 전염병 발생과 슈말칼덴 동맹군의 위협으로 공의 회 개최지를 볼로냐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이때 소토는 카알 5세의 고해 신부로 임명되어 1548년부터 1550년 까지 황제의 고해 신부이자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550년에 황제는 그를 세고비아 주교로 임명하려고 하 였으나, 소토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살라망카로 되돌 아갔는데, 황제의 고해 신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그는 줄 곧 국가와 교회의 일에 개입하게 되었다. 1550년 여름 에 황제의 지시로 14명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발라돌리 드 의회(Junta de Valladolid)의 의장으로서 스페인이 정복 한 신대륙의 인디언 문제를 판결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 이다. 의회가 소집되기 전에 이 문제에서 스페인의 역할 을 옹호하던 세풀베다(Gino de Sepilveda)와 이를 엄격히 비판하던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소토는 양자의 입장을 공평하게 바라보며 이 논쟁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였고, 이것은 라 스 카사스의 저서들과 함께 1552년에 세비야에서 발행 이 되었다. 한편 소토는 1550년 말에 황제의 지시로 종 교 재판 심의회의 위촉을 받아 세비야의 교사인 질레스 (Gilles)의 소송 건을 연구하였으며, 카란자와 함께 스페 인에 유포된 루터주의 성서를 조사하는 일에 착수하기도 하였다.
1552년에 소토는 카노를 계승하여 살라망카 대학의신학부 학장(chair of prime)이 되었으며, 이 직책에 있는 동안에 토마스주의와 아우구스티노주의를 가르쳤다. 또종교 개혁 이후 대두된 문제들, 즉 신대륙 발견과 스페인 내의 자유 시장 체계 부흥 등의 문제들로 자신의 학문 범 위를 넓혀 나갔다. 1554년에 《논리학 선집》 세 번째 편 집본을 발행한 소토는 1553 ~ 1554년에 전 10권으로 된 법철학서 <정의와 법> (De justitia et jure)을 저술하였고, , 1555~1556년에는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095~1160)의 《명제집》(Sententiarum Libri) 제4권을 주석 한 《제4 명제집 주석》(In quartam sententiarum commentarii) 을 저술하였다. 또 이 무렵인 1555~1556년에는 스페 인의 섭정 후아나(doña Juana)의 요청으로 교황 바오로 4 세(1555~1559)와 필립 2세(1527~1598) 왕 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중재함으로써 로마와 스페인 간의 갈등을 줄이려 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 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소토는 살라망카로 돌아가 학문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 카란자의 《교리서》 (Catecismo)에 얽힌 소송 건을 해결하고자 백방으로 노력 하였다. 톨레도의 대주교였던 카란자는 일찍이 소토의동료이자 모범적인 수도자였는데, 그의 교리가 16세기 스페인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일종인 '광명주의'(iluuminismus)를 반영하고 있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소 토는 교회의 공식 입장과 카란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자신의 동료인 카란자를 구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카란자는 이단으로 판정되어 교 황청 감옥에 투옥되었다. 카란자의 불행은 소토의 여생 을 어둡게 하였으며, 소토가 사망할 때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카란자 소송 건은 오늘날까지도 완 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소토는 학장직을 사임 한 후 또 한 번 산 에스테반 신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 며, 이 직무를 수행하던 중 1560년 11월 15일 사망하였다.
〔저서와 사상〕 소토의 철학 작품은 논리학 · 자연 철 학 · 법철학 등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의 신학 저서들 도 여러 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예를 들어 《본 성과 은총》에서 그는 인간 존재의 본성과 영혼과 육체의 관련성, 지성에 필요한 감각들, 하느님의 인과율에 맞선 인간 의지의 자유 등을 다루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 서라고 할 수 있는 《정의와 법》은 방대한 법적 · 신학적 저서로서 전 유럽 국가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에서 그는 토마스주의의 전망 안에서 인간을 통제하는 신법에서 실증법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형의 법 률을 연구하였고, 토마스주의적인 구분으로써 자연 질서 와 초자연 질서 사이에 최상법으로 연결되는 인간의 법 철학 질서를 구성하였다. 또 주로 성사 신학을 다룬 《제 4 명제집 주석》에서는 징표(signum)와 의미(significantia) 정의(definito)를 위해 요청되는 조건들, 질료적 실체 (materialis substantia) 내에 있는 우연유(偶然有, accidens) , 출처로서의 주체(subjectum) 없는 우연유의 실재 가능성, 실체와 우유 사이에 분유되는 존재의 초월적 특성과 비 속성(非屬性), 인간 영혼의 불멸성, 인간과 인간이 선택 한 종주권에 대한 하느님 지상권의 관여 등에 대하여 논 하였다. 학술적인 제반 저서들 외에도 수많은 그의 강의 록들 즉 정규 수업 강의록뿐만 아니라 회의 때나 특별 강 연을 위해 작성된 강의록들이 있는데, 이 중에는 아메리 카의 식민 정책과 선교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 의 강의록들은 비토리아의 강의록과 함께 출판되었다.(→ 라스 카사스, 바르톨로메 드 ; 트리엔트 공의회)
※ 참고문헌 Philip Hughes, The Church in Crisis A History of the General Councils 325~1870, Hanover House, 1961, pp. 311~312/ Hubert Jedin, Geschichte des Konzils von Trient II : Die erste Trienter Tagungsperiode 1545~1547, Verlag Herder Freiburg, 1957, pp. 16, 43, 78, 98, 203, 209, 389/ L.J. Rogier · R. Aubert · M.D. Knowles, Nouvelle Histoire de I'Eglise 3 : Réforme et Contre-Réforme, Seuil, 1968, p. 169/ J.P. Doyl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9, Routledge, 1998, pp. 37~39/ Gérard Reynal ed., Dictiomaire des théologiens et de la théologie chrétiemme, Bayard éditions, 1998, pp. 420~421/ 《ODCC》, p. 1520/ C. Pozo, 《LThK》 9, pp.897~898/ F.D. Nealy, 《NCE》 13, p. 4451 V. Beltran de Heredia, 《DTC》 28, pp. 2423~2429. [梁蕙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