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조(淫), 시호는 소현(昭顯) . 1612년 1월 4일(음) 조선 제16대 왕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 한(韓) 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1625년(인조 3)에 세 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전주(全州)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한 뒤 그 해 12월 승지(承旨)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과 결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 송파(松坡)의 청 태종 진영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그 결과 조선이 명나라와 단교 · 왕자의 인질 · 청나라에 대한 신하의 예(禮) 등을 약속함에 따라, 소현 세자는 2월 8일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주전파 대신 등 186명과 함께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에게 끌려 심양(瀋陽)으로 가게 되었다. 소현 세자는 이후 8년 간 심양관소(瀋陽館所)에서 생활하면서 청나라측의 요구에 응하여 의례적인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명나라 정벌을 위한 서역 원정에 출전하였고, 청나라가 조선과의 현안문제를 세자와 의논하여 해결하려고 할 때에는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640년 3월과 1644년 1월에는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1644년 5월에는 도르곤의 명 정벌군을 따라 북경에 입성하였고, 이어 본국 귀환이 결정되면서 9월에 황제에게 환국 인사차 다시 북경에 도착하였다. 세자의 북경 체류 기간은 9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로, 이 기간 동안 세자는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hall, 湯若望)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다. 소현 세자와 아담 살은 70여 일 동안 서로를 수차 방문하였는데, 아담 살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학문과 종교에 대하여 오래도록 필담하였는데, 세자는 특히 그리스 도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많은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아담 살은 세자가 대동하고 온 조선의 역관(曆官)들에게도 천문 역법과 관련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귀국 날짜가 다가오자 소현 세자는 아담 샬에게 여러 값진 선물을 하였으며, 아담 살도 답례로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종교서 ·역서(曆書) · 천구의(天球儀) · 천주성상 등을 선물하였다. 세자는 친필로 감사의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아담 샬의 선물이 그에게 대단히 큰 기쁨을 주었다는 것, 특히 종교 서적들은 인간의 마음을 닦고 덕을 기르는 데 매우 적절한 가르침을 싣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 천주성상은 위대한 존엄성을 내보여서 보는 사람의 심성을 감동시켜 고귀하지 않은 모든 감정을 순화시킨다는 것, 천구의와 역서 및 기타 서학서들은 조선에도 이미 유사한 것들이 있으나 오류가 많아 귀국하면 학술 서적을 모두 인쇄하고 복사해서 선비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것, 그러나 조선에는 아직 천주교가 전교되지 않았으므로 성상이 모독될 수도 있기 때문에 천주상은 도로 돌려보낸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담 살은 답서를 통해 천주상을 계속 보유할 것을 청하였고, 세자의 태감(환관) 중 이미 세례를 받은 한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니 세자는 매우 기꺼워하며 천주성상을 받아들였다. 세자는 또한 그의 두 번째 편지를 통해 태감의 교리 학습보다는 차라리 선교사를 한 명 대동하고 환국하여 그 자신과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아담 살은 선교사를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예수회 화북교성(華北敎省) 성회장(省會長)은 마카오에 있는 순찰사(巡察使)의 승인 없이 자의로 그 같은 일을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소현 세자는 선교사를 대동하지 못한 채 역서를 비롯한 서학서 및 천구의, 종교 서적과 천주성상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고, 아담 살은 이상의 사실을 기록하며 이때 조선을 개교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소현 세자는 1644년 11월 26일 북경을 떠나 이듬해 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심양에서 청나라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에게 영합하여 막대한 경비 를 쓰고, 또 때로는 사무역(私貿易)을 자행하여 부족한 자금을 마련한 세자의 행위는 인조에게 친청(親淸)적인 모습으로 비쳤고, 여기에 인조의 총비인 조소용(趙昭容)의 모함으로 세자와 인조와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 결과 소현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인 4월 23일 발병하였다가 4월 26일 34세의 나이로 급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인조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 뒤 세자빈은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1646년 3월 15일 죽임을 당하였고, 소현 세자의 세 아들 즉 경선군(慶善君) 석철(石鐵), 경원군(慶元君) 석린(石麟), 경안군(慶安君) 석견(石堅)은 이듬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소현 세자와 아담 샬의 관계를 교회사의 선사(先史)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에 최초로 천주성상을 반입한 사람으로 꼽는다. 만약 소현 세자 왕위에 오를 수 있어서 아담 샬과의 교분을 지속하였다면, 그리스도교는 한국에 150여 년 일찍, 희생 없이 전교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 문명도 순조롭게 도입되어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현세자의 묘는 경기도 고양(高陽)에 있으며, 처음에 소현묘라 칭하였다가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 샬 폰 벨, 요한 아담)
※ 참고문헌 김용덕, <소현 세자 연구>, 《사학 연구》 18집, 한국사학회, 1964/ 최소자, <명청 시대 중한 관계사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7/ 山口正之, <昭顯世子 と 湯若望>, 《青丘學叢》 5집, 1931/ 장정 란, <소현 세자 연구에 있어서의 몇 가지 문제>, 《교회사연구》 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張貞蘭〕
소현 세자 昭顯世子(1612~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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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